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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1
2015년 02월 09일 12시 46분  조회:2456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 시집 1,000권 읽기 1|시집1000권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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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포행 막차□박철, 창비시선 85, 창작과비평사, 1990

  할 말들이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쏟아져 나왔다. 격한 감정들이 절제되지 못한 상태여서 시가 줄거리를 갖게 되었다. 줄거리를 가지면 설명을 하려 든다. 아직 시라는 갈래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시들이다.

  ‘김포6’의 경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라는 제목으로 김포의 개울과 다리를 있는 그대로 묘사에 충실하면 현재의 김포와 그 주변의 풍경이 자신의 추억과 적당히 짜깁기되어 서구지향의 문명이 이 땅에 어설프게 적용되면서 빚어진 문명충돌의 메시지까지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전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자신의 고민만을 털어놓는 수준에 머물렀다.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더 벗어야 할 껍질이 있다는 뜻이다.★☆☆☆☆[4336. 10. 17]

 

2□가을의 시(詩)□김광렬, 창비시선98, 창작과비평사, 1991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 너무 커서 감당을 못하고 있다. 자신의 체험은 조그만데 그 조그만 것에다가 거대한 것을 담으려고 하니, 트더진 푸대처럼 내용물들이 밖으로 비져 나온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것이어서 변변치 못한 시에 대한 면죄부의 작용을 하면서 대신에 진부하다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 묶음으로 분류된 제주에 관한 시들이 그 중 나은데, 자신이 몸담은 곳이어서 그럴까? 제주도의 맛이 잘 나지를 않는다. 제주도의 특징과 정서를 실었다면 좋았을 텐데, 전혀 그런 쪽으로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흠이다. 제주도 방언의 리듬이나 설화세계를 변주하면 아주 좋은 시들이 나올 법도 한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애써 찾은 소재에 주제를 역사 쪽으로 자꾸 몰고 가려는 버릇도 시를 일정한 그릇 안에 가두어 두고 있다. 껍질을 한 꺼풀만 더 벗으면 괜찮은 시를 쓸 듯하다.

  제목에 <詩>라는 한자로 표기한 것은 출판사의 의도일지 시인의 의도일지 잘 모르겠지만, 아주 눈에 거슬린다. 시인도 그렇고 출판사도 그렇고, 역사를 깊이 생각하는 자들이 한자가 지닌 봉건성과 반역사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4336. 10. 17.]

 

3□이슬처럼□황선하, 창비시선 67, 창작과비평사, 1988

  빛나는 표현 몇 개 빼면 수필이다. 빼어난 구절 몇 개가 일기 문장을 무겁게 끌고 가는 형국이다. 표현에 군더더기가 많지 않아서 깔끔한 맛을 주지만, 산문의 그 무거운 걸음걸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한자표기까지 섞여있어서 이런 걸음을 더 무겁게 만들고 있다.

  체계 잡힌 창작교육을 접하지 못한 것 같고, 순수한 열정으로 시를 다듬어서 쓰는 사람 같다. 빼어난 표현과 비유를 얻으면 그것을 시로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하듯이 풀어썼기 때문에 문장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느슨하게 늘어졌다. 그래서 원래 얻은 비유의 신선함마저도 길게 늘어진 화법 때문에 느슨해졌다. 결국 문장을 다듬는 수련이 덜 무르익었다는 얘기다. 아마도 민족 통일과 사회를 염려한 앞 부분의 시들 때문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선택한 것 같은데, 글쎄….★★☆☆☆[4336. 10. 17.]

 

4□어머니의 물감 상자□강우식, 창비시선 132, 창작과비평사, 1995

  전에 “고려의 눈보라”를 읽을 적에는 뭐랄까, 속이 꽉 차지는 못 했어도 우렁찬 맛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시집은 매끈하게 잘 빼 입었지만, 경망스러워졌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1부의 기행시들은 거의 일기 수준이다. 행을 가른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간단한 수필로 썼으면 오히려 감동을 주었을 만한 내용들이 시로 요약됨으로 해서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한 시들은 더 참혹하다. 말을 해서는 아니 될 것들을 말을 하려고 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시와 이야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부실한 안목에 선경(禪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경망스러움까지 겹쳤다. 시의 형식을 빌고 있고, 언어는 제법 시의 긴장을 풍기지만 시라는 형식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 한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자표기는 땡중의 옷자락을 더럽힌 흙자국 같다.★★☆☆☆[4336. 10. 17.]

 

5□우리들의 사랑가□김해화, 창비시선 94, 창작과비평사, 1991

  이 시집에 담긴 정서는 활화산 같다. 뜨거운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가 온 땅과 하늘을 뒤덮을 기세다. 용암이 마구 흘러내리며 거추장스럽고 잘 꾸민 것들을 모조리 삼켜버릴 것 같다. 가슴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마그마 같은 분노가 한 번 살 만하다. 그리고 그런 분노가 아무런 거침이 없이 여과장치 없이 시의 지평 위로 솟아올랐다. 그래서 오히려 신선하다. 형식조차 삼켜버릴 그런 분노야말로 시의 첫새벽에 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는 뜨거운 가슴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가 줄기차게 흘러온 강 같다면, 강물이 산으로 되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강이라는 형식위로 넘쳐버리는 것이 위태롭다. 곳곳에서 서툰 표현이 나타나지만 그가 딛고 있는 세계관이 너무나 확고해서 시간이 가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듯하다. 민중시라는 이름을 단 시들이 대부분 형식에 서툰데 이 시집은 나름대로 꼴을 갖추고 있다. 다만 역시 앞선 분노의 감정 때문에 곳곳에서 불필요한 트집이 잡혀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노동현장의 시를 다루려면 박노해와 백무산을 비켜갈 수 없는데, 아직은 역부족이다. 소재 면이나 수법 면에서 앞의 두 시인은 그 후배들에게 너무나 큰 벽을 만들어놓았다. 이 시집 역시 이들의 아류를 벗어나기는 힘들다.★★☆☆☆[4336. 10. 17.]

 

6□맑은 하늘을 보면□정세훈, 창비시선 90, 창작과비평사, 1990

  이제 시는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일상 생활 속의 소품들이 장독대처럼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한 그릇에 잘 담겼다. 그러니 이런 시들에서 표현을 읽고 의미를 따지고 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다. 아직 아마튜어 티를 벗지 못한 시들이 대부분이나 그것을 탓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4336. 10. 17.]

 

7□떠돌이의 노래□김윤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0

  묘사는 그것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시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그 묘사가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세계가 있어야 한다. 남사당패를 묘사해서 시로 만들려면 남사당패의 목소리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들의 목소리만 있으면 그것은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하다 못해 산문조차도 그것이 그 배경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세계가 있는 법이다. 시는 그것을 일러 상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묘사 자체는 상관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광대의 세계를 노래하는 이 시집은 단순한 묘사를 벗어나기 힘들다. 옛날 광대패들의 이야기를 하면 그건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의 뼈아픈 과거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것을 시가 보여주어야만 그것이 감동으로 연결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다고 전달해 가지고는 시가 되지를 않는다.

  형식도 내용도 현실의 감각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운율이나 묘사 모두 매우 정성을 들인 것이면서도 그것이 일정한 울림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 탓이다. 게다가 서사시의 형식을 약간 빌고 있어서 더더욱 외계와 교감하기 어려운 구조를 띤다. ★★☆☆☆[4336. 10. 17.]

 

8□해뜨는 검은 땅□박영희, 창비시선 89, 창작과비평사, 1990

  프레스에 손이 잘리고 탄광 갱도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다고 적는다고 해서 그것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만이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그러한 상황을 추리한다. 말하자면 조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유추된 감정은 아주 강한 관념성을 띤다.

  노동시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생생한 현장성이다. 생생한 현장성은 현장의 바로 그 장면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 장면을 묘사한 글을 읽고 그 현장을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을 읽는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재주가 필요한 것이다. 박노해나 백무산은 그런 재주가 제법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감정은 격하되 그 감정이 잘 전달되지 않는 흠을 갖고 있다. 노동을 주제로 다룬 시가 영역을 넓혀가면서 일정한 형식 안에 갇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감정과 감동 사이에는 아주 얇은 비닐막이 있다.★☆☆☆☆[4336. 10. 17.]

 

9□월동추□강세환, 창비시선 87, 창작과비평사, 1990

  글을 다루는 재주는 이 정도면 손색이 없다. 그런데 모두가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남의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있다. 이 시집의 내용들은 대부분 남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것은 역사라는 거대주제 속에서 자신이 어떤 자리에 거점을 잡고 들어앉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각은 카메라처럼 냉정한데, 거기에 담기는 풍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미리 감동을 준비하지 않으면 와 닿지 않는 공허한 풍경이다. 좀 더 현실 속에 뿌리내린 소재에서 글감을 찾아야 이런 공허함이 극복될 것이다.★☆☆☆☆[4336. 10. 18]

 

10□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 창비시선 128, 창작과비평사, 1995

  칼을 단단하게 벼리는 방법은 얇은 쇠판을 여러 번 겹쳐서 두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얇지만, 그 얇음이 갖는 약점인 옆심을 한층 더 보강할 수 있다. 그래서 칼 만드는 사람은 벌겋게 단 칼몸을 쇠망치로 두드려대는 것이다. 김남주의 시는 이렇게 해서 몇 차례 다져진 칼이다. 웬만한 압력에는 부러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옆심도 있다.

  이 시집의 장점은 글이 체험을 담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선승의 입에서 나오는 화두 같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진언(眞言)이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형식에 집착하지 않아도 시는 신선하고, 형식은 그때그때 만들어진다. 경험으로 뭉쳐진 사상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형식을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와 현실에 대한 규정이 남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의 시가 남들 시와 다른 것은 그러한 규정과 선언의 밑바닥에 남들이 겪지 못한 그만의 체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체험한 자와 추리한 자의 언어는 어떤 문맥 안에 놓일 때 전혀 다른 빛을 낸다. 그 감각부터가 다른 것이다. 세상이 김남주 김남주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러나 이것이 온전한 시가 되려면 전체 시에 일관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용의 절실함으로 인해 시는 새로운 형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시인 자신은 그 형식에 대한 관심이 아직 없고,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쏟아내는데 급급하고 있다. 그런 완성된 형식에 대한 깨달음이 오려면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세상을 보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와 시인의 속성상 그것이 지금은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오래 산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433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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