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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시에 관하여
2015년 04월 20일 17시 46분  조회:4961  추천:0  작성자: 죽림
 

희망인가, 절망인가  

 

 

 

        해체는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해체이어야만 한다.

                              -남진우, {바벨탑의 언어}, p.99

 

       모든 아방가드는 일어나는 당시에는 아무리 새롭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통의 일부로 수렴되고 마는 운명이어서...

                         -권택영,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p.11

 

 

 

1. 해체의 논리와 비논리

 

-왜 해체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해체 시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 보인다. 그 이전 시대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80년대 시의 굵은 줄기 중의 하나로 해체시를 위치시키는데 독자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날 우리 시가 언어를 조탁하여 아름답게 대상을 묘사하고자 했던 묵시적 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이었기에 더욱 독자들의 관심을 주목시킬 수 있었다. 여러 시인 비평가들이 앞 다투어 작품으로, 혹은 이론으로 해체시의 당위성을 이야기해왔다. 리얼리즘 계열의 평론가들은 나름대로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애써 해체시를 평가 절하시키려고 애썼다. 자의든 타의든 해체 시 자체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존재를 검증받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해체시를 둘러싼 말들이 무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80년대는 지나갔다.

실제의 작품을 보더라도 80년대 초반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등에 의해 촉발된 해체 분위기는 80년대 후반에 들어 한 절정을 이루다 지금은 각개약진 식으로 다양해지기는 했으나 상당히 정숙해진 느낌이다. 모더니즘 혹은 요즘 많이 언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본 방향으로 잡고 있는 {현대시사상}에서 꾸준히 해체를 하나의 묶음으로 정착시키려고 애써왔고, {문학사상}에서도 근래 해체 시 특집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를 둘러싼 해체의 분위기는 분명히 80년대의 그것이 아니다. 단언한다면, '80년대식 해체'는 이제 끝났다. 아니 한걸음 양보한다면, 지금 끝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또 철지난 사랑타령처럼 해체시를 들먹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숲에 있을 땐 나무 하나하나의 모양을 세밀히 보지만 정작 숲 전체를 조감할 수 없다는 흔한 상식을 상기하자. 우리는 80년대와 함께 해체시의 숲을 통과해, 지금 숲이 끝난 곳에서 뒤돌아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또 과거가 역사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현재와 만나야한다는 교훈도 상기하자. 해체는 지금 완전히 분해 되지 않고 우리 주변을 떠돌아다닌다. 한 때 해체의 선봉에 섰던 황지우와 이성복이 이후 방향을 선회하긴 했지만, 그들의 선배 세대인 이승훈, 박의상, 박상배 등이 여전히 해체시를 만들고 있고, 그들의 후배세대인 장정일, 박상우, 황인숙, 최계선 등이 나름대로 실험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승자, 김영승, 김정란 등이 비록 성격은 다르지만 해체를 방법으로 차용하여 꾸준히 작품을 써오고 있다. 80년대가 끝난 지금 우리는 이들에게서 전 시대와는 다른 해체를 읽게되고, 그것이 90년대식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해체를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해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를 뒤집고, 그림이나 도표를 인용하고, 과감한 패러디를 쓰고, 대상을 감추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혹은 글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빈 공간으로 채우는, 한마디로 요약해 전통 시형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체이론은 이러한 정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더 이상 따지고 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해체시의 타당성, 다시 말해 해체시가 시로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가 아닌가에 집중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모더니즘의 입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시의 영토를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리얼리즘 쪽의 논객들은, 시를 언어의 유희 즉 말장난 정도로 여겼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의 첨예한 대결은 해체에만 국한된 대결이 아니라 문학 전반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 더 나아가 이 세상을 해석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차이라는 점에서 전혀 접근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해체시의 바른 평가와 방향설정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이전의 해체를 둘러싼 어떤 해석이나 이론에도 기대지 않기로 한다.

해체를 언어형식의 파괴로 파악할 때 우리는 엄청난 오해에 휩싸인다. 일상의 우리 대화 속에는 문장으로 기술할 때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을 수많은 언어의 단절이 숨어 있다. 말을 할 당시의 주변 환경, 상대방의 태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식의 틀 등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한 문장이 아니어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거기에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이것을 글자로 옮겼을 때 거기에는 엄청난 언어파괴 현상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대화를 두고 '해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편 오늘의 시들이 갖고 있는 문자적 속성은 시에 숙명적인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인쇄되지 않은 시는 시로 인정되지 않는 모순 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시집이나 문학잡지를 통해 시를 읽는데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러나 엄격히 말해 시행을 이루는 글자들은 언어의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 아주 제한적인 약속일뿐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사실, 따라서 주의력을 환기하고 생각해 보야 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글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글자로 옮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미지의 엄청난 수렁을 갖고 있다. 해체 시에서 다루는 도형이나 그림, 낯선 기호나 표식은 모두 그러한 언어의 일종이며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해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이 '언어의 해체'가 아니라 '글자의 해체'였던 것이다.

해체를 언어의 해체가 아니라 글자의 해체로 이해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해체시 자체가 그런 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자의 해체는 언어가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형식의 해체로 국한된다는 뜻이며, 이점은 해체의 특징이자 곧 한계이기도 하다. 내용이란 시인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일 것인데, 그들의 시에 이 내용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 독자를 향해 여전히 충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완전한 해체, 즉 내용까지를 해체하여 텅 빈 세계를 보여주기엔 해체시인들의 욕심이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는 실제의 작품을 검토한 후 그 구체적 증거들을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일단 유보하기로 하고, 먼저 해체시가 나타나게 된 경위와 이유를 살피기로 하자.

해체가 80년대 시의 한 특징이긴 하지만 그 시대만의 것은 물론 아니다. 30년대의 모더니스트들, 특히 이상이라든지, 50년대의 후기 모더니스트, 즉 김구용 조향 박인환 등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해체의 시를 썼다.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김수영에게서조차 그런 해체의 흔적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70년대에도 이승훈이나 김광규 등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고 본인들이 인정하든 아니든, 해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왜 해체 시는 80년대에 유독 두드러져 나온 것일까. 해체시인들의 개인적인 상상력을 논외로 친다면, 여기에는 몇 가지 대답으로서의 가설을 세울 만 하다. 첫째는 전통적 시형식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로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이 그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60년대 4.19가 미완의 혁명으로 마무리되고 군사정권이 장기화되면서 우리 시는 리얼리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순수/참여의 소모적 논쟁을 겪기도 했고, 일부 현실비판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현실에서 움츠러든 문학은 현실을 도피하고 언어의 아름다움이란 미명 아래서 시들시들 메말라 갔다. 유신 이래 이런 경향은 더욱 깊어져 당연히 새로움에 대한 갈증도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부 반영이론 측의 시인들은 폐쇄된 공간에서 자유를 찾기 위한 염원이 지나쳐 문학을 이념의 충실한 매개물로 생각하고 현실을 그리는 데만 전념했을 뿐, 문학이 지녀야 할 정서 환기력에는 무관심하였다. 역시 새롭고 강렬한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80년대에도 군사독재는 계속되었지만 광주의 봄을 겪고 난 우리의 의식은 훨씬 자유롭게 꿈꿀 여유를 얻게 되었고, 이것이 목마름과 잘 연결되어 새로운 시 형태를 낳게 하였다. 초기 황지우의 시에 살짝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도 해체시를 두고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계파논쟁을 벌였던 지난날의 입씨름은 무익한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은,  산업화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우리들 인식구조의 변화가 해체를 가능케 하였다는 점이다.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소개와 연구서가 쏟아져 나오고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관심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관심과는 달리 이들이 느끼는 당혹함은 이들을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으로부터 회피하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고, 별로 대단한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해체시의 대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매우 유익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지금의 후기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읽기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한 가지 가치관으로 삶을 해석하려 해도 그 엄청난 다양성 때문에 전체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고도산업화 정책은 70년대를 지나면서 1차 산업 위주의 사회를 2차 산업 위주의 사회로 바꾸어 놓았고, 80년대 들어와 그 변화는 더욱 두드러져 다시 3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 바뀌어 갔다. 2차 혹은 3차 산업 사회에서는, 인간의 개성은 몰락하고 개인이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 부속품 화 되어 간다.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가까워도 진정 가까울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각 개인이 고립된 채 살아가야 한다. 80년대는 이러한 후기 산업 사회적 징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였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해체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파편화된 삶이 시에 반영될 때, 시는 파괴적 혹은 해체적 양상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두개의 가설은 해체의 등장을 무슨 필연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해체를 포함한 모든 새로움, 모든 아방가드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해체는 그 자체가 해체되어야 할 운명으로 시작되었다는 일부 평자들의 주장은 해체를 올바로 꿰뚫어본 견해이다. 왜냐하면 해체는 처음 그것이 나타났을 때는 새로운 환기력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지만, 그것이 시일이 지나고 유사한 작품들을 여럿 본 연후에는 더 이상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쯤 되면 해체는 관습이나 전통의 일부로 편입되어 더 이상 해체가 아니게 된다. 스스로를 '해체'해야 할 운명에 당도하는 것이다. 문학이나 사회현상, 나아가 과학의 발전까지도 이러한 패러다임의 발현과 세속화라는 반복된 경로를 밟으며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80년대의 해체는 더 이상 해체가 아닌 셈이고, 나아가 80년대의 해체가 80년대만으로 규정될 특이점이 아니라 도전과 응전이라는 보편적 법칙에 의해 있었던 하나의 문화기류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그 본질을 파악하는데 올바른 지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해체적 글쓰기, 또는 해체적 글 읽기의 과정에는 공통으로 전제되는 조건이 하나 있다. '우리의 해체'라는 관형표현을 붙인 이유는 여러 지면에서 해체주의라고 어설프게 소개되곤 하는 서구의 해체와 우리의 것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체는 해체의 대상이 시의 전면에 강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반면, 서구의 것은 대상 그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해체의 흔적까지를 지워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장정일의 [백화점 왕국]은 비틀린 언어로 시인의 생활주변을 묘사하면서 그가 시에서 의도한 방향과는 조금 다른, 시 속의 현실로 독자들을 유도하지만, 그것이 거대한 조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비극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쟈크 데리다로 대표되는 서구의 해체이론은 근본적인 면에서 다르다. {그래마톨로지}에서 그는 진리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화폐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고 금속으로서의 가치만 남은' 그런 화폐와 같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고 있다고 개탄한다. 즉 작품에서 구현할 진리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철저한, 불교적 냄새까지 띠고 있는 이러한 해체 개념은 해체의 마지막 단계를 이르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해체'는 독일의 구체시나 형태시의 또 다른 한 변형이 아니며, 또 그렇게까지 해체를 극단으로 밀고가지도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지만, 우리의 해체가 대상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해체라는 점에서 불완전한 해체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2. 해체시인, 해체시, 해체적 글쓰기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해체의 시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하지만 해체라는 표현 대신에 다양성이라는 좀더 부드러운 말을 쓴다면 분명히 80년대는 그 다양함이 어느 때보다 확대된 시기로 잡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문화현상에서 운동성이나 이데올로기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실천이 이론보다 강조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현상은 다양한 현실의 일부분으로, 가속적으로 다양성을 더욱 부추기는데 큰 몫을 했다. 실천이건 반영이건 80년대를 전체 속의 개인, 혹은 획일성 속의 다양성으로 우리의 의식이 변화해간 시대로 자리매김하더라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80년대는 전통서정을 노래한 시인, 현실변혁을 주창한 시인, 언어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시인 등, 모두 제 목소리를 갖고자 애썼던 시대였다.

해체 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의 대표적 표징으로 80년대를 상징하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우선 시어의 형태를 과감하게 바꾸려는 외형적 해체에서 시작하여 전통정서에의 반기를 든 온건한 양식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해체의 방법이나 정도가 시인에 따라 차이가 남은 당연한 일이다. 해체시인, 혹은 해체시라고 했을 때 그것들을 같은 색깔로 한 보따리에 묶어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 거칠었던 시대를 뚫고 나온 지금, 해체시인들을 갈래 구분하는 일이 이제는 문학사적인 입장에서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해체 시 이론이나 시인 론이 화려한 질투 속에 집중적으로 있었기에 해체시인을 갈래 구분하는 일이 좀 수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시인이라고 우리가 흔히 일컫는 시인 중 소수의 몇몇 시인들만이 조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체의 폭을 남몰래 넓히고도 영광의 그늘에 소리 없이 감추어진 시인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니까 그 많은 해체시론과 시인론이 해체의 전반적 모습을 살피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스스로 인정한 오해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그간 많이 언급된 시인들을 다시 다룬다. 이 글을 통해 해체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필자의 한가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체시를 쓴 모든 시인을 여기에 초대하는 것도 그렇게 생산적일 것 같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가 주로 염두에 둔 시인과 시집을 연대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3)

이하석, {金氏의 옆 얼굴} (1984)

최승자, {즐거운 日記} (1984)

김영승, {반성} (1987)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1987)

박남철, {반시대적 고찰} (1988)

박상우, {사람구경} (1988)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1988)

박의상, {흔들리는 中心} (1989)

김정란, {다시 시작하는 나비} (1989)

이승훈, {너라는 환상} (1989)

최계선, {검은 지층} (1990)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들이 80년대의 해체를 이끌어갔고 지금도 활발히 작품을 쓰고 있는 대표적인 시인들이긴 하지만, 이들만이 해체의 전부는 아니다. 또한 이들의 작품 전부가 해체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해체시인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일부 해체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비록 지명도에 있어 뒤지긴 하지만 김종석이나 가나인처럼 극단적 해체시인의 부류로 넣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선 그들을 모두 뺀다.

해체시인을 세부적으로 갈래구분하기 위하여는 그 기준을 먼저 정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해체하는가'에 따라 거칠게 나눈다면 다음의 세가지 부류가 가능할 것이다. 시의 대상을  현실, 언어, 자아의 3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주변의 현실적 삶과 질곡을 일종의 알레고리적 수법으로 해체하는 것이 첫 번째 부류일 텐데, 여기에는 황지우, 이하석, 장정일, 최계선 등이 속할 것이다. 존재나 언어 자체, 혹은 비대상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두 번 째 부류로, 박남철,박상우,박의상,김정란,이승훈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자아의 확인이란 전통적 주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어 나타내고자 하는 이성복, 최승자, 김영승, 황인숙 등을 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기준을 달리하여, 해체의 정도,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파격의 정도만을 가지고 갈래구분한다면 두 구룹으로의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황지우,박남철, 박의상 등이 과격파라면 나머지는 온건파에 속하고, 특히 황인숙 같은 경우는 표현형태만을 가지고는 해체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겉모양새로의 구분은, 분류 자체보다, 강도의 약화현상이 80년대 전반기에서 후반기로의 변이과정이라는데 더 큰 문학사적 주목을 필요로 한다. 초반의 과격함은 출구 없이 막힌 시의 흐름에 신선한 충격이 되기 위한 전략적 측면도 깃들여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는 같은 방법이 반복될 때 더 이상 해체가 아닌 불우한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초기의 과격한 형태파괴가 후기에 들어 세밀해지고 조심스러워지면서 언어나 생활의 해체로 바뀌어갔다. 90년대로 접어든 지금 초기의 형태파괴시인들이 전통적 수법으로 복귀하거나 상당히 느슨해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간다.

해체의 대상이 무엇이었던가를 밝히면서 해체시인들이 설정한 목표와 한계를 간략히 짚어본다.

먼저 80년대 해체시의 선두이며 기폭제 역할을 했던 황지우의 예를 본다. 그를 생각하면, {시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처음 발간되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새삼 되살아난다. 독자들마다 받아들이는 방향과 폭이 물론 달랐을 테지만, 이상의 [烏瞰圖]이래 가장 강한 이질감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지금은 해체에 익숙해져 그의 시를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이런 파격이 과연 시로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앞섰었다. 그러나 형태파괴가 가져다준 효과가 말을 곱게 다듬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직설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그와의 기호소통체계를 묵시적 약속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성공했다.

이 시집은 현재 우리의 보편적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가령, 꽤 긴 작품인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하루]라는 작품에서 작중 주인공인 송일환씨의 하루생활을 카메라로 비추듯 객관적으로 보여줄 때, [徐伐,셔 ,셔 ,서울,SEOUL]에서 '보성물산주식회사 종로 지점'에 근무하는 장만섭씨의 하루생활을 보여주었을 때, 혹은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에서 신문의 TV프로그램 한 조각을 옮겨놓았을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들 삶의 현실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인지 안다. 우리가 그들 자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여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 붙이며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결국 이 시집을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핵심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정확하게 재현해 내고자하는 노력이며, 이 시집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상황이나 인물들은 시인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들의 전형인 셈이다.

우리의 현 생활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시집은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이 되어야할 시집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것일수록 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이전의 시적 태도와 달랐기에 우리에겐 오히려 낯설게 보인 시집이었고, 이 점도 시인의 의도에는 음흉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시가 대상의 이차적 반영이라고 믿었던 통념을 깨고 대상을 일차적으로 반영함으로써 훨씬 리얼리즘에 가깝게 접근해 들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더욱 흔히 생각하는 바의  '해체'는 전혀 아니다. 황지우 시인의 진정한 목적과 방법은 현실의 진솔한 반영이며, 언어를 사실적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그를 해체시인으로 몰아버린 것은 평론가들이며 여기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책임을 지고 그를 다시 새로운 리얼리즘 시인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황지우보다는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역시 80년대 초반에 해체의 선두주자로 매김 당하는 이성복의 경우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황지우의 대상이 주로 대사회적인 것이라면 이성복은 다분히 개인사적인 면을 속에 담고 있다. [루우트 기호 속에서]에서 보이는 어머니와 자의식의 성장관계라든지,[그날]에 나오는 가족들의 흩어진 모습 등은 그 증거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그의 내부는 스스로 닫힌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하여 통제된 내부이며, 이렇게 닫혀 있으면서도 인식의 성장과정을 참담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내부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 때로는 환상적 세계로 빠져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蒙昧日記]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개인이 집단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생각은 자아의 틀에만 빠져있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는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부단히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지, 절대로 대상을 포기하거나 해체하려 하지 않는다.

박남철의 시는 마음이 너그러운 독자에게도 거칠게 읽힌다. 시인의 신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그의 주변을 장식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신을 포함한 자아의 모든 것들을 그는 시의 대상으로 포착한다. 이 잡동사니 대상들은 황지우의 것처럼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복의 경우처럼 자아의 인식성장을 위한 보조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 시의 대상은 그냥 자기자리에 '있는' 것들로 우연히 체포되었을 뿐, 어떤 혐의도 둘 수 없는 그런 것들이다. 따라서 좋게 말할 때, 그가 해체하고자 애쓰는 대상은 존재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그의 대상은 의미 없는 것들로, 그는 의미 없는 대상들을 가지고 시를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의미를 잃을 때, 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광인일기]는 욕설과 야유와 죽음에 대한 비난의 원색적인 말들로 가득 채워진 꽤 긴 시인데 (그의 다른 시에 비하면 그래도 짧은 셈이지만), 마지막 행의 <세월이여, 시간이여, 역사여, 그리고 광주여 !> (글자가 고딕으로 뒤집혀 똑같이 반복되며 끝남) 라는 것을 뺀다면 이 시가 의미하고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지막 행을 위하여 그 이전의 많은 언어와 대상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가장 경제적 표현으로 가장 큰 효과를 노리는 것이 시라고 하는, 그 낡아빠진 시의 개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박남철의 시에서는 앞 구절이 뒷 구절을 위해 기획되어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앞의 욕설이 망자에 대한 분노나 슬픔을 환기시켜주지 못하고 욕설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박해미르] 시리즈 작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그냥 언어의 흩어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렀다면 지금 해체를 논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박남철을 진정한 해체시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대상 자체를 해체하고 언어를 기호화 혹은 알레고리화 함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가장 철저하게 해체를 실천하는 시인인지도 모른다. {地上의 人間}에서 최근 {용의 모습으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러한 해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해체는 해체가 지닐 수 있는 결정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80년대 해체시의 한 표본이 된다. 시가 가치없고 일회용 종이컵 정도의 용도로 밖에는 쓰이지 않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이천 오백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여 책을 사고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읽어야할 문학작품이라면 우리는 시를 두고 가치와 판단의 면모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의미화 되지 못함으로써 가볍게 공중에 떠 있는데, 가벼움과 유희가 목적이일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새로운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충격을 주려는 시도는 한번으로 족하다. 같은 것이 두번 반복될 때 그것은 더이상 새로움도 아니고 해체도 아니다. 박남철 시인에게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80년대의 해체는 해체가 스스로 해체되어야할 숙명을 안에 담고 있었다.

박상우가 보여주는 야유와 재치, 김정란의 자아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독백도 색깔이나 지향점은 서로 다르지만 넓은 의미에서 박남철이 갖고 있는 해체의 속성과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다. 70년대부터 해체를 실천해온 이승훈과, 역시 비슷한 연배이지만 80년대 들어와서야 해체에 뛰어든 박의상에게도 엮시 같은 지적을 할 수밖에 없다. 이승훈의 '비대상'은 다르게 표현하면 '대상의 해체'일 것인데, 그가 언젠가 스스로 고백했듯, 비대상의 허무함이 시를 텅 빈 그릇으로 만들 때, 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박의상의 경우는 시행을 불규칙하게 배열하고 의미없는 언어를 반복하는 수법의 해체작품을 쓰고 있다. 이럴 때 시행의 배열은 시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定處]연작은 내용상의 '자리찾음'이 아니라 불규칙한 시행이 보여주는 바의 불확실한 현재 위치를 말하는 것이 된다. 이승훈이나 박의상에게 있어 의미 없는 대상의 존재는 시의 중심개념이 되고 있는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전제하기 위하여는 존재의 해체가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박남철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가벼움이 가라앉지 않는 한 그들의 뿌리는 쉽게 고갈될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시에 어떤 해석을 부가하더라도 독자들은 그들에게서 의미 찾기를 포기할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황지우나 박남철과는 다른 유형의 해체시들이 여러 시인에 의하여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얼굴로 필자에게 떠오르는 시인은 장정일과 황인숙이다. 80년대 후반은 초반의 과격한 문자파괴를 거치고 난 이후였기 때문에 문자가 더 이상 해체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글자의 파괴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해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젊은 시인들은 인식했기 때문이다. 해체의 일차적 대상이 문자로 지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자는 글자 이전에 한 의미체계를 지닌 구조물이기에 글자의 해체를 통해서는 대상을 완전히 해체했다고 볼 수가 없다. 그 반대로 대상의 의미만을 비워두고 언어형식을 해체하지 않아도 완전한 해체에는 다다를 수 없다. 그렇다고, 양자의 장점만을 택한 방법, 즉 대상의 의미와 글자를 동시에 해체한다고 해서 해체시가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시집이다. 그의 시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대부분 시가 길고 서술적이며 알레고리화 되어 있다. 이야기들은 대개 그의 개인사적인 매개물로 시작되지만 단순히 한 개인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머리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러나 중요한 만큼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고 싶지 않을 그런 문제들을 향해 장정일의 상상력은 종횡으로 날아다닌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시의 표면에 드러내고 독자를 향해 말한다. 이야기의 재미에 이끌려 시를 끝까지 읽은 독자들은 시가 끝나고 나서야 그것이 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섬뜩해진다.

그의 해체는 해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쉽사리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일부 평자들은 그의 시를 두고 현대 도시의 물질화된 생활, 특히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문명생활에 대한 야유와 경고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다루는 소재들이 주로 도시적 삶에서 얻은 것들이기에 그런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장정일이 다루고자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삶의 진실에 대한 회의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표제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요리과정에 대한 설명 뿐이고, [붉은 신호에 걸린 여자]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던 여자가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하이힐이 걸려 넘어지면서 길을 건너지고 되돌아가지도 못한다는 상황묘사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요리책도 아니고 소설의 일부를 따놓은 것도 아니다. 재미는 있지만 시인이 이 작품을 쓴 의도를 찾기가 어렵다. 그가 [쉬인]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랄떠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들이 지금껏 생각해왔던 '진리'의 숭고함, 형이상학적인 속성, 세속으로부터의 거리감 등을 완전히 무시한데서 온 결과이다. 진실이 교과서에만 써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이나 주변에 얼마든지 흩어진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따라서 그는 진실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진실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이야기를 통해 나타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최승자는 자의식이 강한 면에서 장정일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지만 그의 선배격인 이하석은 장정일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시인이다. 다만 보편적 진실보다는 이데올로기화된 진실, 즉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함으로써 삶을 개조시키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여기에 비하여 황인숙의 애매모호함이 장정일과 더욱 접근된 모습을 보여준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에서 황인숙의 시가 매력적인 것은 쉽고 활달한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매우 어려운 다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 많은 경우에 의미해석을 강요하지 않고 그 분위기가 주는 막연한 느낌이 독자를 오히려 포근하게 감싸준다. 그의 작품을 두고 '둥근 시'라고 평하는데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역시 중요한 문제는 진실에 대한 문제, 즉 기존의 진실의 질서를 신뢰할 수 있는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대상이 예전의 대상이 아닌 그만의 것인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대상이 그의 것이되었을 때, 그는 세상의 신기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고정된 진실이 아닌 열린 개념으로서의 새로운 진실들을 만나게 된다. 황인숙은 진실을 해체하는 작업과 동시에 진실을 새롭게 구성하는 창조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최계선이 낸 시집 {검은 지층}은 글자가 아닌 그림의 삽입이라는 점에서 박남철을 생각나게 하지만, 박남철과는 분명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활을 다룬 시들과 지질학적 상상력으로 인간존재를 다룬 시들이 혼재해 있는데, 눈에 얼른 띄는 것은 물론 후자의 것이고, 형태적 해체를 취한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단층이나 모래의 형상을 실제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감이지만 전혀 신기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인류학적, 혹은 지질학적 인간존재를 다루고 있어 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시에 자연과학을 도입한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3. 무엇을 해체할 것인가

 

80년대에 해체는 리얼리즘에 대립되는 모더니즘의 방편으로 오해되는 가운데, 각 진영으로부터 해체 자체에 대한 깊은 천착 없이 심정적인 찬반의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80년대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모순이 바로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사실 해체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적 기준과는 관계없이 어떠한 예술작용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일종의 아방가드인 것이다. 단순히 '새롭다'는 면에서는 모더니즘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해체의 대상은 리얼리즘에서 다루는 사회성일 수도 있고 모더니즘에서 다루는 현대문명일 수도 있다. 그리도 동시에 이들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해체를 규정할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할 것은 어떤 당파, 혹은 사조에 휩쓸려 있는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대상이 무엇이며 해체로 인하여 어떤 환기력을 갖을 수 있느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다.

앞에서  80년대의 중요한 해체시인들을 검토하며, 필자는 황지우 식의 비해체적 해체, 박남철 식의 무의미적 해체가 진정한 해체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그리고 장정일이나 황인숙의 시들이 보여주는 진리의 해체작업이 앞으로 우리시에서 해체시가 가야할 길을 어느 정도 밝혀주고 있음도 말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글자와 의미의 해체인가, 아니면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의 해체인가로 요약된다.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 진리는 교과서에 적혀있는 죽은 언어들이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우리가 늘 얼굴맞대며 사는 일상에 있다. 고정된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때 이미 그것은 우리의 진리가 아니다. 즉 주어진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해체함으로써 새롭게 탄생된 진리를 알고 즐기는 행위가 바로 해체작업의 본질이다. 80년대의 해체시 중 대부분이 현실의 절망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면서도 해체가 본질적으로 절망을 위한 만가가 아니라 희망을 향해 열린 축복인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해체가 하나의 아방가드로 그 효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아방가드가 해체의 해체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면, 지금의 해체가 무엇을 과연 해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의 지표를 정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미래를 점치고 이론화한다는 것은 교조주의적 심판으로 흐르기 쉽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럴 위험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가지, 90년대의 해체는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삶의 표면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진실을 추출하고 그 진리를 해체시킴으로써 보다 철저한 해체로 나아가야 하리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세월이 흐르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진리도 바뀌고, 진리가 바뀌면 해체의 대상도 바뀐다. 따라서 해체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해체이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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