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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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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이성부 - 벼
2015년 12월 22일 02시 01분  조회:5072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성부<우리들의 양식>(1974)

(1) 주제 : 벼의 강인한 생명력, 서민들의 삶에 대한 연민

 

(2) 이성부(1942∼)광주 출생.  <시학> 동인. 1967년 김광협, 이탄, 최하림, 권오운 등과 1960년대의 시인으로서 이른바 현실참여, 혹은 사회시파의 흐름을 대표한다.

농촌의 현실과 고통을 정직하게 노래하는 한편, 전통적 서정과 민중적 연대감을 굳건히 지켜 가기 위해 애쓰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성격 : 예찬적. 상징적. 낭만적/  어조 : 격정적 어조

(4) 벼  -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민중의 표상, 민족의식과 생명 의지

(5) 시상전개 -

벼의 외면 --> 벼의 내면(덕성) --> 벼의 내면(태도) --> 예찬

(6) 공동체적 삶(이웃) - ㉠㉣㉤

(7) 벼의 상징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시어 - ㉥백성들(민중)

(8) 민중에게 가해진 고난, 시련 - 햇살, 바람, 죄도 없이 죄지어서

(9) ㉦불타는 마음, 가슴이 더움 - 저항의식

(10) 3연은 2연의 부연..

권력에 짓밟혀 서러움과 노여움으로 가득찬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민중들,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불의에 대한 저항심

(11) ㉩넉넉한 힘 - 사랑

(12)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과 민중의 모습

- 공동체적 삶, 인내, 너그러움, 희생, 저항정신, 사랑

 

 

이성부 시 모음 
☆★☆★☆★☆★☆★☆★☆★☆★☆★☆★☆★☆★
가을 사람에게
                          
        이성부

만날 사람도 없이
머물러야 할 장소도 없이
깊은 거리에 따라 들어가서
진 흙투성이인 마음 되어 나온 그대
참담해진 그대

가을 하늘 발판에 뜬
맑은 살결 하나 붙잡아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안간힘을 다 하지만
어느새 손을 펴보아도
빈 마음일 뿐
진흙의 손바닥일 뿐
그대 한 생애를 두고 몸 씻으면
씻겨질까 씻겨지지 않을 그것들이
다순 가슴 맞이할 수 없는
그것들이......
☆★☆★☆★☆★☆★☆★☆★☆★☆★☆★☆★☆★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서둘지 않게

            이성부 

오늘은 천천히 풀꽃들을 살펴보면서
애기똥풀 깨물어 쓴맛이나 보면서
더러는 물가에 떨어진 다래도 주워 씹으면서
좋은 친구 데불고 산에 오른다
저 바위봉우리 올라도 그만 안 올라도 그만
가는 데까지 그냥 가다가
아무 데서나 퍼져 앉아 버려도 그만
바위에 드러누워 흰구름 따라 나도 흐르다가
그냥 내려와도 그만
친구여 자네 잘하는 풀피리소리 들려주게
골짜기 벌레들 기어 나와 춤이나 한바탕
이파리들 잠 깨워 눈 비비는 흔들거림 
눈을 감고 물소리 피리소리 따라 나도 흐르다가
흐르다가 풀죽어 고개 숙이는 목숨
천천히 편안하게 산에 오른다
여기쯤에서 
한번 드넓게 둘러보고 싶다
☆★☆★☆★☆★☆★☆★☆★☆★☆★☆★☆★☆★
숨은 돌이 말한다

       이성부 

나는 내 안에서 솟는 불길
잠재울 줄을 안다
내 안에서 뻗쳐오르는
돌개바람 같은 욕망
참아낼 줄도 안다
마을이여 당산나무여
나를 좀 어떻게든 밀어올려다오
이 견디기 어려운
함묵緘默의 고빗길마다
응어리 하나씩을 뱉어 내놓았으니
그것들은 빛나고 빛나는 흰 이마
내 그리움의 다른 얼굴일 뿐
☆★☆★☆★☆★☆★☆★☆★☆★☆★☆★☆★☆★
안 가본 산 

      이성부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이성부

어머니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면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다.
우리들이 항상 무엇을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그 참모습을 알게 되듯이

어머니가 혼자만 아시던 슬픔
그 무게며 빛깔이며 마음까지
이제 비로소
선연히 가슴에 차오르던 것을
넘쳐서 흐르는 것을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신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 옛적 마음을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저도 또한 속 깊이
그 어머니를 갖추고 있나니
☆★☆★☆★☆★☆★☆★☆★☆★☆★☆★☆★☆★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이성부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 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
익는 술 

     이성부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 차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놓고
너의 넉넉한 잠 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 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 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

 

 
 

이성부(李盛夫, 1942- )

전남 광주생. 광주고등학교졸/ 경희대 국문과 졸. 
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2년 [현대문학]에 <소모의 밤>이 추천 완료, 등단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우리들의 양식>과 연작시 <전라도>를 통해 70년대 사회파 시의 흐름 주도.

시집 : 제1시집 <이성부시집>(69), <우리들의 양식>(74), <빈산 뒤에 두고> 등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전라도 1

좋았던 벗님은 멀리 떠나고
눈부심만이 내 방에 남아 나를 못살게 하네
못살게 하네 터무니없는 욕심도
꽃같이 잠들었던 법석대는 머슴도 착한 마음씨도
못견디게 설운 사랑도 저 모래밭도
九泉에 잠들었네
갈수록 무서운 건 이 노여움의
푸른 잠, 이것을 바로 이것을
땅 위의 모든 책들이 가르쳤네
어째서 책이 조심스럽게 말하는가를 이제 알겠네
이제야 알겠네 벗님도 가버리고
눈부심만 남은 밤을
어째서 그것은 깊이 살아 있고
곳곳에서 소리 없이 고함치는가를...

전라도 2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藝術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光州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는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 놓인다
드러누운 山河에는 
마음이 안 놓인다.

전라도 3

왜 나는 거역을 받기 시작했던가
헤어짐과, 그 차디찬 입맞춤으로부터
보드랍지 않은 정신으로부터
때로부터 저 거리로부터
왜 나는 조금씩 거역을 받기 시작했던가

내 눈에 뛰어드는 바다에도 바람에도
밥을 채운 위장에도
내 살을 뚫고 가는 빛과 어두움, 그 同志의 
저 많은 손발에도 심장에도
왜 나를 거역을 받기 시작했던가

노오란 얼굴이여
내 귀를 잡아 흔들던, 지난 밤 꿈이
참말로 이제
나에게는 반성의 손길임을 알겠다.
죽어가는 슬픔이 아니라,
탄생이다 아아 눈물뿐인

비가 오고 내 고향의 물이 고인다.
맨발로 밤을 딛어 자빠지는 곳
내가 밟은 것은 뱀이었다 피였다
꿈틀거리고 놀라고
재빠르게 튕기는,
싸늘한 혼란이 나를 껴안았다.

기다리는 아내마저 거역을 일삼는다.
새벽에 걷어찬 이불과 뜨신 방바닥과
기적소리와, 파묻히는 성욕과
저 모든 근심마저
왜 나를 거역하기 시작했던가
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던가.

전라도 4

두려움 무릅쓰고 너를 찾아갔다
도적처럼 천천히 고요함을 열고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어둠 속에
너는 자고 있었다 깨어 있는

사물이여 
빛이여
많은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 기어이 손을 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임이 오고 속떨리는
성욕이 오고 눈뜬 死者들이 왔다.

너그러운 밤은 놀라 물러가고
너는 얌전히 맞아들였다
더벅머리 선머슴을 껴안고
너 양갓집 계집은 밤새 흐느꼈다

집에 돌아오니
창백한 아침이
식구들과 더불어 굶주리고 있었다

전라도 5

벌판 끝에서 
외로운 늑대의 울음을 그 여인이 운다
옷벗은 주둥이로 울부짖고
목이 마르고, 그리고는 돌아서 간다
그가 섰던 자리에는 공허마저 없다
시간도 없다 죽어버린 언덕에
오직 한마디 뉘우침만 남는다
서울로 가신 님아

전라도 6

어쩌자는 말도 없이 내 떠나갔다
부두에선 밤을 새우고, 일을 찾아
다른 데를 기웃거리고, 정신 없이
정신도 없이 더 슬픈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은 남아 있다
아직도 내 살에 스며 있는 그대
더욱 많이 다가오는 그대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거리는 다름없고 우는 저녁도 한결같다
두루 찾았더니, 그대 있던 자리
그런데 보이지 않네 보이지를 않네
파고드는 노래의 빛깔 달라지고
숨쉴 산소마저 없고,
그러나 아직도 사랑은 남아 있다
아직도 내 살에 스며 있는 그대
더욱 많이 다가오는 그대

두 해가 지나갔다 말이 없는 사람
무자비한 자유, 잠을 잃은 잠이
나를 사로잡았다
침묵조차도 도무지 말이 없다
오, 굴복하는 사랑의 피의 눈이여
두려워 말고 옷을 벗어다오
좀더 확실하게 옷벗어다오

전라도 7

노인은 삽으로 
영산강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 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람을 혼자서 퍼올린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
불은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전라도 8

파도는 오지 않고
기다리는 배도 오지 않고
바다는 죽고 싶고
나는 답답하고, 그 어두움이다
성급하게 쌓인 무등산 눈이
먼 데를 보고 있다 겨울과
港口를 보고, 다른 데를 보고
그리고 우리의
가난의 權利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싸움은, 문학은, 우리들은,
떠나고, 또 오는 것이다
그가 오는 것이다
오오 파도가, 우리들의 파도가

 

 

 

 


광주 대인동 출신 이성부 시인의 <무등산> 시비가 광주고 교정에 건립,

 시인과 생전 둘도 없는 절친한 동기였던 소설가 문순태씨가 "둘중 산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의 추도사를 하자고 약속했다"면서 '이승의 산행을 끝낸 성부에게'라는 추도사를 낭독하자 금세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문씨는 추도사에서 "너의 빈 자리는 초겨울의 빈 들녘처럼 쓸쓸하다. 지금 제막식에서 의식이 짱짱했던 한 시인의 칠생 평생을 본다. 시인은 시로 태어나 다시 시로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화가 올 것 같다"고 추모했다.

 

<추도사
이승의 山行 끝낸 성부에게

이성부 시비 제막식에 부쳐=

 

 

성부야, 55년 동안 불러온 이름인데 이제 네 대답을 다시 들을 수 없구나어젯밤너를 그리워하며 이 글을 쓰느라밤새도록 뒤척이다가새벽에 비 맞으며 산에 올랐다생오지 마을 뒷산 소나무 숲길을 걷다가울컥 솟구치는 너에 대한 그리움 주체할 수 없어무등산을 바라보며 네 이름을 수없이 불러보았으나빗소리만이 헛헛한 내 가슴을 아프게 적셔주더구나.

작년 2월이었지세상 뜨기 열흘 전수아 씨로부터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석학이랑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서재성이와 셋이서 서울대병원으로 찾아갔었지너를 만나면 절대 눈물 보이지 말고 희망적인 말만 하자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데도마른나무가지처럼 앙상한 네 모습을 보자 가슴이 저미는 것만 같았었다그 때 너는 칠십 년을 살고 이렇게 가는 것도 행복하게 생각한다.” 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눈물을 주주룩 흘렀었지너는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시울이 펑 젖은 눈에 친구들의 얼굴을 담고 있었지.

우리들은 핏기 없는 네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끝까지 힘을 내라고 말했지만마음속으로는 마지막 이별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단다그리고 며칠 후 재성이가 엉엉 울면서 너의 비보를 전해왔을 때마지막 보았던 너의 그 쓸쓸한 미소가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네가 떠난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지금이라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순태야 나 지금 무등산에 와 있다어디서 만날까.” 하고 전화를 할 것만 같다.

무등산을 좋아했던 너는 언젠가 무등산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했다너는 어떤 시인보다 무등산을 사랑했었지. ‘무등산은 네 자신에 대한 뼈저린 성찰과 시대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나자너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절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혀자기학대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고향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탄하던 너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분노 때문에 일체의 시 창작을 중단하기까지 하지 않았더냐너는 고통을 이겨내려고 시를 떠나 산으로 갔지너의 오랜 산행은 구도의 길찾기와 같은 고행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너는 산에서 새로운 자아와 희망을 찾아 다시 시로 돌아왔지그 후 네가 다시 시를 쓰게 한 것은 산이었다산이 네 시를 품어주었고 네 시가 산을 감싸 안아준 것이었다.

성부야이제 영원히 산을 품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안하냐이제 네가 산이 되었으니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냐산으로 돌아가 그리운 어머니 품에 안기니 마음 포근하냐그래 김현승 선생님 다시 만나니 오지고 행복하냐세상 떠나기 두 달 전광주에 왔을 때 너는 갑자기 김현승 선생이 보고 싶다고 했었지무등산 김현승 선생님 시비 앞에 한참 서성이던 너는 소리 내어 눈물을 낭송하기도 했었지.

 

그리운 성부야너를 떠나보낸 후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커서가슴이 아리다 못해 한동안 마음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증에 빠졌었다네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 공허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돌이켜 보니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고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신록이 싱그러운 여름사방이 푸르름으로 꽉 차 넘치는데네가 없는 세상은 마치 초겨울의 빈 들녘처럼 쓸쓸하기만 하구나.아마도 헤어짐이 있기에 인생은 슬프고 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너를 보내고 우리 시대 한 시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일제강점기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광복과 6.25전쟁, 4.19와 5.16 군사구테타그리고 5.18 민주항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온의식이 짱짱했던 한 시인의 70년 생애를 돌아본다너는 분명 영혼이 메마른 한 시대어둠 속에 반짝였던 별이었다아니 한 떨기 꽃이었다시인은 별이 되어 반짝이고 꽃으로 피어날 수 있으니어쩌면 시인에게 생물학적 생명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시인의 죽음은 시에서 태어나 다시 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느냐아쉬움과 그리움 속에서 태양은 뜨고 지며꽃들은 다시 피고 지고시간은 이승의 한복판을 강물처럼 덧없이 흐르지만너는 영원한 시간 속에 별과 꽃으로 머물며강물 위에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이 되고 있음을 나는 알 것 같구나그러고 보니 너는 사라진 것이 아니더구나다만 이승의 산행을 끝냈을 뿐이더구나비록 너는 갔지만 네가 남긴 추억과 정신적 소산은 참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단다지상에 머물렀던 동안에 남긴 너의 일상은 꽃처럼 너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피어나영혼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사랑이 되고 위로의 노래가 될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리운 성부야오늘 우리는우리들이 50여년 전 시인의 꿈을 키웠던 모교 교정에 너의 시 무등산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이 자리에는 너의 가족들과너를 사랑하는 선배님들과 후배친구들이 모였다모두들 너의 시를 읽고 그리움을 쓸어안고 있다오늘 이 모습을 네가 볼 수 있다면너는 결코 먼저 간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너는 이승의 강을 건너서도 행복한 시인로구나이제 속세의 번뇌와 욕망미련과 아쉬움 모두 털어버리고 자유로운 영혼 되어 훨훨 날으거라.성부야부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식과 평화 누리거라.

 

2013년 6월 23일 친구 문순태(소설가)


 유가족인 미망인 한수아씨는 남편이 서울대 병원 병상에서 별세 5일전 새벽 2시에 아프지 않았던 때처럼 꼿꼿하게 앉아 '멀리 보아서도 바다에 걸쭉하게 뜬 섬입니다…'라는 생전 마지막을 고했던 시 '낭개머리 바위에 앉아'의 창작배경을 설명하고 낭독했다. 

 

 유족대표로 인사하는 부인 한수아 씨.

 

  별세 직전 병상에서 쓴 유작시 "낭개머리 바위에 앉아" 낭송

 

 

판소리 심청가 중 한 대목, 기세규 씨 (광고 24회),

 

 

 이애숙 씨의 살풀이춤 한마당 (이화전통무용학원장)

 

 


 광주고교 교내에 설치된 '광고(光州高校)문학관'내 '이성부 시인의 방'이 마련된 가운데 광주에서 '이성부 시인의 밤'도 열리였다.



 이성부 시인은 광주고를 거쳐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지 시 추천완료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성부 시집'과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야간산행', '지리산', '산이 시를 품었네', '도둑산길' 등 다수를 펴냈다. 현대문학상과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광주시 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영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성부 시인을 떠나 보내며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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