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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시나라에서 이상한 시인모임
2016년 01월 21일 00시 55분  조회:4167  추천:0  작성자: 죽림

주치의 h, 주체 h -- 황병승
-주체의 분열, 독자의 분열, 파괴된 주체
 


                                                                                                                                          임동확 시창작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황병승, 「주치의 h」
 
 
 
황병승의 시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원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 살지 않았다. 단지 어떤 이끌림에 따라 초대받은 손님일 뿐. 황병승의 시의 세계는 말그대로 ‘이상한 나라’이다. 그 속으로 초대받은 독자들은 앨리스처럼 걷잡을 수 없이 헤메이게 된다. 보고 다시 또 봐도 이해가 안가는 구문들. 종잡을 수 없는 거친 상징의 세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기존의 언어세계를 거부하며 주류 문화를 배제하는 이질적이고 잡스러운 혼성문화의 세계. 어떠한 도식적인 틀조차도 거부하는 이러한 시에 비평이나 분석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하게도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독자가 시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작품을 새롭게 재생산하고 또다른 영역을 구축하는, 바르트적인 의미에서의 ‘즐김’일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황병승의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 ‘앨리스’가 된다. 이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데 있어 주의할 점은,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체계, 즉 이성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를 탈피하고 해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에 담긴 남성적인 질서나 권위를 사후적으로 해체하겠다는 으름장이 아니라, 텍스트를 탐험하기에 앞서 우리가 사전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준비운동’이라는 데에 역점이 있다. 즉, 그만큼 황병승의 나라는 이미 전통적인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해체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의미에 도달할 수 없는 의미 해석의 무한한 확산, 분산, 산종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코라 기호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황병승의 대표적인 작품인 「주치의 h」를 살펴볼 것이다. 코라 기호학의 ‘과정 속의 주체’ 이론을 통하여, 우리는 작품 속에 나타나는 화자의 정신분열적인 증상들을 흥미롭게 접근해 볼 것이다. 또한 번호별로 구성되어 있는 시 문단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고, 산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어들의 충동적인 의미 체계를 분석하면서,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앨리스 맵’을 그려나갈 것이다.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왜 도끼로 두 번 찍었을까. 그리고 도끼라는 기표는 무엇을 의미할까. 황병승의 시에서 ‘왜’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화자는 어떠한 ‘행동’을 했을 뿐이며, 그것은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닌’, 한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없는 시니피앙(기표)의 유희인 것이다. 다만 도끼가 등장할 때의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라는 기표가 화자의 세계 속에서 어떤 ‘신호’를 주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h'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h’라는 기표가 황병승 자신의 이름을 뜻한다면, h는 황병승의 내면에 있는 또다른 자아, 즉 일종의 ‘초자아’라고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화자를 치료해준다는 주치의라면서 화자의 잘못들을 옮겨적고, 화자가 고통속에 있을 때면 잘못했던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h의 특성을 보았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또는 ‘대문자 H’가 아닌 ‘소문자 h’라는 점에서 ‘소타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는 갑자기 ‘입’ 속으로 들어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 입의 세계 깊숙한 곳에는 입이 여기저기 달린 화자의 가족들이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있다. 무언가 유동적이고 불안하며 충동적인 이 세계 속에서, 입이 하나뿐인 화자는 입을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소외되어 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입’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입 속의 세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우며 충동이 가득한 공간이고, ‘입 밖의 세계’는 ‘침묵의 식탁’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 질서가 잡힌 공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코라 기호학의 관점에서, ‘입 속의 세계’는 시니피앙(기표)의 끊임없는 연쇄가 이루어지는 충동적인 ‘기호계’로, ‘입 밖의 세계’는 시니피에(기의)의 질서와 의미가 고정되는 ‘상징계’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입’이라는 기표를 통하여 기호계와 상징계를 넘나드는 시 속의 ‘주체’는, ‘언어화 과정’을 통해 상징계에 안착하여도 끊임없이 기호계의 영향을 받는다는 크리스테바의 ‘과정 속의 주체’ 이론과 일치한다. 즉, 기호계와 상징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매게해주는 ‘언어화 과정’은 시 속에서 ‘입’이라는 기표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신체에서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기호계의 무질서하고 본능적인 욕동의 세계를 경험한 화자가 상징계의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공고하게 질서화된 상징계의 세계 속에서 기호계적인 ‘균열’을 일으키려는 시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균열’의 시도는 ‘도끼’로 두 번 찍는다는 화자의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신호’, 내지는 ‘증상’을 통하여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도끼’라는 기표는 침묵의 상징계에 틈을 내어 기호계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화자의 강박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때 느닷없이 등장하는 ‘고무인형과 같은 모습의 여자친구’는 상당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데, ‘도끼질 할 때’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 여자친구는 상징계의 균열된 틈을 비집고 들어온 ‘기호계적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여자친구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을 물어보는데, 여자친구가 기호계에서 온 존재라면, ‘오리들’은 기호계 속의 입만 달고 사는 가족들을 의미할 것이고, ‘농담 수준’은 기호계 속 가족들이 하는 말들이 시덥잖은 ‘농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앞에서 ‘도끼질’에 대해 살펴볼 때, ‘기호계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화자의 강박적인 증상’이라고 했는데, ‘기호계적 진실’이 아니라, ‘기호계적 농담’으로 바꿔야겠다. 이는 ‘기호계’라는 공간조차도 진실을 보장할 수 없는 모호한 공간이라는 시인의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여자친구의 질문을 받은 화자는 ‘해가 녹아서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즉, 감추고 싶은 치명적인 약점을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들켜버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 때 다시 등장하는 h는 여자친구의 ‘말’이 아닌 오물거리는 ‘입술’을 적는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화자의 오리들과는 수준이 다른,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 떠나버린다.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화자는 집을 떠나 더이상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다. 단지 h가 안내하는 입의 나라 속에서만 ‘더 많은 입을 달고’ 왁자지껄 농담이나 일삼는 가족들을 만난다. 이제 집을 떠난 화자는 더 이상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행위인 ‘도끼질’을 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 때부터 화자는 상징계의 가족들과 완전히 배제된 상황 속에서, 무료한 ‘밴조 연주 같은’, ‘악수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형태의 ‘연애’를 하게 된다. 화자가 누구와 연애를 하는지는 시 속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까의 ‘고무인형과 같은 여자친구’과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연애는 인형과 같이 인위적으로 무료하게 반복하는 연애이며, 또는 실제의 사람이 아닌 집 떠나온 인형과 연애한다는 점에서, 타자와의 소통불가능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

여기서 화자는 갑자기 자신의 나이를 밝히면서,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시구를 남긴다. 그리고 화자의 위치가 갑자기 전환되는데, 초자아로 상정했었던 주치의 h가 ‘같이 늙어가는 의사선생님’으로 전환되고, ‘나’는 의사선생님이 부르는 ‘황 형’이라는 이름으로 전환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상정했었던 ‘입 속의 세계’와 ‘입 밖의 세계’, 즉 ‘기호계’와 ‘상징계’라는 세계의 구분조차 혼란스러워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해석이 와해되고 해체되고 분열되는 순간이다.
만약 ‘의사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황 형’에게 정신분석을 시도하는 ‘명확한 주체’라면, 지금까지 ‘입 속의 세계’와 ‘입 밖의 세계’를 넘나들며 생쇼를 하던 ‘나’라는 화자는 결국 ‘분열된 주체’로써 의사선생님께 치료를 받는 ‘환자’일 뿐이었고, 이렇게 의사 선생님과 함께 치료를 받는 공간 자체가 ‘진짜 상징계’이고, 화자가 생쇼를 하던 입 속과 입 밖의 세계 전부가 ‘진짜 기호계’였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이 시구는 그야말로 시 속 ‘화자의 분열’뿐만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분열’까지도 불러일으키는 시구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말’이라는 시어에 주목해보자. 앞에서 ‘입’이라는 신체기관이야말로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기관이라 했는데, 화자가 있던 ‘진짜 기호계’의 공간, 즉 ‘입 속의 세계’와 ‘입 밖의 세계’에서는 ‘입’이 정작 중요한 ‘말’을 하지는 않는다. 입이 무수히 달린 가족들도 그저 ‘큰 소리로 웃고 떠든다’고 표현될 뿐 ‘말’을 한다고 표현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던, h가 여자친구의 ‘말’이 아닌 ‘입술’을 적고 있었다는 대목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런 의미에서, ‘말’이야말로 ‘진짜 상징계’로 진입하는, 진정한 ‘언어화 과정’을 뜻하는 시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진짜 기호계’의 세계(분열된 주체 내부의 충동적 공간) 속에서 ‘입’이라는 기호는 ‘말’이라는 ‘언어화 과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오리들의 ‘농담’(기표)일 뿐이었으며, ‘말’(언어)로서 드러난 ‘진짜 상징계’의 세계(분열된 주체 외부의 의사선생님과의 질서가 잡힌 공간) 속에서는 결국 오리들의 ‘농담’(기표)이 문제가 아니라 오리들의 ‘물장구’(기의)가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의사선생님’이라는 ‘명확한 주체’는 오리들이 ‘농담’할 수도 있다는 ‘분열된 주체’의 기호계적․충동적 질서(기표의 질서)를 도외시하고 ‘물장구 치는 수준’(기의의 질서)이나 물어보는, 즉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곁다리나 집는 한계성을 드러낸다. 상징계의 고정된 질서로 정립된 낡은 수첩이나 뒤적거리면서 말이다.
아무튼 시적 화자, 즉 분열된 주체는, 비로소 ‘입’이 아닌 ‘말’이 통하는 시점으로서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라는 표현을, 그리고 정신분열증 환자로서의 자신이 드러나는 시간으로서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라는 전복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이렇듯 <주치의 h>에서 황병승 시인은 독자의 이론적인 접근이나 비평적 시도까지도 끊임없이 와해시키는 돌발적이고 갑작스러운 시어 사용과 구조적인 반전을 드러냄으로써, 말그대로 ‘독자의 분열’을 조장하고 극대화한다. 시의 문단을 번호순으로 나눈 것은, ‘이 시는 반드시 번호순서대로 보시오’라는 시인의 독특한 암시효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필자가 번호대로 시를 나누어서 부분적으로 차근차근 살펴본 것도, 이러한 시 해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론: 황병승의 ‘이상한 나라’에서 ‘주체’란?
황병승의 시에서 ‘주체’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상정하는 ‘분열된 주체’의 틀을 벗어난 그야말로 ‘파괴된 주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화 과정’ 또는 ‘언어화 과정’을 통한 주체의 성립과정도 황병승의 시에서는 결코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서 부터 시작하는 상상계, 아버지의 팔루스 기표로부터 발생하는 상징적 거세 과정, 그리고 상징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정상적인’ 주체화 과정이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분별하고 난잡하게 그려진다. 심지어 정신분석학에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공간이라고 상정하는 ‘상상계’조차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질서하고 혼돈이 가득하며 파괴와 공포가 서려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계’의 무질서는 단순히 ‘상징계’의 안정화된 질서와 대비된다는 원론적인 틀을 벗어나, 코라 기호학에서 말하는 ‘코라’의 모성적 공간, 즉 원초적이고 충동이 가득하지만 선험적이며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편안한 공간과 대비된다는 데에 역점이 있다. 「주치의 h」에서도 시적 화자는 ‘기호계’에서조차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를 포함한 온가족에게 소외되어 있고, 제대로 된 ‘주체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화자는 결국 ‘상징계’의 공간 속에서도 ‘부작용의 시간’을 보내는, -‘분열된 주체’라는 표현으로는 불충분한- ‘파괴된 주체’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단순히 이론에 갇혀있기보다는 그 이론을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언어를 창출해낸 황병승의 시적 세계는 그동안 정신분석학을 도식적으로 적용해 온 많은 시들과는 다른 그만의 독창성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그의 ‘파괴된 주체’를 통해 보여지는 ‘이상한 나라’는 그야말로 세상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질적인 혼성문화의 세계를 파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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