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나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좋다. 남성도 중년 신사보다는 청년이 좋다.
가다가 낯선 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기 하나 가득 청년 장정들이 어깨를 버티고 앉아 담소하고 있은 것을 볼 때,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후끈해지고 미소가 절로 부풀어 오르며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자신이 만만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설혹 그들의 담소가 유치하고 가다가는 지나치게 건방진 때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탓할 바 없는 무관한 일이다. 정의와 용맹과 이상에 불타는 그들의 젊음은 오늘날 그들의 조국이 낡고 병들었어도 내일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조국을 세울 수 있는 건전한 반석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김향안 수필집, <월하의 마음>에서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의 전시회에서 김환기의 27-11-70 작품을 보며 오래전 그의 부인인 김향안여사가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열었고 2004년에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났다. 그 당시에도 참 대단한 여성이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일연수요문화데이 회원들에게 김향안에 대해서 정리해 보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며... 김향안(본명은 변동림)을 알아 보려면 그녀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서양화가 구본웅(1906~1953)은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이고, 숙부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유력 인사 구자옥이다. 어머니가 구본웅(발레리나 강수진의 외조부)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어릴때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다쳐서 불구(곱추)가 되었다. 구본웅은 계모 변동숙의 손에 자라게 되는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낳은, 언니와 26살 차이나는 이복 여동생이 변동림이다. 구본웅은 장애 때문에 소학교에 제 때 들어가지 못했고 몇 년 늦깎이로 입학하고 반 친구들이 곱추 구본웅을 멸시하였지만 김해경(필명 이상)만은 구본웅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고 이후 둘은 학교를 함께 다니며 더욱 친해졌다.
2. 이상(李箱)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오감도>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종생기>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날개>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때 나이 많은 조카 구본웅의 소개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변동림은 이상을 만나게 되고 둘은 1936년 6월 결혼하기에 이른다. 신혼을 즐기기에는 이상은 너무 피폐해 있었고, 햇볕 하나 안 들어오는 셋방에서 이상은 내내 누워 있었고 변동림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갈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보다못한 구본웅이 이상(이모부)에게 일본에 가서 요양이라도 좀 하고 오라고 경제적 도움을 준다. 결혼 석달만에 이상은 일본으로 혼자 떠나게 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고 일본으로 달려간 변동림 앞에서 이상은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김향안(변동림)의 회고를 보면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
“그(이상)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김향안(변동림)은 회고했다.
그녀가 새로이 찾은 사랑은 서양화가 김환기. 육척 장신에 악기도 잘 다루고 글도 잘 쓰고, 서울대 미대, 홍익대 미대교수였는데, 문제는 그는 유부남에 세 딸까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녀의 스물 여섯 연상 언니, 엄마같은 언니 변동숙은 결혼을 엄청 반대하게 된다. 변동림은 결혼 반대에 부딫이자, 이름을 바꾸게 된다. 변씨에서 김씨가 된다. 그리고 김환기에게 말한다. “당신의 아호 향안(鄕岸)을 나한테 줘요 그러면 평생 그 이름으로 살겠어요.” 그래서 ‘김향안’으로 김환기와 재혼(1944년)하게 된다.
한국 근대 회화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 화백이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기까지에는 부인 김향안(1916∼2004)여사의 물심양면 내조가 있었다.
두사람은 55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63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74년 김 화백이 세상을 떠나자 김향안 여사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78년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92년 서울 부암동에 사재를 털어 건립한 환기미술관은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예술과 열정으로 부부애를 과시한 두 사람의 유해가 김 화백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 안치된다. 김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36년 만이다. 고인의 아들 화영(54·환기재단 이사장)씨는 11월 2일 부모의 유해를 안좌면으로 이장하는 협약을 신안군과 체결할 예정이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김 화백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뒤 뉴욕 시립공동묘지에 안장됐으며 부인은 2004년 타계해 남편 곁에 묻혔다.
3. 김환기(1913~1974)전남 신안 안좌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수화(樹話). 추상적 조형언어로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한 대표적 서양화가이다. 도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고 일본대학 미술부에 재학중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서 미술수업을 하는가 하면 자유미술협회에 참가했다. 이과회전(二科會展)에 〈종달새가 울 때〉·〈25호실의 기념〉을 출품해 입선했으며, 1936년 11월 도쿄 천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일본의 자유미술협회전 회원으로 추천되어 적극적으로 출품하면서 193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큐비즘적 시각을 받아들이면서 순수조형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더욱 기울었고 1930년대 고전적인 화풍이 자리잡고 있었던 우리나라 화단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추상미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유영국·이규상 등과 함께 1948년 신사실파라는 그룹을 조직하였고, 한국 현대미술의 초기 시절을 장식했다. 1952년 피난시절에 부산 뉴서울다방에서 〈달밤〉·〈산〉 등으로 개인전을 열고 이어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56~59년까지는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1962년에는 홍익대 학장에 취임하고 1963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어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해에 뉴욕으로 간 그는 이때부터 종전의 향토적인 서정성이 더해진 추상에서 오로지 선과 점의 질서와 균형을 표현하는 작업으로 화풍을 바꾸었다. 이때의 대표작이 한국일보사 주최의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서, 화면 가득히 점을 찍어나간 작품이다. 뉴욕에서 뇌일혈로 죽은 다음해인 1975년 뉴욕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는 50점의 작품으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