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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60, 문학과지성사, 1995 역시 대작은 큰 안목과 구성력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시집이다. 생각의 규모나 발상의 크기가,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이야기하는 데 익숙한 일반 시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아마도 소설의 구성력이 작용한 탓이리라. <촛불 연가>라는 부제가 붙은 제1부는 53까지 나갔고, <도선사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제2부는 29까지 나갔다. 단순히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발상과 전체를 엮는 능력이 큰 안목을 깔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큰 느낌을 준다. 시집 전체의 주제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인데, 그것이 불교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치열한 정신이 시의 중심이 놓여있어서 매우 높은 경지까지 다가갔다. 촛불에 관한 연작은 시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만큼 대단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다만 시집의 뒤로 가면서 시가 수필처럼 변하고 문장 곳곳에서 산문 투의 어조가 남아서 아쉬운 경우가 되었다. 한자 역시 과제로 남아있다.★★★☆☆[4337. 8. 17.]
772□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이윤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59, 문학과지성사, 1995 생각의 병을 앓는 사람의 시집이다. 생각의 병은 문명병이다. 생각에 치여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중환을 누구나 다 앓는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못처럼 박혀있는 그 병을 정직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런 용기를 낸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는 보는 즐거움이 있다. 생각의 병을 앓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설명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방향이 시의 가장 중요한 특색이 되었다. 보여주기에서는 자신의 말이 시각 뒤로 숨기 때문에 때로 갑갑해서 직접 발설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법인데, 이 시인은 그런 점에서는 끈기가 있다. 칭찬 받을 일이다. 다만 이미 결정된 세계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엄살이나 투정으로 비칠 때가 많고, 종말론 신도와도 같아서 결국 판박이 시를 양산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늙은이들이 하는 짓이다. 세계는 이미 늙을 대로 늙었다. 한자는 늙은이들이 즐겨 부리는 고집이다.★★★☆☆[4337. 8. 18.]
773□소읍에 대한 보고□엄원태, 문학과지성시인선 158, 문학과지성사, 1995 이 시집에서 볼 만한 것은 제1부에 묶인 소읍에 관한 시들이다. 대도시의 주변에 위치한 작은 읍의 내부 실정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주변부의 삶과 현실이 아주 잘 나타났다. 그리고 이 부분을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했다. 한 권 정도로 불리고 깊어져야만 정말 좋은 시가 나올 법했는데, 중간에 그치고 말았다. 1부의 시 속에서도 방법상이 혼돈이 엿보이다. 주로 이미지 제시를 통해서 보여주기 수법을 취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직접 말을 하면서 나서는 장면이 적잖이 드러났다. 1부 이외의 시들은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하면 포즈가 좀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강조되는 시에서는 차분함이 감동으로 안내하는 문이다. 틈틈이 낀 한자는 감동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4337. 8. 18.]
774□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이정록, 문학과지성시인선 221, 문학과지성사, 1999 일상의 자잘한 사물과 사건에 관심을 주고 그것에서 삶의 깊은 암시를 읽으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그리고 될수록 시를 재미있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런 노력이 시 속에 이야기를 끌어들이곤 하는데, 그 이야기들이 줄거리로만 남지 않고 시에 긴장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특이하다. 이것은 단순히 하고자 하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읽도록 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다만 너무 그런 재미에 집착을 하다보면 장난끼나 말장난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시에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한자 역시 도움이 되질 않는 물건이다.★★★☆☆[4337. 8. 18.]
775□생명에서 물건으로□이승하, 문학과지성시인선 163, 문학과지성사, 1995 죽음에 대한 관념은 가설일 뿐이다.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그렇다. 특이하게도 죽음에 관한 소재로 시집 한 권을 꾸몄는데, 그것이 관념성이 강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죽음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소재로 택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길이고 함정이다. 그 함정 때문에 시가 건조해졌다. 죽음을 설명한다고 해서 생명의 비밀이 저절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죽음이 관념이기 때문이다. 한자 역시 지독한 관념이다.★☆☆☆☆[4337. 8. 18.]
776□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박용하, 문학과지성시인선 164, 문학과지성사, 1995 겉모습은 서울 생활이 주는 문명비판을 지향하고 있는데, 속에 흐르는 정서는 전통 서정시의 그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얘기다. 따라서 장황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이나 시를 불필요하게 길게 늘어뜨리는 수법은 문명비판의 시인으로 분류되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농촌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흙내 나는 감수성이 담겨있다. 서정성은 내면을 지향하는 반면, 문명비판은 외부를 향한다. 이 화합할 수 없는 모순이 시의 흐름을 종잡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에 좀 더 정직하게 귀기울이는 것이 해법이다.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농사꾼이 회사원이 되지는 않는다. 한자는 서정성을 갉아먹는다.★☆☆☆☆[4337. 8. 18.]
777□누군가 그의 잠을 빌려□심재상, 문학과지성시인선 166, 문학과지성사, 1995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 또한 아니라는 식이다. 진리를 찾다 보면 어떤 것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가 하는 것은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답으로 삼는 것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 순간 그것이 진리로 착각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역은 예술보다는 철학쪽에 더 가까운 고민들이다. 그 고민이 그대로 예술이 된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그렇지 않으면 착각이다. 그러니까 남의 문지방을 넘어들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벗어버려야 할 신발이다.★★☆☆☆[4337. 8. 19.]
778□극장이 너무 많은 동네□성윤석, 문학과지성시인선 174, 문학과지성사, 1996 도시 문명을 노래하는 시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렵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소화해내지 못한 정신의 한계가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그냥 배설해버리는 까닭이다. 이 시집에는 기존의 형식과 새로 발견한 형식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은 나타나는 순간 낡은 형식이 된다. 핸드폰의 신형 발생 주기가 3개월인 것과 같다. 그러니 몇 년에 한 번 내는 시집에서, 혹은 월간이나 계간에서 보이는 시들은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것이다. 주제를 과감하게 드러내야 할 곳과 감추어야 할 곳, 그리고 그 이유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곳곳에 널려있다. 한자 역시 석연치 못한 장치이다.★★☆☆☆[4337. 8. 19.]
779□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이선영, 문학과지성시인선 173, 문학과지성사, 1996 무엇보다도 야망과 패기가 느껴지는 시집이다. 글자라는 도구에 삶의 의미를 집어넣어 새로운 발상을 전개한 수법도 새롭다. 그런데 시를 써나간 발상과 수법이 너무 구태의연하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과 글자의 행위가 갖는 상관관계를 파고들다 보면 생각은 철학의 범주로 넘어가기 쉽고, 그것은 시에서 흔히 보는 서정성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세계이다. 그런데 생각은 끊임없이 인식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데 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혹은 그리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고 겪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상과 시의 정서가 끝내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 인식과 사고는 새로운 단계를 뚫고자 하는데, 시의 형식에 너무 안주해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결국 감정보다는 인식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시를 썼어야 한다는 뜻이다.★☆☆☆☆[4337. 8. 20.]
780□남몰래 흐르는 눈물□김영태, 문학과지성시인선 167, 문학과지성사, 1995 시는 짧은 형식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속성 때문에 낱말 하나도 중요하다. 그래서 잘 해득되지 않는 낱말 하나 때문에 시 전체가 막히는 수가 많다. 하물며 수많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등장하는 시집이야 말해 무엇하리! 미술작품을 등장시킨 시에서는 그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제대로 시의 감정이 파악된다. 따라서 이런 시집의 경우, 처음부터 독자의 접근에 큰 문제가 있는 시집이다. 그러다 보니, 그림이나 예술가의 이름이 주는 울림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문장이 끌고 가는 바깥 모양의 질서에만 의지할 수 없다. 감상이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독자의 문제인지 시인의 문제인지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눈에 띄는 것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 이름이 요구하는 체험의 사건성 때문에 시가 수필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는 잘못 편집된 화면 같다.★★☆☆☆[4337.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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