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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마티스
2015년 02월 15일 18시 37분  조회:3274  추천:0  작성자: 죽림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1869~1905

   

1906~1916

 

1917~1929

 

1930~1940

         

1941~1954


 
마티스의 생애

프랑스의 화가.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1869년12월31일 밤 9시 북부 프랑스 르카토 캉브레지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지냈다. 앙리 마르탱 고등학교 시절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마티스가 미술사가 피에르 쿠르디옹에게 1941년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그렸다고 한다. 1887년 파리로 나가 법률을 배우고, 이듬해 법과 자격시험에 합격, 잠시 생캉탱의 법률사무실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률사무소를 잠시그만두어야 했다. 마티스는 회복기를 보앵에서 보냈다. 그는 병실을 같이 있는 옆 병상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마침내 병상에 그림도구를 가지고 오게 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티스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통을 들고 가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시작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신의천부적 자질을 깨닫지 못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다. 마티스 역시 그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다.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통해 그는 어떤 형태의 예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1891년 이제는 앞날을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갔고, 그는 푸생과 샤르댕 등의 작품을 모사하는 인습적 보수적 경향의 그림을 따라 했었고, 이듬해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티스가 주물로 된 고대 조각품을 그리고 있을 때, 학생들의 작품을 검사하고 있던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를 끌게 되어 1895년부터 모로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는 '너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는 부단히 자기의 창작과정을 밝혀 나갔으며 자기 예술의 원천, 방법,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비범한 지성을 동원하였다. 마티스는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마티스(프랑스, 1869-1954)의 말에 의하면 포비즘 운동은 어디까지나 표현수단의 순수한 것을 재발견하는 용기의 고취이며 추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티스는 표현에 있어서 화가의 주체성에 의하여 화면에 나타나는 구성을 뜻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긴밀한 질서를 지목하였다. 
프랑스인들은 말한다. 물감은 보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읽히기 위해서 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색채, 구조, 도안 따위의 특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적 세련이라는 것에 대해 미묘한 이화감을 보이는데 , 그것은 '회화의 자율성' '대상으로부터 완전독립'이라는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형성된 관념에 대한 이화감으로 표현할 수 있다. 
1898년 만년에 이른 피사로는 여러 건물의 위층 창문을 통해 파리의 가장 찬란한 풍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필법과 감수성의 양면에서 1870년대 개척기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 일련의 작품으로 일생을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이 작품들이 그 뒤 몇 년에 걸쳐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왔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잔느의 그림을 사들인 것은 마티스는 자기의 습작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하기 이전에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당대 화가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1896년 소시에테 나시오날의 살롱에 4점을 출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인상주의적 수법을 채용, 근대회화의 주류에 합류했고, 이어서 코르시카와 툴루즈에 반년씩 머물면서 지중해와 남프랑스의 밝은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렸다. 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외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읽고 시냑과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원래 그가 파리를 떠나있던 1898년에 《르뷔 블랑슈》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매력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 그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레베카의 납치>(1899년)를 펜과 잉크로 모사한 습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티스는 이 습작을 통해서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넓고 아주 짙은 그림자로 에워쌈으로써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부조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야수파 회화의 흑백판이 되는 드로잉 양식으로서 그것은 마티스가 공인된 거장의 작품을 놓고 그때까지 만들어낸 습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신인상주의의에 관한 한 그 궁극적인 결과는 마티스가 시냑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던 1904-5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 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98∼99년에는 후기인상파에서 유래하는 한층 강렬한 색채의 실험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 결과 1900년 전후의 마티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적인 필치와 색채의 대담한 대비 등, 일종의 야수파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1901년 무럽에는 일단 종식되고 곧 이른바 <어두운 시절>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그는 색채문제에서 벗어나, 잔손질이나 구성에 마음을 쓰게 된다. 마티스가 다시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04년의 여름을 남프랑스의 생트로페에서 P.시냐크·H.크로스 등과 함께 지낸 뒤부터였다. 이듬해인 1905년의 앵데팡당전(展) 출품작 《호사(豪奢)·정적(靜寂)·일락(逸樂)》은 모자이크모양의 선명한 색채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어 전보다도 훨씬 명쾌한 신인상주의적 스타일을 나타내고 있다. 1897년까지 브르타뉴 지방을 여행하여 반 고호풍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나, 1898년 남불의 강력한 햇빛을 발견한 이후로 환한 색채가 강력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해 여름 그는 남프랑스의 콜리우르에 머물러 신인상주의의 규칙적인 점묘(點描)를 초월하여 강렬한 색채를 아울러 사용하는 야수파 스타일로 돌진한다. 그 해의 살롱 도톤은 야수파를 탄생시켰는데, 그는 이때 《열린 창문》 《모자 쓴 여인》을 출품했다. 빨강과 녹색, 오렌지와 파랑을 기축으로 한 채색법은 긴장된 화면에서 강렬한 빛을 반사하는 듯한 효과를 냈다. 1910년 뮌헨의 이슬라믹 대전시회를 보러 갔던 마티스는 그해 가을 남부 스페인의 유적을 탐사했으며, 이듬해에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이콘화와 벽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이 같은 그의 관심은 1912년부터 1913년 겨울까지 모로코 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모로코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마치 천국을 부여받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강렬한 태양과 원색의 꽃들, 낯선 이국의 빛깔과 문화에 마티스는 감동했다. 
'색체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야수파. 야수파 화가들은 캔버스를 자신들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하였다. 그들은 회화의 질서를 위한 표현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주관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것에 문제점을 드러냈고, 통일된 강령을 갖고 체계적으로 운동을 펼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2, 3년 정도의 수명만 유지했을 뿐, 그 후 야수파 화가들은 입체파 등 다른 운동에 가담하며 활동하게 된다.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체와 거친 붓놀림 등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 나아가길 추구했다. 이를 위해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했으며, 전통적인 방법에서 일탈한 매우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수많은 시도 속에서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표현이다. 
이처럼 마티스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마티스는 색채에 관해 “내가 녹색을 칠할 때 그것은 하늘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이어 그의 색채는 더욱 강렬한 것으로 되어 1905년 살롱 데 엥데팡당전을 기화로 본의 아니게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06년 발표한[삶의 환희]는 단순화한 형태, 대담한 색의 사용, 종교성을 배제한 신화의 원용 등의 성격으로 다시 한번 물의를 일으킨다. 당시 마티스는 프랑스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반면, 미국의 스타인, 러시아의 모로조프와 후슈킨 등 외국이 소장가들이 그를 지원하게 된다. 특히 후슈킨은 그의 아파트를 장식할 대형 장식화를 주문해, 형태를 더욱 단순화하고 단일 색채를 강조한 [춤]과 [음악]을 낳게 된다. 마티스가 지닌 색채의 자유로움은 이미 고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국적이고 상상의 색으로 현실적인 색채를 벗어나면서 색채의 자유로움을 제시한 고갱. 또한 내면 세계를 그리기 위해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했던 화가 고흐. 이들의 영향으로 야수파는 현실이나 형태로부터 색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주관적인 색채 표현은 후에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주며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7년 무렵부터 질서와 균형 있는 청랑한 예술을 찾아 평탄한 장식적 스타일을 거듭 시도했다. 이렇게 하여 탄생된 《빨강의 조화(1908∼1909)》는 야수파 스타일에 최종적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성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무역상 S.시추킨의 의뢰로 제작한 장식화의 기념비적인 대작 《댄스(1910)》 《음악(1910)》은 야수파의 유산인 격렬하고 풍부한 색채로 빛나고 있다. 10년대에 들어와, 기하학적 구성에 의한 추상적·구축적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입체주의의 영향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엄한 내성적 감정의 반영이 엿보인다. 17년부터 30년 무렵까지를 보통 <니스 시절>이라 한다. 그때까지의 눌리는 듯한 답답함에서 해방된 마티스는 이 시기에 주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우미하고 관능적인 오달리스크를 비롯하여 매우 느긋한 작품을 제작했다. 화풍은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 화면도 작아졌으나 <은색의 빛>을 창출하여 그 속에서 데생과 색채를 융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뒤 <니스 시절>의 수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여 빛과 공간에 의한 추상적·비물질적 감각을 추구하게 되고, 나아가서 단순화와 순수화를 추구했다. 48년에 착수하여 51년에 완성한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되는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으며 니스에서 죽었다. 
야수파 동료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당시에 갓 태어난 입체파 화가들의 기법에 빠져 외도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찬 선의 장식적 율동을 창출하고 넓은 평면적인 색면과 명암을 강력하게 대비시키면서 인물에 살을 붙이는 모델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그의 목표는 입체파 화가의 목표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수단은 정반대였다 (그 목표는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두 가지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실재와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입체 환각, 적어도 그리려는 인물의 입체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전체 구도를 통하여 화폭의 평면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구성요소가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 그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 있어서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도 副的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 또 어떤 것이 主的이라고 할 수도 없다. 多樣相에서 단일화로 질서와 조화가 이루러졌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었다. 사실 그도 "나는 균형이 잡히는 무구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이 불안해 지거나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표현이 아니라 피곤에 담긴 사람들에게 휴식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콤포지션은 화가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로이 다루는 여러 가지 요소를 장식적으로 어레인지 하는 기술이다. 나는 자신의 감각을 제어할 줄 아는 화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념을 가진 그는 선에 있어서 특유한 연구를 하였다. 종래에 있어서 선은 대상의 윤곽을 묘사하는데 쓰여졌다. 이러한 묘선은 대상에는 충실하고 정확한 선인 것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선이지, 선 그 자체를 화가 자신이 만들어낸 선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 그 자체로는 어떠한 표현도 없고 기능도 없는 죽은 선이다. 마티스의 선묘에서는 1890년대의 유겐트양식인 곡선을 特長으로 한 것과 같은 선을 구성하고 성숙시켜, 장려한 극치에 이른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선에는 움직임을 갖는 부드러움을 나타내 늘 유동하고 波動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표면을 한정하는 선이며, 자기자신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선이다. 
그러므로 마티스의 선은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대상의 선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로 그의 주관의 움직임의 생생한 표현력을 가진 선이다. 더욱이 그 선이 아무리 대상의 묘사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간략한 선이라 하여도 그것에서는 생명의 약동을 볼 수 있다. 
그는'그림은 지나쳐가는 일순간의 감각적 정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화가는 '현실의 보다 영속적인 번역'보다는 본질적인 성격을 추구해서 '감각의 응집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말해다. 
이렇게 하여 마티스는 기본적으로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정진하였으며, 또 그는 변화, 데상, 판화, 조각과 같은 광범위한 부분의 시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많은 성과를 냈다. 따라서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림을 그렸다. 이에 따라 그의 그림은 비극적이 아니고, 명랑한 그림으로 죽음도 허무도 멸망도 절망도 없는 아니 그러한 것이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예술이었다. 결국 포비즘의 중심적 화가인 마티스는 장식성을 강조하는 화가로 평가되었다. 마티스가 색체의 단순화를 통하여 달성한 장식성은 자칫하면 화면을 경직시켜 단순한 무늬의 작품으로 변질시킬 수 있으나 , 그는 반대로 이 단순성의 세계에 리듬을 맥동시켜 일종의 모뉴맨틀한 성격을 갖춘 생기있는 세계로 변화시킨다. 
<삶의 기쁨>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적인 정신을 요약하고 이으며 ,그 단조로운 색면, 심한굴곡을 보이는 윤곽선 , 그리고 <원시적인 형태>는 분명 고갱의 여향을 받은 것으로서 , 그주제까지 고갱의 자연인으로의 모습을 닮고이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스페인, 모스코바, 모로코 등지를 여행함으로써 더욱 리듬감있고 유연한 선의 형태와 더욱 강렬한 색채의 장식예술(세라믹, 성화, 옷감)을 발견해 그의 그림에 이를 도입한다. 1913년 아모리 쇼에 출품한[푸른색의 누드] (1906년작)가 큰 물의를 일으킨다. 1차대전 기간 중에는[노란색 커튼](1914~1915),[모로코 사람들](1916), [피아노 교습](1916)과 같은 걸작을 그린다. 1919부터 10년간 니스에 머물면서 오달리스크, 실내 풍경과 여인, 창문으로 본 풍경 등의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 임한다. 색채의 효과, 장식 요소의 극대화,복잡한 공간 구성 연구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을 특징짓는다. 끊임없이 다루는 여인의 형체도 "나는 여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한 폭을 그릴 뿐이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다른 요소들과 어울려지는 구성을 모색하게 위한 구실을 주는 것일 뿐이다. 1933년에는 미국 메리온의 반즈 재단을 장식할 작품[춤]을 같은 제목으로 두 번에 걸쳐 제작한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적인 내용이 완전히 제거된 "일반화된"신체의 모습을 통해 볼륨이나 원근법의 표현을 배제하면서도 그림으로 칠해진 화면을 초월하는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모뉴멘트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1943년부터는 과슈를 칠한 종이를 "가위로 데생을 하듯이" 잘라내어 콜라쥬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 기법을 통해 "데생을 중시하느냐 채색을 중시하느냐 하는 영원한 대립의 문제"에 해결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마티스는 몸을 거동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기법으로 제작된 색종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관절염 관절염으로 인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상에 누워 종이 자르기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71세에 내장 장애로 수술을 거듭하면서 거동을 못하게 된 후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색종이 그림은 계속되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만큼 평면적이고 자유로운 색채가 강조되었다. 그의 종이 자르기는 마치 조각가가 직접적으로 새기는 방식과도 같았다. 그는 색채도 혼합하여 마치 가위를 연필처럼 사용해서 색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 효과는 방법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마티스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명확한, 그리고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이라 할 만큼의 질서감과 절도감을 보여준다. 어쩌면 선과 리듬, 색채와 공간의 자율적인 세계 속에서 마티스는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확증시켜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선에 대한 마티스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고갱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이며. 고갱에서의 상징성이라기보다는 리얼리스트의 면모가 더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예술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1910-13년경 까지의 여행은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에 독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일련의 주요한 작품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온 뒤 그때의 인상이 화실에서 다른 작품을 구상하는 영감의 구실을 했다. 이 시기에 <모로코 사람들>(1916년)을 그렸는데 이례적으로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그림에서 화가는 1914년 시작된 입체파의 수법을 시도하고, 그 시각적 이미지에 불연속 효과를 투사한다. 그는 이 그림의 세 부분 사이에 명목상의 이음새를 잘라버리고, 각 부분을 공간적으로 불확실한 검정색 영역에 걸어놓는다. 여기서 하나의 장식면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마티스가 때늦게 입체파의 개념에 일부나마 동화했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고안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중요한 작품의 상당수는 이러한 집착의 흔적을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다른 몇몇 작품들에는 1907년을 전후한 초기 단계에서 마티스의 개인적인 기법의 유기적인 성장에 유해했던 입체파 양식을 터득하려는 직접적인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1914년에 이르면, 입체파의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양식은 평면적인 장식과 단순화 경향(후기에 와서는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린다)으로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입체파 화가들은 단편화된 평면과 뒤틀린 양감의 작품들에 강력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다 단색적 경향을 띠고 있었던 초기 입체주의와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발전한 모든 기법들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1914년경에 후한 그리가 내놓은 그림이라 생각되며, 여기서는 생생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색채가 평평하고 무늬진 화면을 형성했다. 이런 현상이 계기가 되어 마티스는 자기 고유의 화법을 버리지 않고 입체파의 고안들을 실험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잡았다. 어쨌든 1914년 직후의 주요 작품들과 아울러 수많은 이차적 작품들에는 입체주의의 성향이 배어 있으며,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1916-17)이 완성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피아노 교습>(1916)은 수평, 수직과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에워싸인 평면의 덩어리이고, 마티스가 입체파의 유산을 가장 일관성 있게 수용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입체파 운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단순히 그 기법을 불완전하게 빌어오거나 재해석한 집합체가 아니다. 얄궂게도 <파아노 교습>을 제작하고 있을 동안, 혹은 그 직후에 마티스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음악 수업>을 무르익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홍, 초록과 회색이라는 동일한 기본색으로 그려져 있어, 일단 입체파의 문제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파는 그 뒤의 마티스 예술-후기의 자른 색종이 그림이나 대형 벽화 <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1920년대 낸 그는 하렘들과 그들을 잘 돌봐주는 수동적인 하녀들을 재현한 작품을 그리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따라서 드라크루아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연관되는 앵그르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앵그르는 입체파 세대의 화가들이 재발견하여 새로이 평가를 내린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1915년에 피카소는 위대한 프랑스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의 양식과 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듯한 소묘를 제작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삶의 기쁨>을 그리고 있을 당시 또는 그 직후에 앵그르의 <황금 시대>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1920년대말 이후로 마티스가 앵그르에게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직한 조짐으로 볼 만한 유사성이 그의 작품에 뚜렷이 드러난다. 마티스 예술의 신고전적 요소는 대체로 깊숙이 숨겨져 있고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화면에 깊이와 부조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을 바꾸면 공간적인 입체 환각과 인체의 모델링이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하나의 공식으로 이러한 필요와 욕구를 모두 결합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1907년의 작품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푸른색의 나무, 비스크라의 추억>과 <사치 I> 및 <사치II>를 비교하면 얻는 바가 있다. 누워있는 푸른 인물상은 땅에 고착되어 있고 육중하고도 근육이 우람하다. 나체의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푸른 풍경의 단편이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는 듯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감촉할 수 있는 부피감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도에 있어서는 인체의 겉모양이 지닌 단순하면서 장식적인 윤곽선들을 반영하고 있다.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마티스의 경쟁자를 꼬집어 낸다면, 피카소가 으뜸이었다. 이들 두 예술가들이 반세기에 걸쳐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심지어 1945년에 그들은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에는 충동적인 천재성, 무서운 속도로 과제를 빨아들이는 그의 감수성이 번득인다. 하지만 마티스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뚜벅뚜벅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이따금 현학적인 기미마저 보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예의 전통에 자리잡은 그의 기반은 지나치다고 하리만큼 단단했다. 
미국화가들은 마티스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체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항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엘스워스 켈리나 프랭크 스텔라와 같은 젊은 화가들은 서로 다른 활동 시기에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톰 웨셀먼과 같은 팝아트의 화가는 자기 작품의 구성안에 일종의 장식으로 마티스의 회화를 그대로 복사했다. 보다 최근에 와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이전까지 피카소와 몬드리안에게서 이미지를 차용해오다가 그 뒤 1973년에 화실을 소재로 한 작품과 정물화를 위한 도상학의 바탕을 거장 마티스의 주제 처리법에서 찾았다.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들은 1960년대초에 문헌과 전시를 통해 널리 소개되어 20세기 후기의 새로운 세대에게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마티스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가미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 나갔다. 이 같은 장식성은 이슬람교와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마티스가 비서구적인 예술 형식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에서 기인한다. 마티스는 1954년 사망했다. 마티스에게는 너무나 많은 찬사가 주어져 이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켄버스라는 한정된 투기장위에서 마티스 만큼 훌륭하게 감각의 모든 광휘를 해방하고, 동시에 으지와 이성의지배, 질서의 승리를 실현해낸화가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생애의 목표를 두었던 화가에게색종이작업의 재즈씨리즈는 , 참으로 경쾌하고 고뇌의 색조을 띄지않는 비상한의지의 집중과 감각의연마의집적이 이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출처 : www.pohangart.com/moogi007/art30-_25B8_25B6_25C6_25BC_25BD_25BA.htm


색채, 영혼의 빛을 발하다 - 마티스의 생애와 예술에 대하여 
임근혜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창을열며

생의 마감을 2년 앞둔 1952년 어느 날 '방대하고 진지하며 다난했던 노력의 결실이자 일생동안 이끌어온 작업의 정점'이라 스스로 일컬은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을 방문한 마티스는 하얀 타일 위의 검은 드로잉과 대조를 이루는 파랑, 초록, 노랑의 간결한 원색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생명으로 충만한 빛을 바라보며 곁에 서있던 손자에게 말한다. “나는 북부 출신이란다. 내가 어두운 교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할 게다.” 
마티스의 고향 까또 깡브레시스는 벨기에에 인접한 프랑스 북부의 변경으로, 그가 태어난 1869년을 전후로 산업화의 거센 물결이 전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무자비한 토지 개발로 풍차와 종루가 평화로이 늘어서 있던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향 풍경은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 간다. 이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은 밝고 푸른 정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국경 분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는데, 마티스는 첫 돌을 맞이하던 해부터 프러시아 군대의 점령으로 인한 긴장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정치적 군사적 상황 속에서 어린 마티스를 지배하던 굴욕감과 중압감은 황폐한 자연과 더불어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으로 남는다. 
먼 훗날 마티스는 1941년 평론가 쿠르숑과의 대화에서 “내 작업의 주요 목적은 명료한 빛을 획득하는 것”이라 말했다. 19세기 말 격변기의 침울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의 유년 시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 이전부터 빛의 가치를 사무치도록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깨달음이 그를 혼의 빛을 발산하는 찬란한 색채 화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전부터 전 생애에 걸쳐 즐겨 다룬 소재 중 하나가 자연의 빛을 한껏 머금은 ‘열린 창’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던 10대 말,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건네주신 물감으로 소일삼아 유화를 그린 경험을 계기로 화가가 천직임을 깨달은 마티스는 회복 후 서류 여백에 낙서를 자주 끄적거니다. 이 중에 자신이 근무하는 사무실 입구를 그린 드로잉 한 장이 향후 마티스의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운명처럼 드러낸다. 안과 밖의 경계를 살짝 허물고 미지의 바깥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열린 문’은 실내외 풍경을 동시에 담은 ‘창’이라는 소재와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광선의 변화에 주목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룬 소재이기도 하지만, 특히 자신의 그림이 색채를 통해 강렬한 빛을 발산하기를 원했던 마티스에게는 더욱 의미심장한 소재였음이 틀림없다. 야수주의 시기의 작품 ‘꼴리유르의 열린 창’)1905), 장식적인 화풍을 성립한 1910년 전후의 대표작 ‘붉은 색의 조화(저녁 식가)’와 ‘대화’ 그리고 생의 후반 니스 시기의 실내 풍경을 그린 작품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창’이라는 소재는 마티스가 전 생애에 걸쳐 천착한 ‘빛’의 담지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색채의 복권과 그 정서적 환기력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운명으로 끌어안기까지는 녹록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현실과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추구한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25세에 파리로 상경하나 데생위주의 고답적인 미술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결코 제대로 된 데생을 배우지 못할 것’이라는 보수적인 스승 부게로의 실망스런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재도전하던 중에, 에콜 드 파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주류에서는 벗어난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이자 상징주의 화가인 구스타프 모로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고전의 중요성과 더불어 대상의 내면을 강조한 모로는 “색채는 상상을 통해 사고되어야 한다. 상상이 없다면 아름다운 색채를 결코 만들 수 없다. 영원히 남게 될 그림은 생각과 꿈 그리고 마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 손재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마티스는 이러한 가름침을 통해 어렴풋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인식하게 된다. 


2. 색채의 복권과 그 정서력의 복원

에콜 데 보자르에 어렵게 합격한 후, 마티스는 지금까지 자신의 회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거장들의 작품에서 표현되지 못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1898년 신혼여행을 겸해 런던으로 건너간 마티스는 피사로의 권고에 따라 터너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색에 대한 열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서서히 자각하고 본격적인 색채 혁명을 준비한다. 
자연의 모사를 회화의 미덕으로 삼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은 전통적으로 데생에 우위를 두었으며, 상대적으로 회화의 또 다른 주요 구성 요소인 색은 드로잉의 부차적인 요소 즉, 선으로 이루어진 윤곽을 채우는 보완물로서 인식되어 왔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그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야 한다는 회화의 대전제를 파기하고, 회화 평면에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율성을 부여한다. 회화의 기본 요소, 즉 색과 형을 자연 대상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생명체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려는 것이 모더니즘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다음 세대의 색채는 재현의 대상과는 별개로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지니게 될 것’이며 ‘색채의 기능은 빛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마티스의 진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식은 사실 회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모로의 화실 시절부터 그는 고전 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충실히 모사하였으며, 이후 전 생애에 걸쳐 한 새대 앞서 색채 혁명의 길을 열어준 선배 작가들의 작품들, 이탈리아 여행 중 경험한 르네상스 벽화 들을 연구하며 끊임없이 이들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그리고, 회화 요소 자체의 물질성으로 환원되다가 결국 형상을 버리고 추상으로 귀결되는 모더니즘 회화의 초석을 다져놓으면서도, 형상에 기초한 회화 전통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점은 그와 더불어 아방가르드 미술의 양대 거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피카소와 일치한다. 그러나, ‘구성적 언어’를 구사하며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 피카소와는 달리, 마티스는 색채에 의해 구사되는 빛으로서 새로운 회화 공간을 형성하는 점에서 차이를 이룬다. ㅇ이는 이 두 거장이 회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색과 형을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킨 아방가르드 미술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함께 이끌어냈다는 점을 의미힌다. 이처럼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를 관통해온 구상 미술의 형식적 구성요소를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현실에 뿌리를 둔 추상’이라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점에서 전통을 단절하지 않고 그 연속선상에서의 발전을 이룬 견고한 혁명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런던 여행 이후 코르시카와 툴루즈에서 머물던 1898~99년 사이에 그려진 정물화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식탁 위의 과일과 식기들의 색채는 묘사적이라기보다는 색채들 간의 상호 효과를 고려해서 인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자연의 빛을 모방하지 않고 회화 내의 질서와 균형을 위해 창조된 색은 색채 화가 마티스의 예술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된다.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을 추스르는 신중한 성격의 마티스는 견고한 형태감각을 익히기 위해 세잔느를 거울삼아 조각을 연구하기도 하고 과학적 색채이론에 기초을 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실험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며 자신의 작업 방향을 스스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선배 화가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종합하고 넘어서면서 빛을 발산하는 그림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사치, 고요 그리고 관능’ (1904~5)은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시냐크의 영향 아래 점묘법을 이용해 제작한 작품으로서, 여기서 마티스가 주의를 기울인 점은 단순히 과학적인 색채이론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고요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기쁨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신인상주의 실험에서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색채의 힘’에 대한 확신을 얻은 마티스는 1905년 역사적인 살롱 도톤느에서 ‘야수파’라는 이름을 유래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내의 초상화 두 점 ‘모자를 쓴 여인’ 때문에 고민을 해온 주최측은 심사위원들에게 그 작품을 거절하라고 설득했었고 우여곡절 끝에 전시장에 걸리고 나서도 관람객의 비웃음과 평론가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는 당시의 상황은 순수한 회화 수단으로 돌아가 새로운 미술사를 시작하겠다는 아방가르드적 이상을 예술의 동기로 삼는다는 것이 과감한 결단과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을 말해준다. 


3. 구성, 표현 그리고 장식

짧지만 강렬하게 타올랐던 야수주의 시기를 일단락 짓고 마티스 그 자신으로서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할 무렵 발표한 ‘작가 노트’(1908)는 그의 일관된 예술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로서는 맹목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자연을 해석하고 이를 회화 정신에 따라 재구성해야 한다. 색채 간의 관계로부터 음악적 구성과 유사한 살아있는 색채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는 그의 기본적인 회화관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견지된다. 이는 현실을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되 이를 단순한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그로부터 받은 감흥을 순수한 색들 통해 표현함으로써 내적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렇듯 ‘회화적 수단의 순수성’에 입각한 그의 작품은 결과적으로 단순미와 장식성으로 귀결되는데, 자칫 시각적 즐거움에 경도된 듯이 보이기 쉬운 결과물에게 마티스는 오히려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마티스가 자신의 화화를 가리켜 “편안한 안락의자처럼 안식을 줄 수 있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피상적인 장식이나 눈요기감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으로 영혼을 고양시키는 매개체로서의 미술”이라는 좀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일상 속에 존재하는 자연과 사물에서 순수한 회화적 수단, 즉 선과 색을 통해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며, 이러한 장식적인 회화를 통해 ‘현실에 보다 지속적인 해석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대상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내러티브를 버리고 회화 수단의 순수함, 즉 색채의 순수성을 통해 마티스가 도달하고자 한 궁극적인 목적은 ‘숭고와 미의 더높은 이상’ 이었다. 
한편, 마티스는 1945년에 저술한 <색의 역할과 속성>에서 자신의 회화에서 장식성은 작가 내면의 ‘표현’을 전제로 한 ‘구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표현은 인간의 얼굴이나 과격한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열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표현적인 것은 내 그림의 전체적인 배열이다. 인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그를 둘러싼 빈 공간, 각 부분의 비례 등 모든 것에 각자의 역할이 있다. 구성은 작가의 뜻에 따라 다양한 요소를 장식적인 방식으로 배열하여 화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라는 대목은 자신의 회화을 이루는 표현, 구성, 장식성의 의미와 상호 관계를 밝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색상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림 표면의 고유의 빛을 발산시킴으로써 회화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 또는 반응을 전달하려는 마티스의 회화관을 잘 설명해준다. 
‘수단의 순수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즉 조형 예술에서 가장 단순한 수단이 가장 직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그의 생각은 1909년 러시아의 콜렉터 슈추킨의 주문으로 제작한 ‘춤’과 1910년 작 ‘음악’에 본격적으로 반영되며, 이는 ‘음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은 하늘의 파랑과 땅의 초록 그리고 몸의 주홍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세 가지 색으로 조화로운 빛과 순수한 색을 구성한다…. 색은 형과 비례하며, 형은 이웃하는 색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수정된다. 채색된 평면에서 비롯된 표현성은, 총체적으로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색채가 묘사적인 기능을 버리고 독자적인 기능을 버리고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질 때 화면은 자연적으로 3차원의 환영을 잃고 평면 위에 배열된 색이 창출한 새로운 공간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감은 ‘단순화’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야수주의 이후의 장식성이 강한 화풍으로 발전된다. 마티스의 회화에서 단순화 과정은 단지 그림을 순수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집약된 형과 색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렬한 표현력을 가지게 한다. 
서양 미술의 전통적인 원근법을 거부하고 단순화를 지향하는 마티스의 입장은 1903년과 1910년 각각 파리와 뮌헨에서 열린 대규모 이슬람 미술전에서 세밀화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이슬람 미술을 접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마티스 자신의 말대로 ‘페르시아의 세밀화는 감각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으며, 이 예술품의 도안은 보다 거대한 공간, 진정으로 조형적인 공간을 암시한다.’ 식물 문양의 장식적 패턴으로 뒤덮힌 ‘붉은 실내’)1908)이후, ‘화가의 가족’(1911)및 ‘붉은 화실’(1911)등의 작품에서 공간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실내가구와 인물은 장식적 패턴처럼 순전히 색과 형으로 이루어진 조형 요소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된다. 
표현성과 동일한 의미로서의 장식성은 1912년 모로코 여행의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한 일련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1913년~1917년 사이 일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입체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추상을 실험하던 시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에 잠시 마티스의 그림에 나타난 기하학적 추상의 경향 역시 순간적이고 외적인 겉모습 이면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화가로서의 기본 임무에 충실하여 사물의 구성을 해체하여 더욱 단순화시킨 단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1917년부터 1930년까지 소위 ‘니스 시절’의 작품은 다소 현실 도피적인 장식적인 실내 풍경 및 나른하면서 유혹적인 오달리스크 풍으로 연출한 인물화가 주를 이룬다. 마티스는 1934년까지 이젤화를 잠시 중단하고, 1930년 미국의 반스 재단이 주문한 벽화 제작에 전념한다. 이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점은 형상과 배경에 동등한 비중을 둠으로써 확장된 평면 패턴을 형성시키는 문제였다. 마티스는 반스 재단의 벽화를 위해 미리 채색해 좋은 종이를 오려 자유롭게 패턴을 배치하며 작업했는데, 이는 1940년대 초 독립적인 종이 작업을 하는데 기초가 된다. 
1930년대 중반 이젤화로 복귀하였을 때, 마티스가 주로 다룬 소재 역시 여성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드에서 점차 장식적인 의상을 입은 착의의 초상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그 단순성과 장식성은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1939~1940)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이전에는 다른 화가 뿐 아니라 마티스 자신의 그림 중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면적이고 눈부시게 밝은 색면이 이 시기를 수놓는다. 


4. 색과 형의 구분을 넘어서

‘자신의 예술의 정점을 이루는 운명적인 작업’인 로베르 예배당에 관하여 쓴 글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지나온 날들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자연을 모방하라’는 복종할 수 없는 관습적인 견해를 평생 동안 반박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사실적인 모방을 넘어선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변화를 겪으면서도 내 작업의 근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저항심으로 인해 나는 드로잉, 색상, 구성 등 각 구성요소를 별개로 연구하게 되었도…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결합시킬 때 서로를 침해하거나 풍부한 표현력을 상쇄하지 않고 고유한 특질을 감소시키지도 않은 채 구성하게, 즉 회화 수단의 순수함을 존중하게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마티스는 평생토록 색채의 표현력을 집요하게 탐구해오면서도 조각 작업을 통해 양감을 익히는 등 형태 연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1899년 결혼 지참금으로 화상 볼라르에게 구입한 세잔느의 작품 ‘목욕하는 세 여인’을 두고두고 관찰했으며, 회화를 보완하려는 시도로서 조각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티스에게 드로잉과 색채의 대립과 조화는 영원한 과제였다.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이러한 회화의 두 가지 기본 요소들의 상호관계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1930년 반즈 재단의 벽화를 제작하면서 그 준비작업에 사용했던 종이 작업이다. 그는 1941년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은 후 하루에 한 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는데, 더 이상 이젤 앞에서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되면서 그 대안으로 십여 년 전 처음 시도했었던 종이 작업을 택한 것이다.
윤곽선을 그리고 색을 채워 넣는 방식 대신, 가위로 윤곽을 오려내는 동시에 색면을 만들어내는 이 작업을 마티스는 ‘가위로 드로잉하기’라 불렀다. 기성 제품으로는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선택한 색을 과슈로 종이 위에 바른 후 의도한 형태를 오려내어 서로 어울리도록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형태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빈 공간에도 동등한 무게가 주어진다. 즉, 형상과 바탕 사이, 형상이 점하고 있는 포지티브한 공간과 그 사이의 네거티브한 공간 간의 균형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더욱 율동적인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1947년, 몇 년 전부터 잡지에 발표해왔던 종이 작업을 본격화하여 스텐실로 인쇄한 <재즈>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됨으로써 마티스의 예술 영역이 한층 더 확장된다. 
종이 작업을 주로 하던 1940년대 마티스의 화실 벽에는 나뭇잎, 해조, 산호 등의 모티프로 이루어진 색종이 조각들이 가득히 걸려있었다. 1946년에 종이오리기 기법으로 대형 작업 ‘오세아니아’ 연작을 시도하는데, 이는 린넨 위에 실크 스크린으로 옮겨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티스가 이제까지 천착해온 예술적 탐구의 결실을 집대성할 수 있는 ‘건축학적 그림’이라고 여겼던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의 창문 및 사제의 제복 디자인에도 종이오리기를 이용한다. 
마티스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디자인을 위한 준비작업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완성작으로서 종이 오리기 작품을 왕성하게 제작한다. 1952년 파란 종이로 오려낸 ‘푸른 누드’ 연작은 새로운 기법에 조각적인 양감까지 더하게 되며, 큼직한 색면들이 듬성듬성 배치된 ‘달패잉’(1953)는 매우 단순한 수단을 통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시켜주며, 초기 시절부터 견지해왔던 회화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사항을 그 무엇보다도 완벽히 총족시켜준다. 


5. 색채, 생명의 빛

1953년 한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현대미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빛’이라고 말했다. 마티스의 예술관을 토대로 해석할 때, 그가 말한 빛은 물리적인 빛 뿐만 아니라 물질적 구속을 벗어난 인간 내면의 빛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티스의 예술 세계를 포괄하는 ‘색채 혁명을 통한 회화의 해방’은 곧 ‘영혼의 빛을 향한 구도의 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티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줄곧 꿈꾸어왔던 찬란한 빛과 색은 마침내 스테인드 클라스창이라는 건축적 요소를 통해 실현된다.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인 1945년, 자신의 간호사였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건 장식 작업에 대한 종교적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당신처럼 온 힘을 다해 영적인 지평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내 작업의 진로는 당신처럼 영적인 신앙심을 향하고 있답니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화업을 시작하기 전,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위에 끄적이던 열린 문의 낙서와 그 후 평생 동안 그의 회화의 주제 또는 소재로서 연속적으로 등장한 ‘열린 창’이라는 모티프가 빛을 발하는 실제의 창으로 귀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창과 캔버스는 직사각형의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마티스에게 창을 향해 들어오는 빛은 캔버스이며 파랑, 초록 그리고 노랑 세 가지 색의 빛을 발산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물감으로서 ‘일곱 개의 음계로 이루어진 음악’처럼 순수한 수단 그 자체로서 완결된 교향악을 연축한다. 
마티스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는 못 견디는 정리벽으로 유명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타고난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스로 부여한 것’이라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순수한 형과 색의 조화를 통해 화면에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것도 혼탁한 세상사로 어지럽혀진 인간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기말의 혼란과 두 차례 세계 대전의 격동 속에서 ‘피로를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지와도 같은 예술’을 꿈꾼 마티스에게 균형과 조화의 추구를 통해 도달한 ‘빛’은 곧 ‘치유’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마티스가 회화에서 색채를 해방시키고 이를 통해 내면의 빛을 발산하고자 치열하게 작업한 이유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빛은 모든 선한 것, 모든 치유하는 것의 상징이며,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그러하듯이 빛은 내적인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티스 연대기

1869
12월 31일 북부 프랑스 피카르디의 까또 깡브레시스(Cateau Cambresis)의 외가에서 앙리-에밀-브느와 마티스(Henri-Emile-Benoet Mattise) 태어나다. 아버지 에밀-이폴리트-앙리 마티스(Emile-Hippolyte-Henri Mattise)는 잡화 및 곡물 상인, 어머니 안나 엘로와즈 제라르(Anna Heloese Gerard)는 예술적 기질이 있어 모자를 만들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림. 

1872
남동생 에밀-오귀스트(Emile-Auguste) 7월 9일 태어나다.(1874년 4월 4일 사망) 

1874
다른 남동생 오귀스트-에밀(Auguste- emile) 6월 19일 태어나다. 1882-87생 퀜틴(Saint-Quentin)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 수학하다. 1887-88파리에서 1년간 법룰 공부를 하다. 8월에 첫 번째 자격 시험 통과하다. 이후 곧 피카르디로 돌아가다. 

1889
생 퀜틴에서 변호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아침에 에꼴 퀜틴 드 라 투르(Ecole Quentin de La Tour)에서 드로잉 수업을 듣다. 이후 건강이 나빠 여러 해 병석에서 지내다, 1889년 7월 군대에서 면제되다. 맹장염에서 회복되는 동안 다색석판인쇄법으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다. 첫 작품인 <책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ooks)>을 1890년 6월에 그리다. 건강회복후 다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새벽에 생 퀜틴의 미술학교에 다니다. 

1891
법률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다. 부모를 설득해 미술 공부를 위해 10월에 파리로 떠나다.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William Adolphe Bouguereau)와 가브리엘 페리에(Gabriel Ferrier)가 교수로 있던 아카데미 쥴리앙(l'Academie Julian)에 등록하다. 여기서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입학시험을 준비하다. 

1892
2월 에꼴 데 보자르 시험에서 떨어지다. 잠깐 피카르디에 돌아갔을때, 릴(Lille)의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Arts)에서 고야의 <젊은이와 늙은이(Youth and Old Age)>를 보고 감명받다. 노트르담 근처의 생 미쉘로 이사하다. 부게로의 교수법에 환멸을 느끼다.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의 눈에 띠어 그의 수업을 들으며 조르쥬 데발리에(Georges Desvallieres), 앙드레 루베이르(Andre Rouveyre), 조르쥬 루오(Georges Rouault), 시몽 부시(Simon Bussy), 앙리 에벤에풸(Henri Evenepoel), 앙리 망귄(Henri Manguin)을 만나다. 10월에 장식미술학교(Ecole des Arts Decoratifs)에 등록해 기하학, 원근법, 구성 수업을 듣고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를 만나다. 

1893
모로의 권유로 4월부터 루브르에서 명화 모사연습을 하다. 주로 푸생, 와토, 프라고나르, 샤르댕 같은 17, 18세기 프랑스 회화를 모사하다. 

1894~5
9월 3일 캐롤린 조블로(Caroline Joblaud)에게서 딸 마르게리뜨 에밀리엔느가 태어나다. 

1895
3월 에꼴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합격해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모로의 수업을 듣게 되다. 코로의 100주기 기념전을 보다. 여름에 화가 에밀 웨리(Emile W?ry)와 함께 브리따니의 벨 일(Belle-Ille)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다. 여기서 첫 야외 작업을 시작하다. 볼라르 화랑에서 중요한 세잔 전시를 보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세잔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다. 

1896
4월에 상징주의 저널인 La Plume가 조직한 Salon des Cent에서 첫 번째 공식 전시회를 하다. 한 달 후 보수적 성향의 화랑인 Salon de la Societe de Nationale des Beaux-Arts(관장 퓌비 드 샤반느)에서 5점의 회화 전시하다. 브리따니 벨 일에 두 번째 여행을 가 오스트레일리아인 존 러셀(John Russel)을 만나다. 이 시기 주로 풍경, 정물, 실내 그림을 그리다. 10월에 파리로 돌아와, 대형 구성작품인 <저녁 식탁(The Dinner Table)>을 시작하다. 

1897
뤽상부르 미술관(Musee du Luxembourg)에서 인상주의를 접하다. 이 중 모네에게 큰 감명 받다.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첫 작품인 <저녁 식탁>을 Salon de la Societe de Nationale des Beaux-Arts에서 전시하다. 후에 좋은 조언자가 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알게 되다. 벨 일로 세 번째 여행을 떠나 모네풍의 그림을 그리다. 딸 마르게리뜨의 어머니 캐롤린과의 관계가 끝나다. 

1898
1월 8일에 아멜리-노에미-알렉산드린 파레이르(Amelie-Noemi-Alexandrine Parayre)와 결혼하다. 런던으로의 신혼여행에서 터너를 공부하다.(피사로의 조언) 코르시카의 아자치오(Ajaccio)에서 2월부터 8월까지 머무르다. 코르시카에서 분방한 풍의 풍경화를 그리며 폴 시냑의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D'Eugene Delacroix au neo-impressionisme)』를 읽다. 4월 18일에 구스타프 모로가 죽다. 

1899
1904년까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다. 첫 아들인 장 제라르(Jean Gerard)가 1월 10일 툴루즈에서 태어나다. 화상 볼라르에게서 세잔의 <세 명의 수욕자(Three Bathers)>를 사다. 이 그림은 이후 마티스의 사상과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다. 같은해 로댕의 앙리 드 로쉐포르 석고흉상, 고갱의 소년두상그림, 반고흐의 드로잉도 구입하다. 2월 파리로 돌아와 생 미쉘 부근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 환조 조각 시작하다. Salon de la Societe de Nationale des Beaux-Arts에서의 마지막 전시를 하다. 유진 까리에르(Eug?ne Carriere) 스튜디오에서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장 비테(Jean Biette), 오귀스트 샤보(Augueste Chabaud)등을 만나다. 1900년 파리 박람회를 위해 그랑 빨레(Grand Palais)에서 장식 패널 작업을 마르께와 함께 하다. 

1900
첫 번째 에칭작업을 하다. 오딜롱 르동의 파스텔화 2점 구입하다. 6월에 둘째 아들 피에르 태어나다. 저녁에 l'Ecole d'Art Municipale에서 조각 수업을 듣고, 부르델의 스튜디도에서 일하다. 모로 스튜디오 시절의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하다. 오귀스트 로댕에게 드로잉 보여주다. 

1901
1901년 초 심한 기관지염을 앓다. 베른하임-준(Bernheim-Jeune) 갤러리에서 열린 반 고흐 회고전에서 드랭이 모리스 블라맹크(Maurice Vlaminck)를 소개하다. 살롱 데 엥데팡당(Salon des Independants)에서 처음 전시를 하다. 화가로서의 아들에 불만품은 아버지 원조를 끊다. 샤또에 있는 드랭과 블라맹크를 방문해 그들의 작품에 감명받다. 1902년 2월에 베르뜨 웨일(Berthe Weill) 갤러리에서 5명의 다른 작가와 함께 그룹전하다. 웨일을 통해 작품 중 하나를 팔다.(화상을 통한 첫 판매) 1903년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전시. Pavillon de Marsan에서 이슬람 미술전시를 보다. 그해 가을 살롱 도톤느에서 첫 전시하다. 

1904
폴 시냑과 친해지다. Pavillon Marsan과 biblioth?que Nationale에서 프랑스 원시주의자들의 대형 전시를 보다. 6월에 볼라르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회화 45점, 드로잉 1점)을 열다. 이 전시 서문 로저 막스(Roger Marx)가 씀. <사치, 고요,관능(Luxe, calme et volupt?)>준비 시작하다. 다른 화가 오귀스트 마티스와 구분위해 이름에 하이픈 넣기 시작하다. (Henri-Mattise) 

1905
다른 7점의 작품과 함께 신인상주의풍 회화 <사치, 고요, 관능>을 엥데팡당 전에 출품하다. 이 작품 시냑이 구매하다. 콜리우르(Collioure)에서 드랭과 여름을 보내면서 야수파 스타일작품 시작하다. 그해 살롱 도톤느에서 드랭, 망귄, 마르께, 퓌, 블라멩크와 함께 한 전시가 비평가 루이 보셀르(Louis Vauxcelles)에 의해 "야수들(fauves)"이라고 불리며 스캔들을 일으키다. 거투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레오 스타인(Leo Stein)의 <모자를 쓴 여인(The Woman with the Hat)>을 구입하다. 이후 스타인 가문은 마티스 작품의 주요 컬렉터가 되다. 상상의 낙원을 그린 <생의 행복(Le Bonheur de vivre)>을 그리기 시작하다. 이 작품은 그의 가장 큰 대형작이 되다. 

1906
석판화, 목판화 첫 작업 시도하다. <생의 행복>(이후 생의 기쁨으로 보통 언급됨) 3월에 엥데팡당전에 내다. 큰 크기와 현란한 색채로 인해 화제가 되다.(이 작품 역시 스타인 형제가 구입) 엥데팡당전의 부회장이었던 시냑 이 그림 비판하다. 3-4월에 드루에(Druet)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하다. 4월 거트루드 스타인의 아파트에서 피카소를 만나다. 비슷한 시기 브라크 만난 것을 추정되다. 

1907
1월 콜리에르에서 <기댄 누드 I(Reclining Nude I)>, <푸른 누드(Blue Nude)>를 그리다. <푸른 누드> 엥데팡당전에 전시하고 스타인 형제에게 팔리다. 이것이 스타인 형제가 구입한 마티스의 마지막 주요 작품. 이후 스타인 형제는 피카소의 그림을 주로 구입함.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최초로 좋은 판매고 올림. 이후 이 갤러리가 그의 주된 화상이 됨. 앙드레 메쎄(Andr? M?they)의 아뜰리에에서 도자기 타일을 만들기 시작하다. 여름에, 부인과 이태리로 가 스타인형제를 방문하고 거기서 미국 비평가 월터 파흐(Walter Pach) 만나다.(이후 마티스 후원자 됨) 아레쪼, 라벤냐, 파두아, 베니스 여행하면서 지오토, 두치오,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 카스타뇨, 우첼로 등에 감명받다. 12월에 기욤 아폴로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마티스에 대한 첫 저작 출간하다. 

1908
세브르 56번가 Couvent des Oiseaux에서 마티스 학교(Acad?mie Mattise) 1월에 개교하다. 3년간 12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다. 이 시기 <거북이와 함께 있는 수욕자(Bathers with a Turtle)>, <그릇 게임(The Game of Bowls)>등 제작. 거처 엥발리드 33번가의 Biron 호텔로 옮기다. 봄에 독일 여행. 4월에 뉴욕 291 갤러리에서 첫 미국 전시. 두 명의 러시아 수집가 슈슈킨(Shchukin)과 모로소프(Ivan Morosov) 이때 그의 주요 수장가 됨.(1913년까지 슈슈킨 마티스 작 36점, 모로소프 11점 소장) 살롱 도톤느에서 회화 11점(<붉은 색의 조화(Harmony in Red)>포함), 조각 13점, 드로잉 6점 포함한 중요 전시 염. 12월에 『화가의 노트(Notes of a Painter)』 출간. 이 책 그레타 몰(Greta Moll)에 의해 독어로 번역. 

1909
1월 모스크바에서 Salon of the Toison d'Or 두 번째 전시에 출품. 3월 슈슈킨이 <춤과 음악(Dance and Music)> 주문. 4월 샤를 에스티엔느(Charles Estienne)가 마티스와의 인터뷰 출간. 파리 남쪽 외곽에 있는 집 정원에 대형 스튜디오 짓기 시작. 여름동안 까발리에르(Cavaliere)에 있다가 가을에 집으로 돌아옴. 파리의 베른하임-준 화랑과 3년간 전속계약 체결함. 

1910
2,3월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회고전 개최.(1893년부터의 65점의 회화와 25점의 드로잉) 뉴욕 291갤러리에서 두 번째 전시. 세점의 마티스 드로잉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됨.(마티스 작품 첫 소장한 미국 미술관이 됨) 그해 여름 친구 마르께와 푸르만과 함께 이슬람미술관련 대형 전시를 보러 뮌헨에 감. <춤과 음악>을 살롱 도톤느에 전시해 혹평을 받음. 마티스의 부친 10월에 사망. 이런 저런 일에 지친 마티스 11월 스페인으로 떠남. 세빌레, 그라나다, 코르도바, 마드리드, 톨레도 등을 방문하여 다음해 1월까지 머뭄. 

1911
파리로 귀향. 봄에 마티스 학교 문을 닫음. 같은 해 봄, 엥데팡당 전의 41호실(Salle 41)에서 대형 큐비즘 전시가 열림. 이 해 내내 4점의 대형 장식 패널 제작.(<분홍색 스튜디오(The Pink Studio)>, <화가의 가족(The Painter's Family)>, <오베르진느의 실내(Interior with Aubergines)>, <붉은 화실(The Red Studio)>) 콜리우르에서 여름 보내고 슈슈킨의 초대로 11월에 러시아 여행. 여기서 성화들을 연구하고 러시아의 이국성에 감명받음. 12월에 돌아와 에른스트 골드슈미트(Ernst Goldschmidt)와 인터뷰함. 

1912
1월부터 4월까지 모로코에 머물다.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이탈리아 미래파 전시 열림. 마티스 조각에 대한 첫 전시가 뉴욕에서 열림. 6월부터 10월 사이 Mus?e des Arts Decoratifs에서 열린 페르시아 미니어쳐 전을 연구하다. 가을에 다시 모로코로 돌아가 겨울 내내 머뭄. 베른하임-준 화랑과의 계약 3년 더 연장하다. 장 메칭어(Jean Metzinger)가 『큐비즘(Du Cubisme)』출판하다. 

1913
모로코에서 돌아오다. 아폴리네르의 『큐비즘 화가들(Les peintres cubistes)』출간되다.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조각작품 일부와 모로코시기 회화를 전시하다. 베를린 분리파(Berlin Sezession)과 뉴욕, 보스턴, 시카고의 아모리 쇼(Armory Show)에서 전시하다.(17작) <뒷모습 II(The Back II)> 작업하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Portrait of Mme Matisse)>을 완성해 이 작품만 살롱 도톤느에 보내다. 

1914
에칭과 석판화 작업을 하다. 봄에 <이본느 랑스베르 양의 초상(Portrait of Mlle Yvonne Landsberg)>을 그리다. 7월 베를린 구르릿(Gurlitt) 화랑에서 전시. 일차대전이 터져 그림 반환 안 됨. 입대 지원했으나 거부됨. 9월 콜리우르로 가서 후앙 그리(Juan Gris)와 친해짐. <콜리우드의 프랑스식 창문(French Window at Collioure)>그림. 10월에 파리로 돌아 월터 파흐와 함께 레이몽 뒤샹-비용(Raymond Duchamp-Villon)> 만남. 

1915
뉴욕 몬트로스(Montross) 화랑에서 개인전.(미국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 겨울 내내 생 미쉘과 이시(Issy)에서 작업하며 보냄. 작품 점점 추상적이고 간결해짐. 

1916
<피아노 레슨(The Piano Lesson)>, <모로코사람들(The Moroccans)>, <강가의 수욕자들(Bathers by a River)> <뒷모습 III(The Back III)>, <잔네뜨 V(Jeannette V)> 제작. 사라 스타인과 미쉘 스타인의 초상 제작. 이탈리아인 롤레트(Lorette)가 모델 서기 시작함. 

1917
롤레트를 모델로 해 그린 연작 점점 더 자연주의적이고 관능적이 되어가다. 5월에 마르께와 함께 늙은 모네를 방문하다. 베른하임-준 화랑과 3년 재계약 체결. 12월에 마르세이유를 거쳐 니스로 가 Beau-Rivage 호텔에 머물다. 이때 Cagnes-sur-Mer에 사는 르누아르 방문하다. 

1918
호텔 Beau-Rivage에서 그림 그리다. 1-2월에 마티스와 피카소 파리의 폴 기욤(Paul Guillaume) 화랑에서 2인전 하다. Villa des Allies, Issy등을 방문하고 가을에 니스로 다시 돌아오다. 앙티브(Antibes)에 사는 피에르 보나르 방문. 아폴리 나르가 11월 9일 파리에서 사망하다. 러시아 혁명이후 슈슈킨과 모로소프 소장 마티스 작품이 소련 정부에 의해 압류당하다. 

1919
작품 점점 자연주의적이 되어가다. 새 모델 앙토안느 아르노를 모델로 한 <흰 깃털(White Plumes)>시리즈를 제작하다. 5월에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개인전을 하는데, 이는 1913년 이후 파리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이나 니스 시기 그림 첫 선 보인 것. 라그너 호프(Ragnar Hoppe)와의 인터뷰. 런던의 레이체스터(Leicester) 화랑에서 Maillol과 함께 전시. 런던에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감독하고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맡고, 레오니드 마신느(Leonide Massine)가 안무한 발레 <로시뇰의 노래(Le Chant du Rossignol)>의 의상 및 무대배경 맡음. 의상 디자인으로 자른 종이(cut paper)를 사용. 

1920
마티스의 어머니 1월 25일 사망. 니스에 거주하며 <로시뇰의 노래> 관계로 런던을 드나듬. 7월에 노르망디의 에뜨레따(Etretat)에 가 모네의 모티브들을 그림. 마티스에 대한 첫 모노그라프 Marcel Sembat가 씀. 베른하임-준 화랑과의 4번째 3년 계약 체결. 1927년까지 마티스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된 앙리에뜨 다리까레르(Henriette Darricarrere)가 모델 서기 시작. 10월-11월에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58점의 신작 전시. 대부분이 니스와 에뜨레따의 신작. 

1921
니스 부근의 풍경 그림. 니스에서의 호텔 생활 접고 아파트 빌림.(1928년까지 유지) 

1922
2-3월에 니스 그림으로 베른하임-준에서 전시. 석판화 시리즈 작업 시작. Musee du Luxembourg에서 <붉은 퀼로트를 입은 오달리스크(Odalisque with Red Culottes)>를 구입. 이것은 프랑스 미술관에서의 첫 작품 구입. <오베르진느의 실내(Interior with Aubergines)>를 그르노블의 미술관에 기증. 이 시기 일련의 관능적 오달리스크 그림 그림. Claribel과 Etta Cone, Albert Barnes이 본격적으로 마티스 수집 시작. 초기 후원자였던 Marcel Sembat가 9월에 사망.(Sembat 컬렉션 1923년에 그르노블 미술관에 기증됨) 

1923
Barnes의 수집품 미국으로 이송 전 폴 기욤 화랑에서 전시되다. 베른하임-준 화랑과의 마지막 계약 체결하다. 슈슈킨과 모로소프의 컬렉션 모스크바의 Museum of Modern Western Art에 귀속되다. 

1924
2-3월에 뉴욕의 조셉 브루머(Joseph Brummer) 화랑에서 전시하다. 이때까지의 가장 큰 회고전이 코펜하겐에서 열리다.(이어 스톡홀름과 오슬로로 순회) 아들 피에르 두덴싱(Dudensing) 화랑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다. 

1925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 니스에 머물며 오달리스트 석판화 시리즈를 하다.(1927년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앨범으로 출간). 근년간 첫 조각작품인 <앉아있는 누드(Large Seated Nude)> 시작하다. 자끄 귀엔(Jacques Guenne)과의 인터뷰. 

1927
아들 피에르 마티스에 의해 기획된 마티스 회고전이 뉴욕 발렌틴 두덴싱 화랑에서 열림. 1890년부터 1926년까지의 작품 망라. 피츠버그의 카네기 국제전(Carnegie International Exhibition)에서 <과일과 꽃(Compote and Flowers)>로 1등상 받음. 앙리에뜨 다리까레르 모델 그만둠 

1929
주로 소품을 그리다. 1935년까지 이젤 페인팅 거의 하지 않고, 판화와 조각에 주력하다.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폴 기욤의 개인 소장품 전시 열리다.(회화 16점, 조각 2점) Claribel Cone 9월에 사망하다. 플로렌트 펠스(Florent Fels)에 의해 모노그라프 출간되다. 

1930
2-3월, 베를린의 탄호이저 화랑에서 대형 개인전 열다(회화 83점이 포함된 265점 출품) Albert Skira가 말레르메의 시집『Poesies』 삽화 의뢰하다. 3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타히티 여행. 파나마 등을 거쳐 마르세이유로 돌아옴. Teriade와의 인터뷰. 가을에 카네기 상 심사위해 미국행. 여기서 펜실베니아 메리온의 바르네스(Barnes) 재단과 메릴랜드 발티모어에 있는 에타 콘 재단 방문. 바르네스가 재단 건물에 벽화 그려줄 것을 제의. 마티스 이를 수락함. 

1931
6-7월 파리의 조르쥬 쁘띠 화랑(Galleries Georges Petit)에서 회고전 열림(141점의 회화) 바젤의 쿤스트할레(Kunsthalle)(111점)과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78점)에서의 개인전. 잡지『Cahiers d'Art』와 『Les Chroniques du Jour』에서 마티스 특별판 냄. 마티스 바르네스의 벽화위해 파두아의 지오토 프레스코 등을 연구함. 니스 귀향 후에도 계속 벽화관련 작업함. (캔버스에 색종이 조각붙여 구성상 변화의 용이성 시도) 

1932
바르네스 벽화 초안이 거의 끝났을때 스케일 잘못 알았다는 것을 알고 재작업 결정. 10월에 말라르메의 시집 출간.(마티스의 29점의 에칭 수록) 11-12월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드로잉 전시. 

1933
바르네스가 벽화를 위한 오린 종이 구성(cut-paper composition)을 보러 니스로 오다. 5월에 벽화 작업 끝남. 바르네스 재단에 벽화 설치를 감독하기 위해 메리온으로 감. 이해 말까지 바르네스 벽화의 첫 구상을 재작업, 마무리하다. 

1934
피에르 마티스 뉴욕의 자신의 갤러리에서 아버지 작품으로 일련의 전시회를 구상하기 시작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미국판에 삽화를 그리다.(1935년 출간) 약간의 망설임 끝에 『거트루드 스타인에 대한 항의(Testimony Against Gertrude Stein)』에 거트루드 스타인이 그에 대해 한 말에 대한 반박글 기고. 

1935
2월 조수였던 리디아 들렉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 모델 서기 시작. 이후 마티스의 메인 모델 및 협력자가 됨. <핑크 누드(Pink Nude)>, <파란 눈(Blue Eyes)>, <꿈(The Dream)>그림. 종이 오리기 기법 계속 사용.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와 계약함. 선 드로잉 시리즈 시작. 피에르 보나르 방문. 「모더니즘과 전통에 대하여(On Modernism and Tradition)」 씀. 이것은 1908년이래 처음 출간된 에세이. 

1936
런던 라이체스터 갤러리에서 최근 드로잉 전시. 파리 폴 로젠버그 갤러리에서 27 최근 회화작품 전시. 바르네스 벽화의 첫 번째 구상작이 Musee du Petit Palais의 관장 레이몽 에숄리에(Raymond Escholier)의 노력으로 파리시에 의해 구매됨. 마티스 자신이 소장했던 세잔의 쁘띠 팔레에 기증. 마티스 드로잉 선집이 『Cahiers d'Art』의 특집으로 출간. 장식 작업용 모형으로 종이 자르기와 붙이기 기법 쓰기 시작. 이 시기 그의 그림 점점 평면화되고 밝아졌으며 패턴화 경향이 짙어짐. 

1937
쁘띠 빨레의 엥데팡당전의 거장들(Maietre de l'art Ind?pendent)전시에 마티스에게 특별 전시실 할당됨.(회화 61점) 에숄리에의 전기적 모노그라프 『Henri Matisse』 4월에 출간. 몬테 카를로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 de Monte Carlo)에게서 레오니드 마신느가 안무하고 쇼스타코비치의 1번 교향곡이 음악으로 쓰이는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의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주문받음. 이 무대 디자인 바르네스의 의 이미지 자유롭게 차용. 

1938
오슬로 전시 참여(피카소, 브라크, 로랭 포함). 폴 로젠버그 화랑에서 최근작 전시. 이전에 장식 프로젝트의 모형으로만 쓰던 종이 오리기를 하나의 독립작으로 만들기 시작. 파리의 폴 로젠버그 갤러리에서 개인전, 뉴욕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개인전. 뉴욕의 넬슨 록펠러의 개인아파트 벽난로 장식선반을 위해 주문받은 을 그리다. <루마니아 블라우스(Rumanian Blouse)> 드로잉 작업 계속하다. 

1939
몬테 카를로에서 <적과 흑> 발레 첫 공연 열림. 「드로잉에 대한 한 화가의 생각(Notes of a Painter on his Drawing)> 펴냄. 8월말 스페인 회화전을 보기위해 제네바로 여행.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곧 파리로 돌아옴. 독일 9월 1일 폴란드 침공. 프랑스 이틀후 참전 선포. 10월에 파리 떠나 니스로 돌아가 호텔 레지나에 머뭄.(파리 떠나기 전, 모든 작품 프랑스 은행 지하금고에 맡김) 

1940
4월에 부인과의 별거문제 정리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독일군 파리 진입 직전 파리 떠나 니스에 머물다. 피카소, 마르께, 보나르와 교류하며 지내다. 장에 종양이 생기다. 

1941
1월에 리용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수술을 받다. 마티스 자신이 삽화를 그린 자서전을 출간할 목적으로 피에르 꾸르씨옹(Pierre Courthion)과 4월에 인터뷰 시작하다. 속기본이 완성되었으나 이후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하다. 수술과 계속되는 병으로 건강 악화되어 누워 지내게 되다. 드로잉과 회화도 침대에서 작업하다. <주제와 변주 >작업 시작하다. <목력이 있는 붉은 정물(Red Still Life with a Magnolia)>같은 대담한 정물화를 그리다. 카르코(Carco)와 인터뷰하다. 니스에 살던 루이 아라공을 만나다. 

1942
영초에 비쉬(Vichy) 라디오 방송국과 두 번의 인터뷰를 하다. 루이 아라공이 <주제와 변주들 (Th?mes et variation)>서문을 써주기로 하다. 피카소와 그림을 교환하다. 담낭에 문제가 생겨 8월 중순까지 작업하지 못하다. 샤를 도를레앙(Charles d'Orl?ans)의 시집에 삽화를 그려주다. 

1943
6월말까지 니스의 레지나 호텔에 머물며 침대에서 작업하다. 간호사였던 모니크 부르주아(Monique Bourgeois)가 모델을 서주다. 모니크 부르주아는 이후 방스의 도미니칸 수녀원의 수녀가 되어 마티스의 방스 예배당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다. 롱자르(Ronsard) 시집의 삽화를 그리면서 종이 오리기 작업을 시작해 결국 『Jazz』라는 책으로 출간하다.(1947). 공습이후 방스로 옮기다.(1949년까지 머뭄) 『데생: 주제와 변주(Dessins:Th?mes et variations)』출판하다. 

1944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마티스 부인과 딸 마르게리뜨가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다. 삽화를 그린 『Pasiph??』5월 출간.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 주제로 세폭화(triptych) 주문받다. 독일점령 해방 기념 살롱 도톤느전에 마티스 출품위해 피카소 애쓰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 작업을 하다. 

1945
7월부터 11월까지 파리에 머무르다. 살롱 도톤느의 명예의 방(Salle d'Honneur)에서 마티스 회고전(회화37점) 열리다. 마티스와 피카소,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동시에 개인전 열다.(이 전시 1946년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Palais des Beauz-Arts)로 옮겨져 그대로 전시) 11월 말 방스로 돌아오다. 프랑스 정부가 새로 건립되는 국립근대미술관(Mus?e National d'Art Moderne) 소장품으로 마티스 그림 6점 구입(<사치 I(Le Luxe I)>,<화실에 있는 화가(The Painter in His Studio)>, <목련이 있는 붉은 정물(Red Still Life with a Magnolia)>포함) 가스통 딜(Gaston Diehl)이 마티스의 「색채의 역할과 양상」출판. 테리아드(T?riade)가 마티스의 1941년-1944년 작품이 담겨 있는 「색채로부터(De la Couleur)」 출판하다. 

1946
방스에서 강렬한 색채의 실내장식을 그리기 시작하다. 이것들 48년에 『열정(Verv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다. 피카소와 프랑소와즈 질로가 니스로 방문하다. 프랑소와 깜포(Fran?ois Campaux)가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다. 종이 오리기 기법으로 <오세아니아, 하늘(Oceania, the Sky)>, <오세아니아, 바다(Oceania, the Sea)>등의 대형 작품 제작하다. 

1947
피에르 보나르 1월 사망. 마티스가 삽화 그린 『악의 꽃』출간. 회화보다 장식 프로젝트에 몰두. 알베르 마르께 6월 사망. 12월 방스의 도미니칸 수도회의 예배당 장식 프로젝트를 제의받음. 『색채의 길(The Path of Color』 출판. 

1948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헨리 클리포드(Henry Clifford)가 기획한 마티스 전시 열리다.(회화 93점, 조각 19점, 드로잉 86점, 도록에 마티스 자신의 글 실림) 여름을 파리로 보내고 방스로 돌아가다. 방스의 도미니카 수녀원의 로사리오 성당 디자인 관련 종이오리기 작업을 하다. 

1949
니스의 레지나 호텔로 돌아가 방스 성당 관련 작업을 하다. 뉴욕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최근 회화와 종이오리기 작업을 전시하다. 파리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종이오리기 작업과 다른 최근작 전시하다. 루체른에서 회고전 열리다. 콘(Cone) 컬렉션이 발티모어 미술관에 기증되다. 방스 성당의 기초석이 놓이다. 

1950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모형이 파리의 프랑스 사상의 집(Maison de la Pens?e Fran?aise)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다.(<5점의 잔네트(Jeannette) 두상 포함, 조각 51점이 드로잉 15점과 함께 더불어 최초로 선보이다.) 대형 종이오리기 작업하다. 2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 타다. 

1951
방스 로사리오 성당 6월 25일에 헌당되다. 병으로 개막식 참석 못하고 아들 피에르가 대신 참석하다. 성당에 대한 짧은 두 편의 에세이 출판하다.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대형 전시 열리다.(이후 클리블랜드, 시카고, 샌프란시스코로 순회) 알프레드 바(Alfred Barr)가 『마티스, 그의 예술과 관객(Matisse, His Art and His Public)』출판하다. 테리아드가 마티스 자신의 자서전적 진술담은 「마티스 말하다」출판. 마지막 회화 작품 <푸른 곤도라 드레스를 입은 여자(Woman in a Blue Gondoura Dress)>작업하다. 

1952
<푸른 누드(Blue Nude)>시리즈, <수영장(The Swimming Pool)>, <오세아니아의 추억(Memory of Oceania)>를 포함 대형 사이즈 종이오리기 작업하다. 벨기에와 스톡홀름에서 전시. 11월 8일 고향인 꺄또 깡브레시스(Le Cateau-Cambr?sis)에 마티스 미술관(The Mus?e Matisse) 개관. 앙드레 베르데(Andr? Verdet)와의 대형 인터뷰. 

1953
벽화 사이즈의 종이 오리기 작품인 <마스크가 있는 대형 장식(Large Decoration with Masks)>와 세라믹 타일 주문용 다른 대형작 작업을 하다. 종이 오리기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첫 번째 전시가 파리 베르그륀(Berggruen) 화랑에서 열리다. 런던과 뉴욕에서 조각 전시. 「아이의 눈으로 삶을 보기(Looking at Life with the Eyes of a Child)」 출판되다. 

1954
뉴욕 폴 로젠버그 갤러리에서의 회화 전시. 프랑스어로 된 가장 심도있는 모노그라프인 가스통 딜(Gaston Diehl)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3월 출판. 앙드레 드랭 9월 사망. 마티스의 저술 『초상들(Portraits)』출판 준비.(마티스 사후 12월에 출간) 넬슨 록펠러가 주문한 유니온 교회(Union Church)의 장미창 디자인하다. 이 작품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이 되다. 11월 3일 니스에서 앙리 마티스 사망하다. 니스 시가 마련한 시미에즈(Cimiez)의 언덕 위 묘지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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