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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的 變容에 대하여
핏속에서 자라난 파란 꽃, 빨간 꽃, 흰 꽃, 혹시는 험하게 생긴 독이(毒栮), 이것들은 그가 자라난 흙과 하늘과 기후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디 그럴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이 정숙한 따님들을 그저 벙어리로 알아서는 안 된다. 사랑에 취해 흘려듣는 사람의 귀에, 그들은 저의 온갖 비밀을 쏟기도 한다. 저들은 다만 지껄이지 않고 까불거리지 않을 뿐, 피보다 더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용해한다.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피어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 줄, 지나간 격정이 모두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으로 남긴다.지극히 예민한 감성이 있다면, 옛날의 전설같이 우리의 맥을 짚어봄으로, 우리의 호흡을 들을 뿐으로 얼마나 길고도 가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랴! 흙 속에 어찌 풀이 나고 자라며, 버섯이 생기뇨? 무슨 솜씨가 핏 속에 시를, 시의 꽃을 피어나게 하느뇨? 변종을 만들어내는 원예가, 하느님의 다음 가는 창조자, 그는 실로 교묘하게 배합하느니라. 그러나 몇 곱절이나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랴! 교묘한 배합‧고안‧기술, 그러나 그 위에 다시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되는 변종 발생의 찬스.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에게,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것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그런 내심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건설하라.”고. 이런 무시무시한 권고를 한 독일의 시인 마리아 릴케는 <브리게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전 생애를 두고, 될 수 있으면 긴 생애를 두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의미와 감미를 모으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아마 최후에 겨우 열 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는 보통 생각하는 것같이 단순히 애정이 아닌 것이다. 시는 체험인 것이다.한 가지 시를 쓰는 데도 사람은 여러 도시와 사람들과 도시들을 봐야하고, 짐승들과, 새의 날아감과, 아침을 향해 피어날 때의 작은 꽃의 몸가짐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지방의 길, 뜻하지 않았던 만남, 오래 전부터 생각던 이별, 이러한 것들과, 지금도 분명하지 않은 어린 시절로 마음 가운데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여러 밤의 사람의 기억-하나가 하나와 서로 다른-진통하는 여자의 부르짖음과,아이를 낳고 해쓱하게 잠든 여자의 기억을 가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봐야 하고, 때때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방에서 창을 열어 놓고, 죽은 시체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기억이 이미 많아질 때,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할 수 없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기억만으로는 시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속에 피가 되고, 눈짓과 몸가짐이 되고,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는 이름 없는 것이 된 다음에라야-그때에라야 우연히 가장 귀한 시간에 시의 첫 말이 그 가운데서 생겨나고, 그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열 줄의 좋은 시를 기다리고 일생을 보낸다면, 한 줄의 좋은 시도 못 쓰리라. 다만, 하나의 큰 꽃만을 바라고 일생을 바치면 아무런 꽃도 못 가지리라. 최후의 한 송이, 극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는 그보다 작을지라도, 덜 고울지라도 수다히 꽃을 피우며 일생을 지내야 한다. 마치 그것이 최대의 것인 것같이 최대의 정열을 다하여-주먹을 펴면 꽃이 한 송이 나오고, 한참 심혈을 모아 가지고 있다가 또 한 번 펴면 또 한 송이 꽃이 나오고, 이러한 기술사와 같이.’
나는 서도를 까맣게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서도를 예로 이야기할 욕망을 느낀다. 서도의 대가가 그 생애의 절정에 섰을 때에, 한번 붓을 들어서 한 글자를 이룬다 하자. 괴석같이 뭉치고, 범같이 쭈그린 이 한 자. 최고의 지성과 웅지를 품었던 한 생애의 전 체험이, 한 인격이, 온통 거기 불멸화하였다. 그것이 주는 눈짓과 부르는 손짓과 소곤거리는 말을 나는 모른다. 나는 그것이 그러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다. 이 무슨 불행일 것이냐! 어떻게 하면 한 생애가, 한 정신이 붓대를 타고, 가는 털을 타고, 먹으로써 종이 위에 나타나, 웃고 손짓하고 소곤거릴 수 있느냐? 어쩌면 한참 만에 손을 펼 때마다 한 송이 꽃이 나오는 기술에 다다를 수 있으랴. 우리가 처음에는 선인들의 그 부러운 기술을 보고, 서투른 자기 암시를 하고, 염언(念言)을 외고, 땀을 흘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다. 그저 빈주먹을……. 그러는 중에 어쩌다가 자기 암시가 성공하는 때가 있다. 비로소 주먹 속에 드는 조그만 꽃 하나! 염화시중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비법이다. 이래서, 손을 펼 때마다 꽃이 나오는 확실한 경지에 다다르려면 무한한 고난과 수련의 길을 밟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한번 밤에 흙을 씻고, 꾸며 놓은 무대 위에 흥행하는 기술사로 올라설 때에 그의 손에서는 다만 가화(假花) 조각이 펄펄 날릴 뿐이다. 그가 뿌리는 땅에 박고 광야에 서서 대기를 호흡하는 나무로 있을 때만 그의 가지에서는 생명의 꽃이 핀다. 시인은 진실로 우리 가운데서 자란 한 그루 나무다. 청명한 하늘과 적당한 온도 아래서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고, 장림(長霖)과 담천(曇天) 아래서 험상궂은 버섯으로 자라날 수 있는 기이한 식물이다. 그는 지질학자도 아니요, 기상대원일 수도 없으나, 그는 가장 강렬한 생명에의 의지를 갖고 빨아올리고 받아들이고 한다. 기쁜 태양을 향해 손을 뻗치고 험한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그는 다만 기록하는 이상으로 그 기후를 생활한다. 꽃과 같이 자연스러운 시, 꾀꼬리같이 흘러나오는 노래, 이것은 도달할 길 없는 피안을 이상화한 말일 뿐이다. 비상한 고심과 노력이 아니고는 그 생활의 정을 모아 표현의 꽃을 피게 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진 식물이다.
<한국의 명문장 100선에서>
박용철(1904~1938) 호 龍兒. 전남 광산 출신. 시인. 도쿄 아오야마 학원과 연희전문에서 수업. 1930년 《시문학》에 시 <떠나가는 배>, <밤 기차는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31년 《문예월간》을 출자 간행. 정지용, 김영랑, 이하윤, 신석정 등과 경향파에 대립하여 순수시 운동을 전개. 작품집에 《박용철 전집》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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