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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인, 그리고 그 가족들 - 이육사시인 형제들
2016년 01월 18일 23시 07분  조회:7170  추천:0  작성자: 죽림

가족 이야기-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

"아버지는 위대한 시인이었으나 우리 집은 몰락해"
 

 
  〈청포도〉 〈광야〉 〈절정〉의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딸 이옥비(李沃非·75) 여사를 만나러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새벽 눈발이 날린 국도를 시외버스가 엉금엉금 기어갔다. 도산서원을 지나 ‘땅재’를 가까스로 넘은 버스가 다다른 마을이 안동 도산면 원천리. 육사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 노래한 마을이다. 저 눈이 녹으면 어딘가 알알이 익어 가는 청포도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문득 감정이 벅차 올랐다.
 
  눈 덮인 ‘이육사문학관’을 50m가량 내려와 ‘목재(穆齋) 고택’에서 여사를 만났다. 이 고택은 조선후기 문신(文臣)이자 퇴계(退溪) 후손인 목재 이만유(李晩由·1822~1904)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택 아래 펼쳐진 겨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음자 한옥의 자그마한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들어가 이옥비 여사와 마주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집안이었어요. 친구들은 아버지가 투사고 시인이라며 부러워했지만 속으로 지게꾼이라도 좋으니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원망했어요. 삼촌들이 월북(越北)하고 집안에 피해가 많았어요. 연좌제 때문에…. 아버지나 삼촌의 흔적을 찾고 싶었지만 행여 어린 아이들에게 해(害)가 될까 봐 침묵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어요.”
 

목재 고택 앞 〈청포도〉 詩碑.
  육사는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첫째 원기(源祺),
둘째 원록(源祿),
셋째 원일(源一),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
여섯째 원홍(源洪)이다.

둘째 원록이 바로 이육사다.
 
  이들 6형제 중 3형제가 일제시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는데 육사가 대구주재, 원조가 본사 학예부 담당, 원창이 인천주재 기자로 활약했다. 형제는 민족의식도 투철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이 터졌을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너무 어려 잡혀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며 셋째 원일과 넷째 원조는 월북했고, 다섯째 원창은 셋째 형을 만나러 북으로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황해도 해주에서 폭격을 맞아 숨졌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이산(離散)으로 육사 집안의 내력은 오래 불문(不問)에 부쳐졌었다.
 
 
  陸史 집안 내력은 불문에 부쳐져
 

‘민족시인’ 이육사의 생전 모습. 왼쪽은 1943년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친지들에게 돌렸다는 사진. 오른쪽은 1934년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찍힌 사진.
  이 여사는 아버지 6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형제는 용감했고, 정도 넘쳤다. “퇴계 후손들이 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자존심이 강하다. 잘 안 굽힌다. 삼촌이 우리 집에 오면 유토피아 세계를 들려주셨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25 전까지 원일·원조·원창이 삼촌이 한 달에 세 번은 우리 집에 오셨어요. 우리 어머니(안일양)를 위로하려고요. 삼촌들이 어머니께 술·담배를 다 가르치셨어요. ‘형수가 아니라 누나’라면서…. 삼촌 주량이 꽤 쌨는데도 나중에는 어머니가 대작할 정도가 되셨어요. 오시면 정치 얘기도 하고, 나라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어머니도 그런 사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나 봐요.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제간 우애가 워낙 좋았으니 사상을 공유했을 겁니다.”
 
  육사가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과 임시감옥에서 순국할 당시 아내 안일양(安一陽)씨의 나이는 38살이었다. 육사는 1921년 경북 영천이 고향인 안씨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평생 흰옷만 입으셨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아 부잣집 침모 노릇을 하며 한 달에 비단 두루마기를 40~50벌 지으셨지만 자신은 무명옷만 입으셨죠. 환갑이 지나시고, 제가 자꾸 권하니까 회색 옷을 입으시다가 나중엔 차츰 옥색도 걸치시긴 했어요.”
 
  이런 일도 있다.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이 자수한 뒤 1기생들이 연이어 잡혀갔다. 육사도 그해 3월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됐다. 처남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제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편지 6장을 써서 보냈대요. ‘더러운 혈통을 물려받은 딸과 함께 살 수 없으니 데려가라’고요. 우리 집에 와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문안인사만 하고, 잠은 집 근처 여관에서 주무셨어요. 무려 7년 동안이나요. 우리 어머니 참 마음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버지가 워낙 강인하시니까…. 어머니는 하도 수치스러워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 하셨대요.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어요. 고부(姑婦) 사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아버지 같은 분이야 모진 고문도 다 이겨낼 수 있었지만 외삼촌(안병철)은 힘이 드셨을 거예요. 외삼촌은 배우를 하면 딱 맞을 분이셨어요, 젊었을 때 무대에서 ‘아리랑’ 공연도 하셨대요. 그 일이 있고 외삼촌은 제게 미안해하셨어요. 어디 출타하셨다가 돌아오면 꼭 제게 선물을 사 주셨어요. 처음 두 분의 관계를 몰랐다가 중2 때 처음 알았어요. 큰 충격이었습니다.”
 
 
  李活, 大邱二六四, 肉瀉·戮史·陸史
 

이육사(왼쪽)와 동생 이원창.
  —‘저항의 시인’답게 육사는 평생 꼿꼿하게 사셨네요.
 
  형제들은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투척을 한 ‘장진홍의거 사건’에 연루돼 6형제 중 4형제나 구속됐다. 1년6개월 형을 받은 둘째 원록의 수인번호가 ‘264’다. 그때부터 자신의 이름 대신 ‘이육사’로 불렸다.
 
  “어린 다섯째와 여섯째 삼촌을 빼고 4형제가 잡혀갈 때 아버지는 그저 ‘사과밭에 서리하러 간다. 놀러간다’고 하셨대요. 그날 대구에선 신문 호외(號外)가 돌고, 일경의 호루라기가 요란할 정도로 사건이 컸다고 해요. 아버지는 붙잡혀서 고문을 당해도 ‘나는 모른다’고만 하셨대요. 돌아가실 때 마지막 작성된 조서에도 ‘나는 모른다, 뭐든지 모른다’고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필명에 대해 들은 게 있나요.
 
  육사의 필명은 여러 개를 썼다.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 육사(肉瀉·戮史·陸史) 등 다양하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받은 수인번호(264)에서 나왔다고 해요. 어떤 분은 성씨가 ‘이씨’고 수인번호가 64라고 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입니다. 처음 필명을 ‘죽을 육(戮)’ 자를 써서 육사라 썼다고 합니다. 역사가 일제 역사니까 일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인가 봐요. 그걸 두고 한학자이신 집안 어른이 아버지에게 ‘네 뜻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쓰면 시를 발표하기 전에 잡혀간다. 대신 땅육(陸) 자를 써라. 이 자는 우리 옥편이나 일본 한자사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 자전에는 육(戮)자와 같은 의미’라고 하셨대요. 그 뒤로 육사(陸史)를 쓰셨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삶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아버지부터 잡아갔대요. 어머니도 덩달아 끌려가 따귀를 맞고…. 순사가 아버지 행방을 추궁해도 어머니는 ‘모른다’고만 하고, ‘그것도 모르냐’고 때리면 ‘소박데기여서 나는 모른다’고 맞섰대요. 한번은 아버지가 체포되자 어머니가 잣죽을 끓여 갔더니 ‘소박데기가 왜 왔냐’며 또 따귀를 때리더래요. 어머니가 ‘비록 소박은 맞았어도 남편이 위급할 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이라시며 ‘임부(姙婦) 따귀를 때렸으니 천황에게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당시 저를 배셨는데 임부는 때려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나 봅니다.”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죄’로 육사 아내는 늘 일경에 끌려가 따귀를 맞았고 청상과부로 수절해야 했으나 1984년 사망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여장부였다는 것이 이 여사의 회고다.
 
 
  이육사의 조카가 평양시장이 되다?
 

맏형 이원기가 남긴 간찰.
  육사의 형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첫째 원기는 3명의 동생과 함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주범으로 검거돼 대구형무소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의 몸이 돼 종신(終身)토록 고생했다고 한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육사보다 앞서 1942년 순국했다.
 
  1930년 12월 24일 이원기가 보낸 간찰(簡札)이 남아 있는데, 상(喪)을 당한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동생이 격문(檄文)으로 구속된 정황을 언급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파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흉년으로 부모와 형제가 곤란을 겪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 원일(셋째)은 어제 저녁에 그곳(대구형무소)에서 병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병든 것은 놀라워 곧바로 의사로 하여금 증세를 진단하니 증세가 얕지 않다고 합니다. 또 활(活·이육사) 군도 옥살이 하는 속사정을 탐문해 보니 고통당하는 것이 예사롭지 아니하여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위독한 것을 생각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무슨 사람의 일입니까? …〉
 

경주 불국사에서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 끝이 맏형인 이원기이고 오른쪽 앞에 앉은 이가 이육사다.
  이 여사의 말이다.
 
  “큰아버지도 글이 좋으셨대요. 남겨진 글들이 지금도 간혹 나오고 있어요. 슬하에 2남3녀를 두셨는데 장남이 이동영(李東英·작고) 부산대 명예교수입니다.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어머니와 사촌들하고, 대구 삼덕동 한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우리 집은 밥 먹는 식구가 언제나 스물이 넘었어요. 대구 살 때 주소가 삼덕동 88번지였는데 다들 ‘88여관’이라 불렀지요.”
 
  —셋째 원일씨 가족 얘기를 들려주세요.
 
  “셋째 삼촌은 그림을 잘 그려 서화가셨다고 해요. 숙모님이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1412~1456) 가문이셨는데 6·25 전에 돌아가셨어요. 슬하에 남매를 뒀는데 사촌언니 동탁이는 정말 재주가 좋았대요. 7살 때 가사를 썼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가사 두루마리를 보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제가 두 돌 지나고 어머니가 병에 걸려 격리치료를 받느라 저를 그 집에 맡기셨는데, 언니가 저를 두루마기까지 해 입혔대요. 9살짜리가 말이죠. 그렇게 재주가 좋았는데 장질부사 앓다가 시름시름 죽었어요.
 
  동선이 오빠는 아버지(원일)를 찾으러 혼자 북으로 가셨대요. 그분이 북에서 자신을 ‘육사 아들’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이 ‘육사가 젊은시절 중국을 많이 오갔으니 아마 그때 혈맥을 떨어뜨렸나 보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동선이 오빠는 나중 김일성대학을 나와 평양시장이 됐다는 얘기가 있어요. 옛날 허흡(許洽) 대구시장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 여사는 “원일이 삼촌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뒤 6·25가 나고 조선노동당 재산담당 직책을 맡아 남한으로 내려왔다는데 고향인 안동까지 오진 못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덕혜옹주 6촌동생과 결혼한 이원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이원조.
  넷째 원조는 일제시대 ‘냉혹한 비평가’로 당대에는 이육사보다 더 유명했다. 1935년 일본 호세이대(法政大) 불문과를 나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약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에게 혹독한 비평을 가해 그의 펜은 화제가 됐다. 그는 광복 후 좌파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임화·김남천·설정식과 함께 박헌영(朴憲永)을 따라 1946년 월북했다.
 
  “셋째 삼촌은 조부에게 한문을 배우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문하에도 들었는데 위당께서 ‘장안(長安) 3재(才)의 1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똑똑했다고 해요. 당시 명망 높으셨던 이관용(李灌鎔)의 따님과 결혼(주례 조병옥 박사)했어요.”
 
  이관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손녀인 이정원(李貞媛)과 이원조의 결혼은 ‘국혼(國婚)’이었다.
 
  “넷 숙모님은 덕혜옹주의 6촌 동생이셨는데, 슬하에 딸 셋을 데리고 남편을 찾으러 월북하셨어요. 왕족이었으나 현대여성처럼 서글서글하게 생기셨대요. 큰애 이름이 혜정이고 둘째가 정소, 셋째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원조 삼촌은 1955년 옥사(獄死)했다는데 숙모님도 따라 숨졌다고 해요. 아마 자손이 북한에 남아 있을 겁니다.”
 
  이원조는 비평만이 아니라 1928년, 1929년 연속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될 정도로 문재(文才)가 출중했다.
 
  다섯째 원창은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일했다.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자 지방특파원 방담기사에서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한 일화가 회자한다. 그는 광복 후 《인천신문》 창간에 참여해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46년 미(美)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필화를 겪기도 했다.
 
  “다섯째 삼촌은 조봉암 비서를 지냈다고 하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고 해요. 6·25전쟁 때 셋째 삼촌(원일)을 만나 보고 온다고 이북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어졌어요. 해주에서 폭격에 맞아 죽었다고 해요. 원조 삼촌이 조용하고 위트 있는 성격이라면, 원창 삼촌은 호탕했다고 합니다.”
 
  여섯째 원홍은 19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삼촌들이 막내에게 문학을 권했으나 싫어했다”고 말했다.
 
  “문학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셨대요. 원일 삼촌이 어느 미술선생에게 막내가 그림소질이 있는지 1주일만 봐달라고 맡겼는데, 사흘만에 ‘소질이 있다’고 찾아왔대요. 첫 출품한 전국미술대회에 입선으로 당선됐다고 해요. 삼촌들이 모두 모여 빈대떡을 굽고 잔치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했대요. 삼촌들이 ‘니가 흥분해서 체했나 보다’며 등을 두드리는데 쓰러졌대요. 그 길로 돌아가셨어요. 요즘으로 치면 심장마비였다고 합니다.”
 
  이옥비 여사의 이름은 ‘기름져서는 안 된다(沃非)’는 뜻을 갖고 있다. 육사가 손수 지었다고 한다. 이념으로 찢긴 ‘몰락한 집안’을 그녀는 육사가 지어 준 ‘경계의 이름’으로 버텨 왔다. 2007년 육사의 고향에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지자 안동에 정착했다.
 
  “삼촌의 사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어요. 당대 지식인이 그랬듯 공산주의를 유토피아로 보았던 거죠. 그분들이 독립투쟁을 하며 헌신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을지 모릅니다. 좌우 이념이 경직된 시대에 태어난 것이 불행하고 한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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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향기 홀로…" 아버지 정이 더욱 그리워
 
 
 
  대구 북구 이육사 문학관 건축현장을 찾은 이육사의 딸 이옥비 여사가 상량문을 작성하고 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1904~1944)의 고명딸 이옥비(75) 씨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대구를 방문했다. 대구가 이육사가 40년 인생 중 절반가량(1920년대~1937년 서울로 이사)을 보낸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씨는 대구 북성로에 현재 공사 중인 가칭 대구이육사문학기념관에 들러 상량문이 새겨질 대들보에 이육사의 시 '광야'의 한 구절을 직접 적었다.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기념관은 올 연말 또는 내년 1월 16일 이육사의 기일에 맞춰 개관한다. 기념관은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과 함께 대구에서 유년기와 청장년기를 보낸 이육사의 흔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된다.

이 씨와 박현수 경북대 교수 등 일행은 이날 이육사의 대구 흔적을 두루 찾는 시간도 가졌다. 서문로교회 자리에는 원래 '실달사'라는 일본 사찰이 있었는데, 그 옆에 이육사의 숙부 이세호의 집터가 있다. 이육사가 16세 때 대구로 와 거처를 찾지 못해 잠시 머문 곳이다. 이육사가 기자로 일했던 계산동 중외일보 대구지국 자리에는 현재 모텔이 들어서 있다. 이육사가 문인 등 사람들을 만났던 달성공원 건너편 조양회관 자리에는 지금 빌딩이 위치해 있다. 이 씨는 "모두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했다.

일행은 이후 남산동으로 이동, '대구부 남산정 662번지'라는 이육사의 경찰 신문조서 속 기록이 가리키는 곳을 방문했다. 이육사의 부모와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살던 곳이다. 이옥비 씨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살던 이곳을 난생처음 찾았다. 그러나 미로 같은 골목길 속 굳게 대문이 잠긴 이곳과 주변 주택가는 재개발을 이유로 향후 철거될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이육사의 대구 흔적을 발굴하고 있는 박현수 교수는 “이곳은 대구에 유일하게 실물이 남아 있는 이육사의 흔적이다. 늦었지만 보존 방안이 절실하다”고 했다.

 

황희진 기자

▲ 이육사열사의사진과 육사시집 
 
▲ 감옥살이로 인해 붙여진 이름, 이육사  

이육사 열사는 ‘광야’, ‘절정’, ‘청포도’ 등의 시를 남긴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로써 초등학교 6학년 사회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킨 사람들(홍난파, 김소월, 안익태, 이육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1927년에 방년 23세의 나이로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얽혀 구속되어 첫 옥살이를 시작하였고, 그 후에도 16회를 더 투옥되어 40세 나이로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었다.
 
이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낸다. 
 
▲ 이육사열사의 생가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그의 문학적 기질을 조상인 퇴계 학통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의 고향 안동은 독립운동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며 가자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원촌은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섰던 마을로써 이육사 열사도 그 영향을 받아 나라를 지켰다. 
 
그의 형제는 6형제로 그 당시 주위에 우애가 깊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첫 옥살이 때도 첫 옥살이를 함께했다. 그리고 이육사·원조·원창 3형제가 함께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육사가 ‘이원조의 중형(仲兄·둘째형)’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이원조는 광복 후 죽은 이육사의 시를 모아 ‘육사시집’을 펴냈다. 
 
▲ 이육사열사의 형제들 (사진=이육사문학관 홈페이지)

이육사 열사의 원래 이름은 원록,원삼,활로 불리웠으나 감옥살이로 인해 붙여진 264를통해 이름을 바꾼 것이 지금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처음에 육사란 이름을 쓸때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라는 뜻을 사용했으나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니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하여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 이름으로 숨을 거두었다
.
 
그의 글은 전통적인 요소를 지니면서 일제강점기에 의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은 경험으로 여성적 감수성과 대륙적 기상과 남성적 의지로써 광복에 대한 갈망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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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고향 안동 원천리 문학관 세워져 애국정신 추모 
4살때 여읜 아버지… 포승줄 묶여 끌려가신게 마지막 
일본인 용서 어려워… 생가복원·후원회 만드는게 꿈 



□ 아버지를 죽인 일본 건너가 

현재의 이옥비 여사가 있기까지는 이육사문학관 건립의 뜻을 품은 김휘동 전 안동시장의 끈질긴 권유와 설득 덕분이다.  

지금도 이 여사는 이육사문학관을 통해 상·하반기 문학축전을 비롯해, 백일장, 문학기행 등 다양한 문학관련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전하고 있다. 

이 여사가 아버지를 잃은 시기는 겨우 4살 때였다. 우여곡절의 시기를 지나 대구여고, 대구여사대 등을 졸업하고 1964년 결혼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궁중요리 꽃꽂이 등을 공부해 제자를 양성하다가 1999년 나이 예순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일본 한국총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을 조금씩 배워갔다. 이것이 첫 번째 일본행 이유였다.  

  
  ▲ 안동시가 저항시인이자 퇴계 이황의 14세손인 육사 이원록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도산면 원천리에 건립한 이육사문학관.  
▲ 안동시가 저항시인이자 퇴계 이황의 14세손인 육사 이원록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도산면 원천리에 건립한 이육사문학관.

먼저 그녀는 왜 그토록 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죽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다.

이 여사는 일본을 이렇게 평가했다. “개인적인 일본인은 아주 착실하고 진실하지만 여러 명만 모이면 악독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잦은 지진 등 불안감이 들어서인지 땅에 대한 애착이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첨예한 차이가 있어 침략과 같은 생각을 자주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또 “초상이 나도 형제자매 구분 없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알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개인주의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이런 일본 생활이 아주 힘들고 외로웠지만 2~3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가슴에 큰 아픔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일본인이 가깝게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렇게 일본을 알게 됐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신앙적으론 용서하나 이성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소회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래도 선명 

겨우 4살 때 영결했는데도 딸에겐 아버지 육사 기억이 선명한 듯했다.

“아버지는 아이보리색 양복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어린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셔서 핑크색 모자, 자주빛 원피스, 주름 넣은 반바지, 구두 등을 사다주곤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밀짚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포승줄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가신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여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아버지 모습도 전했다. 아버지의 성품이 늘 강직했다는 어머니의 전언도 그 중 하나였다. 원기, 원일, 원조 등 육사의 6형제가 모여 시를 발표하고 논평하는 시회(詩會) 날이면 장원을 가려 서로를 격려하는 등 우애가 깊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학창시절이던 1960년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신석초 시인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줬었다. “너희 아버지는 장안 최고의 신사였던데다 자존심마저 대쪽 같았다. 변장술에 능하고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실력은 가히 명사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 이육사의 시를 비석에 새겨 공원화한 이육사시비공원.  
▲ 이육사의 시를 비석에 새겨 공원화한 이육사시비공원.

□ 이옥비 여사의 남은 꿈  

이육사문학관이 조성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찾은 일본인이 겨우 10명뿐이다.

이옥비 여사는 “문학적으로 방문한 일부 일본인은 먼저 사과부터 하지만 모른척하기도 한다. 문학관 영상 내용이 일본인 입장에서 자존심 상할 수 있다보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문학관에는 일본인들이 찾지 않지만 인근 도산서원에는 많이들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경에 있을 때 퇴계 15세손이라고 하니까 한 일본인이 존경을 표하고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난 너희를 존경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지요” 

이 여사는 앞으로 해야 할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1976년 안동댐 축조로 수몰 당시 형태도 맞지 않게 이건된 안동시 태화동의 육사 생가를 도산면 원천리로 제자리에 옮기는 일이다. 

이 여사는 3대문화권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이육사문학마을조성사업을 통해 생가를 예전모습그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 이육사 선생이 1943년 중국 북경으로 넘어가기전 지인들에게 주었던 사진.  
▲ 이육사 선생이 1943년 중국 북경으로 넘어가기전 지인들에게 주었던 사진.

두 번째로 서울에 육사후원회를 만드는 일이다. 안동만이 아니라 전국, 세계의 육사가 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려면 반드시 후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가 태어난 곳이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입니다. 그 말은 곧 아버지가 그곳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종로구에서 지번이 살아있다고 전해왔습니다. 그곳에 육사로를 만들고 육사후원회도 만들어 안동의 문학관과 같은 역할로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비록 소원이지만 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딸의 절실한 마음이 고스란히 베여 있었다. 

안동/권기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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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형제와 이상화의 관계 시사

일제 강점기 대표적 저항시인이상화와 이육사 형제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도 나왔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이두파(李斗坡)란 이가 창간호에 기고한 축시 '이역의 봄'는 '오- 때의 봄은 왔는데, 우리의 봄은 언제나 올까, 이역의 봄'이란 탄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듬해 발표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박 교수는 "'두(斗)'는 육사 형제들이 쓴 호인데, 여러 점으로 미뤄 항일 항쟁에 몸을 던지고 동생 둘을 이끌던 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상화의 시는 이에 대한 화답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육사 형제들과 이상화 시인과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경북 안동 출신인 육사 형제들과 대구 출신인 이상화가 이 지역 청년 사회의 저항적 흐름 속에서 상당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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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와 경성제대 중문과 출신의 문학자 김태준(1905~1949), 무용수 최승희(1911~1967) 등이 중국의 루쉰(迅·1881~1936), 장아이링(張愛玲·1920~1995) 등과 각각 교류했던 내용과 자료, 증언 등을 홍 교수가 중국 현지로 찾아가 발로 써내려간 연구서다.

이육사가 루쉰과 실제 교류했고, 학문적으로 사숙했음 또한 연구자들 중심으로 확인된 바 있다. 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여전히 연구가 필요하다. 홍 교수는 이육사가 1926년 겨울학기부터 이듬해 봄학기까지 다녔던 중국 베이징의 ‘중국대학’의 캠퍼스 위치를 확인하고, 당시 신문과 잡지, 일기 등 중국 현지의 다양한 자료는 물론, 중국대학 졸업생 인터뷰 등을 통해 이육사가 어떻게 중국현대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는지 실증적으로 고찰한다. 또한 1933년 6월 중국 상하이에서 딱 한 차례 루쉰과 조우한 경험이었지만 이육사는 전통이 해체되고 근대가 수립되는 시기에 자신처럼 전통과 근대를 내면화하는 루쉰에게 문학적 교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도 이해할 수 있다. 이육사는 루쉰의 글뿐 아니라 쉬즈모(徐志摩), 후스(胡適), 궈모뤄(郭沫若) 등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힘썼다. 



또 ‘색, 계’(色, 戒)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장아이링은 현대 중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장아이링은 1945년 4월 9일 당시 아시아를 떠들썩하게 한 최승희를 만난다. 상하이 월간문예지 ‘잡지’는 ‘최승희의 두 번째 상하이 방문기’ 글을 통해 중국 최고의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 장아이링과의 좌담 내용을 실었다. ‘신중국보’ 신문사가 개최한 좌담회였다.  

홍 교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당시 최승희와 장아이링의 사진까지 실었다. 장아이링의 장편소설 ‘앙가’(秧歌)와 ‘적지지련’(赤地之戀)에서 한국전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우연만이 아님을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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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창살 통풍구' 등 일부시설 확인…70년간 '도심흉물'로 방치
거주민 "무서워 들어가 보지도 못해"…中 '재평가 작업' 시사

 

베이징 도심 왕푸징(王府井) 대로에 인접한 '둥창후퉁(東廠胡同) 28번지' 내에 위치한 일제 시설물. 베이징의 문화유산 보호활동가들과 국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일제는 이 건물을 1937년부터 패망 직전까지 감옥시설로 사용했다.

 

(베이징=연합뉴스) 진병태 홍제성 이준삼 특파원 =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1904∼1944) 열사가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 곳으로 추정되는 베이징(北京)의 '일제지하감옥' 시설이 지금도 70년 전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고증 작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 시설물은 재개발 등으로 조만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알려져 왔다.

 베이징지역의 문화유산 보호전문가와 국내 일부 역사학자에 따르면, 베이징 도심 왕푸징(王府井) 대로에 인접한 '둥창후퉁(東廠胡同) 28번지'에는 일본 헌병대가 1937년부터 패망 직전까지 감옥시설로 사용했던 일제식 2층 건물이 남아있다.

 

'일제감옥' 1층에 설치된 굵은 쇠창살. 지역 주민들은 이 쇠창살이 감옥시설의 일부라고 말했다.

 

연합뉴스가 지난 2015년 5∼7월 두 차례에 걸쳐 이 시설물의 실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지하감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지하공간과 지상감옥 시설의 일부로 보이는 오래된 쇠창살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는 민가로 쓰이는 이 건물의 크기는 대략 가로 25m, 세로 8m다.

10대 때부터 줄곧 4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는 주민 자오쥔(趙軍) 씨는 "지하에서 지상 2층까지 건물 전체가 감옥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하실은 중범죄자 고문·감금 등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건물의 외벽 바닥 부분에서 굵은 쇠창살이 박힌 길이 50㎝의 환기구멍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건물의 외벽 바닥 부분에 설치된 길이 50㎝의 구멍. 구멍 사이로 굵은 쇠창살이 설치돼있는 모습이 보인다. 거주민들은 이 구멍이 지하감옥의 통풍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카메라 플래쉬를 사용해 촬영한 '지하감옥' 모습. 일제 헌병들이 이곳에서 이육사를 포함한 많은 항일운동가들을 가둬두고 고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지하감옥 전체에 1m 깊이의 작은 구덩이가 파여 있다", "전체가 큰 물감옥(水獄)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 지하실의 구체적인 모습은 일제 패망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실상 '미확인' 상태다.

자오 씨 역시 "감히 지하실에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이미 오래 전에 주민들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이육사는 1943년 서울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됐다. 국내 일부 역사학자와 이육사 후손들은 일제 헌병들의 시신 인계장소 등을 고려할 때 바로 이곳에서 이육사가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상 1∼2층 내부공간은 수십년 간에 걸친 걸친 증·개축으로 옛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주민 자오쥔 씨가 과거에 촬영해온 '일제감옥' 내부시설의 흔적. 건물 1~2층 사이에 설치된 이 커다른 타원형 구멍은 수감자들에 대한 감시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자오 씨는 말했다.
주민 자오쥔 씨가 과거에 촬영해온 '일제감옥' 내부시설의 흔적. 지상감옥에 설치돼있었던 굵은 쇠창살.

 

이 일제시설물은 중국의 많은 항일지사들이 고초를 겪은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국내 역사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일찍부터 보존 필요성이 제기돼왔지만, 베이징시는 "구체적인 사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며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탐사보도 언론가이자 중국문물학회 회원인 쩡이즈(曾一智) 씨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2011년에 베이징시에 이 시설물에 대한 보호조치 필요성을 요청한 바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승전 70주년'(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계기로 중국 내에서 미확인 항일유적지 보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면서 베이징시도 이 일제 시설물에 차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베이징시 둥청(東城)구 문화위원회는 최근 연합뉴스의 관련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예전에 실시한 전문가 조사에서는 이 시설물이 일제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면서도 "추가조사를 통해 충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료를 확보한 뒤 (보존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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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여름 내내 필자는 대구MBC가 기획한 ‘이육사 최후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매달려 있었다. 8월 25일에 방영된 이 다큐멘터리는 이육사의 삶과 죽음을 조명한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이 다큐멘터리의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이육사의 최후를 목격했던 유일한 생존자인 항일운동가 이병희 선생(여, 86세)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다큐멘터리의 구성과 글을 맡았던 필자로서는 이육사에 대한 자료 수집만큼이나 이병희 선생에 대한 자료 수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희 선생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다. 이병희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바 있는 일제시대의 항일 운동가들 중 유일한 여성 생존자인 까닭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는 이병희 선생의 육성 증언이 담긴 영상 기록물을 비롯해서 다양한 기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필자는 그 곳에 전시돼 있는 기록을 토대로 하여 이병희 선생의 항일운동 경력을 되짚어 볼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필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두 명의 인물이 이병희 선생의 항일운동에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말할 것도 없이 이육사였고, 또 다른 인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 간 전설적인 항일운동가 이재유였다. 이재유를 그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물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정말이지 예기치 않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2. 이육사와는 한 집안인 이병희 선생은 1918년 생으로 1904년 생인 이육사 보다 열 네 살이 어리지만 항렬로는 손녀 뻘 된다. 촌수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정도로 멀지만 아버지인 이경식 선생이 일찍이 이육사와 교류를 해 온 까닭에 이병희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이육사와 알고 지냈다. 

 

이병희 선생은 아버지인 이경식 선생과 이육사가 큰아버지인 백농 이동하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어울려 지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구에 거주하며 대구지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백농은 종로에서 하해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하해여관이 이경식, 이육사를 비롯한 대구 지역의 지사들이 모여들곤 했던 아지트였다는 것이다.

 

이 아지트에 모여든 지사들은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터진 것이 바로 1927년의 장진홍 의거였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 사건을 통해 이경식, 이육사 등의 지사들은 일본 경찰에 구금된다. 주범인 장진홍 의사가 도피해 버리자 평소에 장진홍의사와 자주 어울리던 이경식, 이육사 형제 등이 일본 경찰에 의해 공범으로 체포 구금됐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9살이던 이병희 소녀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이 사건에 대한 이병희 선생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원래 이 사건은 아버지(이경식)와 이육사 형제, 그리고 장진홍 의사가 함께 모의한 사건이었어. 그런데, 아버지랑 이육사 형제는 때를 기다리자는 신중한 입장이었고, 장진홍은 빨리 하자는 입장이었지. 그런데 어느날 장진홍이 거사를 도모해 버린 거야. 그런데, 폭탄을 쌌던 종이가 이육사의 집에 있던 신문지였다고 해. 이육사의 집에 모아둔 신문지 가운데 폭탄을 쌌던 신문지 날짜만 쏙 빠져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이육사랑 아버지랑 늘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이 죄다 체포됐던 거지.”

 

훗날 장진홍 의사가 체포되면서 자신의 의거가 단독 범행이었음을 주장하게 되고 그 결과 공범으로 연루됐던 이들은 모두 무죄 석방된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2년 7개월가량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병희 선생은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 던진다.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지 알아? 그건 말이야.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라는 말이야. 동지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너 혼자 다 안고 가라는 말이었다고. 당시 우리 집안 분위기는 그랬어.”


 

3. 이병희 선생에게 있어 이육사는 참으로 소중한 인물이다. 이병희 선생은 부친인 이경식 선생과 더불어 1996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는데, 해방 된지 51년이나 지난 뒤에야 일제시대의 활동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은 모두가 이육사 때문이었다. 이육사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 결과 이병희, 이경식 선생의 항일운동의 내용이 알려졌고 그래서 뒤늦게나마 두 사람의 항일 운동은 평가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육사의 항일운동을 추적하던 사람들이 맨 처음 주목했던 것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육사의 죽음이었다. 이육사가 북경의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이육사가 정확히 어디에 수감돼 있었고 또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조사는 이병희 선생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러다보니 이육사가 북경 감옥 순국사실이 거짓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육사가 투옥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호적부에는 그가 이병희라는 친척의 집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병희라는 인물이 나서지 않는 한 이육사의 옥사 주장은 이 새로운 주장에의해 대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병희 선생의 실체를 맨 처음 확인한 것은 대구MBC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1994년에 ‘광야에서 부르리라-이육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던 당시의 제작팀은 이병희라는 인물이 살아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여 탐문을 거듭한 끝에 그동안 남자일 것이라고 짐작돼 오던 이병희라는 인물이 여성이며 생존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병희 선생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이육사와 관련된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들이 일거에 풀렸다. 당시 이육사는 북경과 중경, 연안의 인맥들을 엮는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 체포된 뒤 북경으로 압송돼 와 북경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심문을 받던 중에 순국을 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최후를 지켜 본 이병희 선생 역시 이육사와 정치적 선택을 함께 했던 동지였으며, 함께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밝혀졌다.

 

1994년 8월 8일에 방영된 대구MBC의 다큐멘터리 ‘광야에서 부르리라-이육사’ 이후에도 새로운 사실들은 속속 드러났다. 이병희 선생의 입을 통해 그의 부친인 이경식 선생이 이육사 형제와 더불어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투옥된 바 있으며, 그 자신 역시 1930년대에 노동쟁의를 주도하던 노동운동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주장이 각종 문헌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병희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경험이 있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여성 항일운동가라는 것도 새로이 밝혀졌다.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정부는 1996년의 광복절에 이들 부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과 독립유공자 표창을 한다. 이육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계기가 되어 두 명의 잊혀질 뻔한 항일 운동가가 독립유공자로 부활하게 된 셈이다.

 

 

4. 오늘날, 이병희 선생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이육사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16세의 나이에 종연방적이라는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파업을 주도하다 4년여의 옥고를 치른 항일노동운동가 이병희 선생의 뿌리는 이재유에 닿아있다.

 “공산주의자로서 일생을 마치고 혁명가로서의 미명을 후세에 남기려고 결심했다..........나는 ‘자본론’을 정독하여 마스터했다. 형무소야말로 나에게는 공산주의의 대학이었다.”

 

1930년 11월에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되어 구속되었던 이재유는 출옥한 직후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랬던 그가 1936년 연말에 다시 체포되자 당시의 어용신문인 ‘경성일보’는 ‘집요 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되다.’라는 호외를 내기도 했다. 이재유의 체포로 인해 조선공산당이 괴멸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기사는 당시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이재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병희 선생이 이재유와 인연을 맺었던 것은 집안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여상(서울여상의 전신)에 재학 중이던 무렵 여학생 이병희는 사촌오빠 등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눈을 뜬다. 그리하여 이병희는 이른바 ‘이재유 그룹’의 일원이 된다.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자생적인 공산주의 그룹인 ‘이재유 그룹’은 국제주의 노선을 추종한 운동방식과 대비되는 조선의 특수한 현실상황의 요구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운동을 벌여왔다. 당시 ‘이재유 그룹’이 가장 치중했던 것은 적색 학생서클을 조직하여 노동현장에 투입하고 적색 노동조합을 건설하여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운동이었다. ‘이재유 그룹’에 속해 있던 여학생 이병희 역시 이런 노선에 적극 호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학업을 포기하고 ‘종연방적’이라는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기에 이른다.

 

이재유가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한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1933년부터 그가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에 휘말려 다시 구속되던 1936년 연말까지, 서울 일대의 노동현장에서는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물론 '이재유 그룹'의 작품이었다. 여공 이병희 역시 이 움직임 속에 있었다. 당시 16세이던 이병희는 직공들을 선동하여 동맹파업에 동참한다. 하지만 이 들불 같이 피어올랐던 노동운동은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때 내 나이가 16살인데 내가 뭘 알았겠어? 시킨 대로 한 거지. 근데 체포돼서 보니까 일이 이상하게 돼 있더라고. 내가 삼택 교수의 직계로 돼 있는 거야.”

 

이병희 선생이 말하는 삼택 교수란 당시 경성제국대학교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를 말한다. 이재유는 같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던 미야케 교수와 투쟁방법을 논의해 왔는데, 1934년에 일제에 일시 검거됐다 탈옥하는 과정에 미야케 교수의 관사에 잠시 숨어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의해 적발돼 미야케 교수는 체포되고 이재유는 다시 도피생활을 하게 되는데, 미야케 교수의 체포 소식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파를 안겨준다. 미야케 교수의 체포 뒤, 당시 신문들은 ‘미야케 교수 적화공작 사건’이니 ‘경성제대 연구실, 관사는 공산운동의 총본영’이라는 식의 제목 하에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던 것이다.

 

미야케 교수의 직계로 분류된 이병희 선생은 상당기간 옥고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약 4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이병희 선생은 대구로 내려와 있다가 1940년에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43년에 북경에서 이육사와 재회를 한 뒤 그와 좌우합작의 방법을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단독 행위임을 주장한 이육사의 배려로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풀려난 직후인 1944년 1월에 이육사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접하게 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들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한편, 1936년 연말에 체포돼 있던 이재유는 그 무렵 공주교도소로 이송돼 있었는데, 그 역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0월에 옥사하고 만다. 이병희 선생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인 이육사와 이재유는 같은 해에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차례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5. 지난 광복절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항일운동가들의 공로도 평가해야 할 시기가 됐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뒤 좌파 항일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재유다. 해방을 10개월 앞둔 1944년 가을에 세상을 뜬 탓에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무래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하다. 북한의 정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았으니 복권에 있어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학계의 판단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사회에 있어서는 항일 운동가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좌우의 이념이 무슨 상관이랴 하는 민족중심의 사고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으로 용인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북이라는 논란에만 휩싸이지 않으면 과거의 항일운동 경력이 인정받을 수도 있는 시대 쯤은 되었다는 점일텐데, 이러한 시대에도 과거의 좌파 항일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아직도 민족보다 반공의 가치가 더욱 더 값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탓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다.

 

과연 언제쯤 이재유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과연 언제쯤 우리는 이병희 선생이 회고하는 이재유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시간은 많지 않다. 이병희 선생의 나이 올해로 87세.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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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이병희 여사 타계

옥중 순국한 이육사 유골단지 日 훼손 걱정해 품에 안고 다녀… 방적공장 일하며 항일운동도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옥중 순직한 시인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애국지사 이병희(李丙禧·94) 여사가 2012년 8월 2일 오후 2시 3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조부인 이원식 선생이 동창학교 설립에 참여해 민족교육을 이끌었고, 부친 이경식 선생은 1925년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 여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인 193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종연방적(鍾淵紡績)의 여공(女工)으로 근무하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그는 500여명의 근로자를 이끌고 파업을 주도했다. 그는 생전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여성들만을 직공으로 받았다"면서 "파업에서 보여준 여공들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1936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 등 큰 고초를 당했다.
 
생전의 이병희 여사.
1939년 4월 출옥 후 이듬해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 문서와 무기 등을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1943년 국내에서 베이징으로 건너온 이육사(李陸史)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 여사와 이육사는 같은 문중(진성 이씨)으로,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 여사는 그 해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구금됐다. 잠시 국내로 잠입했던 이육사도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함께 투옥됐다. 이 여사는 1944년 1월 11일 풀려났으나, 이육사는 5일 뒤인 1월 16일 옥중 순국했다. 이 여사는 "형무소 간수로부터 (이)육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와서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달려갔더니 (이육사의)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와있더라"며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이 여사는 이육사의 시신을 거둬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하고 '광야' 등 이육사가 마분지에 쓴 시와 만년필 등 유품을 수습했다. 그는 일제가 유골을 훼손할까 봐 이육사의 유족에게 전달할 때까지 한동안 유골 단지를 품에 안고 다녔다고 한다.

(‘광야’ ‘청포도’ 같은 육사의 주옥같은 시는 이병희 여사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병희 여사는 지난 50여 년간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낙인 찍혀 조국 광복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그늘진 곳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1996년에 가서야 겨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숨죽이며 살았던 여성 애국지사로는 이효정 여사, 이녀사는 이병희 여사의 친정 조카입니다...)

 이 여사는 해방 이후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분류돼 스스로 독립운동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정부는 1996년 이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아들 조영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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