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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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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인 - 구상
2015년 04월 05일 16시 04분  조회:4637  추천:0  작성자: 죽림

 

 

 

          가을 병실(病室)

 

                                          구상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 날아간다.
내 앓은 가슴 위에다
긴 그림자를 지으며
북으로 날아간다.
한 마리 한 마리 꼬리를 물 듯이
一直線을 그으며 날아간다.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내 가슴 空洞에 내려 앉는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마지막 한 마리는
내가 붙잡았다.

              팔딱
              팔딱
              팔딱
내 가슴이 뛴다.

              끼럭
              끼럭
              끼럭
내 가슴이 운다.

끼럭
끼럭
끼럭
하늘이 운다.

               끼럭
끼럭
나는 놓아 보낸다.

혼자 떨어져 날으는 뒷모습이
나 같다.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 날아간다.
나의 가슴에
平行線을 그으며 날아간다.

 

 
 

 

초토(焦土)의 시·8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기도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거듭남                                                   


저 성현들이 쳐드신 바 
어린이 마음을 
지각(知覺) 이전의 상태로
너희는 오해하지들 마라!


그런 미숙(未熟)의 유치란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독선과 편협을 일삼게 되느니,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린이 마음이란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자기가 자신에게 이김으로써
이른바 '거듭남'에서 오는 
순진이요, 단순이요, 
소박한 것이다.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날개                                                       


내가 걸음마를 떼면서
최초에 느낀 것은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제 칠순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느끼는 것도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손길을 향하여 
기우뚱대며 발걸음을 옮기던 때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매달려
어찌 어찌 살아가는 이제나


내가 바라고 그리는 것은 
'제트'기도 아니요, 
우주선도 아니요,


마치 털벌레가 나비가 되듯
바로 내가 날개를 달고
온 누리의 성좌(星座)를 꽃동산 삼아 
첫사랑 어울려 훨훨 날으는 
그 황홀이다.

 

 

 

 

네 마음에다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시                                                           


우리가 평소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이 아무리 말을 치장해도
그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느니


하물며 시의 표상(表象)이 아무리 현란한들 
그 실재(實在)가 없고서야 어찌 감동을 주랴?


흔히 말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아나
실상 생각과 느낌은 말로써 하느니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렷다.


그리고 이웃집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도
누구나 그 주인보다 더 맛볼 수 있듯이 
또한 길섶에 자란 잡초의 짓밟힘에도 
가여워 눈물짓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시는 우주적 감각*과 그 연민(憐憫)에서
태어나고 빚어지고 써지는 것이니 
시를 소유나 이해(利害)의 굴레 안에서 
찾거나 얻거나 쓰려고 들지 말라!


오오, 말씀의 신령함이여!


                           * 하이데거의 "언어와 사고"에서의 말. 
                           * 폴 발레리의 시에 대한 정의.

 


 

 

시심                                                      


내가 달마다 이 연작에다가 
허전스런 이야기를 고르다시피 하여 
시라고 써내니까


젊은 시인 하나가 하도 이상했던지
"그러면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겠네요"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다.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에는
진·선·미가 깃들어 있다.


죄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서
마치 어린애처럼 
맞보고 누리는 것이 
시인이다.


                       * 성서의 로마서 5장 20절

 

 

 

 

어른 세상                                               


네 꼬라지에 어줍잖게 
그리 생각에 잠겨 있느냐고 
비웃지 말라.


내가 기가 차고 어안이벙벙해서
말문마저 막히는 것은


글쎄, 저 글쎄 말이다.
이른바 어른들이 벌리고 있는
이 세상살이라는 게, 그 모조리
거짓에 차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정의를 외치며 불의를 행하고
저들은 사랑을 입담으며 서로 미워하고
저들은 평화를 내걸고 싸우며 죽인다.


내가 주제넘어 몹시 저어되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빌려 한마디 하자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이 거짓세상의 그 덫과 수렁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홀로와 더불어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白 蓮                                                     


내 가슴 무너진 터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솟아난 백련 한 떨기


사막인 듯 메마른 나의 마음에다 
어쩌자고 꽃망울 맺어 놓고야


이제 더 피울래야
피울 길 없는 백련 한 송이


왼 밤 내 꼬박 새어 지켜도
너를 가리울 담장은 없고


선머슴들이 너를 꺾어 간다손 
나는 냉가슴 앓는 벙어리 될 뿐


오가는 길손들이 너를 탐내
송두리째 떠간다 한 들


막을래야 막을 길 없는
내 마음의 망울진 백련 한 송이


차라리 솟지야 않았던 들 
세상없는 꽃에도 무심한 것을

너를 가깝게 멀리 바랠 때 마다 
퉁퉁 부어오르는 영혼의 눈시울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혼자 논다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ㅡ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길래 
ㅡ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ㅡ 몰라! 
란다. 그래 나는 
ㅡ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ㅡ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ㅡ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ㅡ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구상 具常 (1919 - 2004)                                  

 

본명 : 구상준(具常浚)
세례명 : 요한
출생 :  1919년 9월 16일 
학력 :  일본 니혼대학교 
약력 :  1942년 북선매일신문 기자
1952년 효성여자대학교 부교수
1960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85년 문예진흥원 이사
1997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2004년 5월 11일 폐질환으로 별세 
 
시집 『구상시집』(청구출판사, 1951), 『초토의 시』(청구출판사, 1956), 『까마귀』(흥성사, 1981),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큰손, 1982), 『드레퓌스의 벤취에서』(고려원, 1984),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현대문학사, 1984), 『구상연작시집』(시문학사, 1985), 『구상시전집』(서문당, 1986), 수필집 『침언부어』(민중서관, 1961) 등. 


 

 

[시인 구상 이야기]

 

시인 구상(구상)씨는 남북 양체제에서 필화를 경험한 유일한 문인이다. 46년 구씨는 고향인 원산에서 사화집 "응향"에 시를 발표했다가 부르조아적, 퇴폐주의적, 반역사적, 반인민적인 반동시인으로 몰린다. 예컨대, 시작품「길」의 「안개를 생식하는 짐승이 된다」는 구절에 대해서 좌익 평론가들은 「사람이 밥 없이 안개를 마시고 산다는 게 얼마나 비과학적이며 관념적이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냐」며 유물사관을 잣대로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 체제를 못 견뎌 월남한 구씨는 65년 8월 희곡 "수치"를 드라마센터의 무대에 올리려다 당국으로부터 공연보류조치를 당했다. 등장인물 중 빨치산 군관의 대사 "우리의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께서" 등이 문제가 되어서다. 북한에서 상투어로 쓰이고 있는 말을 작품에 사실성을 불어넣고 또 그러한 공산당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것인데도 탄압을 받은 것이다.

 

시인 구상(구상)의 진짜 고향은 함경도 원산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이화동이다. 시인의 고향을 원산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원산의 소농(小農)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東京 유학시절에 만난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깊다.

 

구상 시인의 집은 젊은 시절 그가 말하고 다닌 것과 달리 대대로 班家(반가)였다. 할아버지가 울산부사였고, 큰아버지들은 창령 현감, 현풍 군수를 지냈고 아버지도 궁내부 주사로 있다가 한일합방 후에는 경찰학교 교관으로 한문을 가르친 집안이었다. 아산 李씨 집안인 구상 시인의 외가는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으로 구상 시인의 아버지도 결혼과 함께 천주교회에 다니게 된다.

 

원산과 구상 시인네 집과의 인연은 시인이 네 살 되던 해에 맺어진다. 독일계 신부들이 원산에 교구를 개설하면서 교육사업을 구시인의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원산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마친 「서울집 도련님」 구상은 형처럼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수도원)에 입학한다. 구상 시인은 중도에 신학교 과정을 포기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유는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중풍은 하나의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신학교를 그만둔 후 그는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하지만 금방 퇴학을 당한다. 문학을 한다며 소위 不逞鮮人(불령선인: 불평불만을 일삼는 조선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主義者로 불렀지. 당시 主義者는 저항적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 버렸다」는 말이었지. 사실 내가 어려서부터 레지스탕스 기질이 있었어』

 

결국 시인은 고향을 떠나 노동판을 전전하고 야학당에서 공부도 가르치다가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일본으로 밀항한 시인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연필공장 노무자 등 일급 노무자로 전전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일본 대학 종교과에 시험을 친다. 東京 유학생활 중 저항적 기질의 구상 시인은 사회주의에 경도되게 된다. 평등을 지고지순의 가치 중 하나로 삼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 성분도 小農 출신이라고 숨기게 되는 것이다.

 

東京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형님의 흥남교회 부임으로 집에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면서 시인은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귀국 후 시인은 글만 읽으며 詩 작업에 매달렸다. 그런 그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서울집 도련님이 主義를 하다가 정신 이상에 걸렸다』며 폐인 대접을 했다. 게다가 마침 시인은 폐병까지 결렸다. 전쟁 말기의 일제는 다급해지자 폐병에 걸린 시인마저 징집을 하려고 했다. 징집을 피해서 선택한 길이 시인이 지나온 궤적에서 접어 버리고 싶어하는 親日(친일) 한국인이 함경도 원산지역에서 발행하던 「북선매일」 기자였다.

 

 그가 자전적 詩에서 쓴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목숨을 부지하려는 일념과 펜을 잡는다는 매혹에 식민지 어용(御用)신문의 기자가 되어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날마다 성전송(聖戰頌)과 공출독려문(供出督勵文)을 써 댔다』는 북선매일의 기자를 한 것이다. 저항적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피끓는 청년 구상이 그 일을 오래 할 리 만무했다. 그는 이내 기자직을 그만두고 교회 학원을 맡았다가 곧 광복을 맞는다. 광복된 조국은 「主義者 구상」을 한순간에 선각자이자 독립투사로 바꾸어 놓는다. 마을에서 인민투표를 했는데 그는 최고 득표자가 되었다. 여러 가지 대접도 받았다.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도 과거의 「주의자」 라는 꼬리표가 준 선물이었다. 이듬해 필화 사건에 연루된 구상 시인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유를 찾아 월남을 결행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구상은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만들고, 종군 문인단인 '창공구락부'에 참여한다.

 

『종군 문인단(창공구락부)을 창설하자는 제의를 받았죠. 그래서 아동 문학의 대가인 마해송 선생(당시 승리일보 고문)을 주축으로 사학자였던 이선근 선생(당시 대령)과 전투기 조종사였던 이계환 대위, 국방부 출판국장을 하던 지훈 조동탁 선생 등이 모여 공군의 모든 홍보 활동을 선도하고, 특별 정훈 교육은 물론 후방에서의 대민 사기 진작을 위하여 모였죠.』

 

당시 활동하시던 중 재미있는 일화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는 질문에 구상은 답했다.

『쑥스러운 이야기라서 잘 하지는 않는 것인데…. 사관학교로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어요. 당시 민기식 장군과 서정철 부사단장이 정훈 교육을 나온 나를 굳이 대접하겠다고 인제에 있는 '명월관'이라는 술집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말이 명월관이지 판자집이나 다름없는 선술집이었죠. 여하튼 무척이나 폭음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어요. 차가 논으로 달려들어 갔거든요. 어쨌든 사고를 수습하고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으니까, 자초지종을 모르는 지인들이 나를 위로하며 한다는 말들이 모두 '이렇게 고생하시면서 정훈 교육을 하고 있으세요?'였어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해요.』

 

시인은 『나는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말대로 일제시대 한때 「主義者」가 됐던 것도 , 작가로서 전쟁의 한가운데에 섰던 것도 그의 역사의식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전쟁 후 그는 反독재 투쟁에 앞장선다.

 

『나는 자유를 찾아서 남쪽으로 왔고 그 다음에는 자유를 위해서 민간인으로서 전쟁의 최일선에 섰던 사람이야. 그런데 전쟁 후에 이승만 정권이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정치를 하니까 그래서 투쟁에 앞장섰던 거지』 1952년, 전세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구상 시인은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1953년에는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낸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난한 이 평론집은 곧바로 판매금지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활동을 벌인 시인을 기다린 것은 감옥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利敵兵器(이적병기)를 북한에 밀송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상 시인을 잡아넣는다. 이 사건은 구상 시인의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서 美製(미제) 진공관 2개를 東京대학에서 연체생물 연구를 하고 있는 사위에게 사보낸 것을 구실삼아 반공법 위반죄로 시인의 친구와 시인을 잡아넣은 사건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속된 구상 시인에게 검찰은 15년 형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구상 시인은 최후 진술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有期刑囚(유기형수)가 되느니보다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 고 말했다. 다행히 재판관이 무죄를 선언함으로써 시인의 감옥생활은 8개월여의 기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자유당 정권 말기 민권투쟁을 할 때 나는 민권투쟁위원회의 부장이었고, 김대중, 김영삼 씨는 간사고 그랬어요. 나는 엄상섭이니 전진한이니 하는 분들과 시공관에서 강연도 하고 그러다가 잡혀 감옥에 갔지요. 감옥에 가서 8개월 지내다가 4·19 직전에 나왔어요. 감옥에서 줄곧 현실에 나서느냐, 문학의 길에만 정진할 것인가를 고민했었는데, 마침내는 문학의 길만을 가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내가 소위 박정희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이야기만이 널리 알려져 있지요.(략) 좀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감옥에서 이미 결심한 바가 있어 민주당 때에도 현실 참여를 하지 않았고 박정희에게도 나를 남산골 샌님으로 그대로 놔두라고 했지요. 그런데도 자꾸 권하길래 그때 내가 서강대에 나가면서 카톨릭에서 경영하고 있던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있었는데 그 신문사에 이야기하여 그해 가을에 동경의 지국장으로 나가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피신이었지요. 이 곳에 있으면서 참여는 안하면서 친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잘 했느니 못 했느니 시비를 할 수도 없고 해서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이지요. 그러자 박정희 장군은 김팔봉 선생을 비롯한 주변 분들을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나의 동경행을 만류하기도 했지요. 나는 현실에서 완전히 이탈해서 일본에 가서 60년대를 보내면서 폐를 두 번이나 수술했지요. 70년대에는 하와이 대학에 교수로 취직을 해서 5년 넘게 있었지요. 상주 작가로 동서문화센터에 가서도 있었고, 60-70년대를 그렇게 외국에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그 사람이 대통령을 했지만 나와는 아무런 이해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있었지요.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세상이 다 죽일 놈으로 모는 악당일지라도 친구는 친구니까 5년 동안 내가 제례미사를 드렸어요.』

 

시인 구상은 1959년의 감옥 생활 이후 그의 결심대로 일체의 사회적 직책을 맡지 않는다.

일체의 사회활동을 접은 시인이 그 후 걸은 길은 후학 양성을 위한 교수의 길이었다.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직자의 길을 걸었다.

 

朴대통령과 구상 시인의 인연 한가운데는 李龍文(이용문) 장군이 있다. 구상 시인은 李장군의 소개로 朴대통령을 만났다. 구상 시인이 李장군을 알게 된 것은 1949년에 육군정보국에 들어가면서다. 당시 정보국장이 李장군이었고 두 사람은 이내 친해져 밤낮 술자리를 하는 사이가 됐던 것이다.

 

『의기투합했지. 말이 통했어. 李장군이 소개해 준 朴대통령도 마찬가지였고』구상 시인의 말대로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말이 통하는 사이로 서로에 대한 정 또한 깊었던 것 같다. 세 사람 중 李장군이 제일 일찍 세상을 떠나는데 그날이 1953년 6월24일이다. 비행기 사고로 李장군이 먼저 그들 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날은 대구에서 저녁에 셋이 함께 만나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날이 기도 했다. 5·16 후 朴대통령이 정치외적으로 처음 한 일은 수유리에 있는 李장군의 동상 건립이었다고 한다. 구상 시인이 그 일에 간여했음은 물론이다. 朴대통령 逝去 (서거) 후에 세 사람 중 홀로 남은 구상 시인은 朴 前 대통령을 위해 5년 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朴대통령과 시인의 사이가 어느 정도로 각별한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호칭이다.

- 朴대통령을 부를 때 「박첨지」라고 불렀다면서요.

『官에 나가 있으니까 그렇게 불렀지(웃음)』

 ―대통령 되기 전부터 그렇게 불렀습니까.

『아냐, 대통령 되기 전에는 서로 존대를 했지. 대통령 되고 나서 그렇게 불렀어』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였는데도요.

『나에겐 만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대통령 각하라고 부른 적은 없습니까.

『없어, 그렇게 부른 적 없어. 朴대통령도 그걸 원하지 않았지』

―그렇게 격식이 없을 정도로 가까이서 지켜본 인간 朴正熙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어 . 군인 때 만났지만 아주 해박했어. 플라톤의 국가론도 읽고, 월남 패망사도 읽고 한 마디로 박학다식에 견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어』

―朴대통령 이후로는 정계 입문을 권유받은 적이 없습니까.

『있지. 5共 출범할 때 소위 말하는 3許씨 가 찾아왔었어.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이었어. 거절했지. 그 후에도 총재 고문이라든가,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있었지』

 

시인 구상과 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기인들과의 교류다.

절친한 친구인 천재 화가 李仲燮(이중섭), 시인인 空超(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이자 「어린이 헌장」의 기초자인 馬海松(마해송) 선생을 비롯 세상을 떠난 사람에서부터 현존하는 걸레 스님 重光(중광)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마치 기인(奇人)들과의 교류가 취미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들과 함께 하기를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잖아. 非규격품인 奇人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재미도 주지만 거리에 청량감을 주는 살수차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이중섭과의 우정은 남달랐다. 구상의 서재에는 특이한 그림이 걸려 있다. 옛날 이중섭 화백이 담뱃갑의 은박지에 연필로 그린, 그 유명한 천도 복숭아 그림이다.  "왜 어떤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지 않아. 그걸 먹고 우리 상(常)이 어서 나으라는 말씀이지."  구상 선생님이 폐 절단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문병을 가긴 갔지만 돈이 없어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중섭 화백이, 즉석에서 담뱃갑 속지인 은박지에다 구상이 평소 좋아하던 천도 복숭아를 그려준 것이다.

 

구상이 중섭과 공초 선생에 대해서  밝힌 글을 보자.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살았던 화가 이중섭은 절친하게 지내던 고향친우로, 일찍 세상을 떠나보내고 나니 그를 기억할 때마다 늘 가슴이 아프지요. 생전에 그림밖에 몰랐고 생존의 무기란 오직 그림뿐이었던 천재적인 화가였지요. 그러나 중섭은 뭇천재들이 그랬듯이 너무 비참하게 살다가 가엾게도 너무나 빨리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우리 신시 개척에 선구자이신 공초 선생에게 대해서는 내게 이런 일화가 있지요. 내가 영남일보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 하루는 그분이 찾아와 하시는 말씀이 “이 사회를 건질 묘방으로 날마다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묵상의 시간을 국가가 정해서 그 캠페인을 벌이자”는 겁니다. 선생 생전에 기행 일화는 많지만 그때는 그저 공초다운 말씀이라 생각하고 비현실적인 제안이다 싶어 신문에 사설화하지 못했는데 물질만능의 세태에 이르러 보니 선생의 그 치세훈이 절실해집니다.』

 

젊은 작가들에게 구 시인은 당부한다.

『말과 생각이나 느낌이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문학이라는 것을 말의 치레로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서로 대화를 할 때에도 말을 번드레하게 잘 한다고 해도 그 말 속에 등가량의 진실이 없으면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지요. 소위 말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는 그 사람의 인식추구의 치열성과 진실성에 따르는 거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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