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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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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천시인과 김철시인
2016년 11월 01일 01시 10분  조회:4268  추천:0  작성자: 죽림

 

 나는 학창시절 조기천의 시를 몹시 사랑했었다. 전투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의 정서, 가슴을 활짝 열고 창공에 대고 울부짖는 듯한 강한 시어와 탱탱한 시행, 그의 시를 읊으면서 나의 미래를 꿈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유명한 시인과 만나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 뜻밖의 일도 가끔 있는 법, 나는 그 상봉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투가 끝난 다음 우리는 계속하여 신작로를 따라 함흥 쪽으로 강행군을 하였다. 이날 밤 새벽, 날이 푸르무레해지자 우리선발부대는 함흥에서 멀지 않은 한 나지막한 민둥산 밑의 초가집에서 잠시 묵기로 하였다. 이 산에는 양산처럼 푹 퍼진 소나무가 우거져서 적의 공습을 피하기엔 안성맞춤 했다. 당시 낮이면 공습이 심해서 대부대가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의 공군부대가 아직 출동 못하는 형편에서 하늘은 몽땅 미군 세상이었다. 그때 제일 무서운 것이 B29 폭격기와 《쌕쌔기》라는 전투기였다. B29는 한번 폭격을 한다 하면 밀대를 놓아서 사람들은 이를 《담요 펴기》 폭격이라 했고 저공을 쌕쌕거리며 날아다니는 전투기는 길가의 소 한 마리만 보이도 기관포를 마구 쏘아대는 판이다. 마을이란 마을은 죄다 폭격에 날아나고 폐허가 되었는데 여기 소나무숲 속의 초가집 한 채 만이 요행 살아남아있었다. 헌데 주인은 피란가고 집안은 팅 비어 있었다.

   우리 군부가 이집에 들었다. 전체 관병은 소나무 밑에 자리를 마련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전사들은 모두 제가끔 소나무 밑이나 바위 밑의 눈을 쓸고 그 우에다 소나무가지들을 꺾어다 펴고는 10여명이 한패씩 두 줄로 나뉘어 서로의 발을 상대방의 바짓가랑이에 넣고 누운 다음 그 우에 외투를 덮고 털모자를 꽁꽁 쓰고는 누웠다. 공습 때문에 모닥불은 피우지 못하고 온밤을 떨고만 있었다.

   병사들이 단잠에 노그라졌을 때 눈은 계속 내려 잠자는 그들 위에 흰 이불을 덮어주었다. 온몸이 눈에 덮였는데 유독 코와 입에서만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때 군단사령부에서는 군단장과 정치위원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군단장은 나이 50이 다되었는데도 키가 작고 똘랑똘랑해서 《꼬마군장》이라고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는 성질이 급해서 《콩밭에서 두부를 찾고》 욕부터 앞세우는 사람이지만 정치위원은 그와는 상반대로 성질이 느긋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한번 끔쩍 안하는 천하태평이었다. 그들은 군용지도를 펼쳐놓고 내일의 행군계획을 상의하였다. 우리 군단장은 한평생을 군대에서 지내다보니 지도 한 장만 펼쳐들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그만큼 지도에는 귀신이었다.

   이때 밖에서 왁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좀 쉬어가자구.》

 한패의 인민군 장교들이 들어왔다.

 《어 추워, 미안합니다. 좀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 쪽의 동의도 없이 척척 들어와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끼워 앉았다.   바지에는 두 줄의 굵은 붉은 줄이 있는걸 보아 사단장이나 군단장쯤 되어보였다.

  《지원군아저씨들이구만, 여기 통역이 없나요?》

 당시 나는 군단 사령부 통역이었다. 내가 통역이라고 하니 그들은 반색했다.

  《마침 잘 됐군, 이분들에게 말씀해 주어요. 우리는 저 낙동강일선에서 후퇴해오는 인민군인데 우리를  지원해주어 고맙다고요.》

 나는  이 뜻을 통역하였다. 나는 지금도 한어가 그닥지 않는데 그때는 더구나 형편없었다.

 《전사들에게 휴식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군단장동지!》

 부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문을 떼고 밖에서 깎듯이 거수경계를 하면서 보고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도 군단사령부 소속 인원인줄 알았다.

 《좋소, 가서 소주 좀 가져와.》

 《옛! 알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 부관이 군용물통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자, 우리 한잔 합시다.》

 군단장은 몹시 시원시원한 분 같았다. 물통 덮개로 몇 순배를 돌렸다. 춥고 빈속에 소주가 들어가니 찡해났다. 물론 안주라곤 손가락 빠는 수밖에 없었다. 몇 순배 돌자 모두들 거나해졌다.

  《시인선생, 시나 한수 읊어보지.》

 군단장은 기분이 좋아서 한 분에게 이렇게 청을 들었다.

  (시인?) 나는 귀가 벌쭉해졌다. 그때 물론 시인은 아니었지만 나는 시를 무척 사랑했고 장차 시인이 되어보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읊으라면 읊지요.》

 키가 좀 후리후리하고 너부죽한 얼굴에 흰 테 안경을 쓴 사람이 쾌히 응낙하였다.

  《저 분이 누구신데요?》 나는 곁에 앉은 군관에게 물었다.

  《유명한 조기천선생이지요.》

  《예 조기천?》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가장 흠모하던 조기천선생이 바로 저 분이란 말인가. 바로 그 전날 일이였다. 우리 부대가 반격을 개시했을 때 도망치던 미군이 한 마을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는데 우리 병사들이 달려들어 불을 끄는데 나는 어느 한 집의 무너진 담벽 밑에서 시집 한권을 발견했다. 보니 그것이 바로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이었다. 나는 보배라도 얻은 듯이 그 책을 주워 들고는 불에 달린 한쪽 모서리를 문질러 껐다. 그리고는 행군하면서 단숨에 내리읽었다. 밤에 잘 때도 그 책을 읽고파 공습이 무서워서 외투로 손전지불을 가리고 한 줄 한 줄 읽었다. 나는 조기천을 마음속으로 몹시 숭배하였다. 헌데 그런 성인 같은 사람이 문뜩 내 눈 앞에 나타날 줄이야!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칫하면 소리를 칠 번했다.

   조기천선생은 당시 종군기자로 전선에 나가 있다가 부대와 함께 후퇴하는 중이였다. 그도 꽤나 술을 좋아하는 편이였다.

   《자, 문을 여시오.》 조기천선생은 눈을 지긋이 감고 명상에 잠기였다.

   밖에서는 함박눈이 소리 없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린다. 고요히 내린다…》

그는 즉흥시를 조용히 읊기 시작하였다. 곁에 앉았던 한 젊은 군관이 급히 종이를 꺼내더니 그의 즉흥시를 받아 적는다. 그의 정서는 내리는 함박눈처럼 조용하기도 하고 가열한 전투의 순간처럼 격정이 터지기도 하였다. 대하의 흐름처럼 읊어 내리는 즉흥시, 과연 천재는 틀림이 없었다. 군소리하나 없이, 막히는데 하나 없이 술술 쏟아지는 시구. 온 방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시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격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후에 신문에 실려서 안 일이지만 그때 읊은 즉흥시가 바로 유명한 시 《조선은 싸운다》였다.

   나는 그날의 감격을 조금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렇게도  흠모하던 시인, 더구나 명인상봉이란 각별한 뜻을 갖는 것이 아닐 가. 그때로부터 나는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길은 아주 좋은 창작시간이었다. 걸으면서 구상하고 쉴 짬에 적어놓고 나는 거의 시에 미쳐버렸다. 걸으면서도 뭘 자꾸 중얼거리니까 친구들은 혹 내가 정신이라도 잘못 되었나 해서 의아쩍게 바라보군 하였다. 그 어려운 싸움의 나날에도 남은, 특히는 노병들은 되도록 가벼운 행장으로 행군을 했지만 나의 배낭만은 언제나 불룩해 있었다. 그래서 노병들은 나를 농민의 보수사상이라고 골려주었다. 그 후 나는 그걸 시집으로 묶었다. 물론 출판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누런 포장지 같은 종이를 사다가 정히 책을 매서 거기에 활자처럼 정자로 적어놓고 첫 폐지에다는  내 사진을 찍어 붙여놓고 《저자상》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칼라사진이 없어 흑백에다 물감을 칠해 붙인 것이 지금도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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