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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예의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을 것이다. 명분을 알고 보면 일종 체면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우리민족은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 민족이므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명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중국역사에서 부권제사회의 확립에 따라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 또는 소유의 대상이 된 뒤로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마치 음식이나 재물을 나누듯이 일정한 계획과 방식에 따라 여자를 분배하였다. 그러한 분배의 근거를 ‘명(名)’이라 하고, 분배의 규칙을 ‘예(禮)’라고 하였다. ‘명’은 ‘명분’의 의미이며 ‘이름’에 따라 나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면 ‘명분’이란 곧 지위라고도 할 수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많이 차지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적게 차지하거나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음식이나 재물이나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를 분배할 때에도 이런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지위가 있는 권력자들은 백성들보다 여자를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명분을 만들어 냈다.
예기(禮器) 중의 하나가 옥으로 만든 ‘규(圭)’인데 그 모양이 마치 남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규의 크기는 지위에 따라서 달랐다. 천자의 것은 ‘진규(鎭圭)’라 하고 길이가 한 자 두 치였다. 공작(公爵)의 것은 ‘환규(桓圭)’로 길이는 아홉 치이고, 후작(侯爵)의 것은 ‘신규(信圭)’로 길이는 일곱 치였다. 그리고 백작(伯爵)의 것은 ‘궁규(躬圭)’로 다섯 치였다. 이는 남자가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남근도 크고 거꾸로 지위가 낮으면 낮을수록 남근도 작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남근의 크기에 따라 여자를 차지하는 것도 달라야 한다. 백성들의 남근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여자를 여럿 거느릴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례(周禮)>>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천자는 1명의 왕후와 3명의 부인, 9명의 빈(嬪), 27명의 세부(世婦), 81명의 어처(御妻)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제후는 다만 1명의 부인과 9명의 빈, 대부는 1명의 아내와 2명의 첩, 사(士)는 1처1첩, 백성은 한 명의 처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통사회의 명분과 예의는 모든 분야에서 등급과 상하 질서를 정해 놓고 존귀비천(尊貴卑賤)을 적용해 놓았다. 이를테면 대종은 존귀하고 소종은 비천하고, 양반은 존귀하고 상인(常人)은 비천하고,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고, 처는 존귀하고 첩은 비천하고, 적자는 존귀하고 서자는 비천하고 ······ 등등이다.
전통사회에서 뭐니 뭐니 해도 명분이 가장 불합리했던 것이 바로 인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비천한 존재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녀유별’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등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명분이란 결국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이 없는 자와 약한 자들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우리민족은 조선조 500년을 통해 유교를 본산지인 중국보다 뼈가 절도록 받아들인 데는 명분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에 없는 명분을 만들어 사회질서를 더욱 세분화했다. 예하면 중국에서는 무릇 양민이면 전부 과거급제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던데 비해, 조선은 양반가문만 그것도 서자는 안 되고 적자만 응시자격을 갖게끔 법으로 규정했다. 이는 극소수 양반과 그들의 적통(嫡統)들만 권력과 학문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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