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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보면 詩人을 알것 같은, -시의 문을 두드려라...
2016년 01월 19일 05시 25분  조회:4260  추천:1  작성자: 죽림

 

원룸 속의 시인들
 
이병철
 
 
  1990년대 온라인 문화는 홈페이지가 주도했고,

2000년대는 ‘미니홈피’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바야흐로 SNS 시대가 활짝 열렸다.

디케이드(decade)가 거듭될수록 온라인 세계를 장악하는 웹 공간의 부피와 무게가 가벼워졌다. 90년대 홈페이지를 떠올려보면, “이 홈페이지는 무엇에 대해 소개하는 곳으로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따위의 ‘홈페이지 소개’가 반드시 있었다. 사상이나 세계관이 곧 공간의 성격을 규정했다. 개별화된 공간이지만 거기 사는 개별자는 드물었다. 대부분 보편자로서 다른 보편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들여놓았다. 개인의 일상이나 생활 정보 같은 것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사소한 소품은 손님들에게 환영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 홈페이지를 갖는다는 것은 요즘의 내 집 마련처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할 줄 알면 능력자였다.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무 내용이나 막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홈페이지는 앙코르와트나 이구아수 폭포 같은 관광 명소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근사하고 멋진 것, 지적인 것, 보편감동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홈페이지처럼, 우리 시도 그랬다. 모더니즘, 리얼리즘, 해체시 등 뚜렷한 ‘대문’을 통해서 시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000년대에 미니홈피가 등장하면서 모든 사람이 개인 홈페이지를 갖게 됐다.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보급형 주택이 날개 돋친 듯 분양되자 무겁고 뚱뚱한 기존의 홈페이지는 거의 옛 유적이나 보기 드문 고택으로 취급받았다. 모두가 홈페이지를 가지니 홈페이지는 더 이상 감탄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동일한 프레임의 사진첩과 일기장에 저마다의 일상과 생각을 담으며 보편자들 속의 개별자들로 서기 시작했다. 인터넷 세상에 ‘개인’이 침투하자 그간 잠복돼있던 관음과 노출의 욕망들이 ‘파도’로 밀려왔다. 모두들 남의 집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방문자 수를 올리기 위한 거짓과 허세가 횡행하기도 했다. 여전히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했지만, 개인의 내밀한 일상보다는 그래도 다수가 누릴 수 있는 콘텐츠가 환영받았는데, 진지함보다는 가벼움, 얌전보다는 파격과 엽기가 주를 이뤘다. 그 과정에서 텍스트와 서사가 저물고 이미지와 캐릭터가 부각됐다. 미니홈피의 시대에 등장한 ‘미래파’ 시인들은 시에 파격과 엽기, 또 ‘미니룸’처럼 다채롭고 환상적인 시공간을 들여놓았다. 그 안에서 시인들의 퍼스나는 다양한 ‘아바타’로 형상화됐다. 새롭고 낯선 시적 퍼스나들이 수많은 아바타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파도타기’로 일촌과 일촌의 일촌을 왕래하듯 ‘미래파’라는 파도를 타고 황병승에서 김민정으로, 김민정에서 이승원과 유형진으로 넘나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SNS 시대가 열렸다.

‘심플’과 ‘슬림’으로 2000년대를 장악한 미니홈피는 이미 무겁고 둔한 인터페이스가 돼버렸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미니홈피에서 ‘일기장’만 분리되어 나온 형태다. 단독주택(홈페이지)과 아파트먼트(미니홈피)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원룸이다. 생활에 직접 연관된 최소한의 것들만 들일 수 있으므로 공간이 곧 그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나 홈페이지 시대처럼 사상이나 세계관과 결부되지 않는다. 그저 구체적이고 내밀한 일상과 취향에 대해서다. 긴 글이나 지나친 진지함은 환영받지 못한다.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그로테스크와 엽기도 마찬가지다. 꾸밈없는 일상의 기록, 구체적인 감정의 결, 짤막하지만 재치 있는 유머 따위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 원룸의 주민들은 단독주택처럼 대문을 세우고 정원을 꾸밀 수 없다. 서재나 응접실을 따로 둘 수도 없다. 아파트먼트처럼 ‘단지’나 ‘반상회’ 같은 연대단위로 묶일 수도 없다. 사상을 나타내거나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인프라가 아예 구축되지 않으므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과 취향 말고는 내보일 것이 따로 없는, 철저한 개별자들이 되었다.

  2000년대 시인들은 그래도 ‘미래파’라는 아파트먼트에 공동 입주할 수 있었는데,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은 개별화된 공간의 개별자들로서 원룸에 거하고 있다.

특별한 문제의식이나 사상, 실험적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겨누어진 비판의 칼끝이다. 그런데, 시대를 주도하는 어떤 경향이나 담론이 없다는 것에서 오히려 다양성이 움튼다.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원룸은 단독주택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아파트먼트처럼 세련되지도 않다. 바꿔 말해 근대적 이데올로기에서도 자유롭고, 동일한 범주로 묶일만한 일률적인 (몰)개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고, 전위라 할 만한 파격도 없다. 그러면서 서로 닮아있지도 않다. 문학적 가치를 떠나, 나름대로 다양하다. 그래서 2010년대 시인들의 원룸을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이를테면 황인찬은 이케아 가구로 여백을 부각시킨 방이고,
이혜미는 까사미아 앤틱 가구를 들여놓은 방이다.
박준은 80~90년대 풍의 하숙집이고,
이제니는 후크송이 재생되는 클럽,
유병록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종일 틀어놓은 방이다.

방을 보면 사람을 알 듯 시를 보면 시인을 알 것 같다.
 
무기명으로 받은 소포들이 쌓이고 있었지. 계단, 계단들처럼.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계단 속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지. 서표, 읽지도 않은 책에 꽂아둔 서표들처럼.
 
처음 나랑 잔 애인은 누구였지. 난간에 기대니 계단은 풀어지는데. 소포 속 발자국 소리가 미끄러질 때마다 계단은, 계단을 지워내는데. 묻고 싶다. 하룻밤 애인이 있긴 있었니.
 
애인들은 일제히 고무줄을 끊고, 어둠이 튕겨 나갈 땐 술을 끊고, 나는 손톱을 기르고 있었지. 내가 울었어, 내가 울릴 거야. 자꾸 브래지어는 부드러워졌지.
 
클럽에서 처음 본 애인들은, 언제나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지. 내 손은 분주했지. 많아졌지. 나쁜 것은 헤프도록 헤프게. 애인 아닌 것들만 가끔 물었지. 내 진짜 이름은 뭐냐고.
 
미친 것! 난 이미 실명을 밝혔다구.
 
무기명으로부터 달아날 때마다 소포들은 쌓였지. 계단은 부풀어 오르다 빵빵 터지기도 했지. 처음 본 애인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지.
 
나야 나!
 
실명을 밝힐 때마다
나는 계속 반송을 당했지.
계단이 쌓인 순서조차 기억이 없지
나는 진짜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
 
나야 나!
― 황종권, 「무기명 애인」 (《시와세계》봄호)
 
  이제 시인들은 SNS 글쓰기처럼 시를 쓴다.
시의 형식과 언어로 SNS를 한다.
SNS가 원룸인 것처럼 시도 원룸이다.
시에다 원룸을 들여놓고 거기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담들, 구체적인 에피소드, 다양한 감정들을 직설적으로 집어넣는다. 위 시에서 화자는 시인일 것이다. 시인 자신의 체험을 시로 옮긴 것 아니고서야 나타날 수 없는 구체성이다. 시인은 자기 일상과 연애사를 꾸밈없이 펼쳐 보인다. 어떤 사상이나 세계를 향한 문제의식 대신, 개인의 욕망이 있고,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에 대한 통찰이 있다. 시인은 캐릭터나 이미지 뒤에 숨어서 진술하지 않는다. 이것이 SNS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다.

  관공서와 통신사 등 제도권의 우편물이 잔뜩 쌓인 반지하 원룸, 거기 “실명을 밝힐 때마다 계속 반송을 당”하는 청춘이 산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젊은 시인의 초상이다. 비록 좁은 방이지만 나름의 인테리어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해놓았는데, 와서 머무는 이가 없다. 오늘도 젊은 시인은 솔직한 감정과 구체적 일상이 있는 원룸 안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휴지와 주스를 들고 가 기꺼이 문을 두드려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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