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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고려의 눈보라□강우식, 창비시선 13, 창작과비평사, 1977 역사가 시와 만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관념성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역사는 관념의 화신이다. 역사가 마치 옛날의 어떤 사실을 다루는 것 같지만, 역사는 사실을 밝히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한 사실들이 함의하는 바를 추정하여 한 거대한 관념의 체계를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념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고, 그런 조작된 관념이 없으면 옛날의 사실 한 조각조차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시는 삶을 노래한다. 삶이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관념은 당연히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관념이 체험을 이끌고 가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할뿐더러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를 쓸 때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그래서 역사를 주제로 시를 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역사는 관념덩어리고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멀수록 더 심하다. 이 시집의 주제는, 특히 표제로 설정된 고려는 벌써 수 천 년이 지난 일이다. 수 천 년 전의 사실을 현실 속으로 뽑아낼 때는 현재의 관심을 노래할 수밖에 없고, 현재의 관점은 옛 사실을 희롱할 수밖에 없다.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 사실을 현재로 끌어들일 때 시인이 맞는 어려움은 세 가지이다. 옛 사실의 선택과 그 선택된 것을 표현하는 매개체와 그 이미지가 드리우고 있는 세계이다. 눈이라든가 바람이라든가 하는 이미지로 고려를 끌어들인 것은 아주 탁월한 수법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끌어들인 이미지가 오늘날 우리의 어떤 부분과 맞물려있는가?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 감성을 충전시켜 주는가 하는 것이 정작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탈춤이나 화랑 같은 것들도 너무 관념성이 강하고 추성상이 심한 소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우리의 삶 어느 곳에 닿아있는가 하는 것이 분명한 매듭으로 이어지지를 못한 것이 단점이다. 한자는 역사에서 불가피한 도구라고 하더라도 시에서는 안 그렇다.★★☆☆☆[4336. 12. 7.]
292□우짖는 새여, 태양이여□이인석, 창비시선 22, 창작과비평사, 1980 가장 단순한 시는 구조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그 수준에서 나오는 대로 발설하는 것이다. 이때는 감정이 먼저 나가기 때문에 말들이 감정에 예속되어 울림을 갖지 못한다. 그 격한 감정을 위한 단순한 동원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말들이 서로 어떤 인과율로 묶이지를 못하고 단순한 감정의 지휘를 받아서 산만한 느낌을 준다. 때로는 서로 모순된 관계까지도 보여줄 때가 많다. 이 시집에는 무엇보다도 구조에 대한 고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마음뿐이다. 시의 형식이 어떠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이 내용은 어떤 구조를 띠게 해야만 독자가 시 속으로 빨려드는가 하는 그런 것에 대한 발상이나 고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감정이 사물을 만나는 즉시 생각나는 대로 읊었을 뿐이다. 한자는 허영심처럼 그 위에 떠있다.★☆☆☆☆[4336. 12. 7.]
293□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신동엽, 창비시선 20, 창작과비평사, 1979 가슴속에 들어있는 신념과 지식이 어떻게 시로 나타나는가 하는 물음은 시인이 갖는 가장 뿌리깊은 의문가 숙제에 속한다. 이 시집을 보면 이 관계에 대한 의문이 거듭 생겨난다. 시인은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 시를 쓴다. 그 과정에서 신념을 독자에게 전하는데, 그냥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 지식을 뒷받침해줄 만한 발상과 이미지가 시의 수준과 질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시인의 영혼 속에서 교묘하게 직조되어야만 좋은 시가 나온다. 좋은 시란 가치관이 분명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분명한 것을 말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쉽게 그 시를 기억하고 암송한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지식이 너무나 선명하다. 그리고 그 지식과 신념이 여러 가지 말들을 동원하면서 시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언어들이 신념과 지식을 전하는데 일목요연한 모습을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눌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자세히 뜯어보면 나름대로 이미지들이 일관된 원리에 의해 연결을 맺고 있는데, 그것이 한 장면으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숲은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하여 나무를 그리다 보니 숲을 잊은 경우에 해당한다. 나무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한 색깔로만 처리해도 산은 나타난다. 그런데 거기다가 참나무, 가문비나무, 싸리나무까지 자세하게 그리려고 한 것이다. 이런 방법상의 미숙이 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안타깝게도 명징하게 시의 모습으로 다가와서 독자의 영혼에 깃을 치는 시는 두세 편 정도다. 건강한 역사의식은 만세의 모범이 될 만하지만 시의 방법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었고, 그 중 한자는 버려야 할 세계였다.★★☆☆☆[4336. 12. 7.]
294□중심의 괴로움□김지하, 솔시인선 1, 솔, 1994 시와 철학의 관계는 늘 중요한 문제였다. 이 시집에서는 시인이 어떤 깨달음을 지향하면서 자신의 일상에서 그것을 퍼올리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음을 보여준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주’라는 말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주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서 그 우주를 일상의 작은 체험 속에서 보고 있다. 철학은 시의 밑거름이고 재료이다. 재료가 그대로 시가 되는 수는 없다. 그러면 그것은 그대로 철학이지 시가 아니다. 이 시집에서는 위험할 정도로 철학의 줄기가 그대로 드러난 경우가 많다. 깨달음으로 시가 기울면 모든 형식을 귀찮아한다. 그래서 그대로 줄거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시가 단조롭고 세계도 협소해진다. 우주라는 말이 수없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증거이다. 우주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시의 울림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일이다. 우주는 그렇게 설명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니고 형상화 작업을 통해서 새로 살아나야 할 어떤 것이다. 즉 재료의 차원이지 서술의 차원이 아니다. 따라서 보여주고자 하는 우주의 모습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의 원칙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는 늘 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한자는 철학을 위해서 청산할 수 없는 것일까?★★☆☆☆[4336. 12. 7.]
295□라틴 점묘 기타□김춘수, 문비시선 1, 문학과비평사, 1988 시 쓰는 일이 달관의 경지에 이른다면 거기서는 입만 열어도 시가 쏟아져 나올까? 기행시를 쓴 시인의 태도를 보면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것 같다. 한 번도 읽는 사람을 배려한 적이 없는 태도가 시집 전체에 일관되어 있다. 기행시는 줄거리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이동하기 때문이고, 이동하는 그곳에는 이야기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면 기행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만 평생을 해온 사람은 기행시를 쓰기 어렵다. 그 기행의 대상은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춘수가 기행시를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쓴다면 졸작을 쓸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갖지 않는 기행시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행시는 발길 닿는 곳의 이야기가 주는 감상을 쓰는 시이다. 그렇지 않고 끝내 자신의 내부에 관심이 머물러있기 때문에 이른바 ‘기행’이 되어도 그 시는 단순하고 단조로운 구조를 띨 수밖에 없다. 남의 이야기를 해야 할 곳에서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소통은 처음부터 차단된다.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게 되고 그 체험은 남들이 겪는 그런 체험도 아니어서 잠꼬대 같다. 그래서 기행시는 가장 어려운 시이다. 김춘수는 시에 대해서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체험 중에는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이 있고, 굳이 그럴 필요도 그렇게 할 의미도 없는 체험이 있다. 시로는 어떤 것이든 못 쓸 것이 없지만 굳이 공유할 필요가 없는 내용을 시로 표현해서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것이 시의 울림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그런 묘한 착각을 이따금 한다. 이 기행시에서도 공항에서 만난 흑인 여자의 체험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연이 만드는 어떤 일치를 얘기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여행 중에 흑인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아서 시에 넣어둔다는 그런 투다. 이런 것은 어떤 것이 시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특징이다. 한글로 시를 쓰는 시인이 한자와 알파벳을 마구 섞어 쓰는 것은 어지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4336. 12. 7.]
296□처용단장□김춘수, 미학사, 1991 제목이 “처용단장”이기 때문에 이 시집 전체의 내용은 처용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처용이란 소재는 보조관념이 될 것이다. 시는 내가 곧 주인공인 갈래이므로 결국 내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것을 어떤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비유법이다. 장시는 이 비유법이 없이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집의 상황설정은 처용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이다. 따라서 처용과 나의 경험이 교대로 짜여지면서 시상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이 시집은 모두 4부로 짜여졌다. 1부와 2부는 아주 짧은 편이고 3부가 가장 길다. 그리고 본론에 해당한다. 4부는 사족이다. 따라서 1부와 2부는 이 시의 출발점을 나타낸다. 1부는 바다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그것은 처용과 시인의 출생 배경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생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곧 처용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아주 쉽게 쓸 수 있다. 굳이 내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지 않고 이미지로 몇 개 보여주기 때문에 시들이 짧ㄹ다. 이야기를 내놓을 수 없는 것은 처용과 나의 경험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둘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해서 묘사해야 하기 때문에 바다를 비롯한 몇 가지 이미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2부에서는 울음이 가장 많은 말을 차지하고 있다. 울음은 절규다. 아내를 빼앗긴 처용의 절규를 뜻한다. 그렇게 묘사하면 저절로 시인의 체험을 담게 된다. 시인의 체험을 자세히 나타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시의 상징이고 함의이다. 시만이 가질 수 있는 기법이다. 3부에서는 처용의 얘기 대신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내 이야기가 처용의 구도와 맞물리면서 이미지들의 긴장을 만든다. 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는 계속해서 처용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4부는 말 그대로 사족이다. 최근의 심사를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는 구조와 대위 때문에 겨우겨우 성공하고 있는 시다. 하지만 보조관념과 원관념 간의 간극이 너무 커서 아무리 현명한 독자라도 하더라도 그 간극을 메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태도가 무책임하고 불성실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그 후의 시단에 그런 불성실을 양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성복이나 송재학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성실은 인생에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결벽증을 단재하고 대비시킨 것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런 대비는 누가 보아도 역사와 그 속에서 치열했던 한 인물의 삶을 모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재가 무정부주의자로 죽었다는 사실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한 소심한 사람이 불령선인으로 몰려서 잠시 유치장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이 역사에 대해 회의주의 내지는 무관심주의를 보인다는 것하고는 도저히 비교할 항목이 되지를 않는 것이다. 대비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면 잠자코나 있을 일이다. 한글로 시를 쓰는 시인의 자질을 의심받아 마땅한 것은 외국어의 등장이다. 한문은 기본이고 일본어도 등장하고 프랑스어까지 등장하여 세계 문화의 쓰레기통인 우리의 현재 문화를 시 속에 축소해놓은 것 같다. 정말로 각성해야 할 부분이고, 이런 자들이 문단의 어른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한심한 일이다. 그것이 시에 어떤 시각효과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해방 전후에 시를 쓴 사람들이 공통으로 갖는 원죄가 아닌가 한다. 일본어로 생각하고 한글로 번역해서 시를 쓰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것이다. 한자를 모르고 일본어를 모르고 프랑스어를 모르고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시는 우리 시가 아니다.★★☆☆☆[4336. 12. 7.]
297□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박형진, 창비시선 120, 창작과비평사, 1994 농사는 하늘의 명령이다. 농사꾼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직하고 거짓이 없다. 거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꾼의 말은 자연의 이법이다. 시 역시 진작에 그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나라의 시에서는 농촌 체험이 드물다. 아마도 민요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농사짓는 사람이 시를 쓰지 않는 탓이고, 그것은 시를 고상한 것으로 가르치고 시에서 삶을 제거해버린 제도 교육의 악영향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은 농사짓는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고 반가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툴다. 그러나 그 서툰 행보는 결코 단점이 아니다. 시는 그러해야 한다. 농사꾼의 시가 매끈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농사꾼의 시에서 읽고자 하는 것은 매끈한 상상력이나 화려한 말발이 아니다. 그러나 과도한 이야기나 줄거리를 시에 끌어들이는 것은 좀 삼가야 할 일이다. 그것은 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자 한다면 시의 기본은 지키는 것이 좋다. ‘눈 속에서’나 ‘대선을 위한 밭갈이’ 같이 빼어난 작품처럼 한 생각과 체험에 집중하여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 비결이다. 집중하는 힘이 필요하다.★☆☆☆☆[4336. 12. 8.]
298□골목 하나를 사이로□최영숙, 창비시선 150, 창작과비평사, 1996 뿌리깊은 허무가 시집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허무는 추억과 교감하며 시인을 방 안에 가두고 있다. 자신의 내부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색채는 흐리고 검다. 언어가 아무리 아름답게 다듬어져도 시는 빛나지 않는다. 어둠의 거울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들이 분명하지 않은 관념 주변에 모여서 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이것은 시 쓰는 재주 때문이기보다는 시인이 시에서 드러내는 세계 때문이다. 허무란 주제가 원래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물건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내부에 있는 세계로 자꾸 후퇴하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자신에게는 분명해도 독자에게는 흐릿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당연히 시선을 현실 속의 어느 한 곳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할 말이 분명히 서고, 할 말이 서면 이미지 역시 분명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시들이 허영기 없이 아주 안정돼있기 때문에 방향만 잡힌다면 좋은 작품을 많이 쓸 시인이다.★★☆☆☆[4336. 12. 8.]
299□바람 설레는 날에□인태성, 창비시선 25, 창작과비평사, 1981 자신에 대해 엄정한 감정의 절제력과 그것이 시까지 미치는 영향을 이 시집에서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술한 구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랜 동안 깎고 다듬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시 전체의 논조가 일정한 반면에 강렬한 인식과 사색의 깊이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것은 삶에서 또는 인식의 방법에서 뚜렷한 방법이나 의지가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이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살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나름대로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의 인식마저도 독특한 색채를 띠면서 쉽게 이루어진다. 이 점이 못내 아쉽다. 한자 역시 보기 좋은 모양이 아니다.★★☆☆☆[4336. 12. 8.]
300□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시선 19, 창작과비평사, 1979 이 시집은 묘한 맛이 있다. 대부분 시들이 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서 개인의 체험에 서린 감정을 얘기하기 때문에 그 정서 역시 개인의 것에 머무는데, 이 시인의 경우는 거의가 집단의 그것이다. 분명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시의 전면에 떠오르는 정서는 공동체의 정서이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서를 정확히 읽어서 그것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운율이 아주 잘 살아있다는 점에서도 증명이 된다. 거의 김소월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정서가 깊고 그 정서의 박동을 운율로 전하는 데 크게 성공하고 있다. 다만 인식의 출발점이 흐릿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조금 몽롱한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전체의 의미가 메꿔 줄 수 있다.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의 우리나라 정서를 이처럼 잘 대변해주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보기 힘든 정서이다.★★★☆☆[4336.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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