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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시론 ( - 한국 현대시의 최초 시론)
2015년 02월 19일 16시 24분  조회:4179  추천:0  작성자: 죽림

* 1947년 발간 된 김기림의 <시론>은 한국현대시의 최초 시론이다. 그의 <시론>에서 '과학과 비평과 시'는 현대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문이다. 과학과 형이상학과의 관계에는 근대시와 현대시를 가름하는 기초적인 이론이 들어 있다.* 

 

 

                   科學과 批評과 詩

 

 

 

                                                        金 起 林

 

                                                    1.

 

 우리 詩壇의 通弊가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수많은 文學原則論이나 創作方法論이 써지는 대신 실제로 具體的 作品에 대한 科學的 分析과 그것을 基礎로 한 批評이 지극히 드물었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新詩運動이 있은 후 20年 가까운 동안 수천 편 발표된 詩에서 거푸 두 편이 科學的으로 分析 批評되었다는 소문을 우리는 듣지 못하였다. 오늘의 詩는 또한 文學上의 亡命處가 되도록 적당한 密林은 아니다. 우리는 詩에 아무러한 形而上學的 <아프리오리>도 神學的 秘密도 붙일 필요가 없다. 詩는 일찍이는 神과 함께 살았다. 다음에는 詩神의 傳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이 ‘우리 소리’에 틀림없다. 그것은 科學的 分析과 究明에 견딜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絶對한 價値가 있다. 새로 씌어져야 할 詩學은 美라든지 靈感이라든지 超時間的 價値라든지 한 形而上學的 術語는 한 마디도 쓰지 않고도 써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時期에 어떠한 詩人이나 詩壇이 昏迷에 빠져 있다면 그 原因의 적지 않은 부분은 詩에 대한 科學的 追究의 부족에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으로서의 詩學은 이미 確立된 것은 아니다. 詩의 歷史的 社會的 關聯의 연구는 社會學에 속하고 詩的 經驗에 대한 具體的 解明은 心理學에 속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사이에 詩學을 위한 일의 領域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처럼 실망할 것은 없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詩學의 救濟에 있는 것이 아니고 詩의 진정한 認識을 얻는데 있는 까닭이다. 形而上學的 講堂 美學이나 詩學이 우리에게 준 것은 아름다운 觀念과 그리고 失望이었다. 詩에 대한 진정한 智識이 아니고 머릿속에서 꾸며낸 精妙한 論理였다. 詩에 대해 말하면서도 詩의 事實과는 들어맞지 않는 빌려온 禮服이었다.

 나는 여기서 잠간 <케풀러> <갈릴레오> 以來의 學問의 새 傳統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2

 

  우리는 보통 學問의 形式分野를 대개 세 가지로 나누어도 무방할 것 같다.

1. 博識: 東洋流의 在來의 學問 形式은 대체로 여기 속한다. 그 決定的 缺陷은 體系가 없다는 점이다.

2. 形而上學: 그 자체의 精妙한 論理는 갖추고 있다. 누가 <헤겔>더러 그 體系는 現實하고 맞지 않는다고 말하였더니 <헤겔>은 즉석에 그것은 自己의 體系가 나쁜 것이 아니고 現實이 나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3. 科學: <갈릴레오> 이래의 新傳統이다. 主張을 품은 모든 命題는 事實의 檢證에 비추어서 그 眞假를 결정하는 것을 眼目으로 한다. 論理 自體는 權利가 없다. 그것이 事實-실로 事實과 相應하지 않을 때는 거짓이라는 烙印을 얻어맞는다. 科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理論物理學이다. 形而上學이 科學 앞에서 드디어 그 地位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 學問으로서의 생명인 眞理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形而上學的 뭇 命題는 事實에 대한 주장일 수 없는 점에 결정적인 陷穽이 있었다. <칸트>는 벌써 形而上學의 不可能을 주장하였고 그 認識論은 科學的 認識에 대한 연구였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모양을 한 形而上學이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오늘의 哲學이 科學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는 結論은 도처에서 實證되고 있는가 한다. 학문의 全 領域에서는 아직도 在來의 博識 또는 形而上學이 혹은 단독으로 혹은 어울려서 혹은 뚜렷하게 혹은 隱然中에 숨어서 널리 남아있다. 아직은 科學은 여러 세기 不安의 苦鬪에도 불구하고 낡은 인습의 城壘를 완전히 깨드리지 못했다. 그것은 사람의 뿌리 깊은 蒙昧 때문이다. 조만간 學問은 모조리 科學으로 統一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본다. 오늘의 科學의 未熟을 가지고 곧 科學을 훼방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先史時代 이래의 인류의 깊은 迷信을 분쇄해야할 큰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완전한 精神的 一新을 企圖한다. 이렇게 多事多難한 科學은 그 目的을 達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時日을 요망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사람의 蒙昧의 退却과 反比例해서 목적에 점점 가까이 갈 것이다.

科學은 科學的 方法 위에 선다. 개개의 특수한 科學은 그 특수한 방법의 면을 가지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事實에서 出發한다는 것-그래서 事實의 면밀한 觀察과 分析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공통된 일이다. 그 뒤에는 모든 우상에서 (독자는 베이컨의 네 우상-인류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생각하라) 極力 떠나서 事實을 응시해서 마지않는 科學的 態度가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

科學-科學的 方法-科學的 態度는 일련의 새로운 世界觀 人生觀 생활 태도와 조응한다.

 

 批評이 만약에 한 作品이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오직 한 개의 命題를 내세움으로써 일이 끝난다면 혹은 科學的 態度나 方法을 떠나서 幻想的 感歎詞 몇 마디만 준비하면 그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批評은 있을 수 없다. 批評은 長期間 그 作品에 대한 敍述을 해야 한다. 그 敍述은 그 作品에 대한 실로 그 作品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作品이 일으키는 效果를 事實에 기해서 記述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作品이 일으키는 效果와 대체로 一致해야 한다. 批評家가 判定을 내리는 것은 실로 그 準備가 십분 되었을 때 그 위에서 비로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批評家는 그의 判定을 보일뿐 아니라 그 判定의 理由를 보여주어야 한다. 批評은 分析과 判定을 그 일의 부분으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分析은 그 일의 가장 중대한 大部分을 차지한다. 우리는 理由를 보여주기 전에는 어떤 判定도 信用할 수 없다.

 

                                                       3.

 

 따라서 批評은 실로 가장 진지한 科學的 態度와 方法에서만 가능하다. 오늘의 作家나 詩人은 단애 위에서 一步轉落을 늘 발아래 위태롭게 느끼면서 죽음과 싸우듯이 製作한다. 그러한 진지한 노력의 결과인 작품에 대해서 自己流의 幻想이나 機智나 印象만을 가지고 處斷하려고 하는 것은 現代批評의 倫理일 수도 없다.

 우리는 다시 詩로 돌아가서 얘기를 계속하자. 形而上學的 방법이 破産한 地帶를 收拾할 과학적 방법에 의한 詩의 硏究는 詩의 事實에서 出發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것이 치밀한 觀察과 分析에서 일을 始作해야할 것이다. 詩의 批評은 또한 논하려는 詩篇의 效果의 그러한 科學的 分析과 計算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내리는 判定을 품은 것이다. 우리는 다시 詩의 認識 및 批評에 있어서 과학적 태도와 과학적 방법이 不可避하다는 지금까지의 논의보다도 더 중요한 命題로 옮겨 가자. -즉 科學的 態度는 오늘의 詩人의 새 모럴이며 뿐만 아니라 과학의 勃興과 함께 자라난 世界의 새 情勢가 요구하는 唯一한 진정한 人生態度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거기에 現代詩의 최대의 問題가 숨어 있다. 詩의 문제는 결코 人生問題에서 떨어진 한가한 題目이 아니라는 것을 再認하게 한다.

 

 讀者는 詩의 事實에서 이를 論證하려고 한다. 詩의 製作의 材料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이 소리나 글자의 모양을 한 記號가 아니고 우리의 經驗을 代表하고 組織하고 傳達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意識의 활동을 代表한다. 意識이 역사적 사회적 규제를 받는다는 命題는 ‘말’이 역사적 사회적 規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명제의 同意反覆이다. 편 편의 詩는 한 全體로서 意識의 어떤 統一된 활동을 代表한다. 그래서 讀者의 意識에 한 態度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人生에 대한 態度다. 詩의 散文的意味가 어떤 人生態度를 說敎한다는 말이 아니고 讀者의 마음에 한 편의 詩가 全體的 反應으로서 불러일으키는 心理的 態度다. 이 점에서 詩에서 모럴을 去勢하려는 모든 藝術至上主義者의 辨說은 결국 그들이 변호하려는 詩가 人生을 도피하려는 태도를 지지하는 詩라는 것을 그릇 告白했음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詩의 人生態度에 대한 關係를 역사적으로 回顧하기로 하자.

 어떠한 時代에도 사람은 그가 사는 宇宙에 대해서 한 世界像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과 調和된 人生態度를 選擇한다. 神話는 古代人의 世界像이요 동시에 그 모럴의 源泉이다. 호머의 시가 희랍 神話를 人生態度의 詩的 經驗으로서가 아니고 더 노골한 具體的 記號로써 대표한 일은 너무 유명하다. 그 뒤에도 단테의 <神曲>이 르네상스 前夜의 神話였고 밀턴의 <失樂園>이 淸敎徒의 神話였고 괴테의 <파우스트>도 神話 속에 들 수 있을 것이다.

歐羅巴 사람의 생활이 지금보다는 統一이 있었던 시절에는 詩人은 全歐羅巴 또는 한 國民의 生活上의 指導者인 적도 있었다. 허버트리드는 英詩에 있어서 民謠詩人은 그 集團과 一致했고 다음의 휴머니즘의 詩人은 그 集團의 中心點에 있었고 그 다음의 宗敎詩人은 그 圓周 위에 섰고 로맨티스트들은 自己들의 世界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4.

 

  19世紀를 일관해서 西洋의 詩는 대체로 前代의 貴族의 意識을 반영한다고 筆者는 본다. 사회의 새 變革에 대해서 詩人은 늘 귀족적 결벽에서 소극적으로 非難하고 逃亡하려고만 했다. 科學과 새 産業機構의 主人으로서 市民들이 멋대로 자라날 때에 19世紀의 시는 슬픈 敗北者의 노래였다. 宮廷과 莊園과 지나간 날에 대한 달콤한 回顧와 鄕愁에서 언제고 깨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異國에 대한 憧憬으로 나타나서 世紀末에는 東洋에 대한 꿈을 불타게 했다. 타골이 登場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 속이었다.<기탄자리>와 <루바얏드>가 英國의 世紀末 詩人들과 끌어안고 우는 동안 印度와 近東에는 英國의 支配가 날로 굳어갔던 것이다.

 우리 新詩運動의 當初에 先驅者들이 輸入한 것은 바로 이러한 19世紀의 傳統이었다. 象徵派의 황혼 ‘센티멘탈. 로멘티시즘’..... 그것들은 다시 말하면 ‘센티멘탈리즘’으로 어느 정도 까지는 槪括할 수 있는 逃避的인 패배적인 回顧的인 人生態度를 代表했다.

 

 우리가 先驅的 功勞에도 불구하고 어느 부류의 先輩들과 그 末流의 詩를 19世紀와 함께 경멸하는 것도 주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20世紀의 機械體操場에서 19世紀의 춤을 추는 그 우스꽝스러운 嬌態 때문이다. 退步와 隱退를 사랑하는 東洋의 禮儀다. 20世紀의 初頭까지는 그래도 어떤 詩人은 그 國民의 꽤 넓은 範圍에 향해서 統一的 영향을 주었다. 가령 <테니슨>이라든지 <키플링>에게는 어찌 보면 ‘國民的’이라는 形容詞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차 世界大戰이 지나간 뒤의 歐羅巴에는 국민의 생활이 支離滅裂해지고 같은 知識階級 안에서도 다시 分裂을 시작했다. 詩人의 소리는 거의 微視的으로 分裂해버린 그가 속한 지극히 적은 한 黨派 속에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드>는 그 일을 가리켜 오늘의 詩人은 “혼자 呼訴한다.”고 했다. 그 자신의 괴로움 아픔 및 理想의 세계와 미운 現實의 不均衡을 뿜어 놓을 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大戰後의 한 世代- <방쟈망 크레뮤>가 말한 소위 “不安한 時代‘를 통한 시인의 속임 없는 모양이다. 깨어진 神話의 조각을 집어 들고 그들은 너무나 어이없어서 찌푸린 時代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 悲慘은 결코 약속된 未來 때문에 榮光이 있는 受難이 아니다. 과거의 怠慢에서 온 차라리 不美한 刑罰이다. 즉 人類의 생활에 새로운 情勢가 전개되어가는 동안에 詩人은 그것에 無關心하였고 도리어 反撥을 꾀한 刑罰이다.

 

 조만간 時代는 秩序를 回復해야 했다. <크레뮤>도 그렇게 말하고 <리드>도 그렇게 말했다. 秩序는 어떻게 回復할까? 問題는 共通되면서도 解答은 아무도 잘 몰랐다. 성급한 사람들- 가령 <마리탱> 같은 사람들은 中世紀의 復活을 解答으로서 제출하였다. <파시즘>은 이러한 歷史의 龜裂을 가장 巧妙하게 利用했다. 秩序는 오직 神學的인 形而上學的인 先史以來의 낡은 傳統에 선 世界像과 人生態度를 버리고, 그 뒤에 科學 위에 선 새 世界像을 세우고 그것에 알맞은 人生態度를 새 모럴로 파악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것은 벌써 刑罰이 아니었다. 希望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歷史의 中流에서 詩人의 發言이 한 커다란 진폭을 가지고 울리는 것을 다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詩人은 비로소 아무 奇蹟도 神들의 이름도 그 속에서 구경할 수 없는 20世紀의 神話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詩와 科學은 결코 서로 對立하고 否定하는 것이 아니고 調和할 수 있는 것임을 또 調和해야 할 것을 깨달아야 했다. 詩가 組織하고 통일할 것은 科學的 世界像에 알맞은 人生態度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科學的 態度와 근저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다.

 

                                                     5

 

우리는 다시 우리 詩壇을 살펴보자.

 新詩運動의 始初에 대해서는 이미 論及한 바 있지만 그 뒤에 한 중요한 시기는 1920年代의 後半期였다. 한 時期를 다만 幻想以外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一笑해버리는 것은 歷史에서 무엇을 배우려는 사람의 態度가 아니다. 우리는 한 時期의 動機와 成果를 냉정하게 分析해서 그 중에서 失手와 收穫을 잘 가려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焦燥와 獨斷에 차 있으면서도 이 時期는 우리 詩속에 科學的 要求가 처음으로 눈뜬 때이므로 우리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30年代의 前半期에 모색한 것은 바로 詩의 科學的 파악과 그것에 의한 詩의 實踐에 대한 努力이었다. 그 努力과 분투에 비해서는 혹은 얻은 것이 成果보다도 失敗가 더 많았을지 모른다. 여하간 1930年代의 後半期가 그 前半期의 失敗와 成功 위에서만 一步 前進을 꾀한 것은 事實이다.

 젊은 세대는 앞에서 제시한 歷史를 兩分하는 새 神話의 建設을 최대의 과제로 가졌었다. 그리고 가장 綿密한 ‘말’의 科學者이려 했다. 그들은 時代와 社會의 움직임에 대한 根氣있는 凝視者이려 했다. 인생에 대한 미쁜 實驗者이려 했다.

 筆者는 逆說이 아니라 참말로 이렇게 새로 詩를 하려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낡은 美學이나 詩學을 읽기 전에 우선 詩를 읽으라고-. 또 한 권의 美學이나 詩學을 읽느니 보다는 한 권의 ‘아인슈타인’이나 ‘에딩튼’을 읽는 것이 詩人에게 얼마나 有用한 敎養이 될는지 모른다고.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近代派 시인 李箱은 일찍이 「倦怠」에서 적절한 現代의 診斷書를 썼다. 그의 우울한 時代 病理學을 기술하기에 가장 알맞은 暗號를 그는 考案했었다. 다만 우리는 目標를 바로 본 이상 다음에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일찍이 20世紀의 神話를 쓰려고 한 「荒蕪地」의 詩人이 겨우 精神的 火田民의 神話를 써놓고는 그만 歐洲의 焦土 위에 무모하게도 中世的 神話를 再建하려고 한 전철은 똑 바로 보아 두었을 것이다.

(1937년 조선일보) 김기림 「시론」(1947년 11월 15일 백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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