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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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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작법 살살살...
2016년 01월 12일 23시 12분  조회:4906  추천:0  작성자: 죽림

5) 사물의 비밀과 존재 탐구에 주력한 시 

<문의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이 시는 작가가 동료시인인 신동문의 모친상을 접하여 충북 청원군에 있는 文義 마을에 가서 장례식을 주관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인이 직접 호상이 되어 장례절차를 주관하였는데, 시인은 거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었다. 흔히 죽음은 절망이나 공포, 비애 등의 격렬한 감정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에서는 죽음이 친근한 것이 되어 있고 그 친근성은 인간의 삶에 대한 경건함을 동반하고 있다. 
1연에는 어느 해 겨울 문의마을에 가서 죽음을 보았다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즉 장례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문의마을까지 닿는 길은 몇 갈래의 길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통해 있는데, 그 길이 적막한 것과 같이 죽음의 길도 적막하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에 추운 쪽으로 뻗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애도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은 길에서 돌아가 죽은 사람의 유품을 태우는데, 그 태운 재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한 마을을 향해 흩날리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는 문득 팔짱을 끼고 먼 산을 바라보는데, 그 산이 무척 가깝게 여겨진다. 즉 죽음과 삶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장례식날 눈마저 날리어 죽음을 덮고 있다. 그 눈은 죽음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만물을 덮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삶의 경건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것이 2연에서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망자가 죽음 받기를 끝까지 사절하다가 이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의 인기척을 듣고는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향해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을 시적 화자는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이다. 엄숙한 장례의식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와 그것들의 경건함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죽음 앞에서 낮아지고, 곧 겸허해지는데, 그 위로 눈이 내리고 있다. 이는 바로 엄숙함이자 경건함이다. 이런 장례절차도 끝나 죽음은 이승을 향해 떠나서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문의 마을에서는 장례식이 있었다. 눈은 내려 죽음을 덮고 마침내 이 세상마저 모두 덮어버리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시적 상상력은 삶과 죽음, 곧 존재의 비밀을 살짝 엿보게도 하는 것이다. 

<별빛들을 쓰다> - 오태환 

필경사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 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墨蘭 잎새처럼 쳐 있는 것 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 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모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든 흰 섬들을 바라보 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榧子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빼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아프게 쓸 수밖에 없는 것임을 지금 알겠 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綠靑기왓장 위 별 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별빛을 쓰다”니? 별이 그의 빛을 쓴다는 것인가? 아니다. 별의 빛을 쓰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별빛을 쓰는 시인은 스스로 아름다운 별로 태어날 것 같다. 
이 시는 아프고 아픈 한 편의 연시로도 읽힌다. 발에 밟힐 듯 긴 스란치맛자락 같은 다섯 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끝부분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에, 시의 젖가슴께에 놓인 ‘반물모시 옷고름’에서 눈이 밝은 독자들은 어렴풋이 사랑스런 여인의 그림자를 만났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는 한 여인에 대한 헌시로서의 빼어난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시적 우주를 창조하게 된다. ‘그녀’의 고유명사 위에 크고 아픈 모성으로서의 시가 덧씌워지는 大變轉의 회오리를 이 여릿여릿한 시편은 감추고 있다. 
시인이 사는 마을의 하늘에는 이슬과 묵란과 계곡 물소리와 반물빛 치마저고리와 함께 참으로 아름다운 별들이 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잘 어우러진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은 새로운 우주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상 우리는 다섯 갈래의 주제에 합당한 시를 살펴보면서 그 주제의식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참으로 아름답고 슬프고 높고 깊은 시세계들을 볼 수 있었다. 시는 시적 경험의 소재에다 주제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인 상상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세계는 슬픔과 한과 아름다움이 뒤범벅된 세계일 수도 있고, 맑고 착한 순수서정이 내면의 고요한 울림과 만나는 세계일 수도 있으며, 또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계일 수도 있고, 언어로 세운 존재의 집일도 있으며, 모든 사물들이 제 존재 그대로 빛을 던져 하나의 융융한 화엄을 이루는 세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3. 시적 구조, 그리고 직관력 


E. 뮤어의『소설의 구조』라는 책에는 소설의 구조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하나는 극적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구조다. 
극적 구조란 다르게 말하면 메인 스토리가 있는 구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의 주된 사건이 전개되면서 인물이 바뀌지 않는다. 나도향의「물레방아」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 소설은 애정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발단과 절정과 끝이 선명히 드러난다. 
반면 극적이 아닌 구조란 메인 스토리가 없고 에피소드로 연결돼 있는 구조다. 등장인물이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바뀐다. 김동인의「감자」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복녀라는 한 농민의 딸이 가난 때문에 몸을 더럽히며 끝내는 파멸해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에피소드 두 개가 연결돼 있을 뿐 메인 스토리는 없다. 인물이 바뀐다.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연결시켜 갈 수가 있다. 
시에서도 이런 따위 구조의 유형이 있다. 가령 서정주의「국화 옆에서」와 같이 다음 조지훈의「僧舞」는 극적 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기승전결로 아주 동적 기계적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희의 동작으로 채우는데 마침내 그녀의 동작이 절정을 거쳐 끝을 맺는다. 직접 시를 보자. 

<僧舞>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기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서서 날아갈 듯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이냥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는 본래 2행이 1연이 되어 모두 9연 18행으로 된 시인데 내가 기승전결의 한시 형식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편의상 4연으로 배열했다. 처음 고깔과 고깔 속의 얼굴 묘사로 시작되어(기) 다음으로 배경과 춤동작의 찰나 포착(승), 그 다음 형이상학적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고는(전) 마지막 시간의 경과 속에 지속되는 춤의 표현(결) 등이 너무도 확연한 기승전결 구조다. 
특히 이 시는 제10행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와 제14행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라는 두 행에 핵심이 있다. 이 두 행은 모두 이 시의 중심축이 되는 승, 전의 터전을 마련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시행들을 통해서 시적 화자는 춤으로서의 승무와 정신적 내면성을 지닌 인간의 고뇌를 시적으로 결합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시가 단순한 소재 차원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적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참이었으니 여기서 그 내용의 해석은 그만 두기로 하자. 시에서 구조가 요구되는 것은 시적 형상화의 성공을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의 짜임새가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나는 동양시학의 기승전결 구조를 시 창작에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자연적 구조와 일치하기도 하고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인생구조와도 부합되어서이다. 
그런데 이런 극적 구조와 반대로 그렇지 않은 구조를 가진 시가 있다. 

<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는 정지용의「향수」일부분이다. 이 시는 아까「승무」와 다르게 연마다 다른 장면이 나온다. 앞연과 뒷연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기에 이런 시는 극적 구조를 가지지 않은 시에 해당된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동백’이 피고 지듯 시적 화자인 시인의 내부에서 ‘그대’로 지칭되는 한 사람이 피고 진다. 생성되고 소멸되어버렸으며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존재의 진정한 소멸 혹은 진정한 결별은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없이 기억하는 것이며 그리움에 허덕거리지 않고 낡은 사진첩을 넘기듯 담담하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피고 짐’이나 ‘만나고 헤어짐’은 분명하나 동백꽃이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듯 그대 역시 잊혀지지 않고 내 안에서 쉼없이 고통을 자아내며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멀리서’ 여전히 사랑을 담고 ‘웃는’ 그대는 산 넘어가지만, 잊는다는 것이 영영 한참일 수밖에 없는 이 괴로움을 어찌하는가. 
짐짓 남의 일처럼 시의 종결어미를 ‘-이더군’ 이라고 쓰며 겉으로는 툭툭 말을 던지지만, 그 속엔 그대와 헤어지고 선운사에 여행을 가서 그 붉은 동백꽃의 피고 짐을 바라보며 그대에 대한 갈망과 탄식하는 것을 감추고 있다. 그럼에도 시적 장치인 기승전결의 안정적 구조와 대립과 병치를 반복하는 수평적 구조가 긴밀히 교직하여 상상력의 형식화에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강변 마을> - 노향림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더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 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 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밝은 미색 커튼 흔들리는 창가에서 
블랙 커피나 한잔! 

노향림의 이 시는 극적 구조가 없는 시다. 이 시에도 등장인물인 ‘나’가 등장하고 그가 처음과 끝에 나타나서 어떤 동작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면적이건 외면적이건 어떤 사건과 연결돼 있지 않다. 그냥 어느 날 강변 찻집에 들러 이 커피를 마실까 저 커피를 마실까 유희하듯 생각하고, 창밖에 헝클어진 구름 떼를 바라보고, 아직 봄이 일러 푸른 잎 틔울까 말까 망설이는 나무를 생각하며, 그렇게 가볍고 하찮아진 자신에게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면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바꾸어 마음의 블랙홀에 나트륨등처럼 반짝 켜고,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잔을 마심으로 인생을 씹을 수도 있는 것! 
한데 이렇듯 극적 구조를 가진 시와 그렇지 않은 구조를 가진 시를 살펴보다 보면 시에서 구조는 꼭 어떤 논리를 수반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가 시적 논리를 가져야 함에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詩三百이 思無邪’라는 말이나 시는 어떤 영감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는 그런 논리적 구조 없이도 되어지는 시들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직관력’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직관이라는 것은 진리나 실재는 사고나 판단 등에 의하지 않고 분별지 곧 이성을 넘어선 본질로의 순간적 육박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철학화한 직관주의는 베르그송이 주창한 설이다. 직관력에 의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는 서정시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 원리에는 세계에의 동화와 투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직관력에 의한 시나 순간성과 압축성을 생명으로 하는 짧은 시에도 구조는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전 설> - 서정춘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겼으랴 
기차는, 고향역을 떠났습니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습니다. 

먼저 이 시를 해설해 보자. 기차가 고향역을 떠났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다. 물론 기차가 고향역을 떠났다는 것은 그 기차를 탄 어떤 사람이 떠났다는 것이다. 또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다는 것은 하모니카로 상징되는 우리 고향의 오륙십 년대를 떠났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기차가 떠난 뒤에 남는 것은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레일뿐이다. 그런데 이 ‘레일’이 시인의 직관력에 의해 순식간에 ‘詩’로 바뀌어 첫 행으로 올려지니 평면적인 시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겹무늬를 만들어낸다. 시를 남기고 떠난 사람, 그것도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시를 남기고 떠난 사람은 어떤 이였을까. 어쩌면 우리 고향의 오륙십 년대에 만연했던 혹독한 가난과 못배움의 설움, 그것으로 인한 한 때문에 길고 긴 두 줄의 시를 남겼겠다. 또 가난과 못배움의 한을 딛고 기어이 성공해보겠다는 다짐이 있었기에 강철의 시를 남겼겠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그가 객지에서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결코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사람이겠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이미 ‘전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시인은 그의 첫 시집에서 대나무를 빌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앞서 피력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竹篇․1」)라고. 그런데 이 시가 ‘전설’이 된 이유의 또 하나는 사실 백년이 걸려서 찾아가 보아야 “대꽃이 피는 마을”로 상징되는 고향, 혹은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긴 고향은 이미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우리의 꿈과 다짐이 있던 순수의 고향은 그리하여 이제 마음 어느 한켠으로 거두어진다. 
결국 <전설>이란 시는 주로 직관력에 의해 형상화된 시지만 바로 해설을 통해서 보듯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랑이 거리에서> - 채호기 

내가 엎질러 버린 물 
언 얼음 속에 네가 갇혀 있다 
햇빛에게 떨어지며 네 몸은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인다 
얼음 풀리는 시내처럼 
슬픔은 거리를 흐르고 
시냇가에 핀 맑은 꽃처럼 
너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사랑에는 두 개의 극단이 있다. 불과 얼음. 사랑할 땐 불이지만 그 상처는 얼음이다. 사랑은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이다가 때로는 슬픔으로 흐른다. 사랑은 잔인한 경험이다. 슬픔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이나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슬픔 뒤에 너의 눈은 시냇가의 맑은 꽃처럼 나를 바라본다고 한다. 
이 짧은 시도 찬찬히 보면 2행 4연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 연이 다음 연에 對句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시인데 영락없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에서 잘 짜여진 짜임새는 독자에게 시적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것이 외형적인 짜임새도 중요하지만 시에서도 갈등과 깨달음의 구조가 존재함으로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면 내용의 굴곡은 곧잘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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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겨울 저녁이 다시 / 조정권

 

 

 

          

 

 

 

 

 

 

 

 

겨울 저녁이 다시

 

                                조정권

 

정신은 점점 위독해진다

창밖의 일몰 여섯 시 이십 분의 재

사내가 피우고 있는 감옥의 담배

사람들 속에 섞여 누워서

피우고 있는 감옥의 담배

모든 것을 제압하고 무시하고

뻑뻑 피우는 담배

재떨이에는 여섯 시 이십 분까지의 재

머리끝의 재

교회당 꼭대기의 재

조금 있으면 곧 떨어질

여섯 시 삼십 분의 재

발바닥까지 재를 떨구는

암담한 여섯 시 삼십 분까지의 재

 

 

조정권 시집 < 얼음들의 거주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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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어둠의 뿌리 / 조정권 

 

 

 

 

 

 

 

 

어둠의 뿌리

 

                                조정권

 

열한 시 이후부터 밤은 마당에 혼자 남는다.

지샐 곳이 없는 나뭇잎들이 구석에 모여

구석에 깃든 어둠을 한층 더 짙게 한다.

이런 밤엔 누구와 자도 잠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돌맹이가 가득찬 밤하늘이 내리누르는

납덩이같은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유난히도 마당 구석에 진하게 모여 있는 나뭇잎의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밤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제 뿌리를 그리워한다.

기댈 곳이 없는 모든 것들이

차가운 흙 위에 등을 깔고 누워

흙 속의 어느 따스한 품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

 

 

조정권 시집 < 얼음들의 거주지 > 중에서 

 



3. 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산가족으로서의 뼈아픈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지만 늙어가면서 느낀 쑥스러운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김광림의 시에는 민족사가 담겨 있지만 박남수의 시에는 일상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 박남수는 미국에 이민을 와 작품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라 여러분 중에 교분을 나눈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 [훈련] 전문 

시인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하고서 홀아비가 될 남편을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가 봅니다. 그런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아내를 눈을 감았습니다. 이 작품은 흡사 일기를 시행으로 나눈 듯 시적 기교는 없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의 젊은 날의 시 가운데 [아침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같은 눈부신 감각을 보여준 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노년에 들어서서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지사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야 한다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성은 나한테 잘못을 한 타인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넓게 말해 사랑이지요. 여러분은 신문을 읽으면서 혀를 차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혀를 차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마음이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오불관언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일가족 동반 자살의 뉴스가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해마다 정말 자주 듣는 뉴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한 결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지만 살아난 사람도 중태란 소식, 부도를 막지 못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 또 어른은 살아나고 아이들이 죽었으니 이건 동반자살을 아니라 비속살해라는 등등. 자, 시를 읽어봅시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 속의 집] 전문 <현대시학 1996년 2월호>


어린아이들이야 자살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 없고, 부모가(흔히 아버지가) 자식을 일단 살해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혀놓지 않았는데, 1995년 1월에 서른세 살의 남자가 빚 때문에 고민하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의 손을 잡고 영랑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어들었으니 그야말로 '동반' 자살입니다. 타인의 죽음이므로 시인은 1연에서 이 사실을 담담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담담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4행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에 이르면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확, 다가옵니다. 그 겨울의 눈보라는 영랑호를 눈앞에 둔 한 가족을 얼마나 떨게 했을까요. 이 비정한 세상에 남편 없이 팽개쳐질 두 새끼의 목숨까지 거둘 결심을 한 젊은 가장의 굳어 있는 얼굴까지 확, 다가옵니다. 인간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제2연을 쓰게 합니다. 시인은 자살의 현장인, 네 사람의 목숨을 삼키고도 여전히 고요한 영랑호에 고리와 청둥오리들을 보내 조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합니다.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즉,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족을 시를 통해서나마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다 집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한때는 단란했을 그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빚이 없었던 그 가족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하느님이 다 무심하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상국은 시를 구상하는 동안, 초고를 쓰는 동안, 퇴고하는 동안, 신이 되었습니다. 시밖에 쓸 수 없는, 언어의 창조주가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폭탄 테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지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어쩌지 못해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무력감이 서글퍼 제3연을 썼을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인 자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울고 있습니다. 죽은 가족이 시인이 아는 사람들이라 비보를 접하고서 울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는지, 혹은 신문 기사를 보고서 울고 싶었는지, 뭐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자가 이 시를 평하면서 센티멘털리즘이니 감상 과잉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도 시인은 개의치 않기로 한 듯합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시작 행위를 하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렇게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접하면 아이들을 살해한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정 죽고 싶으면 자기네들이나 죽지 왜 애들을 죽여,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개탄한 뒤, 욕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남의 일이기에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국 시인은 젊은 부부가, 혹은 젊은 가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으랴 하는 생각에 이어진 연민의 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물 속에다 집을 지어주고, 물 속의 집 뜨락에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게끔 하고, 화암사 중들에게까지 부탁하여 목탁을 치게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 우리가 어찌 문학을 한다고 운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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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독락당 / 조정권

 

          

 

 

 

 

 

 

 

독락당

 

                         조정권

 

독락당 대월루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조정권 시집 < 산정묘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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