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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속의 시인 노천명...
2016년 01월 31일 23시 01분  조회:5115  추천:0  작성자: 죽림
 

노천명 시모음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얹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천명(盧天命, 1912년 9월 2일 ~ 1957년 12월 10일)은 한국의 시인이다.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파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파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파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1]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다.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다.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와 함께 묻혀 있다.

 

 

 

노천명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한 “기원(祈願)”(조광 1942년 2월호),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 “勝戰의 날”(조광 1942년 3월호),

“부인근로대”(每日新報 1942년 3월 4일), 그리고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등의 시들과

“여인연성”(咸南女子訓練所 參觀記, 國民文學 1943년 6월호, 日文)같은 글 을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병과 강제동원을 정당화 시키는데 적극 협조하였다.

하지만“노천명”은 훗날 “한국전쟁”당시,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친일과 친공이 소설 “꺼삐딴 리”에서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처럼

“단순 기회주의자로서의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노천명--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英美)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랫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위의 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친일신문이었던 「매일신보」 1943년 8월5일자에 실렸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시로 조선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군인이 되길 종용하는 내용이다.

 

이윤옥 시인은 친일작가 노천명을 이렇게 풍자한다. 

 

황군의 딸 되어

소화 천황 만수무강 빌던

그날 

 

인쇄소 윤전기는

"그 처참하든 대포소리 이제 끝나고 공중엔

일장기의 비행기 햇살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를 불러 평화를 받어라"

찍어 내었지

바쁘게 

 

이윤옥 시인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되기 몇 달 전인 1945년 2월25일 시집

《창변》을 펴내고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시집 끝에 친일시 9편이 실려 있었는데 그해 해방이 되자 그녀는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시를 부분만 뜯어내고 그대로 팔았다고 한다.

 

한겨레 신문 2004년 10월3일자에는 '노천명 친일시 또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이 소개돼 있었다.

 

한겨레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 후 《창변》에서

친일시 부분만 빼고 다시 출간했지만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었다고 한다.

목차에서 친일시 제목만 나열돼 있던 마지막 페이지는 뜯어냈고 다른 시와 함께

친일시 제목이 인쇄된 부분은 친일시의 제목 부분만 창호지로 붙여 보이지 않게하여 출간했다고 한다.

뜯어낸 부분이야 확인할 수 없지만 창호지로 붙인 부분은

친일시의 제목을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총 4편이었다고 한다.

그 4편의 제목은 <흰 비둘기를 날려라>,〈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이었다. 

노천명이 그렇게 바랬던 증거인멸은 그녀의 바램으로 끝났던 모양이다. 

《창변》의 원본이 발굴됨으로써 그녀가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친일시 5편이 추가되었는데

제목만 본다면  <병정>, 〈창공에빛나는>, 〈학병>, 〈천인침>, 〈아들의 편지>였다고 한다. 

노천명의 친일시는 그녀의 시집 《창변》에 실린 9편이 모두가 아니란다.

앞서 <사쿠라 불나방>에 소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시 말고도

1944년 매일신보에 <신익>이라는 제목의 시를 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인 출신으로 가미가제 특공대에 나가 최초로 죽은 마쓰이 오장을 찬양한 노래라고 한다.

마쓰이 오장을 노래했던 서정주보다 더 앞서 발표된 친일시인 셈이다. 

 

 

조선일보 사람들

문예부흥│ 신세대 문인들 골방에서 나오다

 

오만하고 고독한 ‘슬픈 사슴’ ― 노천명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최정희가 1937년 4월 30일자로 사임하고

그 자리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낸 시인 노천명(盧天命)이 5월 3일자로 입사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노천명은 1935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처녀시 <내 청춘의 배는>을 동인지 《시원》

창간호(1935년 2월)에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기자가 되고 난 뒤 기자를 소재로 한 시 <호외>를 발표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에게는 별로 좋게 생각되지 않았던 듯 하다.

 

큰불이라도 나라 폭탄사건이라도 생겨라

외근(外勤)에서 들어오는 전화가

비상(非常)하기를 바라는 젊은 편집자

그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되어버린 슬픈 기계다

(중략)

오늘은 또 저 붓끝이 몇 사람을 매장할테냐은 훗날

젊은이 수기에 참회가 있는 날

그 날은 무서운 날일지도 모른다 ― 《조광》 1936년 9월

 

노천명은 훗날 “그럭저럭 한 10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였고 신문사도 제법 옮겨다녀 보았으나

여성에게 한해 이것은 화려한 직업은 못 되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도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문기자가 되기를 고집했다.

부모는 “여자가 신문기자를 하면 못쓴다. 시집을 갈 때도 데려가는 집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말렸지만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신문사(조선중앙일보)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처럼 아슬아슬한 붓끝 때문에 참회할 날이 올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

노천명은 기자 생활을 접고 용정, 북간도, 연길 등지를 여행한다.

조선일보 입사는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조선일보 출판부는 신문처럼 시간에 쫓기며 아슬아슬 펜대를 굴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여러 문인들을 접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겸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노천명은 여성 편집을 맡았다.

그는 최정희, 모윤숙, 이선희 등 여류 문인들을 필진으로 끌여들여 여성을 여성 문단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도 쓰기 시작했다.

북간도 여행의 감흥을 담아 처녀시집 《산호림》을 출간한 것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1938년이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도 이 시집에 실렸다.

 

노천명은 여류 문인들을 규합해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을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강경애, 김말봉, 김오남, 이선희, 모윤숙, 박화성, 백신애, 장덕조, 최정희 등

당대를 풍미하던 여류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었다.

노천명은 이 책을 내기 위해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수필 <오월의 사정>에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더라 얼굴이 요새 못됐다는 인사”라며

“메모첩을 보면 날마다 나갈 일이 있고 저녁 때 집으로 발을 옮길 무렵이면 정말이지 몸이 괴롭다.

여성문화총서를 내보려고 힘에 부치는 것을 애를 쓰고 다니노라니

정신적으로 지친 것을 속일 수 없이 육체로 나타나는 모양이다”라고 토로했다.

 

노천명은 내성적인 성격에다 오만할 정도로 도도했다.

경제부 기자 김광섭은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시인 최하림에 따르면 노천명은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동료와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다.

다른 기자와 실랑이 끝에 자신의 옷이 찢어진 일이 있었는데

노천명은 똑같은 옷감으로 다시 옷을 해 오라고 버티며 몇 년 동안 화해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말이 없다가도 한순간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한 번 토라지면 다시는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신문사에서도 결벽스러울 만큼 냉정했다.

남자 기자들과 비교적 스스럼없이 지냈던 최정희와는 달리 노천명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노천명은 “이 나라 남성들의 인색함과 완고함, 그 시멘트같이 굳어진

여성 무능력시 및 멸시의 관념은 어느 세월에나 청산이 될 것인지”라고 했다.

그는 시 <자화상>에서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대竹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 했다.

 

이런 노천명이 1938년 조선일보 사원 ‘부수 확장운동’에서 26부로 2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114부로 1위를 차지한 윤석중의 실적에는 턱없이 못 미쳤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개 2~5부에 그친 것을 감안하면

내성적 성격인 그로서는 놀라운 실적이었다.

 

노천명은 남자들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최정희, 이선희, 모윤숙 등 여류 문인들과는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이들은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서로 찾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서로 찾았으면

서로 찾지 못하는 때면 편지로써 마음을 서로 알렸다”고 한다.

노천명은 특히 최정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4후퇴 때 세간살림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도 최정희와 주고받은 편지는 꼭 안고 갔을 정도였다.

 

노천명의 냉정하고 도도한 성격은 오히려 남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다.

조선일부 학예부장이자 시인인 김기림은 한때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 밤 노천명의 집을 찾아간 김기림은 밤 늦도록 노천명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나오지 않자 발자국만 남기고 돌아갔다.

최정희는 “구두 발자국은 댓돌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나갔다”며 “

김기림 씨 하면 시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고 회고했다.

 

정작 노천명은 보성전문 경제학 교수 김광진을 사랑했다.

노천명이 1938년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안톤 체홉 원작의 <앵화원>에서

주인공 라프네스카야의 ‘아냐’ 역으로 출연했을 때였다.

김광진이 관객으로 와서 그에게 꽃다발을 전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광진은 유부남이었지만 노천명은 혼수감을 마련하면서 결혼을 준비했다.

그러나 본처와 이혼할 작정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노천명은 실연의 아픔을 안고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두 사람의 연애담은 유진오가 <이혼>이라는 소설로 작품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후 김광진은 6·25 때 본처도 뒤로 하고, 가수로 활동하면서

‘방가로’라는 다방을 운명하던 유명한 기생 왕수복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천명은 1939년 조선일보를 떠났다.

이후 조선문인보국회 활동을 하며 1942년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등의 시를 썼으며

1943년부터 매일신보 문화부에서 일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과 부녀신문사 등에서 일했다.  

 

노천명은 625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군에게 붙들려 이른바 ‘부역 문인’ 노릇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이 수복된 후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이때 노천명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던 시인 김광섭에게

“거기 있으면서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삼일절에 나가도록 하라”는 명령에 가까운 편지를 보냈다.

김광섭은 조선일보 출신으로 공보처 국장과 차장을 맡고 있던 이건혁, 이헌구 와 함께

세 사람 명의로 노천명의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썼다.

이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노천명은 1951년 4월 4일 출감했다.

노천명은 이후 ‘부역 사건’을 언급하는 사람과는 가차없이 절교했다.

박종화 역시 625 이후 부역 문인 문제를 언급하는 바람에 노천명과 서로 등지는 사이가 되었다.

 

노천명의 원래 이름은 기선基善이었으나

6세 때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자 ‘하늘의 뜻으로 살아났다’해서 ‘천명’으로 개명했다.

1957년 <이화 70년사>를 쓰던 중 뇌빈혈로 쓰러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책 『조선일보 사람들』 중 발췌 p.505~510 

 

노천명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애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망향(望鄕)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鶴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山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講道상을 치며 설교하던 村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마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叢)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봄의 서곡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 옷들을 받아 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분홍「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한번의 눈짓, 한번의 손짓,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즐거울 땐 꽃처럼 활짝 웃음으로 보낼 줄 알며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
드릴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 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비연송(悲戀頌)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사월의 노래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당신을 위해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구름같이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봄비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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