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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청록집□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1946)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집이다. 허투루 쓰인 시어가 하나도 없이 모두 제가 있어야 할 곳에서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 더욱이 세 명이 낸 합동시집인데도 한 호흡으로 읽힌다는 것이 특이하다. 세 세계가 각기 조금씩 다른 차이를 보이면서도 자연을 바라보는 전통의 어떤 맥락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떤 의도가 작용한 탓이겠지만, 박목월의 경우 자연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현실마저 제거돼버렸다. 이 점은 조지훈도 마찬가지이다. 절과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한 영역이 잘 살아났다. 여기에는 한시의 작법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전통 계승의 또 다른 국면을 엿볼 수도 있다. 전통을 파내고서 그 자리에 들어앉아 뿌리내린 것이 현대시의 운명이자 경향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면이다.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그 속에 숨긴 의도가 가장 많이 드러난 것이 박두진인데, 어둠과 밝음을 대비시킨 구도가 민족 해방이라는 관념을 시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법이라는 것을 첫눈에도 눈치챌 수 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설익은 듯한 느낌마저 들지만, 강점기하의 양심이 어떻게 시의 장식 아래 은폐되었는가 하는 한 전범을 보는 것 같아 오히려 가슴 아프다. 해방 후 작고할 때까지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감추지 않았던 노시인의 정신은 이 은폐물 속에 숨어있었던 셈이다.★★★★☆[4337. 7. 20.]
712□와사등□김광균,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4) 방법상의 의도가 너무 돌출하는 바람에 ‘설야’를 빼고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한시의 전통으로 보면 이미지만 남아있는 이런 류의 시는 일종의 퇴영이라고 할 밖에 없다. 이미 있는 훌륭한 전통을 무시하고 생경한 이론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이렇듯 허무한 것이다. 극히 절제된 묘사가 뛰어나다. 하지만 한시의 묘사가 마음의 어떤 정황을 드러내기 위해 상징의 차원까지 승화된 반면에 묘사만이 남은 이런 시의 심상은 공허할 따름이다. 다만 이미지즘을 염두에 두고 썼으면서도 그 방법의 투철함에서는 김기림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 김기림이 큰 구도를 갖고 시를 꾸미는 능력이 탁월했다면, 김광균은 극세밀 묘사에 뛰어났던 셈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진 데에다가 그것이 그러내고자 하는 세계까지 갖추어야 제대로 된 시가 될 것이니, 생각하면 한 방법이 완전히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통의 단절과 도외시가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런 시집에서 본다. 유행, 유행 하지만, 뿌리 없는 유행은 공허할 따름이다.★★☆☆☆[4337. 7. 21.]
71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창비시선 156, 창작과비평사, 1996 격렬한 인식과 사고만으로 시가 될 수 있는가? 앞부분의 시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시의 감동은 생각의 질서에서 오지만, 격식을 버리고 사고의 뼈대만 추려서 보여주면 당황하게 되는 것이 독자다. 그것은 독자의 몫일 뿐, 시인의 탓은 아니라고 한다면 왕왕 우리가 논하는 시의 형식성은 무엇이 될 것인가? 뒷부분의 시들과 앞부분의 시들은 서로 방향이 달랐어야 한다. 같은 방향으로 서로 다른 감정을 배열했기에 뒷부분의 발랄함이 앞부분의 진중함을 짓눌러버린 결과가 되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관념성이 짙다. 죽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을 대하는 바탕에는 그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반발력이 만드는 상상력은 탄력이 있어 좋지만, 그 상상력을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것은 시에 여러 가지로 불협화음을 일으킬 소지가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아이는 아이처럼 대하고 어른은 어른처럼 대하며, 여자는 여자처럼 대할 일이다. 원리는 같더라도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하는 것이 시다. 한자는 시급히 없애야 할 불협화음이다.★★☆☆☆[4337. 7. 21.]
714□세기말 블루스□신현림, 창비시선 149, 창작과비평사, 1996 멈추지 않는 것이 젊음의 특징이자 권리라면 이 시집은 충분히 젊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의식을 실험하여 이 세계의 비밀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는 높이 살 만하다. 그리고 뻗어가는 의식의 촉수를 충분히 받아낼 언어의 세계가 확보되어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시어가 시상을 끊지 않고 일관된 천체를 보여줄 줄 아는 것은 젊은 시인치고는 갖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집에서 노래하는 세계는 언어 안에만 갇혀있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그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림 때문이 아니라 언어가 가둘 수 있는 세계는 그림과 달리 어떤 결론이다. 그 결론이 없기에 활달하지만 언어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어떤 방향을 향해 시의 의미가 수렴되지 않으면 시에 오래도록 정착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성급하게 결론을 낼 필요는 없지만 어떤 결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이 시에 머무는 한 방법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일은 이런 시에서는 위험한 일이다. 독자가 애써 일군 상상력의 세계가 불필요한 친절로 인하여 바람 빠진 풍선이 되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4337. 7. 21.]
715□조벽암 시 전집□이동순 김석영 편, 소명출판, 2004 시가 정치를 만날 때 어떤 모습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말하자면 선전 선동의 한 도구로 자리매김하여 실용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쓰임의 효용성이 중요한 것이지 작품이 갖는 상상력의 진폭이나 감동의 요인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침식을 견디지 못하고, 효용성을 지닌 그 시기만 지나면 무덤덤해지고 마는 한계를 지닌다. 시가 역사의 평가대상이라면 지난 시기의 한 가치를 드러내는 존재로 역사의 뒤안길에서 은은히 존재한다. 하지만 작품의 가치는 영원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런 부류의 작품이 갖는 단점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주제를 드러내는 데 급급해서 작품의 긴밀성이 떨어지고 상상력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노래된 세계에 열광하는 광신도가 아니라면 독자가 개입할 틈은 별로 없다.★☆☆☆☆[4337. 7. 22.]
716□고척동의 밤□유종순, 창비시선 71, 창작과비평사, 1988 용수철의 탄력으로 쓴 시이다. 용수철은 스스로는 튀지 않는다. 누군가 누르면 그 반동으로 탄력을 내면서 튄다. 시집 대부분이 외부에서 가해진 충격에 대한 반동 내지는 반발로 이루어진 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발력으로 인한 주제가 시의 전면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구체성을 유지할 때는 정신이 단단하게 드러나지만, 구체성이 조금만 결여되면 시가 모호해진다. 사물에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그들의 영역과 양상이 있다. 시가 대상을 가장 심하게 일그러뜨리는 양식이기는 하지만, 사물의 모습을 너무 심하게 일그러뜨리면 현실성을 잃게 된다. 시에서 현실성을 잃는 것은 주제를 전달해줄 수 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감동으로 연결되기는 퍽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 말이 많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미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인내는 노동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물과 사태에 대한 억지해석이 시의 전편에 흐르고 있다. 감옥 체험 시편을 뺀 나머지는 거의 다 그렇다. 말투는 강하면서도 정작 전하고자 하는 정서는 모호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사상이 건전하다고 해서 그것이 시의 정서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상가나 철학자의 몫이다. 시인은 시인으로 머물러야 하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때 드러난다. 한자에 매달리는 것은 자유 이상의 질곡이 된다.★☆☆☆☆[4337. 7. 22.]
717□바다의 눈□김명수, 창비시선 136, 창작과비평사, 1995 깔끔한 이미지를 만들 줄 아는 시인인데, 아직도 써야 할 부분과 써서는 안 되는 부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미지는 상징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제시의 기능이 강하다. 독자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여 시인의 메시지를 해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이미지로 제시된 것들에 대해서는 다시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 이미지들이 깔끔하게 잘 전달되도록 처리했는데도 중간중간에 영탄조로 발언을 해버리고 말아 애써 가꾼 이미지들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그리고 주제를 한 가지로 좁혀서 각 시들이 지향하는 초점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두세 개로 흩어져서 시집 전체는 산만하다. 이미지와, 시집 전체의 조율법을 깊이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7. 22.]
718□꽃산 가는 길□김용택, 창비시선 70, 창작과비평사, 1988 애써 이룬 공을 무기력한 반복으로 까먹은 시집이다. 앞부분의 꽃산 이미지는 대단한 성취를 이룬 시이다. 거기에다가 사랑을 결부시키고, 이후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의 중심에 꽃산을 놓음으로써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주 잘 드러냈다. 이렇게 상징화한 꽃산은 민중의 염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될 만하다. 시에서 이만큼 선명한 싱징을 이루면서 그 상징이 시집에 굵은 눈을 형성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기교만으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그 성과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뒷부분의 무기력한 반복 때문에 이런 성취를 절반은 깎아먹은 꼴이 되었다. 무기력한 반복은 조절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가 모자라서 전체를 완성하지 못하는 어떤 운명이 이 시인의 시에는 있다. 안타까운 일이로고!★★★☆☆[4337. 7. 22.]
719□새벽길□고은, 창비시선 15, 창작과비평사, 1978 시를 가장 편하게 쓰는 방법은 비유니, 상징이니, 이미지니 하는 자잘한 기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그런 방법조차 거추장스러울 만큼 할 말이 가슴속 가득히 차야 하고 가슴속 가득히 들어찬 그것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되어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토해낼 만큼 절실한 상황에 자신을 놓으면 된다.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자신이 어떻게 몸놀림을 하는지도 모르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면 된다. 그런 상황이면 자신이 뱉는 모든 말은 시가 된다. 이 시인이 지금 이런 경지에서 시를 쓴다. 엉뚱한 것 같지만,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어떤 전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시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시 앞에서 멀미가 나고 재미가 없다. 게다가 동일한 반복이 만드는 지루함을 운율로 넘어가려고 하는 땜질 처방을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시집 뒤쪽의 장시는 그런 혐의를 벗기 힘들다. 문제는 시 천 편을 써도, 만 편을 써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질을 직접 언급하는 연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속의 그 거대한 것을 에둘러 말하되, 언어가 작기 때문에 그것을 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본 세계를 잘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오래도록 탐구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인의 마음이 너무 바쁘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칭찬에 취하고 만다. 박수소리 들으며 아무도 말리지 않는 제 갈 길을 갈 뿐.★★☆☆☆[4337. 7. 22.]
720□별들은 따뜻하다□정호승, 창비시선 88, 창작과비평사, 1990 시집 안에 ‘박정만’이라는 시가 있는데, 전체의 율격이나 시의 격조가 박정만의 시와 많이 닮았다. 아마도 운율이 잘 살아있는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율은 가락에서도 오지만 시의 행 가름에서도 온다. 박정만의 시에서도 그렇지만 운율을 살리려는 시들은 행가름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호흡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1970년대라는 시대는 단순한 색깔을 지닌 시대였다. 바라볼 곳이 이쪽 아니면 저쪽이었다. 따라서 이쪽을 노래하면 저쪽은 당연히 드러나는 시대였다. 바로 그런 특징 때문에 정호승은 1970년대의 암울한 시기를 <서울의 예수>같은 걸작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런 색깔이 흐려지거나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이쪽을 노래해도 저쪽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이 시집이 있다. 어조나 창작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으로부터 적당한 높이로 떠서 묘사하는 수법이나 대상을 환기시킬 수 있는 상관물을 이미지로 차용함으로써 전체를 그려내는 수법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런데 절실함이 덜한 것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좀 무뎌진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낱낱의 의미를 버리고 상관물을 더욱 추상화해서 전체를 노래하는 방법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시들은 소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한자는 꼭 빼야 할 그 무엇이다.★★☆☆☆[433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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