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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鄕愛와 영원한 생명의 만남이 연작시 「고향산천」
시인은 자기의 全生涯를 시에 투여하면 그만인 것
심상운
나는 오늘 도시의 매연으로 더렵혀진 눈을 소금물로 씻고 시의 창문을 통해 고향산천에 환히 쏟아져 내리는 겨울 햇빛을 본다. 이때 나는 고향에 돌아온 내 정신의 싱싱함을 느낀다. 어두운 구석구석을 사랑의 따스함으로 어루만져주고, 산기슭 죽은 풀잎들의 차디찬 가슴에 훈훈한 생기를 넣어주는 겨울 햇빛. 나는 생명의 봄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시의 문을 활짝 열고 눈 덮인 들판으로 뛰어나가 봄의 햇빛을 껴안고 그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는다. 그리고 어둠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환한 빛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때 나의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내며.... 연작시 「고향산천」은 이러한 정신작업의 산물이었다. 나는 이 연작시를 통해 ‘고향의 하늘’ ‘산천의 햇빛’ ‘이웃의 아픔’ ‘죽은 풀잎의 말’ ‘분단의 문제’등과 만났으며 끝내 새봄의 소리를 들었다. 나는 시작을 통해 고향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바로 보고 느끼고 그것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삶의 봄을 향유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시인은 정신의 밭을 갈고 생명의 씨를 뿌리는 정신농부인 것이다. 정신은 생명의 원천이며 어둠을 이겨내는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훌륭한 시인의 작품에서는 항상 싱그러운 생명냄새가 난다. 이 생명냄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신신한 향기까지 뿜는다. 그런데 나의 시는 어떤가. 내 시의 밭에는 정신의 작은 풀씨 하나라도 잠자고 있는가. 나는 이런 물음에 가슴 깊이 저어함을 느낀다.
고향산천 . 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고향산천 . 18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밝음과 어둠의 문지방 사이에
걸쳐 있는 그의 발목>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81년 봄 시문학회 사화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는 이 시의 시상을 어느 해 여름 강원도 원통 골 산비탈에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싸리 꽃 속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소총을 들고 낮은 포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앞에 소박한 보랏빛 향기로 피어있는 싸리 꽃. 나는 무릎이 벗겨져 뻘겋게 번지는 혈흔의 아픔도 잊고 싸리 꽃 무더기 속으로 내 온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고향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영원한 생명과의 만남을 내 나름의 체험을 통해 노래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역사 속의 나와 자연본래의 나를 결합시켜 새로운 생명적 창조의 나로 그려 보았다. 스물 두 살의 나는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다. 그런 내가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소총(증오심,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고향산천에 환히 핀 싸리꽃(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껴안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싱싱한 자연인(본질적인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나는 드디어 분단의 역사를 극복한 내가 되는 것이다. 1연의 ‘이른 여름’ 3연의 ‘푸른 불길’은 계절적 배경이라는 단순한 의미망을 벗어나 냉랭한 현실과 함께 서로의 가슴을 겨누는 쇠붙이까지도 완전히 녹여 재생시키는 민족혼의 왕성한 표상으로 상징화된 말이다. 또 4연의 ‘청록색 풀잎’은 자연과 동화된 나이며 분단시대의 아픔을 극복한 나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속의 나는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이 땅의 사나이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겨레의 평화를 염원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 땅의 한 사나이의 올바른 정신적 모습을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해도 가능할 것 같다. 겨레니 고향이니 하는 좁은 사고의 공간을 벗어나 이 살벌의 시대에 생명의 존엄함을 지키려는 순수한 인간적 행위의 한 표현이라고. 여하튼 이 시는 증오심(소총)을 버리고 사랑(싸리꽃)을 껴안고 국토지상(땅바닥)에 누운 순수한 인간(스물 두 살의 나)은 뜨거운 자연의 용광로(여름, 푸른 불길) 속에서 드디어 새로운 생명(청록색 풀잎)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의 만남이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인간회복의 기쁨을 안게 된 것을 무엇보다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이 시의 표현은 서정적으로 하였다. 암시와 상징의 옷은 되도록 얇은 천의 옷으로 하였다. 시의 겉옷이 너무 단단하고 두꺼워서 그 속살을 만져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운한 일일까. 나는 속살이 살짝 내비치는 옷 속에 내 시의 비밀을 감추었을 뿐이다.
「고향산천 . 18-어느 소년병의 잠」은 어릴 적 기억의 재생이다. 6,25 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춘천에서 30리쯤 떨어진 시골 ‘곰실’이란 곳으로 피란을 갔다. 시내에서는 식량도 없고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후퇴하는 한패의 병사들을 보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은 패잔병으로 기진맥진한 몰골이 처참했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며 걸어와선 쓰러지던 그들의 모습. 그 중에는 총신을 질질 끄는 소년병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울고 있던 소년병의 모습이. 그들은 비인간적인 힘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나온 이 땅의 선량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화하며 그들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언젠가 깨어나야 할 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봄이 오면 그들은 깨어나리라. 그들은 잠을 자면서 비로소 산천의 햇빛과 만나고 맑은 새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언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의지를 그려 보았다. 그러나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은 나에게 퍽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시가 독자와의 만남에서 다시 창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달린 것이다. 그러기에 작품에 대한 작자의 변명은 (해명)은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변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蛇足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기의 전 생애를 시에 투여하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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