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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015년 12월 23일 23시 44분  조회:5350  추천:0  작성자: 죽림

 

묘비명 / 김광규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이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이고

 

 

 

나의 선생의 제자이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이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이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이고

적이고

환자이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 
현재 한양대 독문학 교수로 재직중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발표. 제1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4년 2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 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4년 5시집<아니리>로 제 4회 편운문학상을 수상 
시집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대장간의 유혹> <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

          <살아남은 자의 슬픔>등 번역 시집과 영역 시집 독역시집 등

 

--------------------------------------------게시 목록----------------------------------------------------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묘비명 / 김광규 
좀팽이처럼 / 김광규 
안개의 나라 / 김광규
밤꽃 향기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연통 속에서/김광규
달력 /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 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묘비명 / 김광규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2006년 2월호, <젊은 시인들의 중견 시인 읽기>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밤꽃 향기 / 김광규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시집 -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콜로라도 고원을 달려가던 인디언이 갑자기 벌판 한 가운데서 내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렇게 고속을 달려가면, 영혼이 육신을 쫓아올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을 멈추어 서서 영혼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점보제트기를 타고 유럽에서 한국까지 불과 열 시간만에 날아온 날, 현지 시간 적응한답시고, 반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에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는 호텔 방인가, 국제선 여객기 속인가, 어느새 집에 돌아왔나, 분별이 안 되어 어리둥절…… 
억지로 아침 먹고, 늠름하게 출근하니, 그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못 가고, 하품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은 서울에 돌아왔지만, 육체는 아직도 서양의 어느 도시를 헤매고 있구나 
인디언과 다른 점인가 
정신보다 느린 나의 육체가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고비 사막을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를 찾아오려면, 앞으로 두 주일은 더 걸릴 듯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연통 속에서 / 김광규

 

 

바닷가 나무 없는 벌판에
직각으로 꺾어진 시멘트 건물
겨우내 비워둔 방
석유난로 연통 속에서
새끼참새 우짖는 소리
짚가리도 처마도 없고
아무 데도 깃들 곳 없어
바람막힌 연통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음산한 서북향 연구실에서
난로불도 못 피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가를 서성거린다
연통 속에서 함석을 긁는
새발짝 소리 안쓰러워

 

 

 

달력 / 김광규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작은 사내들.

 

                                             - 김광규 -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그들은 어서 빨리 늙지 않음을 한탄하며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나가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아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교대역에서

 

                          김광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늙은 소나무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 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다시 목련

 

                                   김광규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네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더니

목련은 한잎두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볼까

 

 

 

영산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엇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앗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산은 이 곳에 없다고 한다.

 

 

 

 

능소화

 

                                김광규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자유시

 

                      김광규

 

시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유다

다만 종이에 써서

누구에겐가 보여 주고

발표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시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책상서랍에 넣어 둔 것은

시가 아니다

 

마음껏 발효할 수 없을 때

좋은 술은 익을 수 없어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를 받아

마시는 술은 피처럼

진하지도 않고

깊은 향기도 없다

(자유시는 그러므로

자유로운 시도 아니고

자유에 관한 시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술병

 

                        김광규

 

건강증진센터의 진단과 처방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술을 끊었다
지나간 반세기 동안 즐겨온 술을
끊어버리자
술 마시던 나와
술 끊은 나 사이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어
괴롭다
오랫동안 술 마셔온 나는
이미 늙고 병들었으니 불쌍하고
얼마 전에 술 끊은 나는
아직 어리니까 손자처럼 귀엽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몸과 마음이 갈라져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쓰러져 건강하게 살기는 
더욱 힘들 터인데

 

 
 
 

 

김광규(金光圭) 시인

 

  

1941년 서울에서 출생서울대 및 同 대학원 졸업.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83 <귄터 아이히 연구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등 시선집과 영역시집 『Faint Shadows of Love』, 『The Depths of a Clam』, 『A Journey to Seoul』,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 일역시집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시집『Tenues sombras del viejo amor』와 중국어 번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음. 譯書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집, 귄터 아이히 시선집 등이 있음.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과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상과 2008년도 이미륵상 수상.      

     

 


 

 

  김광규(金光圭) 시인.  1941년 1월 7일 일제말기의 경성부 통인정 74번지(현 종로구 통인동 74번지)에서 엄격한 유교 집안의 후손인 김형찬(金炯璨)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글을 쓴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의 일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교무실로 불려간 몇몇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문예작품 제출 공문이 내려왔으니 뒷동산에 올라가 작문을 하나씩 써서 내라 하였는데 얼떨결에 글을 써 본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리고 서서히 작문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당시 작문 교사였던 조병화 시인과 김광식 선생을 만난 때이다.

 

  이전까지에는 글이란 특별한 것을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던 그는 비로소 이 세상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시인의 집에 세들어 살던 여순경이 국화 화분을 깨뜨린 평범한 이야기를 쓴 <국화와 여순경>, 시골에서 기르던 묏새와의 추억을 쓴 <묏새의 추억> 등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최고 인기 잡지 《학원》지에 실렸는가 하면, 학교신문에도 그의 글들이 실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이 집 저 집을 몰려다니면서 이른 바 문예수업을 했었는데 당시 《여명》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만들 정도로 그 열의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신문과 교지를 만드느라 학교 수업도 빼먹고 출판사와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다른 학교 문예반 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는데,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지금 현역 문인으로 다수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다. 이전까지는 주로 산문을 써왔는데, 문예작품 낭독회 같은 학교 행사에 출품하기에는 산문보다는 시가 적절했고, 시가 아무래도 산문보다 한 수 위인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그느 그의 산문에 적고 있다. 그 무렵, 하이틴의 연정을 노래한 <한시에>가 서울 고등학교에서 주는 경희문학상을 받았고, <청자 앞에서>라는 시는 전국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문예》 문학 작품 공모에 당선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조숙하게 《현대문학》이나 《사상계》를 읽었으며, 고전음악을 들으며 음악실에 앉아 인생과 문학을 논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자신을 본인은, 문학적 허영심을 과시한 건방진 청소년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에 진학했다. 그에게는 본격적인 시인의 문학수업이 시작된 시절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청준, 김주연, 염무웅, 박태순, 정규웅, 홍기창, 김현, 김치수, 김승옥 등의 문학 분야의 인재들과 문우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연이은 4·19와 5·16으로 인해 그의 대학 1∼2학년 시절은 한마디로 만신창이 신세였다. 3학년이 되어 그가 독문학에 깊이 빠져 있을 때, 동료들은 하나 둘 신춘문예와 문예지로 등단을 하고 더러는 동인지를 만들어 문단에 나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때 그는 독문학의 일가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우리 글을 쓰기보다는 세계문학과 독일문학에 전념하며 대학 후반기를 보냈다. 

 

​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군대에 들어갔다. 사병으로 입대해서 대한민국의 남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평범한 경력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대한 열의는 군대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병영의 체험들을 쓴 글들을 신춘문예에 여러 차례 투고했다. 그때마다 예심을 통과하는데 그치곤 하였는데 그 결과, 고등학교 시절의 시인의 문예 경력이 주는 우월감에 젖어 있던 자신감이 크게 허물어지며, 자신의 문학에 대하여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다. 기실 문학을 하는 이가 자신의 글에 대하여 객관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문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를 올곧게 쓰는 이는 누구나 자신의 시에 대해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크게 깨달었다

 

  그는 제대 후 정혜영(鄭蕙英) 씨와 결혼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독일의 뮌헨대학교에서 유학했다. 

 

  독일로 향한 김광규 시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의와 인간으로서의 용기를 엿볼 수 있다. 가부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견 교사로서의 안정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인은 오직 향학의 일념으로 홀연히 타국으로 가 손수 장을 보고,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새로 배우는 입장이 되어 20대 안팎의 학생들과 교통해야 했다.

 

  바이에른의 알프스 지역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촌에서 시작된 시인의 독일 생활은 고독과 향수의 연속이었다. 시인의 외톨이 성격은 그것의 깊이를 더해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고독이나 향수라는 말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시인은 그런 생활을 하면서 많은 단어들을 새롭게 배웠다. 물론 독일어 단어들만이 아니라 한글 단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어의 올바른 의미를 시인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체험으로 얻어낸 듯 싶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의 시작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사물을 명명한 것이 바로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 상식을 떠나 언어 자체에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무의미한 짓을 해 왔음을 깨달았다.” “문학이나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렇듯 시도 한마디로 규정될 수 있는 완성된 이상형을 가질 수는 없다. 시는 결코 아름다운 꽃만도 아니고, 이미지의 세련된 나열만도 아니고, 사라진 민요의 부활만도 아니며, 현실 개혁의 구호만도 아니다"라고 시인은 말하기도 했다.

    시인이 1974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부산대학교였다. 이곳에서 시인은 6년 동안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3대가 함께 살았던 서울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시인은 부득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기형의 출퇴근을 하게 된다. 일주일 중에 평일 나흘이나 닷새는 부산에서, 주말은 서울에서 보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은 여관이나 하숙방을 전전하는 신세로, 요즈음 흔히 말하는 주말 부부인 셈이었다. 그런 사정을 시인은 자신의 ‘역맛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부산에서 시인은 계간지 《문학과 지성》에 <시론>, <유무有無>, <영산靈山>을 75년에 발표하여 문단 데뷔를 한다.

 

  이곳에서 시인은 많은 시를 썼고 여러 편의 저서와 번역서를 썼다. <부산釜山>, <물의 모습1·2>, <물의 소리>, <도다리를 먹으며>, <어린 게의 죽음>, <소야곡小夜曲> 등이 직접 부산에서 씌어진 시들이며 <19세기 독일시>를 비롯하여 200여 편의 근대 및 현대 독일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도 이때였다. 남들이 단란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동안에 시인은 하숙방이나 여관방에서 시를 쓰고 책과 글과 씨름하며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내내 독일 문학 텍스트를 읽고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펴낸 것도 이곳에서 였다. 그런데 이 첫시집은 인쇄일과 실재의 발행일은 몇 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사정인 즉, 인쇄일인 1979년 10월 20일은 박정희대통령의 유고일인 10월 26일의 일주일 전이다. 이 10·26 사태로 인해 인쇄와 제본이 끝난 상태의 시집이 검열에 걸려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서슬 푸른 계엄 하에서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어 시인은 술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다행히 몇 개월 후 우여곡절 끝에 검역필 도장을 맡아서 시집은 햇빛을 보게되었다. 그렇게 출간된 그의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은 지금까지 꾸준히 20판을 넘게 찍었다. 별똥별처럼 반짝했다가 사라지고 마는 대다수의 베스트 셀러에 비해 비록 희미하지만 영원히 빛나는 무릇 작은 별 같은, 명실공히 스태디 셀러이다. 그의 이 첫시집에 수록된 그의 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은 명실공히 그를 대표하는 시이기도 하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김광규의 시는 대부분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구문(構文)으로 씌어진 일상시(日常詩)이면서도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그를 흔히 난해시에 식상한 독자와의 통교(通交)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이 시 역시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평이한 표현 방법을 통해 중년기 사내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명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는 화자가 중심이 된 간단한 줄거리가 담겨 있다. 419가 일어나던 무렵젊은 혈기와 때묻지 않은’ 순수로 살던 화자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어느 세밑’, 중년의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옛 추억이 서린 곳에서 동창들을 만난다그들은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기고 전화번호가 달라진 만큼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부와 지위를 얻은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년이 되어 있다월급이 대화의 전부가 되고물가가 고민의 주종을 이루는 소시민의 중년이 되어 버린 그들은, ‘’ 같은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옛사랑을 노래하던 젊음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결국은 포커나 으로 대표되는 향락적 세계를 즐길 뿐이다.

 

  어쨌든 바로 그 첫시집이 출간되기까지 부산에서의 6년 동안, 그 어려운 생활을 충실히 이겨낸 결과, 시인이 이룬 문학적 성과도 성과려니와 제자들 중에는 부산 일대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사람들과, 문학 언론 출판 사업 등 각계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사람들, 또 대학 교수가 된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시인이 한양대학교 독문과로 직장을 옮기기까지의 부산에서 보낸 30대 후반의 6년은 외롭고 힘들었던 만큼 실로 보람찬 날들이었다. 시인이 부산을 들어 자신의 30대의 고향이라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양대로 직장을 옮긴 이후 그은 퇴직하기까지 줄곧 같은 대학에서 독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작문을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의 화려한 문학소년 시절을 지나 대학에 진학, 도전의 독일 유학, 그리고 교수로 이어지는 시인의 인생 항로에 ‘키’ 역활을 해온 시, 그 시는 이렇듯 독자적인 시의 일가를 이루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어진 길을 오직 외길로 걸어온 시인은, 치국평천하의 올바른 의미를 알았기에 수신제가에 열중하느라 서른다섯 나이에 데뷔하여 1981년 시선집 반달곰에게로 제5회 오늘의 작가상, 1984년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4회 김수영문학상, 1994년 시집 아니리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인이자 독문학자로서 지금까지 독일문학 작품의 번역 등에도 힘쓰며 독일과 한국의 문학 교류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브레히트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귄터 아이히 시집  햇빛 속에서, 하이네 시집  로렐라이 등을 번역·출간하였고, 1993년 '독일문학의 주간' 행사를 주관한 이후 한·독 문학 교류 행사를 매년 갖기도 하였다. 또 독일과 오스트리아·스위스 등지에서 열린 '한국 작가 작품 낭독회' 등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으며 1999년에는 독역시집  Die Tiefe der Muschel을 출간했다.

 

  그밖의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등 시선집과 영역시집 『Faint Shadows of Love』, 『The Depths of a Clam』, 『A Journey to Seoul』,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 일역시집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시집『Tenues sombras del viejo amor』와 중국어 번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다.

 

 서정의 정신과 시적 언어의 자유로움을 이어 가장 진실하고 투명한 시를 써내는 김광규 시인. 등단 이후, 그의 작품들은 그의 데뷔작 「靈山」과 「有無1」 등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나온 자연과의 합일된 정서에서 보듯  그의 시에 현현되는 자연은 타자로서 관찰되는 대상이 아닌 발화의 주체이다 .시인은 자연을 들여다보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자연이 되어 삶과 눈을 맞추는 자세를 취하며, 자연으로부터 받는 인상들을 통해  독자에게 삶의 이치들을 깨우치게 한다. 

 

  또한 그는 깨어 있는 감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 또한 잃지 않는다. 지난 2011년 발간된 그의 시집  『하루 또 하루』에서 시인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들의 박한 임금(「굴삭기의 힘」),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의 소외(「나뉨」), 위안부 문제는 외면한 채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탐욕(「인수봉 바라보며」)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시 속에서 격노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논리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심도있게 파해쳤다.

 

  문학비평가 오생근이 말했지만 김광규 시인은 비천한 현실을 파괴하고 해체하기보다는 현실을 적절히 비판하면서 진정한 삶을 긍정하고 있다.

 

  그는 거지에게 빵 하나를 줄 수는 없을지언정 거지를 세상의 추문으로 만드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른다. 

 

 


말해질 수 없는것 포착하려
홀로 '중얼중얼 중얼…'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인 김광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숫자와 결부된다.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생년월일이 결정되고, 뒤따라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된다. 

주소의 번지와 우편번호, 아파트 동 수와 호 수, 학교에 가면 학번, 군대에 가면 군번, 외국에 나가면 여권번호,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 은행구좌번호와 신용카드번호, 각종 비밀번호와 자동차 등록번호, 전산 입력 번호와 납세자 번호….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과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봉 얼마라는 액수에 얽매여 노예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흘러가면 다시 못 올 시간을 이처럼 숫자놀이로 소진하는 인생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아이덴티티와 화폐와 시간이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숫자의 교육이 문자의 습득보다 앞서야 한다고 흔히 믿는다. 

그러나 내 자신은 목적으로서의 자본 축적을 이해할 수 없고, 시간을 돈과 함께 계량적으로만 파악하는 경영 마인드에 동의할 수 없다. 숫자의 정확성보다 문자의 상징성에 이끌리는 것은 문학인의 숙명적 체질인 것 같다. 

그러나 문자를 도구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소설을 써서 전업작가로 입신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시를 써서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동양의 고전 시성으로부터, 서양의 현대시인 T. S. 엘리엇이나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대개 시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했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생업을 찾기 위해서 많은 방황을 했다. 

만 36개월의 군 복무를 끝낸 후 곧장 생업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한때는 외환 금융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당시의 경제 상황으로 보아 대우가 좋고 선망받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업무가 숫자와 돈으로 귀결되는 일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직으로 직장을 옮겨, 대학원 과정을 끝낸 뒤 장학금을 얻어서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후 삼십여 년을 독문학도로 생활하며 시를 써왔다. 

생업과 시업이 똑같이 문학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 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러울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삶의 진폭이 좁아진 느낌도 든다. 

하지만 문자보다 숫자가 중요한 분야를 감내하지 못한 체질로 보건대,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나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생은 단선의 궤적을 그리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5년 여름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네 편의 시를 발표한 것이 나에게는 창작의 공식적 출발점이었다. 

이른바 데뷔 작품 가운데 ‘시론(詩論)’이라는 시도 있었다. 자기의 시론을 시로써 표현한 시인이 나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 발표작으로 ‘시론’을 쓴 예는 드물 것이다. 어쩌면 당돌하고 건방진 수작으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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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詩論)

 

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때의 내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었고, 내 또래 문인들이 문단의 중견으로 발돋움하던 시점이었음을 감안하면, 늦깎이다운 등단 선언이었다. 

이 시는 나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첫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동시대의 언어가 권력과 자본에 의하여 조작되고 왜곡되고 훼손되는 현실 속에서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 이 시는 첫 시집을 여는 서시로서는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번째 시 ‘영산(靈山)’과 함께 언어와 문학에 대한 나의 시학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다.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하나의 형상으로 포착해보고자 시도한다.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이 시도를 나는 지금까지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시는 오늘날 멋진 아리아가 될 수 없다.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테너나 소프라노의 열창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아리아가 한때 시인을 의미하던 가객의 몫으로부터 이제는 다른 매체의 인기 직종으로 옮겨갔다. 

시인이 아직도 무엇인가 읊조린다면, 그것은 레시타티브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래와 연기를 연결시키며 오페라를 끌고 가는 레시타티브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에서 아니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으로만 판소리가 될 수 없고, 아리아만 가지고 오페라를 꾸밀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은, 시를 아니리나 레시타티브에 비유하는 것과는 물론 다르다. 

다만 오늘날의 삶에서 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그렇게 본다. 이 보잘 것 없는 처지에서 시가 예술로서의 필연적 존재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다섯번째 시집 제목 ‘아니리’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시의 현실적 입지가 약화되는 현상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더욱 가속화되었다. 아니리나 레시타티브는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말을 빌리자면 콘텐츠를 전달 내지는 매개하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가상현실이 현실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삽시간에 상상의 시공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른바 시적 상상력의 자장이 축소된 반면에, 확대된 현실의 온갖 폭력이 언어를 유린하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시집이 출판되고, 시 전문지도 심심찮게 창간되지만, 시의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일부 문인들만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은밀한 속삭임도 못되고, 일방적인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이제 혼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중얼거리다’는 상대방을 전제로 하지 않고, 메시지의 전달을 원하지도 않는, 글자 그대로 절대적 고백에 접근하는 언술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종언을 개의치 않는 중얼거림이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차렷!/ 한마디로 연대 병력을 움직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목쉰 부르짖음으로 군중을 열광시키고/ 사랑해 당신을/ 달콤한 속삭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사로잡고/ 짜장면 하나에 짬뽕 둘!/ 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임금 총액 동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자반고등어나 먹갈치 사려!/ 저마다 목청 높여 부르짖는데/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어디를 가나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없고/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얼중얼 중얼…’ 

나의 일곱번째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에 실린 위의 시는 ‘시론’에서 시작된 나의 시학이 사반세기 동안 천천히 그려온 궤적의 종점 부근이다. 

언어에 대한 부정적 절망에서 출발하여, 오백여 편의 시를 쓰는 동안, 아니리를 거쳐서, 겨우 중얼거림에 도달했다니, 이것은 발전인가 퇴보인가 아니면 제자리 걸음인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격동과 변화의 한 세대를 살아오면서 너무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당신은 중얼거리는 방식이 틀렸다’고 욕을 먹기도 했고, 때로는 ‘참 잘 중얼거렸다’고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는 왜 중얼거리는가’에 관하여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디서나 들려오고 나처럼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을 찾아와 들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시낭송회를 개최한다든가, 한국 작가들이 외국에서 열리는 작품낭독회에 초대받는다든가, 시낭송을 담은 카세트테이프나 CD가 판매된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사불란한 논리와 정확한 통계숫자와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사자후를 토하는 광경을 우리는 정치집회에서 자주 보게 된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 때가 되면 온 나라가 확성기의 소음으로 가득차고, 일당 얼마씩에 동원된 박수부대의 연호로 유세장이 들썩거린다. 

그러나 밀물처럼 몰려온 이러한 함성의 분출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일상을 되찾은 우리의 주변에서 풀벌레의 노래가 다시 들려오고,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중얼거린다. 소음과 연호가 우리의 귀를 가득 채웠을 때도 이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만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큰소리로 똑똑히 말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도 인간이 오랜 역사를 두고 간직해온 특유의 언술방식이다. 

한번 이 낮은 목소리에 귀기울여보면, 이 세상의 온갖 소란한 외침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며, 한 시간에 걸친 시정연설이나, 숫자로 가득한 삼백 페이지의 경제백서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될 것이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남성 4중창단이었던 블루벨즈(Blue Bells), 정희숙·희정·희옥 세 자매로 이루어졌던 정시스터즈가 각각 1960년대 초에 음반에 담아 발표한 노래다. '푸른 저 달빛은 호숫가에 지는데/ 멀리 떠난 그 님의 소식 꿈같이 아득하여라' 하고 시작한다. 멕시코 출신 3인조 그룹인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의 '보름달(Luna Llena)'을 번안한 노래로 당시 젊은이들의 애창곡이었다.

'보름달'은 1960년대에 70개국 이상의 가수들이 불러 라틴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노래다.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가 서울에서 공연한 1978년에 시인 김광규는 그 번안 제목을 차용한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발표했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고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한양대 명예교수로 올해 70세의 독문학자이기도 한 김광규가 독일 베를린, 스위스 취리히 등지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그는 앞서 열 번째 시집 '하루 또 하루'를 3월24일 펴내면서 이렇게 토로했다. "십진법의 기수에 1을 더한 숫자 10은 두 자릿수가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헌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겠다." 그의 시집이 발간될 때마다 다른 일을 제치고 서점부터 찾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환생한 새우' '시간의 부드러운 손' '누군가를 위하여' 등이 나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요즘도.

김광규는 대한민국 시인으로는 드물게 영어·독일어·일본어·중국어·스페인어권에서도 시집이 번역 출간돼 왔다. 프랑스어·아랍어로도 번역돼 해당 언어권 현지에서 나올 예정. 그의 시는 중국 베이징대 중문학대학원 입학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그를 비롯한 대한민국 시인의 시가 더 많은 언어로 소개되고, 더 많은 나라에서 읽히며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날도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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