옛날 종법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대를 잇는 것이다(傳種接代). 만약 대를 잇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대가 끊긴다면 이는 곧 불효 중 최대의 불효요. 불효는 죄악이니 대가 끊긴다는 것은 죄악 중의 무거운 죄악이다. 그런데 ‘대가 끊길 것이다’고 욕을 퍼부으니 악담도 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악담이 더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 무시무시한 악담의 주인공이 길거리에 나선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 입이 거칠고 상스러운 파부(婆婦)일 것으로 짐작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인즉슨 위대한 성인 공자님이라는 것이다.
도덕군자의 상징인 공자는 왜 이와 같은 악담을 퍼부었을까?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상나라가 망한 이유 중 주요 이유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민심, 민심은 천심. 민심을 얻은 자는 이기고 민심을 잃은 자는 망한다.
많이 듣던 얘기이다.
상나라가 잃은 민심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상나라는 어떻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증거는?
그 주요 증거가 바로 순장제도와 인간제물이었다.
순장제도란 왕이나 귀족 더 나아가서 돈 있고 세력 있는 권세가들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무리를 산 채로 무덤에 파묻는 일종 관습이다. 순장의 숫자에 따라 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을 산 채로 파묻으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다음 상나라 때 사회 가장 큰 특징은 곧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점치는 제사의식이었다.
제사의식에 필요한 것은 귀신에게 바치는 음식인데 주로 동물을 제물로 사용했다. 제물로는 양이 많이 사용(소뢰:小牢)되었고 소도 사용했다(대뢰:大牢). 물론 이 두 가지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도 돼지도 염소도 사슴도 말도 있었다. 이런 동물을 짐승이라 하는데 집에서 짐승을 기를 때는 ‘축(畜)’이라 부르고 제물로 도살할 때는 ‘생(牲)’이라 한다. 사람을 ‘축생’이라 욕하는 관습이 여기서 생겨났던 것이다.
짐승을 도살하여 제물로 쓰는 것은 세계역사에서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와 좀 다르게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사례도 있었다.
상나라인이 바로 사람을 제물로 사용했다.
순장의 숫자가 부를 가늠하는 척도였던 것처럼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는 숫자의 다소에 따라 부를 매기기도 했다. 노예와 평민을 제물로 사용한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개별적으로 귀족을 제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귀족 한 사람의 값이 노예나 평민 1만 명에 해당되었다고 하니 왕이나 굉장한 부자만 귀족을 제물로 삼을 수 있었다.
산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삼았으니 이것도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상나라인은 이렇듯 순장과 인간제물을 통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고 결국 주나라인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천하를 얻은 주나라인은 상나라인의 교훈을 아로새기고 그들과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였다. 즉 순장제도와 인간제물을 폐지하였다.
그런데 수백수천 년의 관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을까?
된 것도 안 된 것도 있었다. 된 것은 주나라 때 인간제물 관습이 기본상 사라졌다. 이에 비해 순장은 그 생명력이 매우 질겨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나라 때부터 제도로서의 순장은 사라지고 순장에 대해 사회적인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순장은 기어코 하고 싶은데 산 사람을 파묻자니 사회적인 비난을 받아야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손 놓고 포기하자니 아쉽고 맘에 걸린다. 평생 후회할 것 같다. 밀고 나아가는 것과 포기하는 것 사이 절충대안이 없을까?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대책이 바로 사람 같은 형상 즉 인형을 만들어 사자의 무덤에 파묻는 것이었다. 일종 대리만족의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맘이 편했다.
진시황의 병마용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쉽게 답이 얻어진다.
주나라 때 순장에 산 사람을 사용하는 대신 인형을 사용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궁여지책인 이마저도 거품 물고 반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위대한 성인 공자님이었다.
BC 641년 송나라 양공이 조(曹), 주(邾)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정(鄫)의 군주를 죽여 토지신에게 바칠 제물로 쓰고자 했다. 이때 자어(子魚)라는 ‘군법무관’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큰 짐승으로 작은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사람을 사용하다니요! 제사는 손님 접대와 같은데 어찌 인육을 먹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일에 반하는 일을 하시면 결말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자어의 반대는 성공하지 못해서 그 운수 나쁜 군주는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순장에 반대한 제나라 진자항(陣子亢)은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그의 형인 진자거(陣子車)가 죽었을 때 형수와 집사는 산 사람을 순장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진자거가 다른 나라에서 보살핌도 잘 못 받고 병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진자항은 즉시 그것이 예법에 맞지 않는 데다 자기 형을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두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진자거의 부인과 집사는 당연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자항은 왜 그토록 반대하였을까?
진자항은 공자의 광팬이었다.
공자는 순장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대신 인형을 사용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순장용 인형에는 흙인형과 나무인형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물건을 공자는 극도로 혐오해서 심지어 “인형을 처음 만든 자는 대가 끊길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라고까지 했다.
흙인형과 나무인형을 발명한 것은 본래 산 사람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산 채로 묻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진보적인 방식이었는데 공자는 왜 그런 저주를 했을까?
공자는 근본적으로 순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보기에 순장은 인에 어긋났고 예가 아니었다. 그래서 산 사람을 쓰든 죽은 사람을 쓰든 안 되는 일이었고 또한 진짜 사람을 쓰든 가짜 사람을 쓰든 역시 안 되는 일이었다. 인형으로 순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순장의 합리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거짓으로 진실을 어지럽히는 짝퉁 순장인 셈이었다. 그런 식으로 빌미를 남기면 언제든 진짜 순장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철저히 제재해야만 했다.
확실히 그것은 소박하고 원시적인 인도주의였다. 바로 이것이 나중에 인(仁)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인의 본래 의미는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이다. 중국 최초 인본주의는 주나라 때 이렇게 탄생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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