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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
2016년 10월 30일 22시 23분  조회:3742  추천:0  작성자: 죽림

 

김기림론

                              

 모더니즘의 한국적 전개

/< 박 철희 > = 문학평론가/서강대교수 


한국 시사에 있어서 1930년대초 모더니즘 운동은 한국시의 현대적 전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1920년대 전반기 시의 감상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역이자, 시적 구조(명징한 지성)에 대한 새로운 욕구다. 이러한 반역과 욕구가 20년대 전반기 감상시만이 아니라 후반기 편 내용주의의 시까지 포함한다고 하면, 그에 대한 반명제로 모더니즘의 건설과, 그 옹호를 그 무엇보다도 강조한 김 기림의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이 당시 시의 순수운동을 표방한 시문학파운동과 함께 한국 시사에 차지하는 의의는 자못 큰 것이다. 김 기림에 의해 강조된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은 이렇듯 낭만주의의 병적 감상성과 경향파의 정치적 관념성의 부정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시의 건강성, 명징성, 조소성을 시의 <현대성>을 위한 시적 징표로 내세웠다. 이런뜻에서 김 기림이야말로 한국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이론가였던 셈이다. 그만큼 그의 시론은 질 양 양면에 있어서 아주 괄목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김 기림 또한 이론가로서의 활동 못지 않게 그의 시작은 한결 더 정력적이고 생산적이었다.

{태양의 풍속} {기상도} {바다와나비} {새노래} 등의 시집이 보여주듯이 1930년 이후 6725사변 때 그가 납북되기 전까지 20여 년을 지속적으로 작품활동을 해왔으며, 그 작품수 또한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때 방대한 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구시와 시론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진시와 시론, 그 중에서도 시가 시론보다 서구적 자극 못지않게 전통에 대하여 유념하고 있었다. 서구적인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어 전통과 무관한지대에서 작업하면서도 그 지대를 다시금 전통과 맞물리게 하는 반작용 시의  <현대성>을 빚어내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2

김 기림의 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동경에서 비롯한다. 1930년 9월 6일자 {조선일보}에 G.W.의 필명으로 발표된 그의 첫작품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부터 그의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과 심취는 압도적이다. 그만큼 그의 초기시, 특히 시집 {태양의 풍속}을 특징짓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현실안은 철저히 서구지향적이며 문명지향적이다. 이러한 서구지향 문명지향이 그가 처음에 생각한 모더니즘에 틀림없다. {태양의 풍속}의 시편들은 한결같이 <태양> <아침> <바다>의 이미지를구심점으로 해서 모든 시작품에 메아리쳐 있다. <태양> <아침> <바다>는 <새로운 생활>을 이루는 대표적 이미지다. 그러기에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어둠> <밤> <벽>은 전면적으로결별되어야 할 세계다. 시집 {태양의 풍속}의 서문과 같이 <비만(肥滿)하고 노둔(魯鈍)한 오후의 예의>다. 그것은 <동양적 적멸>이며 <무절제한 감상의 배설>이며 또한 <탄식>이다. 그래서 <밤>은 <새벽을 꾸짖는 사형수인 늙은세계>([십오야(十五野)])이며, <어둠>은 태양의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여야 할 세계라고 절규([태양의 풍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만큼 <새로운 생활>은 <건강한 아침의 체격>이자 <오전의 생리>다. <아침> <태양> <바다>는 그러므로 신선 활발 대담 명랑 건강의 이미지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아침> <태양> <바다>보다 오히려 <밤> <어둠> <벽>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순, <밤><어둠> <벽>을 노래함으로써 <아침> <태양> <바다>를 구현한 역설, 이러한 모순과 역설로 이루어진 시가 그가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할 때 쓴 그의 초기 시편이며. 시[가거라 새로운 생활로]이다. 이 시를 시집 {태양의 풍속}에서 [오후(午後)의 예의(禮儀)]편에 시인 자신이 넣은 것은 이 때문이다.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가 보여주듯이 <바빌론>으로 상징되는 문명세계에 대한 동경과 심취는 그만큼 각별하다. 사실 그의 이국적 기질은 너무나 강하다. 그곳은 아침이며 밝음이며 깃발의 세계다. 하지만 이곳은 밤이며 어둠이며 비탄과 울음의 세계다. [기차] [고독] [이방인] 등의 시가 그 시공을 밤과 어둠으로 선택했을 때, 그 세계는 눈물과 울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있어 <동양적인 적멸>이나 이곳의 과거는하루빨리 결별되고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태양의풍속}에 실린 시편들은 동양의 세계, 어둠의 세계로부터 결별과 강렬한 부정을 의미한다. [출발] [깃발] [바다의 아침] [일요일 행진곡(日曜日 行進曲)] 등 여행시는 <태양의 풍속>을 읊은 시다. 여행시는 말하자면 <새로운 생활>. 문명세계로 항해하기 위한 태양의 풍속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그에게 있어 시는 노래이기보다 인식이며 또한 인식의 기호론이다. 시는 스스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짓는 것이다. 시가 인식되었을 때, 시는 당시 감상주의와 편내용주의에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20년대 전반기 시가 감상에 집착했을 때, 그는 단연코 시의 건강성으로서 지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감상과 지성의 대립은 다시 운율과 이미지로 대체된다. [대합실] [쵸코레 1트] [함흥평야] 등의 시에 나오는 이미지의 조형, 관념의 감각화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조형, 관념의감각화는 그것이 형식면에서 새로운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온 것이 아니라 관념에서 온 것이다. 그만큼 타설적이고 관념적이다. 이들 시가 결국 기교주의적 말초화로 시종한 것은 이 때문이다.


3

<현대의 교향악을 기획했다>고 스스로 표방한 장시 {기상도}는 시집 {태양의 풍속}의 시편이 보여주듯이 현실과 유리된 시의 관념적 세계에 대한스스로의 반성이자, <현실의 적극적 관심>에 부응한 구체적 표현이다. {기상도}는 그동안 그가 시도한 어떤 시보다 크고 넓은 세계이며, 현대문명의 상황을 비판한 의욕적이고 실험적인 시적 구조물이다. 현대문명은 그것에 걸맞는 시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엘리어트의 [황무지], 스펜더의[비엔나]와 같은 장시를 그는 {기상도}에서 실험한 것이다. 그러기에 {기상도}를 발표한 1930년대 중반은 김기림에 있어 모더니즘과 사회성의종합이라는 시의식의 변화를 보여준 주목할 만한 시기다. 그것은 말하자면 20년대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었다. 그만큼 30년대 중반에서 모더니즘이 위기에 다다른 것이다. 그래서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 낳은 시가 다름 아닌 {기상도}다. 시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기상도}는 현대사회의 어지러운 기상을 진단 비판한 자본주의 문명의 기상도이자 현실의 기상도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 현대문명의 내습을 태풍에 비유하고, 그것으로 인한 세계의 붕괴와 그 재생을 주로 다루고 있는 우의적이고 의욕적인 문명비평시다.

비늘 
돋친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두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幅)처럼 미끄러웁고 
오만한 풍경(風景)은 바로 오천(午前) 칠시(七時)의 절 
정(絶頂)에 가로누웠다

로 시작되는 {기상도}는 모두 424행의 장시로서 [세계(世界)의 아침] [시민행렬(市民行列)] [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 [자취] [병(病)든 풍경(風景)] [올빼미의 주문(呪文)] [쇠바퀴의 노래] 등 7부로 이루어져 있다. 7부로 엮어진 이 시는 7부 각각이 <태풍>이라는 한 핵을 향해 수렴되고 긴밀하게 엮어지면서 유기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1부 [세계(世界)의 아침]과 이 시의 대단원인 7부 [쇠바퀴의 노래]는 그시적 구조가 시간상으로 원형을 보여주듯이 공간상 원형을 보여주고 있음을 놓칠 수 없다. 말하자면 구조상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이 시의 특색이다. 1부 [세계(世界)의 아침]이 <새로운 생활>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라면, 7부 [쇠바퀴의 노래]는 태풍을 거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생활>이 거듭남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재생이자 쇄신작업이라고 할 만하다. [세계(世界)의 아침]의 단순한 무조건적인 새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이 [쇠바퀴의 노래]에 와서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의 믿음으로 바뀐 것이다. <우울과 질투와 분노와/끝없는 탄식과/원한의 장마에 곰팽이 낀/추근한 우비>는 벗어던지고 <날개와 같이/가벼운 태양의 옷>을 갈아입어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시 {기상도}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3부[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을 구심점으로 해서 그 여파를 다룬 2부 [시민행렬(市民行列)]과 4부 [자취]라고 생각한다. 현대문명의 기상(위기)을 태풍의 기상 상황에 비유하여 현대문명의 위기로 인한 모순과 비리와 불합리를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시의 다양한 기법을 맘껏 실험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풍자와 기법이 전통적 형식보다 서구적 형식이 크게 작용한 점에 있다. 그만큼 {기상도}는 그 형식과 내용이 {태양의 풍속}의 시편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서구지향적이며 문명지향적이다. 그의 시만이 아니라 {시론}이 그렇고. {문장론신강}이 그렇다. 더구나 <시대적 고민의 심각한 축도>라고 스스로 자처하면서, <현실에의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모더니즘 못지않게 시의 사회성을 강조했던 그가{기상도}에서 보여준 사회는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한 식민지 조선의 사회가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팽창과 대내외적 갈등과정에서 빚어낸 저쪽 지식인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시방법은 타설적일 수밖에 없고그 때문에 {태양의 풍속}의 시편과 결과적으로 너무나 비슷한 것이다. 다만 {태양의 풍속}이 현실에서 유리된 관념적 세계라면, {기상도}는 현실에의 적극적 관심의 소산이면서 그 현실은 한국적 리얼리티와 유리된 또 하나의 관념적 세계인 것이다.


4

이런 뜻에서 그후 김기림이 {새노래}에 와서 자기비판을 시도한 것은 여러 모로 그의 시적 변모를 이해하는 데 시사적이다. 물론 시는 <생활의현실> 속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소리>이어야 한다는 자각과 모더니즘에대한 이러한 자기비판은 이미 시집 {바다와 나비}에서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양의 풍속} {기상도} 이후 1939년 대전 발발까지 발표된 시가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 [요양원] [공동묘지] [유리창] [겨울의 노래] 등이 보여주듯이 그가 그동안 의욕했던 모더니즘의 탈지향성에서 남의 현실이 아닌 나의 현실, 말하자면 <시의 고향>으로 귀의한 것이다. [유리창] [공동묘지] 등이 환기하는 주정적이고 정감적인 세계는그 자체만으로 매력과 장점이 되어준다. 그것은 서구적인 경험에 입각하여짓고 노래하던 종래시에 대한 자기반성과 자기인식이며, 그러한 인식이 낳은시가 [바다와 나비]며 [겨울의 노래]다. [바다와 나비] [겨울의 노래]는 어떤 의미에서 시인의 자화상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혜에게 바치는 노래]등 8715광복을 노래한 {바다와 나비}의 시편 등의 일부와 {새노래}의 시편들은 이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감수성이나 경험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보다 광복 후의 감격과 환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시는 개인적인 것보다 우리라는 공동체 언어를 지향한다. 이제 모더니스트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고 남은 것은 청중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자아내는 경향시(사회성)의 지향이다. 비록 이러한 시편들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제로 나타 나 있다 하여도 그것은 내면의 필연성에서 오는 시인의 표현 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시대적 요청에서 제작된 것이며 광복후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부응이다. 이런 점에서 초기시 {태양의 풍속}이나 {기상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초기의주요 내용인 <서구문명숭배>가 <새나라 건설>로 바뀐 것이 다르다. 시집{새노래}의 첫머리에 샌드벅의 시구절 <나는 새도시와 새백성들을 노래하는걸세/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을 인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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