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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주당들의 이야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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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이유 - 유운
유운(柳雲, 1485∼152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항재(恒齋), 성재(醒齋)이다. 연산군 10년(1504) 과거에 급제하여 후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들과 술만 마신다고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기묘사화 때 남곤에 의하여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려다가 파직 당했다.
주당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술에 빠져 살다보면 자신의 책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유운이 바로 그러한 경우인데 그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과 술을 많이 마셨다는 이유로 탄핵될 정도였으니 그 정도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운은 파직 당한 후 향리에 묻혀 살았는데 술로 자신의 울분을 달래다가 죽었다고 한다. 야담에서는 그가 술을 먹고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
거칠 것 없는 호기 - 윤결
「시정기(時政記)」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名世, 1518~1548)를 술자리에서 변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윤결은 성격이 고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호를 취부(醉夫: 취한 사나이)로 지을 만큼 술을 좋아하였다. 술에 취하여서도 그는 언제나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
문정황후 수렴청정 시절 진복창이 득세할 때의 일이다. 한번은 진복창이 주최하는 연회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될 일이 있었다. 그 자리가 탐탁치 않았던 윤결은 술을 연거푸 마시고 진복창에게 토해버렸다. 후에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간악한 자가 준 술을 어찌 뱃속에 담아 둘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천하의 풍류 가객 - 정철
정철(鄭澈, 1536~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시인으로 호는 송강(松江)이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의 쌍벽으로 불린다. 그의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들은 그가 술과 함께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지은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는 40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사랑을 받고 있다.
( 한 잔 먹어 보세 또 한 잔 먹어 보세. 꽃 꺾어 셈을 하면서 한없이 먹어 보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어져서 가거나 호화로운 상여에 만인이 울면서 따라가거나, 억새풀과 속새와 떡갈나무와 백양나무 숲에 가기만 곧 가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함박눈, 음산한 바람이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 같은가. 하물며 무덤 위에 잿빛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장진주사는 인생이 덧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나서 후회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젊을 때 술을 마시며 즐기자 라는 내용의 사설시조이다.
파격의 명문장가 - 임제
임제(林悌, 1549~1587)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시인으로 호는 백호(白湖), 겸재(謙齋)이다. 임제는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며, 아부하지 않는 천성으로 인해 벼슬 운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개탄하며 벼슬길에 물러난 임제는 명산을 찾아 시문을 즐기며 호방하게 여생을 보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술로 울분을 삭혔다. 임제는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기녀들과의 사랑, 그리고 양반사대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죽을 때 자신을 위한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평안감사로 임명을 받은 후, 개성의 황진이 묘에 들러 시 한 수를 읊고 술을 부어주었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불세출의 여인 - 황진이
황진이(黃眞伊, ?-?)는 조선시대의 명기이다. 본명은 진(眞)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황진이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가창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자존심도 강하여 그녀가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일,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또한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었으며 글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녀라는 독특한 직업 속에 술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술과 더불어 사는 풍류적이고 낭만적인 삶 가운데서 지어진 것이다.
시와 술로 한 평생을 삼은 주당 - 권필
권필(權齬, 1569∼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호는 석주(石洲)이다. 한문소설 [주생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시 속에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기도 하였으며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기도 하였다. 선조 20년(1587)에 장원급제를 했지만 임금에게 거슬리는 글자가 있어 과거에서 떨어졌다. 권필은 그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광해군 4년(1612)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척족(戚族)들의 잘못된 행실을 풍자하였는데 그것이 광해군에게 발각되어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 떠나는 날, 장독이 퍼지고 거기다가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과음하여 이튿날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권필은 「희제(戱題)」라는 시에서,
시는 고민 걷어가기에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주기에 잔을 들었지
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자신의 한과 분을 달래는 것은 시와 술 밖에 없다는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다른 그의 시를 보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전함을 술로 달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만나 술을 찾으면 술이 없더니 / 逢人覓酒酒難致 술을 두고 님 그리면 오지를 않네 / 對酒懷人人不來 평생 내 몸의 일이 매일 이러하니 / 百秊身事每如此 크게 웃고 홀로 서너 잔 술을 기울이네 / 大笑獨傾三四杯
안빈낙도의 표상 - 윤선도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으로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윤선도는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으로 불린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 정치 권력 면에서 약한 남인 출신이었다. 그래서 오랜 은거 생활과 유배생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기간을 통해 수많은 한시와 시조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그는 보길도에서 은거하며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술과 시로 세상을 살았다고 한다. 윤선도는 그가 지은 낙서재에서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와 술을 한 잔 걸치고서는 어부사시사를 노래 부르게 했다. 또한 남쪽 산중턱에 있는 자연암석의 옥소대 위에서 채색옷을 입힌 기녀에게 풍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게 하여 연못에 그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감상하기도 했다. 유배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사치스러운 삶이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았던 탓인지, 그의 술사랑에는 기행이나 파격이 뒤따르지 않았다.
품격 높은 주당 - 송민고
송민고(宋民古, 1592~?)는 조선 중기의 서화가로 호는 난곡(蘭谷)이다. 송민고는 삼절(三絶)로 불릴 정도로 글, 글씨, 그림이 뛰어났다고 하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산수도(山水圖)」가 있고 문집에 『난곡집(蘭谷集)』이 있다. 그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했다. 그 후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송민고는 혼란한 정치판에 뛰어 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에 은거하며 살았다. 그런 그의 벗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술이었다. 그 중 조속(趙涑, 1595~1668)과의 일화가 야담에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강 조속이 전라북도 임피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자, 난곡 송민고가 한산에서 조속을 찾아왔다. 조속은 그를 매우 반가워하며 술상을 차려 대접했다. 많은 술잔이 오고가고 송민고는 만취하여 쓰러져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조속은 즉시 관아에 있는 말에 태워 송민고를 서재로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갔다. 송민고는 말에서 내려 서재에 쓰러져서는 눈을 부릅뜨고 조속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내 시를 다 지었네.” 하고는 낭랑하게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바람결에 송별가가 벽제관에 흩어지네. / 送客風驪散碧蹄 관로의 역정이 꿈에서처럼 지나가니, / 官路驛亭如夢過 몸이 이미 작은 다리 서쪽에 이른 것도 몰랐네 / 不知身已小橋西
반드시 취해야 붓을 잡는 화가 - 김명국
김명국(金明國, 1600∼?)은 조선 중기의 화가로 일명 김명국(金鳴國), 김명국(金命國)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는 연담(蓮潭), 취옹(醉翁)이다. 김명국은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호방한 성격으로 해학에 능했다.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취옹(醉翁: 취한 늙은이)일 만큼 술을 좋아했다. 주당으로 알려진 화가들이 그렇듯이,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술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면 술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졌다고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한 후에야 그림그리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도 술에 취한 후 그림을 그려야만 그의 재능이 다 발휘 된다고 말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김명국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질 않았고 또 술에 만취하면 만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취해야 그림을 그리고 또 너무 취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명국이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술에 취하여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은 대부분 술에 취해 재빨리 그려낸 듯한, 굳세고 거친 필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민정중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노봉(老峯)이다. 인조 26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직언을 잘 하여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민정중은 그 아우인 민유중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두 형제는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이에 아버지 민광훈이 그들에게 금주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에 관한 일화가 야담 『동패락송』 에 나와 있다. 민정중과 민유중 두 형제의 아버지가 강원도 관찰사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민정중 형제도 근친(近親: 멀리 있는 보모를 찾아가 뵘)을 하러 강원도에 와 있었는데, 거기 머물면서 형제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형인 민정중은 승지에 임명되었다는 어명을 받았고, 아우인 문유중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의 금주령도 그날만큼은 느슨해졌다. 형제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술을 마셨고, 흠씬 취하게 됐다. 더는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연달아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하인이 관찰사의 분부라면서 더는 가져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정중이 취중에 크게 호통을 쳤다. “너희 사또 나리의 접대가 어찌 이 모양이냐?” 사또라 하면, 곧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데, 민정중은 너무 취해 자신의 아버지를 험담한 꼴이 된 것이다. 후에, 술이 깬 두 형제는 실언을 한 것에 크게 놀라 문 밖에 거적 자리를 깔고 처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관찰사는 웃으며 꾸짖지 않았다고 한다.
달관에 이른 주당 - 김창업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로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노가재(老稼齋)이다. 숙종 7년(1681)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東郊) 송계(松溪)에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스스로를 노가재라 부르며 향리에서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김창업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것은 그가 지은 시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醫員(의원)이 病(병) 다 고치면 北邙山(북망산)이 져려 하랴 아히야 盞(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삽작문 개 짖는 소리에 반가운 벗이 찾아오는구나. 아이야! 점심 겸해서 마실 테니 외상으로 막걸리 상이나 차려오너라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 최북
최북(崔北, ?-?)은 조선 숙종·경종·영조 시대의 화가이다.원래 이름은 최식(崔埴)이나 스스로 이름을 최북(崔北)이라고 개명 하였다.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호생관(毫生館)이라는 호를 지었으며, 자신의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최칠칠(崔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만의 조형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북은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특히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술에 취해 그가 벌인 행적들을 보면 과연 조선의 주당이라고 할 만하다. 최북은 하루에 5, 6되의 술을 마셨고 집안의 책과 종이로 술을 바꿔 먹어, 세간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광'이라 불렀다. 이른바 예술인치고 구속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최북은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이름을 얻지만, 조선 중기 엄격한 신분제의 구속은 일개 화원(畵員)이었던 최북의 영혼을 억누르기에 충분했다. 그림 실력으로 이름이 나자 숱한 청탁이 들어왔다. 어느 날 권문세가의 한 귀인이 찾아와 최북에게 그림을 청했다. 그런데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최북은 그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이에 귀인은 매우 화가 났다. 천한 그림쟁이가 양반 부탁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귀인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최북에게 협박을 했다. “감히 양반의 명령을 거절하느냐, 이 괘씸한 놈. 나에게 그림을 그려주지 않으면 네 심신이 편치 못할 것이다. ” 이 말을 들은 최북의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최북은 술을 진탕 마신 뒤, 문갑 위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서 자신의 눈을 찔러 버린다.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차라리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 그 이후, 최북은 애꾸가 되었고 늘 반 안경을 쓰고 다녔다. 그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이한 행동과 술, 그림을 벗 삼아 한평생 살았던 최북은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 잠이 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밤에 내린 폭설로 죽음을 맞게 된다.
‘술낚시’의 원조 - 박지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다. 호는 연암(燕巖)이다. 박지원은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한 실학자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린 『허생전』, 『호질』, 『양반전』 과 같은 한문소설들은 당시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였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문학계,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연암 박지원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벼슬길에 오른 것도 만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선비들이 들끓었다. 그 손님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박지원의 아내는 손님이 올 때만 술을 마시라고 박지원에게 통사정을 했다. 집안 사정을 아는 박지원 역시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언제나 술이 고팠다. 1784년(정조 8년)의 어느 날의 일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관인 이 승지가 입궐하는 중이었다. 진고개를 지나는데 갑자기 초라한 선비 하나가 앞을 가로 막고는 이렇게 말했다. “영감, 누추하지만 잠깐 저희 집에 들렀다 가시지요. 바로 저깁니다.” “...나랏일이 바빠 그럴 겨를이 없소.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뉘시오?” 그러나 그 선비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임금을 모신다고 도도하게 군다느니, 담배 한 대 피우고 가라는데 비싸게 군다느니 갖은 핑계를 다 대며 놓아주지 않았다. 입씨름에 지친 이승지는 할 수 없이 그의 집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손님 오셨으니 술상 내 오너라.” 그 선비가 안에다 대고 외쳤다. 이윽고, 막걸리 두 사발에 안주라고는 김치밖에 없는 조촐한 술상이 나왔다. 술상이 나오자 선비는 술을 권하지도 않고 자기 잔의 술을 냉큼 마시더니, 이 승지 앞에 따라 놓은 술도 가져다가 다 마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승지가 기가 차서 그 선비에게 물었다. “도대체 나를 청한 이유가 뭐요? 그리고 당신은 뉘시오?” 그 선비는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영감! 달리 생각 마시오. 오늘은 영감이 내 술 낚시에 걸려들었소이다. 하하하……” 좋아하는 술을 마실 수 없게 된 박지원이 손님이 와야만 술상을 내주는 아내를 속이고자 한 일이었다.
쉰(시큼하게 쉰) 술값 치른 사연 - 김병연(김삿갓)
김삿갓(金笠, 1807~1863)은 조선시대의 방랑시인으로 본명은 병연(炳淵)이다. 주로,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 불렀다. 폐족자(廢族子: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벼슬을 할 수 없는 자손)이기 때문에 벼슬을 할 수가 없었던 그는 20세 무렵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바람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도는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방랑생활 가운데 그의 위안이 되고 벗이 되는 것이 술이었다. 황오(黃五)는 녹차집(綠此集)에서 김삿갓을 평하기를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는 기인”이라고 평했다.
김삿갓이 어느 여름날 고개를 넘다 목도 마르고 해서 주막에 들렀다. 김삿갓은 주모에게 탁주 한 사발을 청했다. 주모는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술값을 떼일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너무 야박하게 내쫓는 것도 그렇고 해서 시큼하게 쉰 탁주를 한 사발 내 놓았다. 김삿갓은 더운 터라 탁주 한 사발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그 맛이 시금털털하였다. 김삿갓은 주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고 탁주 값을 물었다. 주모는 탁주 값이 두 닢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김삿갓은 주모에게 네 닢을 주었다. 주모는 어리둥절해 하며, 네 닢을 준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김삿갓이 말하기를, “ 두 닢은 탁주 값이요, 나머지 두 닢은 초 값이요.”
시대를 조롱한 희대의 익살꾼 - 정수동
정수동(鄭壽銅)-1808~1858)은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호는 하원(夏園)이다. 본래 역관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생업을 돌보지 않고 방랑생활을 즐겨 늘 가난하였다. 그는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불만을 느껴 광인처럼 행동하였고, 그가 권력이나 금력을 향해 날카로운 풍자와 야유로 저항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시는 번거로운 문장이나 허황한 형식을 배격하고, 간결한 가운데 높은 격조를 담고 있다. 정수동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발한 익살꾼'이라 불렀다. 그는 흐르는 물과 같이 세상에 매달리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정수동은 돈과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술만 마시면 기이한 행동과 해학을 연출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풍류객이었다. 술을 매우 즐겨 마셨으며 술 한 두 잔 마신 후면 세상을 향한 비판과 풍자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곤 하였다.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 때 저승에서도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술안주 얻어먹는 재치 정수동이 하루는 목이 칼칼하여 친구를 찾아가 술을 청했다. 주인이 곧 술상을 들여왔는데, 안주가 시원치 않았다. 정수동은 심술이 났다. 그래서 곧 주인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안주 없이 어찌 술을 먹을 수 있겠나? 내가 타고 온 나귀를 잡게.” 그러자 주인이 놀라며 물었다. “아니, 자네 갈 적엔 뭘 타고 가려나?” “저 뜰에 노니는 닭을 타고 가지.” 그 주인은 닭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락호(破落戶)시절의 기억 -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고종의 아버지로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흥선대원군이 대권을 잡기 이전, 그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의식하여 일부러 자신을 파락호(破落戶)로 위장한다. 그는 세도가들의 잔치집이나 연회에 일부러 찾아가 술을 얻어 마시고 추태를 부리기도 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낮추었다. 혹시라도 종친에게 품을 수 있는 한 가닥 의심을 없애려는 의도에서였다. 대원군이 상가 집을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 마시고 주정을 하기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상갓 집의 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양반의 신분으로, 보잘 것 없는 건달이나 잡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노름판에 끼어들어 노름을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흥선대원군은 어떤 때는 술값이 모자라 자신의 난초 그림을 팔기도 하는 등 거의 젊은 시절을 술독에 빠져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야망을 잊지 않고 술자리를 통해 민심을 살피고 세도가의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을 기용한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 춘홍이라는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날도 거기서 술을 마시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있던 군금별장 이장렴(李章廉)이 시비 끝에 그의 뺨을 치며, "나라의 종친이 기생집에서 외상술이나 먹느냐?" 고 호통을 쳤다. 이 일을 기억한 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후 그를 불렀다."지금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느냐?" 이장렴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원군께서 예전에 기생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을 하신다면 다시 뺨을 때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기뻐하며 그에게 술상을 대접했다.
술과 여자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화가 - 장승업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화가로 불린다. 호는 오원(吾園)이다.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장승업은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예술적 영감을 북돋아주는 매개가 바로 술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딘가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해서, 임금이 궁궐로 와 그림을 그리게 하면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을 정도이다. 또 결혼을 했지만 부인과 단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술을 목숨처럼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고 받은 돈은 주막에서 술 먹는데 다 허비하였다. 그에게서 그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랑방과 술집이 바로 그의 집이었다. 세상에 널린 집들을 전전하며 장승업은 뜬구름 같은 일생을 보냈다. 특히 그림을 그릴 때 고운 여인네에게 술병을 들리고 술을 따르게 하여야 신이 나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장승업의 생애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네가 가서 승업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말을 해 보아라.” 이 명을 받은 기생은 장승업에게 술을 따르며 그림 그리기를 종용했다. 이에 신이 난 장승업은 그 여인이 따라 준 술을 마시며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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