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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花)의 시인 - 김춘수
2016년 01월 05일 05시 32분  조회:5121  추천:0  작성자: 죽림


꽃의 시인 김춘수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 일반적으로 ‘꽃’이라고 하면 예쁘고 아름다운 감성적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춘수에게 ‘꽃’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꽃은 존재의 대상이다. 전국민에게 사랑받는 시 <꽃>으로 인해 김춘수는 꽃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김춘수 시인은 한국 시단에 아주 독특한 시세계를 가진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 그로 인해 시인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가장 독특한 경지에 있었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은 시인에게 이그조티즘(이국취향)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다.

시인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이후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온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년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특이한 이력은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삶과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이후 작고하기 전까지 김춘수 시인은 정치활동 경험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시와 시론을 묶은 <김춘수 전집>(현대문학)이 2004년 출간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 이후 한국 시단에서 가장 독특하고 모던한 시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후기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거울 속의 천사>, <쉰 한 편의 비가> 등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전문

 

김춘수의 시 <꽃>은 전국민이 모두 아는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작품이긴 하지만, 김춘수가 가진 존재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는 시이다. 어떠한 대상이든지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다. 산의 이름 모를 들풀도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의미를 띄는 것이다. 그 의미가 바로 시에 말하는 ‘꽃’으로 상징할 수 있다.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은 존재는 늘 불안하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과 소망이 있다. 어떤 의미로든지 타인과 이 세계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시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전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희박하다. 인터넷 공간과 블로그, 미니홈피, 트위터, 그외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디지털미디어 기기, 스마트폰 등으로 대화가 단절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적어진다. 가상공간에서 포장된 나와 타인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춘수의 <꽃>을 읽고 있으면 타인을 가만히 불러보고 싶게 한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라고 속삭이고 싶게 한다. 찬바람이 분다. 외롭다고 인터넷과 스마트폰만 쳐다볼 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한다면 어떨까.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동안 잊었던 내 존재가 그에게로 가서 새로운 존재로 남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참 포근하고 훈훈한 날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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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이재훈

 

 

 

 

 

 






대여(大餘) 김춘수 선생은 지난 2004년 1월 <김춘수 시전집>(현대문학 刊)을 상재하셨다. 이 시선집은 1152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그간 60여년 가까이 해오신 문학 활동을 총결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선집에 그치지 않고 <김춘수 시론 전집> 1, 2권을 연이어 냄으로써 김춘수 문학의 총체적인 정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김춘수 선생은 4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문학의 한 경지를 이룩한 시인이다.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기까지 선생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독특한 경지에 스스로 계셨다. 특히 이번 전집 출간은 선생의 미발표작 뿐만 아니라 최근 발표작까지를 모두 담은 것이어서 그 의미는 각별하다. 2004년 3월 15일. 김춘수 선생을 찾아 뵙고 선생께서 그 동안 살아오신 삶과 문학을 육성으로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춘수 선생(1922~2004) (C)현대시


풍경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성남시 분당구 까치마을의 한 아파트. 나는 몇 번 헤맨 후에야 선생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았다. 아파트 바깥의 풍경과는 다르게 선생의 집안 풍경은 한가로웠다. 마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별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거실에는 선풍기 모양의 회전하는 전기난로가 돌아가고 있었고 선생은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려놓고 앉아 계셨다. 우리가 들어가자 선생은 일어서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하였고, 오후의 햇살이 베란다와 거실의 경계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내가 등단을 하고 난 후 선생의 모습을 제일 처음 뵌 것은 어느 시상식장에서였다. 김춘수 선생이 저렇게 정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내게 선생은 늘 교과서와 책들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화였다. 그 큰 그늘 속에서 잠시뿐이지만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선생에게 무슨 말을 던질 것인가. 그냥 편안한 옛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선생은 분당의 집에서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외손녀는 서울의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 늦은 밤 귀가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낮에는 가정부가 와서 집안일을 돌봐주고 있었다. 동행한 <현대시> 원구식 주간은 곧이어 작년에 처음으로 치러졌던 <현대시 통일마라톤대회> 얘기를 꺼냈다. 작년 임영조, 김강태 시인의 죽음으로 촉발된 통일 마라톤대회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시단의 행사였다. 올해 행사 때에는 시단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선생은 옳다고 반갑게 말씀하셨다. “문단도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갈라지지 말고 화합하고 어울렸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이 다르다고 사람까지 갈라지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경향은 다 제 각각 다를 수 있는 거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인터뷰하러 간 날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신문을 통해, 탄핵과 관련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다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을 터여서 그것부터 여쭈어 보았다.

 

김춘수: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어요. 나는 앙케이트하는 것인 줄만 알았지 내 이름이 나오는지는 몰랐지요. 각계 원로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크게 나왔습디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내 생각도 가다듬고 신중히 말할 것을… 하지만서도 근본은 같으니까 뭐. 어느 쪽이 잘했는가 잘못했는가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사태 자체가 불행한 일이다. 그런 조의 말을 했지요.

 

선생은 정치에 대해 특히 노무현 정부에 대해 몇 마디의 말씀을 더 하시려다가 이내 말문을 닫으셨다.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까지 정치얘기를 하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구름과 장미

 

연보를 보면, 선생의 유년에서부터 학창 시절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통영에서의 유소년의 시기, 두 번째는 서울 경기중학의 시절과 일본대학의 시기, 마지막으로는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다.

선생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 때문에 그 당시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때 체험이 시인에게 각별하게 다가온다. 유년시절의 삶에서 선생에게 가장 기억나는 체험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일 것이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미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자세하게 알고 싶어졌다.

 

김춘수:자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무렵의 정서적인 체험이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영향이 큰 것으로 봐야지요. 간혹 그때 얘기가 내 시에도 나오거든. 그때 교회체험이라든가 선교사가 밖에서 앉아 있는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호주의 선교사가 경영하는 미션 계통의 유치원에 다녔다고 하는 것이 에그조티즘(exoticism, 이국정조-필자주)을 준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고 나니 큰 자극이 된 것 같아요. 선교사 아들 딸들의 파란 눈이 생각납니다. 유치원의 경계가 탱자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탱자나무 틈으로 들여다보면 간혹 우리 또래의 서양 남매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요. 눈이 파래서 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쪽 세상은 이쪽과 다를 것 같았지요. 바람도 구름도 다를 것 같고. 그때 장미라는 꽃을 처음 봤어요. 그 남매가 작은 삽을 가지고 장미를 심는 장난을 하고 있어요. 그때 참, 이상한 꽃도 있구나 생각했지요. 모든 게 낯설었지요. 그때 호주라는 말을 들었는데 바람도 구름도 모두 호주에서 가져온 것 같았지요.

 

선생의 말로 미루어 보면 독특한 미의 관심을 알 수 있다. 통영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을 대표하는 고장인데 선생이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이다. 이것은 선생이 생래적으로 우리가 한국적 혹은 민족적이라고 부르는 여타의 미적 가치관과 차별됨을 말해준다. 선생의 첫 시집 <구름과 장미>는 이런 자각의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의 토속적인 생활환경에서 오는 정서와 이국적인 정서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구름’은 유치원 담 바깥, 즉 생장 본거지로서의 통영이다. ‘장미’는 유치원 안쪽, 즉 그곳에는 바람도 구름도 다를 것 같은 관념의 세계이다. 장미에 대한 선생의 체험이 고스란히 시집의 표제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경기중학 시절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마침 선생은 뜻밖의 얘기를 해주었다.

 

김춘수:경기중학이 당시에는 5년제였습니다. 5학년 2학기 때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었는데 담임선생과 트러블이 있었지요. 이거 말하기가 참 쑥스러운데… 국민감정하고 연결된 것이지요. 그 당시엔 대부분이 일본 선생이었지요. 굉장히 역겨웠어요. 학교 가기 싫고… 그게 5학년 2학기 때 폭발한 거지요. 담임은 내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겠지요. 선친께서도 많이 나무라셨습니다. 동경으로 가서 학교를 알아보는데 중학 4년만 수료하면 대학 예과에 갈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대학에 가는 코스였습니다. 왜 제국대학 코스인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하면. 식민지 학생이 일본의 고등학교에 가려면 모교 담임의 소견표가 필요합니다. 그 소견표가 사상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었지요. 그게 첨부돼야 원서 제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이 그걸 안 써주었어요. 중학을 마치고 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험시기도 놓치고, 내년이 된다고 해도 그걸 써주기는 만무하고. 그러다가 마침 소견표가 필요없는 대학에 가게 된 것이지요.

 

선생은 당시 담임선생과 민족적인 감정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은 이 대목에서 자세히 말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하셨다. 선생이 일본대학에 처음 입학할 때에는 법학과를 지망했다. 그것으로 보면 당시에는 문학을 하고 싶은 절박함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이 당시에 릴케를 만나게 된다. 릴케와의 만남에 대해 <두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헤어짐>(<의미와 무의미>, 문학과 지성사, 1976)이라는 글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 글을 보면 일본에서 대학 입학하기 전 고서점에서 릴케를 만난다. 그때 만난 릴케의 시는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햇살이 빛나듯이

혹은 꽃눈보라처럼 왔던가

기도처럼 왔던가

― 말하렴!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내 꽃피어 있는 영혼에 걸렸습니다.

 

와 같다. 선생은 릴케가 하나의 계시처럼 왔다고 했다. 이 만남으로 선생은 예술대학의 창작과를 선택하게 된다. 또 한번의 큰 만남은 해방 이후이다. 그때 릴케의 시와 <말테의 수기>를 다시 읽게 된다. 이후 선생의 초기시는 릴케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시 김춘수 선생 분당 자택(2004)


역사허무주의자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은 최근 일간지 기자들과 나눈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선생에게는 기질적으로 독립운동이 맞지 않는다. 한 개인의 실존이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선생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당시의 체험에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도쿄대 좌파 교수들과의 체험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시 물었다.

 

김춘수:한국 고학생들을 따라서 호기심에 갔지요. 나는 집에서 학비가 충분히 왔었기 때문에 일을 하러 갈 필요는 없었는데. 그 친구들 따라서 가와사키라는 부두에서 하역을 했습니다. 일하다가 휴식시간에 한국 고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황도 비방하고 총독정치를 비판을 하고 그랬지요. 우리끼리니까 우리말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한국 스파이가 있었던 거라. 한국 사람인데 헌병대에 헌병보로 있으면서 한국 사람들을 감찰하는 스파이가 염탐하다 고발한 거지요. (역사관에 영향을 준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짐)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그게 뭐냐하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한 불신이 생겼지요. 그 혐의로 붙들려가서 한 1년 정도 고생했는데, 학교도 퇴학당하고. 당시 같은 교도소에 인민전선파인 제국대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제국대학 교수라면 가장 영향력있는 교수들이었지요. 인민전선파인 좌파 경제학자 교수 중의 하나가 고등계에 붙들려 왔습니다. 하루는 그 교수와 함께 취조를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교수를 취조하는 형사는 안보이고 내 담당 형사만 있었어요. 조금 있으니까 교수집에서 사식이 들어오데요. 김이 모락모락나는 갓 구은 빵이 들어왔지요. 그때는 모두 배급시대고 어려운 시대인데 특권계급 아니면 먹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런 사람이 저런 빵을 먹고 있나도 좀 이상했고. 조금 있으니까 나를 취조하던 형사도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그 교수와 나와 둘만 남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몇 개월 동안 너무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지요. 먹을 거 있으면 눈에 불이 켜지고 목구멍에서 손이 나오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나는 자연히 그것을 나누어 줄줄 알았는데… 민중을 생각하는 지식인인데, 식민지 어린 학생이 있으면 자네도 하나 먹어라 응당 그럴 줄 알았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상하고 인격하고는 다른 것이구나. 사상은 믿을 게 못되는 구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습니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봤구나. 저런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 것인데…

 

이 사건은 선생의 역사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질곡의 역사인 한국 정치현실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두면서 예술지상주의의 문학관을 가지게 된 점과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깊은 내면 세계를 탐색하는 점은 이 사실과 연관이 있다.

선생은 이 후에도 5공 정권 때 전국구 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선생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선생은 당신이 정계생활을 한 것에 대해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셨다. 타의에 의해 시작한 4년 여의 정계생활이 시인으로서의 자신에게는 상처였으며 문학적으로 여간한 손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며 이제 말할 때도 되었는데 자전소설을 쓰게 되면 그때 자세하게 말할 생각이라고 하셨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유경 선생이 쓴 인터뷰집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이유경, <시인의 시인 탐험>, 월간조선사, 2002) 선생은 자신의 정계생황을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것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께 역사라는 것은 능동적인 참여가 아니고 어떻게 보면 피해자라는 생각이 강하신 것 같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입니까, 라는 질문을 드렸다. 선생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김춘수:어떻게 보면 피해자가 아니고 실제로 큰 피해자이지요. 저는 한국의 역사라는 것 뿐만아니라 역사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나는 스스로 역사 허무주의자이다, 라는 말을 씁니다. 역사, 이데올로기, 폭력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결국 폭력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게 되었지요. 그 삼각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역사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인식이 생겼습니다. 역사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데올로기가 있고 폭력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역사를 아주 회의적으로 본 것이지요.

갑자기 학생 때 읽은 책이 하나 생각납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의 책이지요. 그는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에 동조를 했지요. 그러다 불란서로 망명을 해서 쓴 책이 있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운명>이라고.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 나는 그 말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역사라는 이름 때문에 개인이 얼마나 짓밟혔나요. 역사, 이러면 악 소리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됩니다. 역사에 저항하면 죄인이 되니까요. 이때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지요.

역사의 歷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은 과거 일이지요. 史는 기록입니다. 기록하는 사람도 史에 속하고요. 역사는 사실로서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고 기록하는 것은 사람이지요. 사람이 기록한다는 것은 주관적이지요. 그런데 기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사실이 달라지지요. 그러니까 역사는 모순 개념입니다. 그러니 쉽게 말하면 역사는 없다, 이겁니다. 학교 교과서에나 있는 거지요. 어떤 사실의 단편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강자의 역사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가 바뀝니다. 역사는 없고 강자, 힘센 사람이 그려 놓은 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의문 하나

 

한국전쟁 중 선생은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인 <후반기> 동인에는 가담하지 않고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함께 <시와시론>이라는 동인을 결성했다. 문학적 성격으로 본다면 선생은 <후반기> 모임에 있어야 한다. <시와시론>은 문학적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되는데 <후반기>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졌다.

 

김춘수:후반기 동인 중에 조향은 나하고 해방 직후, 그러니까 1946년에 김수돈 시인과 함께 <로만파>라고 하는 동인지를 냈습니다. 김수돈 시인은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로 나온 시인이지요. 이 둘 다 마산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처가가 마산이라 자주 드나 들면서 동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50년 전쟁 때 부산 임시수도에서 조향하고 내가 만났지요. 그때 조향은 부산 동아대의 교수로 있었을 때고요. 조향이 <후반기> 동인을 같이 하자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조금 망설였습니다. 조향은 알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좀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생각해 보지요, 하고 살짝 빠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진주에서 설창수 시인이 하는 <개천예술제>에 청마 유치환 선생과 함께 갔습니다. 그때 김윤성, 구상 시인 등과 어울리게 되었지요. 그때 우연히 말이 나와서 <시와시론>이라고 하는 걸 내게 되었지요. 그때 문학적인 경향이나 뜻이 같아서 한 것은 아니고, 한번 낸 것이지요. 1권 나오고 말았습니다.

 

김수영과 김춘수

 

선생은 김수영과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 김수영이 죽기 얼마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종로의 한 여관에서 김수영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밤에 심심하여서 수첩을 뒤적이다가 전화번호가 나와서 걸어본 것이다. 김수영이 집에 있긴 했지만 술이 만취해서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통화도 못하고 다음 날 선생은 볼 일을 마치고 곧바로 내려가게 된다.

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고 김춘수는 <타령조> 연작을 쓰면서 의식적인 트레이닝의 시작(詩作)을 하고 있었다. 이미지와 관념 사이,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사생과 추상을 거쳐 <처용단장> 연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의 순수와 참여의 대립 구도에서 선생은 젊은 모더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순수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수영은 참여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좀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김춘수와 김수영을 이런 거친 분류 속에 넣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당시 김수영이 참여로 갔기 때문에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춘수:그 말이 옳기는 옳은 말입니다.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과 역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역사허무주의자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같은 시도 썼지만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습니다. 역사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때 김수영을 가장 큰 라이벌로 생각하셨나요?)

 

김춘수:했지. 내가 그때 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뿐입니다. 미당 같은 시인도 있었지만, 나와는 시적 세계관이 너무 다르니까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요.

 

의미에서 무의미, 다시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김춘수 선생은 40년대 후반 <로만파>라는 동인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는 신춘문예나 잡지의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선생의 술회에 따르면 40년대 후반 4~5년은 아류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즉 선배 시인들의 시를 모범으로 트레이닝을 하던 시절이었다.

50년대에 들어서 선생은 자신의 시에 대한 자성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자성의 시가 바로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받은 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연작시이다. 소위 관념시라 부르는 김춘수의 시는 스스로 ‘플라토닉 포에트리’라고 부르고 있다.

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이러한 무의미시의 변화 양상을 이승훈 선생은 <부두에서>, <봄바다>, <인동 잎>에서 보이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 <처용단장> 2부에서 드러나는 탈이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로 전환되는, 이미지조차 마침내 소멸되는 시기, 그리고 이러한 되풀이로 인해 오로지 리듬만 남게 되는 시기(<이중섭>, <예수>, <중국 유적지> 연작)로 나누기도 한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거울 속의 천사>, <쉰 한 편의 비가> 등이다. 이런 시편들이 나에게 된 내면 정황을 선생은 전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선적 세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 시는 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무의미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무의미시 이전의 세계로 후퇴할 수는 없다.

 

무의미시로 대표되는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실제로 일반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시는 무의미의 시편들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의 시, 그러니까 초기 관념시와 후기에 다시 의미로 되돌아온 시기이다. 아무래도 무의미시가 일반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선생에게 독자는 어떤 의미인가. 선생은 “내 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소수의 독자들을 염두해 두면서 쓴다”고 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선생의 무의미시도 하나의 과정인지 모른다. 무의미시는 어느 한 소실점으로 모일 수 있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출구 같은 게 아닐까.

선생은 젊은 후학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그간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이번에는 모더니즘 계열의 젊은 시인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렸다. 큰 틀을 놓고 봤을 때 선생의 시세계를 이끌어갈 만한 시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생은 후학들이라면 어떤 연배를 두고 말해야 하는지 잠시 고심하셨다. 30, 40십대 젊은 후학들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천천히 말을 이으셨다.

 

김춘수:그동안 젊은 후학들이 우리 나이 때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학에서 어학력도 갖추고 일본을 통하지 않고도 원서를 읽을 수 있고 외국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정보력이 있기 때문에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우선 내가 봐도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박상순, 송찬호 같은 시들입니다. 이들의 시는 과격 모더니즘에 속하죠. 전위성이 있는… 그런데 이 사람들의 전위는 이승훈이나 황지우의 전위와는 또 다릅니다. 이승훈은 존재론적이고 황지우는 사회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상순이나 송찬호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이미지가 그려내는 환상세계만 있을 뿐입니다. 허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앞의 두 사람에 비해 훨씬 허무적입니다. 의식상태가 그런 거 같습니다. 믿고 기대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요. 철저한 비대상 세계, 말하고 싶은 대상이 없는 거지요. 환상세계가 이미지를 통해서만 펼쳐지고 있는데, 아무 의미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허무를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요. 허무는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뭔가 기대는 게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육체를 가진 이상, 허무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허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 완전히 해방된 상태입니다.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무의미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이런 시만 못씁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건 언어입니다. 언어와 의식은 이콜 아닙니까. 언어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건데 결국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건 시를 못쓴다는 것입니다. 시를 못쓰거나 다른 상식적인 세계와 타협하거나가 되지요. 그러니까 상식적인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찾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사는 굉장히 진일보했습니다. 시 자체를 극한으로까지 끌고 갔으니까요. 그러나 진일보라는 게 어느 한계에 가면 막다른 골목 아닙니까. 우리 시도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서정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정주의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시에 대한 자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내 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시를 썼는가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충동적으로 쓰고 마는 것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게 통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안됩니다. 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예술가적 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시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수가 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제어하는 이성이 있어야 합니다. 19세기 시대의 로맨티스트들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부르짓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 시는 대체로 단순해요. 소품이고, 입체성이 없고 논리도 없고 평면적이지요. 좋은 시들의 시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볼륨이 있는 시, 논리전개도 입체적이고, 파라독스나 아이러니를 깔아놓은 입체적인 전개 등의 양적으로 무게가 있는 큰 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릴케하고 엘리엇처럼 말이죠. 그런 큰 시인이 나와 주었으면 싶다는 생각입니다.

 

선생은 1시간 30여분 이상 이어진 인터뷰 시간 동안 뜨거운 열정으로 세심하게 하나씩 짚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선생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든 시간들이 문학적 열정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에게 문학 이외의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에게는 사회적 지위도 국가적 명예도 귀찮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을 뿐이다. 선생은 지금도 공부하고 계신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반성과 회의야말로 오래도록 문학을 지속하는 힘이 아닌가.

선생은 당신이 앞으로 어떤 세계로 또 나아갈 지는 당신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다. 선생은 시 <강설降雪>에서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늘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닐까. 이 비껴 서지 않는 역사 앞에서 선생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참 오랜만에 멀리 통영의 생가에 눈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지만, 의식은 먼 끝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시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일까.

 

강설降雪

 

역사는 비껴 서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나

눈이 저만치 찢어지고 턱이 두툼한

(그 왜 있잖나?)

 

그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

그는,

기다림이 겨울에도 망개알을 익게 하고

익은 망개알을 땅에 떨어뜨린다.

또 한 번 일러주랴.

역사는 비껴서지 않는다.

절대로, 땅에 떨어진

망개알을 겨울에도 썩게 한다.

썩게 하여 엄마가 아기를 낳듯 그렇게

땅을 우비고 땅을 우비게 한다.

그는 온다고 지금도 오고 있다고,

오지 않는 것이 오고 있는 거라고,

 

바라보면 멀리 통영

내 생가가 눈을 맞고 있다. 내 눈에

참 오랜만에 보인다.

기왓장 우는 소리.


_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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