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시는 유머 감각의 산물이다
이상국의 시가 너무 비감하여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번에는 유쾌한 시를 한 편 감상해봅시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비장미, 숭고미, 순정미, 우아미 외에 골계미가 있고, 또 하나 미와 반대개념이면서 미의 일종인 추(the ugly)가 있습니다. 우리 시는 너무 점잖고 엄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하는 중에도 뜻을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거나 씩 웃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정일근, [흑백사진―가물치] 전문
이 시는 상황 설정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촉매제가 바로 가물치입니다. 장모가 마흔이 넘어 처제를 낳았으니 본인은 백년 손님인 맏사위 보기가 민망하고, 장인은 사위 맞기가 멋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위는 그래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들고 처갓집에 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인의 재능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아름다운 금빛으로 도금하는 언어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퍼져나가고", "新羅瓦當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같은 표현도 그렇거니와, 화자의 팔순을 넘기신 할머니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정겨워 독자는 감동하게 됩니다. 시 한 편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듯한 정감을 이렇게 듬뿍 담을 수 있다니, 아니 흘러 넘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6.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재와 주제일지라도 표현 방법이 너무 진부하면 시의 맛이 사라져버립니다.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실험정신이 시를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시도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기로 한다.
그―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
날―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
통합적으로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나의 알 수 없는 우울증은 조금 더 강도를 높인다. 다음 단계로 그날의 사건과 정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이 단계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육신이 제거된 영혼의 교만함이 고개를 쳐든다는 점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두 번째 시도로 들어간다.
정말이지,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가 떠오른다. 정말 어찌 하라는 건지, 나 부끄러움 넘어선 견디기 힘든 굴욕감에 별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깊이 얼음 송곳 밀어 넣는다. 바람에 상처받기 쉬운 겨울나무는 땅의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단단한 겨울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런 잠 못 들기 몇 날인가, 핏발 서린 눈에선 자꾸 마른 눈물 흘러, 말라비틀어진 흔적이 영혼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기막힌 알리바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 더 나아가 내 몸 구석구석 굴욕의 상처들이 바람에 제 존재를 알리는 풀잎처럼 우우, 일시에 일어나 실개울로 흘러 비굴한 시 쓰기를 관통하여 뜨거운 태양이 그대의 오만함을 녹여줄 회복기의 봄을 고대하도록 한다. 이쯤 되면 영혼의 교만함이 육체의 단순성을 비웃듯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강성철, [그날] 전문 <현대시 1993년 3월호>
시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지요? [그날]이란 제목을 보고 '그 어느 날'이라고 생각한 저의 기대지평은 초장에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시인은 '그날'을 달리 생각해보고자 '그'를 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로, '날'을 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으로 해석해본 뒤, 통합하여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봅니다. '그'는 ①번을 선택했으나 '날'은 세 개 중 마땅한 것이 없어 면도날을 연상한 것입니다. ①번 '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에서 날카롭기 짝이 없는 면도날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면도날이라니요. 여기서 독자는 시인의 장난에 우롱 당했다는 당혹스런 느낌과 시인의 계산을 못 따라잡았다는 허탈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제2연에 접어들어서도 강성철은 계속 독자에게 미지의 덫을 놓습니다.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는 면도날을 휘둘러대는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불시에 가한 자네의 행동에 나는 괴롭고 서러워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겨울에 저항하는 겨울나무처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냅니다. 고통과 설움은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는 2연 중반 끝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뒤엉킴의 실마리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시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영혼의 불멸 또한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설사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은 이 현실사회에서도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제 대충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육신을 계속 괴롭히는 영혼의 병이 나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늘 상처받는 내 영혼의 병인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굴욕의 상처들"과 "비굴한 시 쓰기", "그대의 오만함"과 "영혼의 교만함" 등 온갖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면서 굴욕과 비굴, 영혼의 교만함에서 벗어나기를, 고통과 설움이 끝나기를,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제2연 끝 부분에 이르러 '그날'이란 글자의 분석에 몰입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하면서 밤이 깊도록 세고 있듯이 강성철은, 아니 [그날]의 시적 화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그날'이라는 글자를 분석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글자 분석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화자의 우울증이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니까요.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이 괄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늘 어긋나기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숨은 세계에서 승냥이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와 타인은 다들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고, 나의 우울증은 심화되기만 합니다. 읽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동안 뜻이 풀리는 이런 시가 오히려 매력적인 시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 시단을 풍미했던 이른바 해체시라는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갖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호 풀기나 미로 찾기 같은 시 읽기이지만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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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향수 / 정지용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연보
1902년(1세) 음력 5월15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
지용의 아명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지룡(池龍)이었고,
이 발음을 따서 본명은 지용(芝溶)으로 했음. 세레명은 프란시스코.
1910년 (9세)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 입학.
1913년(12세)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
1918년(17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함. 학교성적은 우수하고 집안이 어려워서 校費生으로 선정.
재학당시의 교우로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윤식,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으며 이 무렵 부터 문재를 나타내어 박팔양 등과 8명으로 요람동인을 만들어
동인지<요람>을 프린트판으로 10여호를 발간.
1919년(18세)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이 되어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
12월 <서광>창간호에 소설<3인>을 발표함 지용의 유일한 소설이며 첫 발표작품임.
1922년(21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함. 이때까지 계속 아버지의 친구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
1923년(22세) 휘문고보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하는 문우회에서 만든 <휘문>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됨.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6년(25세) <학조>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
<신민>·<문에시대>에 ·<홍춘>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이 시작.
1927년(26세) <뻣나무 열매>·<갈매기>등 7편의 시를 교토와 옥천을 오가며 씀.
<신민>·<문에시대>·<조선지광>·<청소년>·<학조>지에 <향수>등 30여편의 시 발표.
1929년(28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함.
그 해 9월 휘문고보 영어과교사로 부임, 부인과 장남을 데려와 종로구 효자동로 이사.
1930년(29세) 시문학동인으로 참가, 동인으로는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이 있음.
1932년(31세) <신생>·<동방평론>·<문예월간>지에<고향>·<열차>등 10편의 시를 발표함.
1933년(32세)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의 편집고문을 맡음.
1935년(34세)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출간함, 거의 발표 되었던 작품 89편으로 수록됨.
1936년(35세)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이사. 북아현동 자택에서 부친 별세.
1938년(37세) <동아일보>·<조선일보>·<삼천리문학>·<여성>·<조광>·<소년><삼천리>·<청색지>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우 상>·<비로봉>, 평론 <시와 감상>, 그외 수필 등
약 30여편을 발표.
블레이크와 휘트먼의 시를 번역하여 최재서 편(編)의 <해외서정시집>에 수록.
천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는 등 문필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한 해임.
1939년(38세)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킴.
1941년(40세) <문장>22호 특집으로 ,조찬>· <진달래>들 10편의 시가 특집으로 실림.
둘째 시집 <백록담>이 문장사에서 발간됨
1944년(43세) 제 2차대전의 말기에 이르러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사함.
1945년(44세) 해방과 함께 휘문중학교 교사직 사직.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 여자대학교)교수로 옮겨 한국어와 라틴어 강의.
1946년(45세) 다시 서울의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사함(46세).
6월에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옴.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옮김.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추대.(본의가 아니었으므로 활동한 일은 없음.)
1947년(46세) 경향신문사의 주간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출강.「시경」을 강의함.
1948년(47세)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임하고 녹번리초당(현재 은평구 녹번동)에서 서예를 하며 소일.
2월 <문학독본> 출간. <사시안의 불행>등 37편의 시문, 수필, 기행문 등 수록.
1949년(48세) 3월 <산문>이 출간(3월). 시문, 수필, 역시(휘트면) 등 55편이 수록.
1950년(49세)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됨.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등 33인이 함께 수용 되었다가 그 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
1971년 부인 송재숙 70세를 일기로 별세.
1982년 48명의 문인과 각계인사들이 납북 후 묶여있었던 정지용문학의 회복운동을 시작함.
1988년 3월31일 정지용의 문학이 해금됨. 4월 지용회 결성. 초대회장 방용구.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제 1회 지용제를 지냄
6월 25일 고향인 옥천의 관성회관에서 다시 지용제 개최 이후 16회를 이어옴.
1989년 지용시문학상 제정.
1997년 제2대 회장 이근배.
2002년 5월 정지용 탄신 100주년 서울지용제 및 지용문학심포지움 개최함
2003년 이달의 문화인물 (5월)로 선정 기념 서울지용제 및 지용문학 심포지움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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