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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시론
2015년 03월 27일 22시 39분  조회:4189  추천:0  작성자: 죽림
[아방가르드/시론]

 

 

    디지털리즘의 시/ 질의응답의 현장

 

―본 내용은 2005년 6월  배재회관에서 있은 한국시문학아카데미의 강연내용임

 

  

 

시문학아카데미 금요강좌(매주넷째주 금요일)

일 시: 2005년 6.24(금) 오후 5시

장 소: 배재회관(중앙일보사 근처)

연 제: 「디지털시대의 나의 시쓰기(연사:오진현)

사 회: 이승복(홍익대 교수)

정 리: 이 솔(시인)

 

 

 

탈관념의 Showing

― '나의 시쓰기 과정'에 대한 몇 가지 질문/문덕수

 

 

 

오남구(오진현)은 그동안 탈관념, 접사와 염사, 디지털리즘 등의 화두를 던지면서, 자기 시의 논리화를 훨씬 넘어선 새로운 아방가르드 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 방면의 기수라는 느낌도 들고 그만큼 화제도 많이 되뿌렸다. 이러한 전위적 몸짓만으로도 귀한 것이지만, 슬로건을 외치고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면, 자기가 내세우는 이론을 밑받침할 수 있는 논리 구축도 불가결한 것이며, 자기에게로 되돌아 올 반론의 부메랑도 각오해야 한다. 뼈아픈 자기성찰의 필요성,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전제에서 오진현의 「접사와 염사의 시점(視點) 문제」를 면밀하게 읽었다.

 

(1) 오진현은 ‘디지털리즘’(digitalism)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 개념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오진현은 디지트(digit), 디지털(digital)의 어원을 설명하면서, 디지털은 2진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고,“디지털은 이런 가능성을 가진 것을 지칭한다.‘이즘’은 여기서 필자가 붙임”이라고 하여‘디지털리즘’이 자기의 조어임을 밝히고 있다.‘digital’에‘ism’이라는 말을 붙여 ‘digitalism’이라는 새 용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여기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기존 사전(Kenkyusha’s New English-Japanese Dictionary, 2002)에서는 digitalism을 “디지털리스 중독증”이라는 병리학의 용어라고 말하고 있다. ‘디지털리스’(digitalis)라는 것은 식물 이름이거나 그런 식물로 만든 일종의 강심제인 디지털리스 제제(製劑)를 의미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오진현이 쓰고 있는 디지털리즘은 digital+ism=digitalism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데,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을 하나의 개념 내지 관념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술어인지, 오진현 자신이 검증해야 할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영문학자나 철학자의 조언을 받는 것이 좋다.)

 

(2) ‘접사’와‘염사’는 모두 사물에 대한 탈관념 시점에서의 시쓰기의 방법으로 생각된다. 오진현이 그의 시론에 도입한 용어다. 그런데 우리가‘탈관념 운운’하지만, 이 개념은 조향(1917∼1984)의‘오브제론’김춘수(1922∼2004)의‘대상의 붕괴’(『의미와 무의미』), 문덕수의 ‘대상에서의 해방(「내면세계의 미학」)’ 등의 선행 이론에서 발전되었고, 그러한 선행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탈관념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론 등과도 관련된다.(불교의 유식론과도 관련될 것 같다.) 오진현은 이러한 여러 선행 이론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그 연속선상에서 자기 이론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3) 오진현은 ‘염사’(念寫)에 대하여 “내면세계의 잠재 영상을 촬영하는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일단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관념의 제로 포인트(탈관념 상태 ― 본질의 상태)인 물체를 촬영한다는 점에 주목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바로는“내면세계의 잠재영상”즉 있는 그대로의 내면세계의 현상이 현재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면세계의 잠재영상”은 생각 만큼 단순·소박한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의식(意識) 안팎의 시간과 공간의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융의 집단 무의식도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것을 오진현은 “잠재영상”이라고 포괄하여 ‘염사’로서 촬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로 가능할까. 또 불교의 선(禪)과도 관련시키고 있는데, 그 관련성에 대한 논리적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염사라는 촬영기술이 이런 무의식이나 집단 무의식의 촬영까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다.

 

(4) 20세기 모더니즘이 회화적 이미지를 강조하고‘말하기’(telling)보다는‘보여주기’(showing)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오진현의 디지털 시론에서는 말하기보다 보여주기 즉‘제시’(提示)를 강조하면서 자기 이론을 20세기 모더니즘과는  구별한다. 진일보라고 하겠다. 특히 자기 이론을 “디지털적 보여주기”라고 특정화한 것은 진전된 견해로 보인다.

 

(5) 오진현의 ‘염사, 접사’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논리화 하느냐에 따라 시론상의 논의가치도 결정될 것이다. 오진현은 염사와 접사의 시점(視點)을  탈관념 시론의 방법으로서 이를 중시하고 있다. 특히 단일시점과 다시점을 구별하고, 다시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다시점 설정의 정당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시점 설정의 ‘기준’은 아예 말하지 않고 있다.「도표 1」에서의 P1, P2, P3 등은 시점 표지에 지나지 않고, 피카소의 「도표 3」, 백남준의 「TV시계」의 예에서도 다시점(복합시점)의 보기일 뿐, 시점의 기준을 말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작품 「日出山行」이 다시점의 예로서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시점 발생의 가능성적 계기를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시점은 방위(동·서·남·북·상·하·좌·우 등), 차원(dimension: 공간적 넓이의 성질을 나타내는 1차원, 2차원, 3차원, n차원, 무한 차원 등), 주관과 객관, 인칭(1인칭, 2인칭, 3인칭 등), 관념(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기독교, 불교 기타) 등이 있겠지만, 자기가 주장하는 시점의 기준을 제시하여 분명히 밝혀야 한다.

오진현은 단시점보다는 다시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시점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는 수긍할 수 있으나, 자기 시론에서의 그 정당성이나 필연성을 보완하기 위한 강성논리(强性論理)의 개진이 요구된다.

 

(6) 오진현은 “인식의 대상인 사물을 A라고 하고, 시인의 변수(인식의 변수)를 x라고 하면…”이라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사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이 생략된 채 ‘A’라는 기호로 추상해버리는 것은 논술하는 방법으로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인의 변수(인식의 변수)”를 간단히 ‘x’라는 기호로 처리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대상을 대하는 시인의 변수 즉 “인식의 변수”도 x라는 기호로 처리하기 전에 타당한 논리와 객관적 설명이 요구된다. 시론에서는,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시인) 사이의 상호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탈관념의 시론이건 아니건 즉 어떠한 종류의 시론이건 반드시 확실하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론의 핵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심 카테고리를 뭉뚱그리고  요약하여 “A”나 “x”라는 기호로 추상하여 처리해버리는 것은 논리빈곤이라는 의심을 면할 수 없다. 특히 시론에서는 만부득이하거나 필연적 이유 없이 논리를 수학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덕수의 몇 가지 질문 등

―대답과 보충 / 오남구

 

 

(1) 디지털리즘에 관하여

 

물론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을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디지털시대가 전개되는 어떤 상태에 따라서‘주의’‘주장’‘설’ 등이 나올 것입니다. 우선 먼저 생각되는 것은,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특히 일종의 언어기능을 하는)에서 비롯되는 21세기 첨단과학의 영상시대가 빚어내는 디지털의 “인간확장”으로서의 긍정적인 면과 “인간축소(도구화로 전락)”로서의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큰 이슈들이 나올 것이라 봅니다. 이를테면 조심스럽게 제기된, 미래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신체적 접근의 휴머니즘” 등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미래사회를 예측하여 무모하지만 ‘디지털리즘’을 선언했고 그 선억적 의미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디지털의 탈관념과 선행이론에 대하여

 

「대상의 붕괴」와 「대상에서의 해방」은 시의 대상에 초점이 있습니다.‘오브제’ 역시 대상(소재)를 해방시켜 버림으로써 ‘해방’이란 한 단어에 모아지는데, 여기에서‘관념의 해방’이란 관점에서 보면 모두 탈관념에 속합니다. 자크 데리다 등 언어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선행 이론들은 ‘언어의 탈관념’으로서,‘언어예술’과 언표의 확장은 이루었다고 봅니다.

물론 본인이 내세운 ‘탈관념’은 선행 이론의‘언어의 탈관념’에 기대면서, 역설적으로 언어의 반성적 이해를 하게 됩니다. 즉“언어가 처음 순수 직관에 의한 사물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언어주의(또는 언어예술)의 무의미시의 지향은 곧 언어의 본적(사물)을 부정해 버리는 모순에 빠집니다.‘시는 본적지를 부정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관념’은 문덕수 시인의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는 새로운 명제에 동참하게 되며, 협의의 탈관념으로서,“사물에 대한 탈관념”으로 좁히고, 그 방법으로서 ‘염사’와 ‘접사’라는 사진 기법을 디지털 시대의 시쓰기 기법으로 성립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점의 문제를 포함하여 선행 이론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염사’와‘접사’가 탈관념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언어로써 묘사하거나 기술하게 되므로, 선행 이론에 기대면서 기존과는 달리,“대상의 해방”이 아니라 대상의 ‘보여주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물성을 보여주는 디지털 시쓰기의 다양한 방법이 발전됨에 따라 언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디지털과 만나게 될 것이며‘디지털적 감각’의 또는‘디지털 방식’의 시적 수사학이 발달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3) 염사에 대하여

 

염사를 설명하여,‘선적현상(禪的現象)’이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나 이와 비슷한 자세에서 내면세계를‘보는, 또는‘떠오르는,‘느끼는’ 의미 등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염사와 접사는 ‘직관’이라는 같은 맥락에 있으며, 보거나 느끼는 방법으로서, 골똘히 생각하면 더욱 안 됩니다. 이때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연상에 지나지 않으며, 마치 그것은‘사고의 언어’와 같고, 무념한 상태에서 떠오르는 ‘잠재영상’은 ‘자연언어’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란, 바로 ‘잠재영상’그 자체를 지시하며 다양한 상태로 있는 내면세계의 영상이나 그 느낌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잠재영상을 떠올리는 방법은, 선을 해보면 알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긴장하지 않은 상태로, 눈을 감고 집중하면 쉽게 잘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동기술과 비교해 보면, 언어를 하나 백지 위에 써 놓고나면 자동적으로 그 다음이 써내려지는 자동기술을 체험한 적이 있는데, 이와는 달리 염사는‘회화적’이며, ‘느낌’이 움직이고, TV에서 방영되는 꽃을 보기만 해도 코앞에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작용을 input/output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4)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과 탈관념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은, 차연의 ‘차이’와‘연기’로써 설명됩니다.‘차이’는 소쉬르의 말로,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고, 기의 즉 언어의 의미는‘차이’에서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차이’에 의해서 경계도 생기고 이름도 생기고, 이런 의미는 곧 관념으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이런 의미가 유동적이고, 불확실하고, 연기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미끄러짐으로써 해체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경계도 무너지고, 이름도 무너지고 주객의 구분도 없어지게 됨으로써 탈관념이 됩니다. 이것은 언어철학의 형식논리가 이른 탈관념일 것입니다.

저는 이와 구분하여‘직관시의 탈관념’이란 말로 거리 두기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형식논리 없이 사물의 직관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탈관념을 말함으로서,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선적’인 탈관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과는‘탈관념’에 똑같이 이른다 해도 방법론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면밀히 동질성과 차이점을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유 / 질의응답]

 

(1) 최근 포스트모던의 시와, 오진현 시인의 예문의 시를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른 ‘언어의 끼’랄까 맛을 느끼기는 한데, 아직 저로서는 특별히 잘 구분이 안 갑니다. 왜 그런지? 포스트모던과 간단히 비교해주십시오

 

최근 우리 문단의 포스트모던의 시들이 보여주는 경향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패러디’이고 그 하나는 ‘매직’이고 그 하나는‘미니멀’로 압축되고 있습니다.‘매직’에 대해서는 이미 김춘수의 시에서 보았듯 기교를 넘어선 ‘트릭’으로서, 시가 ‘트릭’까지 가는‘언어 유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역시 ‘패러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언어주의가 낳은 것으로, ‘창의성’이라든가 ‘독창성’이 문제 되는 일종의 ‘언어게임’으로 봅니다.

마지막 세번째,‘미니멀’은 언어의 다의적 의미를 절제하고 사물을 지시하며, 회화적 또는 구조적 표현을 하므로, 시의 ‘말하기’가 아닌‘보여주기’는‘이미지’ 성향의 시가 되겠습니다. 이 미니멀은 현대시의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언어중심주의’이므로,‘사물성’으로 이동한 인식논리의 디지털과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디지털은 감각적으로 명징하고 정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와 비교해 보면, 아날로그의 시계바늘을 보고 감각적으로 정확히 읽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은 숫자로 표현되므로, 정확히 1초 2초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디지털 감각이라 하는데, 그 표현이 톡 톡 튀고‘생생히 살아 있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선적이든 아니든 일단 오진현 시인이‘탈관념’을 해버리면 자크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주·객의 경계도 무너지고 해체된다고 보는데, 그렇다면‘누가 쓰고 누가 쓰여 지는가’의 중요한 주·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쓰고’‘쓰여지는’사이에 놓인‘의미’는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승훈의 『탈근대 주체이론 과정으로서의 나』란 책의 인용문에 나오는 윤효녕 교수의 말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체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이 “주체의 절대 부정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데리다의 주체 개념을 대승불교적 시각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고 하며, “나뉘어지고 연기되며 구성되는 주체”라고 보고 있는데, 이승훈은 임제의 말을 다시 이용하여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어디가든지 거기서 주인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대로 진실된 곳, 극락, 부처님 자리이다” 즉, “원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장소가 있고, 장소에 따라 이동하는 과정이 있고, 이 장소가 바로 주체, 주인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든 거기서 주체가 될 때 그곳이 바로 진리라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렇듯 데리다의 주체 개념은 방황, 표류가 아니라 이런 표류가 바로 자유와 통하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탈관념은 역시 이러한 대승적 개념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3) 실험시를 쓰며,‘아방가르드’를 한 지가 30여 년이라고 하는데, 시작한 그 동기와 그에 대한 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언어는 한계성(관념)이 있습니다.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첫말로써 말로는 도(道)를 말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성을 전제(前提)하고 있습니다. 시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언어의 숙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극복하는 염화시중(拈華示衆)1)의 묘법 같은, 언어 이전의 사물성(事物性)은 하나의 희망입니다. 사물을 보여줌으로써 서로 소통하는 이런 탈관념의 화법(‘x화법’ 또는 ‘거시기화법’)이 있다면 거대한 언어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처음 이러한 단순한 생각이 끔찍한 ‘실험 30여 년 외로운 길’을 가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1975년 등단하자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시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손에 꽃을 들고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누가 “꽃!”이라고 대답하면 꽃을 쓰레기 통에 던지면서, “쓰레기야!”라고 말했습니다. (『꽃의 문답법』 1999, 신세림, 출간)

이 해프닝은 ‘시=도(道)’라는 등식을 성립시켜놓고 벌인 의도적인 것이었으며, 이어서 “신은 고정관념의 대표 선수이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이 말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지 체험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당(未堂)의 영향이 컷던 것 같습니다.

등단 이후에 시가 참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의 시 모델이 될 작품을 골랐는데(선배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서정주의 「동천」, 김춘수의 「꽃」, 문덕수의 「꽃과 언어」, 이상의 「오감도, 시제1호」였습니다. 이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늘 어떤 전율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듯 하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여 커다란 산처럼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 시들은 내가 잘 이해하는지 모르지만, 30여 년 동안 실험해 온 과정이, 결국 모델로 골랐던 네 종류의 작품을 실험해 온 것처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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