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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해설> 1966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시이다.
이 시는 이미지즘 수법의 시들을 통해 생략과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왔던 시인의 독특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이외에는 동일한 구문의 4회 반복에 불과한 이 시는, '저녁 눈'을 통해 가려져 있는 것, 소외되어 있는 것, 그리고 잊고 있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보여 준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리듬의 효과와 함께 유랑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녁 눈'은 물질적 현상으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이다. 그와 함께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 그것들 위로 '붐비듯이' 늦은 저녁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애상적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되어 더욱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 풍경을 한 장의 사진처럼 묘사하고 있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4행시 형식의 행간 속에 그 감정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문명의 거센 물결에 밀려 머지 않아 사라져 버릴 토속적 세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치되어 '붐비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의 눈발로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는 밀려나 있는 변두리, 즉 향토의 사물 위에 머물게 한다. 시간적 배경으로 제시된 '늦은 저녁'이라는 하강적 이미지와 '눈발'이라는 소멸의 이미지가 한 곳에 어우러져 이루어 낸 '저녁 눈'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같은 이미지의 네 가지 사물들과 결합됨으로써 이 작품을 텅 빈 아름다움의 시로 만들어주고 있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이 시는 단조로운 구성 속에서 향토적 사물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시인의 그리움의 정서가 투사된 저녁 눈발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석진 곳으로 몰려다니는 정황을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전통적 시어의 사용에서 얻어지는 색다른 운율의 효과로 잘 드러내고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대전시 보문산 사정공원 박용래 시비, 시제는 '저녁눈'>
◈ 겨울밤/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해설>겨울밤에 떠오르는 고향에 대한 강열한 그리움을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형식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저녁눈'과 같이 이 시도 사라져 가는 향토적 사물의 세계를 치밀한 감각과 절제된 감상으로 표현하면서, 양토적 시어, 반복과 병치, 시행의 시각적 배치 효과를 활용하고 있다.
* 1960년대에 향토적 서정이 물씬한 시 세계를 일궈낸 시인이 박용래(朴龍來, 1925~1980)다. 「겨울밤」은 응축과 생략의 단형시로 일관한 박용래의 시적 특질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의 시에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1960년대의 농촌의 거덜난 살림살이와 같은 사회 현실은 애당초 깃들일 여지가 없었다. 어떤 비평가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문명의 비적응성”(송재영)에서 그 까닭을 찾기도 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정경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준 「겨울밤」이 머금은 의미체는 원형으로서의 고향이다. 그의 고향에는 당대의 숨결이 빠져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대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감의 부피가 없다. 박용래의 고향은 지나간 시간 속에 응고된 현실이며, 당대와의 소통이 정지된 자폐적 시간이 고여 있는 공간일 따름이다. 더구나 「겨울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시점의 주체가 완벽하게 지워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당대의 현실에서 길어낸 주체의 느낌과 통찰이 머금어 있지 않은 시. 그 인식의 지평은 닫혀 있다.
박용래는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 사이에서 “눈물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전의 시인과 술자리에서 어울리곤 하던 작가 이문구는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돌아본다. 그는 우렁 껍질·먹감·조랑말·원두막·얼레빗·쇠죽가마·개비름·초가지붕·도깨비불 같은 세상의 사라져가는 것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을 즐겨 노래한 시인이다. 박용래 시인이 그토록 자주 눈물을 보인 것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보듬어 안는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박용래의 딸 연의 술회에 의하면 “시에 대한 정열만은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강하셨던 아버지, 어쩌다 동창회에 다녀오신 날에는 밤새워 괴로워하셨지만, 끝내 아버지께서는 몇 구절의 시에 생애를 걸고, 평생 시인이라는 명분 이외에는 그 어느 직함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용래는 그에 앞서 김소월, 백석, 서정주 그리고 청록파 시인들이 걸어간 “향토성의 발견”, 혹은 “자연의 발견”이라는 길에서 제 시의 정체성을 찾은 시인이다. 특히 박용래의 시 세계는 전통 율조와 회화적 감각,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는 박목월의 초기 자연시와 근친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의 첫 시집인 『싸락눈』에 실려 있는 짤막한 4행시 「저녁눈」은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눈발 흩날리는 정경을 한 폭의 소묘처럼 담아낸 작품이다. 진술하는 어조가 아니라 미세한 소묘만으로도 사라지는 것들, 곧 스러질 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민을 깔끔하게 드러낸다. 그가 즐겨 다루던 소재는 강아지풀, 엉겅퀴, 각시풀, 호박꽃, 상추꽃, 아욱꽃처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들과 호롱불, 손거울, 나막신, 우렁 껍질, 조랑말, 창호지처럼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그는 이런 소재로 유년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거나, 한국의 농촌 풍경을 그윽하게 묘사하고, 그 속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붙잡아내 향토에 깃들인 정한의 세계를 노래한다. 바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의 유별난 관심과 연민은 그의 눈길을 문명한 도시보다는 변두리, 향토의 사물 위에 시종 머물게 한다. 바로 이런 요소가 박용래를 흔치 않은 토착 시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민요의 기본 구조인 언어의 반복과 병렬을 눈여겨보고, 그것이 한국적 정한의 세계와 달관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 자기 나름으로 걸러낸 민요의 어법을 시에 자주 살려 쓴다.
1969년에 펴낸 첫 시집 『싸락눈』으로 박용래는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을 받는다. 1975년에 제2시집 『강아지풀』을 <민음사>에서 내고, 1979년에 제3시집 『백발(白髮)의 꽃대궁』을 펴낸다. 시집 『백발의 꽃대궁』으로 1980년에는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차지한다. 1980년 여름 취중에 길을 건너다 택시에 치여 3개월 동안 입원하는데, 이때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같은 해 11월 20일, 전날 밤도 여전히 소주를 마시고 돌아온 그는 다음날 셋째 딸 수명이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안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11월 21일 오후 1시,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발췌) (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 연시(軟枾)/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해설> 1975년 시집 [강아지풀]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의 내용은, 감이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서,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른 것을 노래하고 있다. 내용과 형식이 매우 간결해 보이는 이 작품은 그 구성면에서는 상당히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의미상 단락을 구분지으면, 1·2·3 / 4·5·6 // 7·8·9 / 10·11 / 12·13·14 //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10,11연의 위치가 전체 시상 전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가 하면 1∼6연의 주어는 '땡볕'이요, 또 7∼14연의 생략된 주어는 감인데 서술어는 '빛나다'로 되어 있어, 1∼6연의 주어인 땡볕에 연결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하나의 풋과일이 한여름 땡볕 속에서 성숙한 결실을 맺게되는 과정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포착해 내고 있다. '땡볕-연시'로 옮겨지는 붉은 색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면서, 익기 이전의 감과 비름잎이 지닌 푸른 색의 이미지와 선명한 색채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여름 땡볕을 받아 붉어진 감(연시)이 서리를 맞아 익어서 눈오는 어느날 밤 젯상에 오르게 된다는 독특한 발상의 표현을 통해, 상당한 시간의 경과를 거쳐 인간과 자연이 만나게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하나의 미립적 자연 현상마저도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는 날카로움과 자연의 신비를 해독한 지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과 외경심, 그리고 세심한 관찰력에서 오는 듯하다.(현대시 목록,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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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눈물의 시인" 박용래의 발자취를 찾아 - 이 문 구 -
군자와 군자는 비록 세월이 다르되 길이 같고, 소인과 소인은 세상이 달라도 역시 한 무리일 뿐이라는 옛말이 있다.
인간이 물질에 대해서는 제법 인간다운 행세를 하면서도, 한 어리인 인간에 대해서는 짐승 노릇이 도리인 줄로 아는 세상을 지금으로써 증명하니, 옛말이 도리어 오늘에 이르러 그 뜻이 나타났음은 실로 딱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하여 삶의 줏대로 삼고, 타고난 숨이 다되면 하릴없이 자리를 뜨되, 일생을 지녀온 고운 얼까지도 남에게 물려주고 가던 대인(大人)이 드물지 않았음을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런 난세에도 하늘은 높으나 고개를 숙여야 하고 땅이 넓어도 길이 아니면 얼씬을 말아야 한다고 이르던 한 아름다운 이가 있었다.
박용래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그의 작품을 모르던 이가 없고, 죽어서는 그의 이름을 지울 이가 없을 터임에 세상은 그를 일컬어 시인이라 한다.
일찍이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했던 그는, 꽃그늘과 풀그늘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능히 알면서도 셈은 남과 같지 않았으니, 마침내 몸소 자기 곳을 찾아 오십추(五十秋) 남짓 되는 생애를 초야에 묻혀 다하였다.
그는 조상 적 이름의 풀꼿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더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詩篇)의 행간에 마련해 두고 살았다. 그는 나물밥 30년에 구차함을 느끼지 않았고, 곁두리 30년 탁배기에도 아쉬움을 말하지 않았다. 달팽이집이라도 머리만 디밀 수 있으면 뜨락에 풀포기를 길렀고, 저문 황토길 오십리에도 달빛에 별발이 어리면 뒷덜미에 내리던 이슬조차도 눈물겹도록 고마워하였다.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情恨)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박용래 시인은 1925년 음력 정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중앙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의 3남 1녀 중 늦동이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원태(朴元泰)씨가 고향인 부여군 부여면 관북리 70번지에서 소지주(小地主)의 넉넉한 살림을 대강 정리하여 강경으로 나온 것은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말의 유생(儒生)으로서 한학과 한시(漢詩)에 일가를 이룬 것으로 원근의 유림(儒林)에서 일러온 터였지만, 평양·대구와 더불어 전선(全鮮)의 3대시장으로 꼽힐 만큼 육운과 수운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로로서 그리고 내포평야(內浦平野)의 농산과 금강으로 올라온 새로운 문물의 교역처로 중부 이남의 상권을 흔들던 강경에 발판을 다지려 했던 것은, 개화기에 따른 의식이 남보다 뒤지지 않았던 결과였다.
박용래 시비 금강을 대문으로 삼고 논산천과 강경천을 옆에 두어 삼남(三南)의 보고(寶庫)로 불리던 내포평야는, 미맥 위주의 주곡을 비롯, 모시와 해산물의 집산지로서도 조선시대이래의 큰 장이었다. 더욱이 강경상업학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던 명문이었다.
박원태·김정자(金正子)씨 부부는 중앙동에 정착하자 봉래(鳳來)·학래(鶴來)·홍래(鴻來)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한편으로 막내둥이를 낳았고, 봉황과 학과 기러기의 날개 항렬보다 좀더 상서로운 영물을 찾아 부르니 그것이 곧 용래라는 이름이었다.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놀뫼와 나루 저녁 노을이 유난히 짙어 놀뫼(黃山)라 부르던 채운산(彩雲山) 산자락과 부여를 잇는 놀뫼나루, 황산천과 황산교, 죽마(竹馬)를 타고 오르내렸던 서편의 옥녀봉(玉女峰)들은 뒷날 민요풍(民謠風)의 그윽한 가락을 홀로 읊게 될 한 시인의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키웠다.
홍래 누이는 막내가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한시도 딴전 볼 겨를이 없었다. 부모가 연만한데다 하나뿐인 누이를 누구보다도 옴살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박시인은 홍래 누이를 따라 변두리로 다니며 노는 일이 잦았다. 채운산 너머 부투골, 낭청이, 까치말과 채운들 저쪽의 용답급, 돌꽃메, 두테골, 거름실 등 그들 오뉘의 발길이 미치지 않던 곳이 드물었다.
시「마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놀뫼와 나루, 논티(論山)의 들녘들은 그로 하여금 자연과의 일체감을 처음 터득하게 했던 본바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시의 씨앗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씨앗들은 뒷날 대싸리, 모과, 능금, 이끼, 달개비, 민들레, 엉겅퀴, 캥이풀, 목화다래, 상수리, 수수이삭, 미루나무,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잉앗대, 횃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옹배기, 목침, 베잠방이, 얼레빗, 실타래, 옥양목, 까마귀, 동박새, 반딧불, 베짱이, 소금쟁이, 물방개, 버들붕어, 메기, 쏘가리 등 우리 겨레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시어(詩語)로 영글어 양기 바른 두메의 붙박이 정서를 자아내게 된다.
그는 강경상업학교에 입학을 했던 1939년의 1학년 초엽부터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띌 만큼 여러 가지로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전과목의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품행에서도 남의 본보기로 마땅하였으며, 특히 미술에서 재질을 드러내어 미술반장의 구실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강경상업학교는 그의 생애를 가름했던 가장 중요한 고비의 어설픈 체제였다. 사춘기의 꿈과 낭만을 지레 접어버린 것이 이때라면, 실의와 허무감의 동거인으로서 시련에 의한 타율적인 성장을 이룬 것도 그때였다. 주산(珠算) 우위의 상업적인 교육에서 한몸에 촉망을 모으고도 비상업적인 관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소질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전교의 수석 졸업생, 학교를 대표하던 정구선수, 구령 한마디로 전교생을 거느렸던 대대장 등 공인적인 위치를 떠날 수 없었던 학창 경력들도 무릇 위임사항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도 정신적인 숙성을 부추긴 것은 문학이었다.
장터에서 일어나 시림(詩林)이 되기까지, 그의 연보(年譜)에서 누구도 누락시킬 수 없는 사건은, 동기(同氣) 이상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던 홍래 누이와의 갑작스런 영결(永訣)이었다.
놀묏내 건넛마울(부여군 세도면)로 시집을 갔던 홍래 누이가 초산의 산고로 이승을 뜬 것은 아무래도 너무 이른 2학년 어름이었다.누이와의 사별은 그의 여러 작품에 떨리는 가락으로 스며 있을 정도로 여운도 긴 아쉬움이었다.
그의 시들은 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세필(細筆)에 의한 소묘로서 전위적인 추상(抽象)마저도 원천적으로 포괄하지만, 가을 하늘의 가장 분명한 사건인 기러기떼의 이미지를 통하여 기러기처럼 왔다가 기러기같이 날아간 숙명적인 이름 '홍래'의 애도로 이해할 경우, 보다 가급적(可及的)인 정한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홍래 누이를 묻으면서 비롯된 허무감은 활달하고 숫기 있던 본래의 성격까지 문득 내성적인 규모로 다듬어 보아 서정적인 품위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른 사이 삶에 대한 회의, 신불(神佛)에의 불신임, 그리고 개체적인 고독과 사사로운 우수의 늪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박시인은 70년대 말기부터 차츰 고향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산업시대와 함께 내리막길을 치달려 장터로서의 위신을 잃어버린 강경―그는 바야흐로 기울어가는 고향의 낙조(落照)에 착잡한 감회를 느꼈다.
"밀물에/슬리고//썰물에/뜨는//하염없는 갯벌/살더라, 살더라/사알짝 흙에 덮여/목이 메인 백강 하류(白江下流)/노을 밴 황산(黃山)메기/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黃山메기」전문)
고향에 남은 옛것은 산업시대의 공해에 병들어 생태변화를 일으킨 불구의 메기였다. 이 "노을 밴" 불구의 메기는 누구인가? 초로(初老)에 접어든 시인의 뒷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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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故 박용래 시인 생가 헐렸다|작성자 바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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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학관은 대전의 첫 문학관임에도
한국문학관협회 가입 순으로 보면 60번째다...?!?!...
▲ 박용래 시인 전시관. |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닌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문구, 「박용래 약전(略傳)」-
그는 여성적이고 감상적이었다. 그의 몸짓, 말투부터가 너무나 시인다웠고, 시에 관한 한 촌보도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존심이 있었다…, 나는 그의 영롱한 감성과 서정의 아름다움에 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술을 좋아해서 만나면 으레 술잔을 나누었던 그는 한 줄의 시를 위해 몇십 번씩 생각하며 시어를 다듬을 만큼 꼼꼼하고 생각이 깊었다.
-호현찬 언론인·영화인,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인생」-
돈 세는 일이 역겨워 은행을 그만두시고, 등록금을 독촉하기가 안스러워 결국 교직을 떠나셨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어느 곳에나 얽매이기를 싫어하셨던 자유분방함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여린 심정으로, 어쩌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시인으로 운명지워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연 서양화가, 박용래시인의 딸, 「아버지는 오십 먹은 소년」中-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
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고은이 킬킬 웃어대며
냇물에 돌 한 개를 던졌다
물은 말 없고
그 대신 냇둑의 새가
화를 내며 날아갔다
박용래가 울었다 안주 없이 먹은 술을 토했다
괜히 새를 쫓았다고 화를 냈다
은이는 나뻐
은이는 나뻐
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고은, 「어느날 박용래」-
「박용래」
소나기 속에 매미가 우네.
황산나루에서 빠져 죽고 싶은 사람
막걸리잔 들고 웃다 우는 사람
상치꽃 쑥갓꽃 하며 호호거리는 사람
맷돌 가는 소리에 또 우는 사람
싸락눈 속에 매미가 우네.
-홍희표, 「박용래」-
박용래
박용래는 훗승에서 개구리가 되었을라
상칫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아욱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죽은 홍래 누이 그립다가 그리고…… 그리고……
박용래는 훗승에서 그리고로 울었을라
서정춘 시집 『귀』(시와시학사)에 실린 「박용래」
술
술은 마음의 울타리
술 속에 작은 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가 보면
조약돌이 드러난 개울
개울 건너 골담초 수풀
골담초 수풀 속에 푸슥푸슥
날으는 동박새
스치는 까까머리 아기 스님 먹물 옷깃
누가 마음의 울타리를 흔드는가
누가 마음의 설렁줄을 당기는가.
江景
안개비 뿌옇게 흐려진 창가에 붙어서서
종일 두고 손가락 끝으로 쓰는 이름
진한 잉크빛 번진 서양 제비꽃, 팬지
입술이 갈라진, 가슴이 너울대는.
오류동
방안에 들였어도 퍼렇게 얼어죽은 삼동의 협죽도
쇠죽가마 왕겨불로 달군 방바닥은 등을 지져도
외풍이 세어서 휘는 촛불꼬리
들리지도 않는 부뚜막의 겨울 귀뚜라미 소리
찔찔찔찔 들린다 해서 잠들지 못하는
초로의 시인
윗목에 얼어죽은 제주도 협죽도가
함께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대전시 교외 오류동
삼동의 삼경. 귀를 세우고
-나태주, <박용래>-
맑은 이슬방울이 연잎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졌는데, 그것은 늙지 않을 것 같다. 박용래는 내 안에서 늙지 않은 채로 항상 이슬처럼 있다. 박용래는 그 타고난 자리를 잃지 않고 그 천분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 같다.
박용래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꿈의 세계에 있는 듯도 싶다. 박용래라는 사람은 타고 날 때 묻어 있었던, 타고나기 이전의 어떤 것을 아직 지닌 채 살았던 사람같다. 세상 파도가 아무리 거셌어도 박용래에게서 그것을 앗아가지 못했다. 그것이 시가 되고 그는 이 세상에서 오직 시인으로만 살다가 갔다.
-최종태 조각가, 「맑은 이슬방울처럼 그렇게 : 박용래를 회상함」-
‘아내와 아이들 다 職場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詩 쓰며 빈집 지키고
해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朴龍來더러 ‘장 속의 새로다’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그중 지혜있는 장 속의 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朴龍來인가 하노라.’
-서정주 ‘박용래’ 전문
문학사상 1976년 1월호에 게재
아버지를 회상하며
가을. 감나무 이파리. 감새의 수리성.
오래 전 일입니다. 방에서 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조심히 문을 열고 쳐다본 아버지의 모습.
아…….
전 시인을, 우수수 떨어진 청시사의 저녁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구름의 행방을 묻지 말자. 구름은 영원한 방랑자.’
두 줄의 시구를 읊고, 육 개월 후 구름이 되어 가셨습니다.
- 박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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