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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시인 - 오장환 시모음
2016년 02월 06일 00시 20분  조회:4878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 오장환과 그의 문학친구들...
==================================


The Last Train

                          /오장환

 

The Last Train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헌사, 남만서방, 1939

 

 

 

 

 

가거라 벗이여 오장환

 

가거라 벗이여

 

가거라 벗이여!

너의 고향에……

 

우리는 눈물로 손잡는 게 아니라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움의 길로 디디라.

 

아 우리의 수많은 재물

반가운 마음에 적시는 눈시울

어찌나

굳게 잡은 우리의 손

모든 것은 설움이 이끌은 것을……

 

가거라 벗이여!

너의 고향에!

지난날은 모두 다 조약돌모양 차버리고

거기도 설움만이 맞이할

너의 고향에

 

벗이여!

그러나 손잡은 우리의 보람

손잡은 이 마음이 기쁨으로 떨릴 때까지

우리는 제각기 차내 버리자

―지난날이 달래 주던 눈물의 달디 단 맛을……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경 오장환

 

경(鯨)

 

점잖은 고래는 섬 모양 해상에 떠서 한나절 분수를 뿜는다. 허식(虛飾)한 신사, 풍류(風流)로운 시인이여! 고래는 분수를 중단할 때마다 어족들을 입 안에 요리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고전 오장환

 

고전(古典)

 

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늘어선 골목에는 가로등도 켜지는 않았다. 조금 높다란 포도도 깔리우지는 않았다. 조금 말쑥한 집과 조금 허름한 집은 모조리 충충하여서 바짝바짝 친밀하게는 늘어서 있다. 구멍 뚫린 속내의를 팔러 온 사람, 구멍 뚫린 속내의를 사러 온 사람. 충충한 길목으로는 검은 망또를 두른 주정꾼이 비틀거리고, 인력거 위에선 차(車)와 함께 이미 하반신이 썩어가는 기녀들이 비단 내음새를 풍기어 가며 가느른 어깨를 흔들거렸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고향 앞에서 오장환

 

고향 앞에서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듯하리라.

 

고향 가차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구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잰내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간다.

 

예 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듸듸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공청으로 가는 길 오장환

 

공청(共靑)으로 가는 길

 

눈발은 세차게 내리다가도

금시에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내 겸연쩍은 마음이

공청(共靑)으로 가는 길

 

동무들은 벌써부터 기다릴 텐데

어두운 방에는 불이 켜지고

굳은 열의에 불타는 동무들은

나 같은 친구조차

믿음으로 기다릴 텐데

 

아 무엇이 자꾸만 겸연쩍은가

지난날의 부질없음

이 지금의 약한 마음

그래도 동무들은

너그러이 기다리는데……

 

눈발은 펑펑 내리다가도

금시에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그의 성품

너무나 맑고 차워

내 마음 내 입성에 젖지 않아라.

 

쏟아지렴…… 한결같이

쏟아나 지렴……

함박 같은 눈송이.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구름과 눈물의 노래 오장환

 

구름과 눈물의 노래

 

성(城)돌에 앉아

우리 다만

구름과 눈물의 노래를 불러 보려나.

 

산으로 산으로 따라 오르며

초막들 죄그만 죄그만 속에

그 속에 네 집이 있고

네 집에서 문을 나서면 바로 성 앞이었다.

 

어디메인가

이제쯤은

너 홀로 단소 부는 곳……

 

어둠 속 성(城)줄기를 따라 내리며

오로지 마음 속에 여며 두는 것

시꺼먼 두루마기 쓸쓸한 옷깃을 펄럭거리며

박쥐와 같이

다만 박쥐와 같이 날아 보리라.

 

성(城)돌에 앉아

우리 다만

구름과 눈물을 노래하려나

 

산마루 축대를 쌓고

띄엄띄엄 닦아 놓은

새 거리에는

병든 말이 서서 잠잔다.

 

눈감고 귀기울이면 무엇이 들려올까

들컹거리고 돌아가는 쇠바퀴 소리

하염없이 돌아가는 폐마의 발굽소리뿐.

 

성(城)돌에 앉아

우리 다만

페가사쓰와 눈물의 노래를 불러 보려나.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귀촉도 오장환

 

귀촉도(歸蜀途)&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 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窓) 넘에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巴蜀)의 인주(印朱)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

 

풀섶마다 소(小)해자(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두리는 일금칠십원야(一金七十圓也)의 쌀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러사 안 되지라요.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병(病)의 꽃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모양,

아 새벽별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춘추, 1941. 4

 

 

 

 

 

귀향의 노래 오장환

 

귀향의 노래

 

굴팜나무로 엮은 십자가, 이런 게 그리웠었다

일상 성내인 내 마음의 시꺼먼 뻘

썰물은 나날이 쓸어버린다

깊은 산발에서 새벽녘에 들려오는 쇠북 소리나

개굴창에 떠나려온 찔레꽃, 물에 배인 꽃향기.

 

젊은이는 어디로 갔나, 성황당 옆에…… 찔레꽃 우거진 넌출 밑에 뱀이 잠자는 동구 안 사내들은 노상 진한 밀주에 울고

어찌나, 이곳은 동무의 고향

밤그늘의 조금 따라 돛단 어선들은 떠나갔느냐

가까운 바다 건너 작은 섬들은

먼 조상이 귀양 가서 오지 않은 곳

하늘을 바라보다 돌아오면서

해바라기 덜미에 꽂고

내 번듯이 웃음 웃는 머리 위에 후광을 보라

 

목수여! 사공이여! 미장이여! 열두 형제는 노란 꽃잎알

해를 좇는 두터운 화심(花心)에 피는 잎이니 피맺힌 발바닥으로 무연한 뻘 지나서 오라.

 

춘추, 1941. 7

 

 

 

 

 

길손의 노래 오장환

 

길손의 노래

 

입동(立冬)철 깊은 밤을 눈이 나린다. 이어 날린다.

못 견디게 외로웁던 마음조차

차차로이 물러 앉는 고운 밤이여!

 

석유불 섬벅이는 객창 안에서

이 해 접어 처음으로 나리는 눈에

램프의 유리를 다시 닦는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 그리움일래

연하여 생각나는

날 사랑하던 지난날의 모든 사람들

그리운 이야

이 밤 또한 너를 생각는 조용한 즐거움에서

나는 면면한 기쁨과 적요에 잠기려노라.

 

모든 것은 나무람도 서글픔도 또한 아니나

스스로 막혀 오는 가슴을 풀고

싸늘한 미닫이 조용히 열면

낯선 집 봉당에는 약탕관이 끓는 내음새

이 밤따라

가신 이를 생각하옵네

가신 이를 상고하옵네.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깽 오장환

 

 

깽이 있다.

깽은 고도한 자본주의 국가의 첨단을 가는 직업이다.

성미 급한 이 땅의 젊은이는 그리하여 이런 것을 받아들였다.

알콜에 물 탄 양주와

댄스로 정신이 없는

장안의 구석구석에

그들은 그들에게까지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 여기와는 상관도 없이

또 장안의 한복판에서,

이 땅이 해방에서 얻은 북쪽 38도의 어려운 주소(住所)와

숱한 `야미'꾼으로 완전히 막혀진 서울길을

비비어 뚫고 그들의 행복까지를 위하여

전국의 인민대표들이 모였다는 사실을……

 

그러나

깽은 끝까지 직업이다.

전국의 생산이 완전히 쉬어진 오늘에

이것은 확실히 신기한 직업이다.

 

그리하여 점잖은 의상을 갖추운 자본가들은

새로이 이것을 기업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번창해질 장사를 위하여

`한국'이니 `건설'이니 `청년'이니

`민주'니 하는 간판을 더욱 크게 내건다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나 사는 곳 오장환

 

나 사는 곳

 

밤늦게 들려오는 기적 소리가

산짐승의 울음소리로 들릴 제,

고향에도 가지 않고

거리에 떠도는 몸은 얼마나 외로울 건가.

 

여관방의 심지를 돋우고

생각 없이 쉬고 있으면

단칸방 구차한 살림의 벗은

찬 술을 들고 와 미안한 얼굴로 잔을 권한다.

 

가벼운 술기운을 누르고

떠들고 싶은 마음조차 억제하며

조용조용 잔을 노늘 새

어느덧 눈물 방울은 옷깃에 구르지 아니하는가.

 

`내일을 또 떠나겠는가'

벗은 말없이 손을 잡을 때

 

아 내 발길 대일 곳 아무데도 없으나

아 내 장담할 아무런 힘은 없으나

언제나 서로 합하는 젊은 보람에

홀로 서는 나의 길은 미더웁고 든든하여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나의 길 오장환

 

나의 길

 

부제 : 3․1 기념(三․一紀念)의 날을 맞으며

 

기미년 만세 때

나도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아니 흉내라도 내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전해에 났기 때문에

어린애 본능으로 울기만 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나의 울음이다.

 

광주 학생 사건 때

나도 두 가슴을 헤치고 여러 사람을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중등학교 입학 시험에 미끄러져

그냥 시골 구석에서 한문을 배울 때였다.

타고난 불운이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그 뒤에 나는

동경에서 신문 배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붉은 동무와

나날이 싸우면서도

그 친구 말리는 붉은 시를 썼다.

 

그러나

이때도 늦은 때였다.

벌써 옳은 생각도 한철의 유행되는 옷감과 같이

철이 지났다.

그래서 내가 우니까

그때엔 모두 다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나의 울음이다.

 

8월 15일

그 울음이 내처 따라왔다.

빛나야 할 앞날을 위하여

모든 것은

나에게 지난 일을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울음뿐이다.

몇 사람 귀기울이는 데에 팔리어

나는 울음을 일삼아 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늦었다.

나의 갈 길,

우리들의 가는 길,

그것이 무엇인 줄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물음에 나의 대답은 또 늦었다.

 

아 나에게 조금만치의 성실이 있다면

내 등에 마소와 같이 길마를 지우라.

먼저 가는 동무들이여,

밝고 밝은 언행의 채찍으로

마소와 같은 나의 걸음을 빠르게 하라.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나의 노래 오장환

 

나의 노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헌사, 남만서방, 1939

 

 

 

 

 

나폴리의 부랑자 오장환

 

나폴리의 부랑자(浮浪者)

 

어둠과 네온을 뚫고 적은 강물은 나폴리로 흘러내렸다.

부두에 묵묵히 앉아

청춘은 어떠한 생각에 잠길 것인가,

항구의 개울은 비린내에 섞이어 피가 흘렀다.

무거이 고개 숙이면

사원의 종소리도 들려오나

육중한 바닷물은, 끝없이 출석거리어

기―단 지팡이로 아라비아 숫자를 그려보며 마른 빵쪽을 집어던졌다.

글쎄 이방귀족이라도 좋지 않은가

어느 나라 삼등선에서 부는 보이라 소리

연화가(煙花街)의 계집이 짐을 내리고

공원 가까이 비둘기떼는 구구 운다

도미노의 쓰디쓴 웃음을 웃으나

마지막 비로―드의 검은 망또를 벗어버리나

붉은 벽돌담에 기대어 서서 떠가는 구름 바라보면 그만 아닌가

밤이면 흐르는 별이며 적은 강물에 나폴리는 함촉히 젖어

충충한 가로수 아래

꽃 파는 수레에도 등불을 끈다.

호젓한 뒷거리에 휘파람 불며

네가 배울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겠나

말없이 담배만 말고 돌층계에 기대어 앉아

포도(鋪道) 위의 야윈 조약돌을 차내 버리다.

 

헌사, 남만서방, 1939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 오장환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

 

부제: 씩씩한 사나이 박진동(朴晋東)의 영(靈) 앞에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야

강도만이 복받는

이처럼 아름다운 세월 속에서

파출소 지날 때마다

선뜩한 가슴

나는 오며 가며 그냥 지냈다.

 

너는 보았느냐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이들이

다 살기 띠운 얼굴에

장총을 들고 선 것을……

 

그들은 장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총 속엔 탄환이 들었다.

 

파출소 앞에는

스물네 시간

그저 쉬지 않고

파출소만 지키는

군정청의 경찰관!

 

어디다 쏘느냐.

오 어디다 쏘느냐!

이것만이 애타는 우리의 가슴일 때

총소리는 대답하였다.

―여기는 삼청동이다.

죄 없는 학병의 가슴 속이다.

 

그리하여 죽어 가는 학병들도 대답하였다.

―우리 학병 우리 동무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야,

강도만이 복받는

이처럼 화려한 세월 속에서

아 우리는 어찌하여

우리는 어찌하여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형제와 우리의 동무 속에 찾아야 하느냐.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너는 보았느냐 오장환

 

너는 보았느냐

 

너는 보았느냐

마차발에 채어 죽은 마차꾼을,

그리고

장안 한복판에

마육(馬肉)을 싣고 가는 마차말같이

인육(人肉)을 싣고 가는 폭력단을―

 

한 나라의 집결된 의사,

인민의 입,

신문이 있다.

그리고

아 끝까지 배지 못한 인육의 마부는

성낸 말들을 이곳으로 몰아 넣는다.

 

너는 보았느냐,

타성의 뒷발질밖에

아무런 재주도 없는

이 마차말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늙은 마부를……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다시금 여가를…… 오장환

 

다시금 여가(餘暇)를……

 

아, 내 사랑하는 꽃잎알이 지난다.

불 타오르는 햇덩이어!

너의 굴리는 수레바퀴 더욱 힘차고

나는 내 몸에 풍기는 향기조차 잊어 왔고나.

 

어느 것에 앗기웠는가,

무엇에 골독하였나,

예사 젊음에서 사라지는 꽃향기.

 

장마 전 시내 정다이 흐르고

새들은 즐거이 노래 불렀으련만

다가오는 칠월(七月)이어

그대는 나에게 어떠한 열매를 맺어 주려나.

 

다시금 여가(餘暇)를 나에게……

다시금 여가(餘暇)를 나에게……

온통 눈물에 젖었던 얼굴이 스스로 붉어 보도록

 

봄날의 다사로히 퍼지는 햇살들이어!

또 한 번 나의 볼을 어루만지라

더 한 번 내 목에 감기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다시 미당리 오장환

 

다시 미당리(美堂里)

 

돌아온 탕아라 할까

여기에 비하긴

늙으신 홀어머니 너무나 가난하시어

 

돌아온 자식의 상머리에는

지나치게 큰 냄비에

닭이 한 마리

 

아직도 어머니 가슴에

또 내 가슴에

남은 것은 무엇이냐.

 

서슴없이 고깃점을 베어 물다가

여기에 다만 헛되이 울렁이는 내 가슴

여기 그냥 뉘우침에 앞을 서는 내 눈물

 

조용한 슬픔은 알련만

아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 바치었음을……

 

크나큰 사랑이여

어머니 같으신

바치옴이여!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 괴로움에 못 이기는 내 말을 막고

이냥 넓이 없는 눈물로 싸 주시어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독초 오장환

 

독초(毒草)

 

썩어 문드러진 나무 뿌리에서는 버섯들이 생겨난다. 썩은 나무 뿌리의 냄새는 훗훗한 땅 속에 묻히어 붉은 흙을 거멓게 살지워 놓는다. 버섯은 밤내어 이상한 빛깔을 내었다. 어두운 밤을 독한 색채는 성좌를 향하여 쏘아 오른다. 혼란한 삿갓을 뒤집어 쓴 가냘픈 버섯은 한자리에 무성히 솟아올라서 사념을 모르는 들쥐의 식욕을 쏘을게 한다. 진한 병균의 독기를 빨아들이어 자줏빛 빳빳하게 싸늘해지는 소(小)동물들의 인광! 밤내어 밤내어 안개가 끼고 찬이슬 내려올 때면, 독한 풀에서는 요기의 광채가 피직, 피직 다 타 버리려는 기름불처럼 튀어나오고. 어둠 속에 시신만이 겅충 서 있는 썩은 나무는 이상한 내음새를 몹시는 풍기며, 딱따구리는, 딱따구리는, 불길한 가마귀처럼 밤눈을 밝혀가지고 병든 나무의 뇌수를 쪼으고 있다. 쪼으고 있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매음부 오장환

 

매음부(賣淫婦)

 

푸른 입술. 어리운 한숨. 음습한 방안엔 술잔만 훤―하였다. 질척척한 풀섶과 같은 방안이다. 현화식물(顯花植物)과 같은 계집은 알 수 없는 웃음으로 제 마음도 속여 온다. 항구, 항구, 들리며 술과 계집을 찾아다니는 시꺼먼 얼굴. 윤락된 보헤미안의 절망적인 심화(心火). ―퇴폐한 향연 속. 모두 다 오줌싸개 모양 비척거리며 얕게 떨었다. 괴로운 분노를 숨기어 가며…… 젖가슴이 이미 싸늘한 매음녀는 파충류처럼 포복한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목욕간 오장환

 

목욕간

 

내가 수업료를 바치지 못하고 정학을 받아 귀향하였을 때 달포가 넘도록 청결을 하지 못한 내 몸을 씻어 보려고 나는 욕탕엘 갔었지

뜨거운 물 속에 온몸을 잠그고 잠시 아른거리는 정신에 도취할 것을 그리어 보며

나는 아저씨와 함께 욕탕엘 갔었지

아저씨의 말씀은 `내가 돈 주고 때 씻기는 생전 처음인걸' 하시었네

아저씨는 오늘 할 수 없이 허리 굽은 늙은 밤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가지고 팔러 나오신 길이었네

이 고목은 할아버지 열두 살 적에 심으신 세전지물(世傳之物)이라고 언제나 `이 집은 팔아도 밤나무만은 못 팔겠다' 하시더니 그것을 베어 가지고 오셨네그려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오시어 이곳에 한 개밖에 없는 목욕탕에 이 밤나무 장작을 팔으시었지

그리하여 이 나무로 데운 물에라도 좀 몸을 대이고 싶으셔서 할아버님의 유물의 부품이라도 좀더 가까이 하시려고 아저씨의 목적은 때 씻는 것이 아니었던 것일세

세시쯤 해서 아저씨와 함께 나는 욕탕엘 갔었지

그러나 문이 닫혀 있데그려

`어째 오늘은 열지 않으시우' 내가 이렇게 물을 때에 `네 나무가 떨어져서' 이렇게 주인은 얼버무리었네

`아니 내가 아까 두시쯤 해서 판 장작을 다 때었단 말이요?' 하고 아저씨는 의심스러이 뒷담을 쳐다보시었네 ` へ, 實は 今日が市日で あかたらけの田舍っぺ―が群をなして來ますからわえ'* 하고 뿔떡같이 생긴 주인은 규격이 맞지도 않게 피시시 웃으며 아저씨를 바라다보았네

`가자!'

`가지요' 거의 한때 이런 말이 숙질의 입에서 흘러나왔지

아저씨도 야학을 다니셔서 그 따위 말마디는 알으시네 우리는 괘씸해서 그곳을 나왔네

그 이튿날일세 아저씨는 나보고 다시 목욕탕엘 가자고 하시었네

`못하겠습니다 그런 더러운 모욕을 당하고……'

`음 네 말도 그럴듯하지만 그래두 가자' 하시고 강제로 나를 끌고 가셨지

 

* 에, 실은 오늘이 장날인데 때투성이 시골뜨기들이 떼를 지어 오기 때문에.

 

조선문학, 1933. 11.

 

 

 

 

 

무인도2 오장환

 

무인도(無人島)2

 

나의 지대함은 운성(隕星)과 함께 타 버리었다.

아직도 나의 목숨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인가 그 언제인가

허공을 스치는 별납과 같이

나의 영광은 사라졌노라

 

내 노래를 들으며 오지 않으려느냐

독한 향취를 맡으러 오지 않으려느냐

너는 귀기울이려 아니하여도

딱다구리 썩은 고목을 쪼으는 밤에 나는 한 걸음 네 앞에 가마

 

표정 없이 타오르는 인광(燐光)이여!

발길에 채는 것은 무거운 묘비와 담담한 상심(傷心)

 

천변(川邊) 가까이 가마귀떼는 왜 저리 우나

오늘밤 아―오늘밤에는 어디쯤 먼―곳에서

뜬 송장이 떠나 오려나

 

헌사, 남만서방, 1939

 

 

 

 

 

밤의 노래 오장환

 

밤의 노래&

 

깊은 밤중에 들려오는 소리는

시냇물 소리만인가 했더니,

어두운 골짜기

노루 우는 소리.

또 가까운 산발에 꿩이 우는 소리.

그런가 하면

두견이의, 소쩍새의, 쭉쭉새의,

신음하듯 들려오는 울음소리

 

아, 저 약하디 약한 미물들이,

또 온 하루를 쫓겨다니다

깊은 밤 잠자리를 얻어

저리도 우는 것인가.

아니, 저것이 오늘 하루를 더 살았다는

안타까운 울음소린가.

피곤한 마음은 나조차

불을 죽이고 어둠 속에 누웠다.

 

깊은 밤중에 들려오는 소리는

시냇물 소리만인가 했더니

잠결에도 편안하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소리……

이처럼 약하디 약한 무리는

아, 짧은 하루밤의 안식도 있지는 못한가

외저운 마음은 나조차

불까지, 아 이 작은 불빛이 무엇이겠느냐.

 

차라리 어둠으로 인하여 가벼워지는 마음이어!

만상은 모두가 잠들었나 했더니

먼―발의 노루며

아 소쩍새, 쭉쭉새, 또 두견이

그러나 이들이 운다는 것은

나의 생각뿐이고

그들은 어려운 하루 하루를, 무사히 살았다는 즐거움에서……

참으로 즐거움에서 부르는 노래라 하면……

나의 설움이어! 아니 나의 많음이어!

너는 어찌하느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병든 서울 오장환

 

병든 서울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 부르며

이것도 하루 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 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 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이……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북방의 길 오장환

 

북방(北方)의 길

 

눈 덮인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머구리 울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 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헌사, 남만서방, 1939

 

 

 

 

 

불길한 노래 오장환

 

불길(不吉)한 노래

 

나요. 오장환이요. 나의 곁을 스치는 것은, 그대가 아니요. 검은 먹구렁이요. 당신이요.

외양조차 날 닮았다면 얼마나 기쁘고 또한 신용하리요.

이야기를 돌리오. 이야길 돌리오.

비명조차 숨기는 이는 그대요. 그대의 동족뿐이요.

그대의 피는 거멓다지요. 붉지를 않고 거멓다지요.

음부 마리아모양, 집시의 계집애모양,

 

당신이요. 충충한 아구리에 까만 열매를 물고 이브의 뒤를 따른 것은 그대 사탄이요.

차디찬 몸으로 친친이 날 감아주시오. 나요. 카인의 말예(末裔)요. 병든 시인이요. 벌(罰)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능금을 따먹고 날 낳았소.

 

기생충이요. 추억이요. 독한 버섯들이요.

다릿한 꿈이요. 번뇌요. 아름다운 뉘우침이요.

손발조차 가는 몸에 숨기고, 내 뒤를 쫓는 것은 그대 아니요. 두엄자리에 반사(半死)한 점성사(占星師), 나의 예감이요. 당신이요.

견딜 수 없는 것은 낼름대는 혓바닥이요. 서릿발 같은 면돗날이요.

괴로움이요. 괴로움이요. 피 흐르는 시인에게 이지(理智)의 프리즘은 현기로웁소

어른거리는 무지개 속에, 손가락을 보시오. 주먹을 보시오.

남빛이요―빨갱이요. 잿빛이요. 잿빛이요. 빨갱이요.

 

헌사, 남만서방, 1939

 

 

 

 

 

붉은 산 오장환

 

붉은 산(山)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금 솔나무 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같이 어리고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비둘기 내 어깨에 앉으라 오장환

 

비둘기 내 어깨에 앉으라

 

그리하야 내 마음에 평화(平和)로운 짐을 지우라.

 

그리움이어 속절없노라. 멀리 바라옴이어…

깊은 농 속에 숨겨 둔 향료(香料)와 같이

아, 그대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지려나

 

멀리서 오라. 아니 다만 먼 곳에 있으라.

이처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복받히는 사랑이었든, 설음이든

끝없이 이끌리는 안타까움에

언제나 내 마음은 아름다웠다.

 

다가서라. 나의 비둘기

한동안

적은 새야 너 어디로 어디로 날 찾아 왔느냐

이제는 내 노래의 샘이 막히고

이제는 내 노래에 아무도 귀기울이지 아니하노라.

아침 이슬 밟고 오는 고 빨간 다리

비둘기 나와 함께 거닐자

깊은 밤 우리들 잠든 새에도

거리엔 낙엽(落葉)이 졌어라.

 

입맞추라 비둘기!

사랑하는 이의 이마에, 나의 뺨에, 나의 목에,

그리고 나의 가슴에……

늬들 사랑에 못 이겨 구 구 구 울듯이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산협의 노래 오장환

 

산협(山峽)의 노래

 

이 추운 겨울 이리떼는 어디로 몰려다니랴.

첩첩이 눈 쌓인 골짜기에

재목을 싣고 가는 화물차의 철로가 있고

언덕 위 파수막에는

눈 어둔 역원이 저녁마다 램프의 심지를 갈고.

 

포근히 눈은 날리어

포근히 눈은 내리고 쌓이어

날마다 침울해지는 수림(樹林)의 어둠 속에서

이리떼를 근심하는 나의 고적은 어디로 가랴.

 

눈보라 휘날리는 벌판에

통나무 장작을 벌겋게 지피나

아 일찍이 지난날의 사랑만은 따스하지 아니하도다.

 

배낭에는 한 줌의 보리 이삭

쓸쓸한 마음만이 오로지 추억의 이슬을 받아 마시나

눈부시게 훤한 산등을 내려다 보며

홀로이 돌아올 날의 기꺼움을 몸가졌노라.

 

눈 속에 싸인 골짜기

사람 모를 바위틈엔 맑은 샘이 솟아나고

아늑한 응달녘에 눈을 헤치면

그 속에 고요히 잠자는 토끼와 병든 사슴이.

 

한겨울 내린 눈은

높은 벌에 쌓여

나의 꿈이여! 온 산으로 벋어 나가고

어디쯤 나직한 개울 밑으로

훈훈한 동이가 하나

온 겨울, 아니 온 사철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

 

한동안 그리움 속에

고운 흙 한 줌

내 마음에는 보리 이삭이 솟아났노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상렬 오장환

 

상렬(喪列)

 

고운 달밤에

상여야, 나가라

처량히 요령 흔들며

 

상주도 없는

삿갓가마에

나의 쓸쓸한 마음을 싣고

 

오늘밤도

소리 없이 지는 눈물

달빛에 젖어

 

상여야 고웁다

어두운 숲 속

두견이 목청은 피에 적시어……

 

헌사, 남만서방, 1939

 

 

 

 

 

석양 오장환

 

석양&

 

보리밭 고랑에 드러누워

솟치는 종다리며 떠가는 구름장이며

울면서 치어다 보았노라.

 

양지짝의 묘지는

사랑보다 다슷하고나

 

쓸쓸한 대낮에

달이나 뜨려무나

조그만 도회의 생철 지붕에……

 

헌사, 남만서방, 1939

 

 

 

 

 

성묘하러 가는 길 오장환

 

성묘하러 가는 길

 

솔잎이 모두 타는 칙한 더위에

아버님 산소로 가는 산길은

붉은 흙이 옷에 배는 강팍한 땅이었노라.

 

아 이곳에 새로운 길터를 닦고

그 위에 자갈을 져 나르는 인부들

매미 소리 풀기운조차 없는 산등성이에

고향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일까.

 

깊은 골에 남포소리, 산을 울리고

거칠은 동네 앞엔

예전부터 굴러 있던 송덕비.

 

아버님이여

이런 곳에

님이 두고 가신 주검의 자는 무덤은

아무도 헤아리지 아니하는 황토산에, 나의 가슴에……

 

무엇을 아뢰이러 찾아 왔는가,

개굴창이 모두 타는 가뭄 더위에

성묘하러 가는 길은 팍팍한 산길이노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성벽 오장환

 

성벽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는 진보를 허락치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춧가루 뿌리던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성씨보 오장환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吳)씨. 어째서 오(吳)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一) 청인(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李)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성탄제 오장환

 

성탄제(聖誕祭)&

 

산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 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 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내리고

눈 위엔 아직도 따듯한 핏방울……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심동 오장환

 

심동(深冬)

 

눈 쌓인 수풀에

이상한 산새의

시체가 묻히고

 

유리창이 모두 깨어진

양관(洋館)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덕 아래

저기 아, 저기 눈쌓인 새냇가에는

어린 아이가 고기를 잡고

 

눈 위에 피인 숯불은

빨―갛게

죽음은, 아, 죽음은 아름다웁게 불타 오른다.

 

헌사, 남만서방, 1939

 

 

 

 

 

싸늘한 화단 오장환

 

싸늘한 화단(花壇)

 

싸늘한 제단(祭壇)이로다

젖은 풀잎이로다

 

해가 천명(天明)에 다다랐을 때

뉘 회한의 한숨을 들이키느뇨

 

짐승들의 울음이로라

잠결에서야

저도 모르게 느끼는 울음이로라

 

반추하는 위장과 같이

질긴 풍습이 있어

내 이 한밤을 잠들지 못하였노라

 

석유 불을 마시라

등잔 아울러 삼켜 버리라

미사 종소리

보슬비 모양 흐트러진다

 

죄그만 어둠을 터는 숫닭의 날개

싸늘한 제단이로다

기온이 얕은 풀섶이로다

 

언제나 쇠창살 밖으론

떠 가는 구름이 있어

야수들의 회상과 함께 자유롭도다

 

헌사, 남만서방, 1939

 

 

 

 

 

양 오장환

 

양(羊)

 

양아 어린 양아

조이를 주마.

어째서 너마저

울 안에 사는지

 

양아 어린 양아

보드라운 네 털

구름과 같구나.

 

잔디도 없는

쓸쓸한 목책(木柵) 안에서

양아 어린 양아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양아 어린 양아

조이를 주마.

보낼 곳 없이

그냥 그리움에 내어친 사연

 

양아 어린 양야

샘물같이 맑은 눈

포도알모양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 좀 보아라

가냑한 목책(木柵)에 기대어 서서

양아 어린 양아

나마저 무엇을 생각하느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어린 동생에게 오장환

 

어린 동생에게

 

술취한 사나이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부축이듯,

사랑이여! 아니

나를 사랑하는 스승이여! 동무여!

또 나어린 동생아!

너희들이다

―몸 가누지 못하는 내 마음을

바른 길로 이끎은……

 

걷잡을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어린 동생아

너는 강철 같은 규율, 열화 같은 의지에조차

동방(東紡)에서

경전(京電)에서

철도 노조에서

화신(和信) 쟁의단 속에서,

눈에 뵈지 않는 곳곳에서

근로하는 인민들의 눈을 띄우고

그것이 또한 온 인류의 눈을 띄우는 것이기도 할 때

나는

오늘도 보았다

 

7월 3일 피로 물든

저녁 훈련원 앞에

조선 화물

수천의 종업원이 생사의 문제를 위하여

그 속에는

자기의 몸이 화차에 깔리우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정당한 요구를 위하여

싸운 사람이 있다.

 

육십여 명의 중경상자

총대를 던지고 직업을 팽개치는 사나이

길거리에서 날라 온

무수한 유리병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 나어린 동생아

나는 피할 길 없이 후끈거리는 네 입김에 온몸이 바작바작 마른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무한히 어수룩하고

어려 보이는 너희들

어디서 나오는 거친 힘이냐

 

성낸 말같이 너희들을 앞으로 앞으로 달리게 하는 힘이

강철 같은 규율―

불타는 의지라 하면

끝없이 연약한 기운, 예릿예릿한 사랑만이

나를,

몸 가누지 못하는 나를,

그 뒤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아 이처럼 말하려는 나

이처럼

발 빼려는 나,

 

너의 뜨거운 사랑을

육친이란 묵은 생각에서 느끼던

다만 옳다는 그것만이

냉혹한 현실에서 합치던,

너의 불붙는 의지로

가물거리는

참으로 가물거리는 내 사랑의 심지에

폭발되게 하여라!

 

강철 같은 규율―

열화 같은 의지,

아 이런 것이

불붙기 비롯하는 내 가슴에

끝없는 내 것으로 만들어 달라

 

백제, 1947. 2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오장환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탕아 돌아가는 게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병든 자식을 찾아오시다.

 

―아 네 병은 언제나 낫는 것이냐.

날마다 이처럼 쏘다니기만 하니……

어머니 눈에 눈물이 어릴 때

나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내 붙이, 내가 위해 받드는 어른

내가 사랑하는 자식

한평생을 나는 이들이 죽어갈 때마다

옆에서 미음을 끓이고, 약을 달인 게 나의 일이었다.

자, 너마저 시중을 받아라.

 

오로지 이 아들 위하여

서울에 왔건만

며칠 만에 한 번씩 상을 대하면

밥숟갈이 오르기 전에 눈물은 앞서 흐른다.

어머니여, 어머니시여! 이 어인 일인가요

뼈를 깎는 당신의 자애보다도

날마다 애타는 가슴을

바로 생각에 내닫지 못하여 부산히 서두르는 몸짓뿐.

 

―이것아, 어서 돌아가자

병든 것은 너뿐이 아니다. 온 서울이 병이 들었다.

생각만 하여도 무섭지 않으냐

대궐 안의 윤비는 어디로 가시라고

글쎄 그게 가로채였다는구나.

 

시골에서 땅이나 파는 어머니

이제는 자식까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신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가슴에 넘치는 사랑이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이 가슴에 넘치는 바른 뜻이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모든 이의 가슴에 부을 길이 서툴러 사실은

그 때문에 병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탕아 돌아가는 게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병든 자식을 찾아오시다.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어육 오장환

 

어육(魚肉)

 

신사들은 식탁에 죽은 어육을 올려 놓고 입천장을 핥으며 낚시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천기예보엔 일기도 검어진다는(승합마차가 몹시 흔들리는) 기절(氣節)을, 신사들은 바다로 간다고 떠들어 댔다. 천후(天候)일수록 잘은 걸려드는 법이라고 행랑아범더러 어류들의 진기한 미끼, 파리나 지렁이를 잡아오라고 호령한다. 점잖은 신사들은 어떠한 유희에서나 예절 가운데에 행하여졌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어포 오장환

 

어포(漁浦)

 

어포(漁浦)의 등대는 귀류(鬼類)의 불처럼 음습하였다. 어두운 밤이면 안개는 비처럼 나렸다. 불빛은 오히려 무서웁게 검은 등대를 튀겨 놓는다. 구름에 지워지는 하현달도 한참 자옥―한 안개에는 등대처럼 보였다. 돛폭이 충충한 박쥐의 나래처럼 펼쳐 있는 때, 돛폭이 어스름―한 해적의 배처럼 어른거릴 때, 뜸 안에서는 고기를 많이 잡은 이나 적게 잡은 이나 함부로 투전을 뽑았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여수 오장환

 

여수(旅愁)&

 

여수에 잠겼을 때, 나에게는 조그만 희망도 숨어 버린다.

요령처럼 흔들리는 슬픈 마음이여!

요지경 속으로 나오는 좁은 세상에 이상스러운 세월들

나는 추억이 무성한 숲 속에 섰다.

 

요지경을 메고 다니는 늙은 장돌뱅이의 고달픈 주막꿈처럼

누덕누덕이 기워진 때묻은 추억,

신뢰할 만한 현실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시정배와 같이 현실을 모르며 아는 것처럼 믿고 있었다.

 

괴로운 행려 속 외로이 쉬일 때이면

달팽이 깍질 틈에서 문 밖을 내다보는 얄미운 노스타르자

너무나, 너무나, 뼈없는 마음으로

오―늬는 무슨 두 뿔따구를 휘저어 보는 것이냐!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연안서 오는 동무 심에게 오장환

 

연안(延安)서 오는 동무 심(沈)에게

 

그 전날

이웃나라 동무들이

서금(瑞金)에서 연안으로 막다른 길을 헤치고 가듯

내 나라에서 연안으로

길 없는 길을

만여 리.

다만 외줄로 뚫고 간 벗이여!

 

동무, 이제 내 나라를 찾기에 앞서

벗에게 보내는 말

`동무여! 평안하신가.'

심(沈)이여,

아니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동무와 동무여!

나도 눈물로 외친다.

`동무여 평안하셨나.'

 

동무, 이제 벗을 찾기에 앞서

소식을 전하는 뜻

`부끄러워라. 쫓겨 갔던 몸 돌아옵니다.

내 나라에 끝까지 머무른 동무들의 싸움,

얼마나 괴로웠는가'

얼굴조차 없어라.

우리는 이제 무어라 대답하랴.

 

불타는 가슴,

피끓는 성실은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동무,

심(沈)이여!

아니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동무와 동무들이여!

우리들 배자운 싸움 가운데

뜨거이 닫는 힘찬 손이여!

동무, 동무들의 가슴, 동무들의 입, 동무들의 주먹,

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1945. 12. 13, 김사량(金史良) 동무의 편으로 심(沈)의 안부를 받으며.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영원한 귀향 오장환

 

영원한 귀향

 

옛날과 같이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밤마다

바다는 희생을 노래 부르고

 

항상 돌이키고 다시 돌떠스는

고독과 무한한 신뢰에

바다여!

내 몸을 쓸어가는 성낸 파도

 

부두에 남겨둔 애상은 어떤 것인가

 

진정 나도 진정으로 젊은이를 사랑했노라.

왔다는 다시 갈 오― 영원한 귀향

 

계후조(季候鳥)는 떠난다.

암초에 쎈트 헤레나에 흰 새똥을 남기고.

 

헌사, 남만서방, 1939

 

 

 

 

 

영회 오장환

 

영회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지우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 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경(卿)이여!

어찌 추억 위에 고운 탑을 쌓았는가

애수(哀愁)가 분수같이 흐트러진다.

 

동구 밖에는 청랭(晴冷)한 달빛에

허물어진 향교(鄕校) 기왓장이 빛나고

댓돌 밑 귀뚜리 운다.

 

다만 울라

그대도 따라 울어라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밤 영회의 정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 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헌사, 남만서방, 1939

 

 

 

 

 

온천지 오장환

 

온천지(溫泉地)

 

온천지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 은빛 자동차가 드나들었다. 늙은이나 어린애나 점잖은 신사는, 꽃 같은 계집을 음식처럼 싣고 물탕을 온다. 젊은 계집이 물탕에서 개구리처럼 떠 보이는 것은 가장 좋다고 늙은 상인들은 저녁상 머리에서 떠들어 댄다. 옴쟁이 땀쟁이 가지각색 더러운 피부병자가 모여든다고 신사들은 투덜거리며 가족탕을 선약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월향구천곡 오장환

 

월향구천곡(月香九天曲)

 

오랑주 껍질을 벗기면

손을 적신다.

향내가 난다.

 

점잖은 사람 여럿이 보이인 중에 여럿은 웃고 떠드나

기녀(妓女)는 호을로

옛 사나이와 흡사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점잖은 손들의 전하여 오는 풍습엔

계집의 손목을 만져 주는 것,

기녀는 푸른 얼굴 근심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훈기는 냄새

분 냄새를 지니었도다.

 

옛 이야기 모양 거짓말을 잘하는 계집

너는 사슴처럼 차디찬 슬픔을 지니었고나

 

한나절 태극선 부치며

슬픈 노래, 너는 부른다

좁은 보선 맵시 단정히 앉아

무던히도 총총한 하루 하루

 

옛 기억의 엷은 입술엔

포도물이 젖어 있고나.

 

물고기와 같은 입 하고

슬픈 노래, 너는 조용히 웃도다

 

화려한 옷깃으로도

쓸쓸한 마음은 가릴 수 없어

스란치마 땅에 끄을며 조심조심 춤을 추도다.

 

순백하다는 소녀의 날이여!

그렇지만

너는 매운 회초리, 허기찬 금식(禁食)의 날

오―끌리어 왔다.

 

슬픈 교육, 외로운 허영심이여!

첫사람의 모습을 모듬 속에 찾으려 헤매는 것은

벌―써 첫사람은 아니라

잃어진 옛날로의 조각진 꿈길이니

바싹 마른 종아리로

시들은 화심(花心)에

너는 향료를 물들이도다.

 

슬픈 사람의 슬픈 옛일이여!

값진 패물로도

구차한 제 마음에 복수는 할 바이 없고

다 먹은 과일처럼 이 틈에 끼여

꺼치거리는 옛 사랑

오―방탕한 귀공자!

기녀는 조심조심 노래하도다. 춤을 추도다.

 

졸리운 양, 춤추는 여자야!

세상은

몸에 이익하지도 않고

가미(加味)를 모르는 한약처럼 쓰고 틉틉하고나.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이 세월도 헛되이 오장환

 

이 세월도 헛되이

 

아, 이 세월도 헛되이 물러서는가

 

38도라는 술집이 있다.

낙원이라는 카페가 있다.

춤추는 연놈이나 술 마시는 것들은

모두 다 피 흐르는 비수를 손아귀에 쥐고 뛰는 것이다.

젊은 사내가 있다.

새로 나선 장사치가 있다.

예전부터 싸움으로 먹고 사는 무지한 놈들이 있다.

내 나라의 심장 속

내 나라의 수채물 구멍

이 서울 한복판에

밤을 도와 기승히 날뛰는 무리가 있다.

다만 남에게 지나는 몸채를 가지고

이 지금 내 나라의 커다란 부정을 못 견디게 느끼나

이것을 똑바른 이성으로 캐내지 못하여

씨근거리는 젊은 사내의 가슴과

내둥 양심껏 살 양으로 참고 참다가

이제는 할 수 없이 사느냐 죽느냐의 막다른 곳에서

다시 장삿길로 나간 소시민의

반항하는 춤맵시와

그리고

값싼 허영심에 뻗어 갔거나

여러 식구를 먹이겠다는 생활고에서 뛰쳐나갔거나

진하게 개어 붙인 분가루와 루―쥬에

모든 표정을 숨기고

다만 상대방의 표정을 좇는 뱀의 눈같이 싸늘한 여급의 눈초리

담요때기로 외투를 해 입는 자가 있다.

담요때기로 망또를 해 두른 놈이 있다.

또 어떤 놈은

권총을 희뜩희뜩 비치는 자도 있다.

이런 곳에서 목을 매는 중학생이 있다.

아 그러나

이제부터 얼마가 지나지 않은

해방의 날!

그 즉시는 이들도,

서른여섯 해 만에 스물여섯 해 만에

아니 몇살 만이라도 좋다.

이 세상에 나 처음으로 쥐어 보는 내 나라의 깃발에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춤추던

그리고 밝고 굳세인 새날을 맹서하던 사람들이 아니냐.

아 이 서울

내 나라의 심장부, 내 나라의 똥수깐,

남녘에서 오는 벗이여!

북쪽에서 오는 벗이여!

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오는 벗이여!

또는

이곳이 궁금하여 견디지 못하고 허턱 찾아오는 동무여!

우리 온몸에 굵게 흐르는 정맥의

노리고 더러운 찌꺼기들이여!

너는 내 나라의 심장부, 우리의 모든 피검불을 거르는 염통 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우리의 백혈구를 만나지 아니했느냐.

 

아, 그리고 이 세월도 속절 없이 물러서느냐.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장마철 오장환

 

장마철

 

나는 보았다.

철마다 강기슭에서

큰물이 갈 때에……

 

아 모든 것은 이냥 떠내려가는가

시뻘건 물 위에 썩은 용구새

그 위에 날았다 다시 앉고

날았다는 다시 앉는 참새떼.

 

어쩌면 나의 설움은

이처럼 여럿이

함께 외치고 싶은가.

 

나는 자랐다.

메마른 강기슭에

나날이 울어예는 여울가에서

 

□ *

 

꿈 아시

아슬하게 높이는

흰구름.

 

아 모든 것은 이냥 흘러만 가는가

내 노래에 젖은 내 마음

내 입성에 배인 내 몸매

다만 소리 없는 흰나비로

자취 없이 춤추며 사라질 것인가

 

꽃비늘 어지러이 흘러가는

여울가에서

온통 숨차게 흔들리는 가슴 속

 

그러나 이것은, 어디로서 오는 두려움인가

아니,

어디에서 복받치는 노여움인가.

 

나는 보았다.

철마다 강기슭에서

큰물이 갈 때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전설 오장환

 

전설&

 

느티나무 속에선 올빼미가 울었다. 밤이면 운다. 항상, 음습한 바람은 얕게 나려앉았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올빼미는 동화 속에 산다. 동리 아이들은 충충한 나무 밑을 무서워한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절정의 노래 오장환

 

절정(絶頂)의 노래

 

탑(塔)이 있다.

누구의 손으로 쌓았는가, 지금은 거치른 들판

모두다 까―맣게 잊혀진 속에

무거운 입 다물고 한(限)없이 서 있는 탑(塔),

나는 아노라. 뭇 천백(千百)사람, 미지(未知)와 신비(神秘) 속에서

보드라운 구름 밟고

별과 별들에게 기울이는 속삭임.

 

순시(瞬時)라도 아, 젊은 가슴 무여지는

덧없는 바래옴

탑(塔)이어, 하늘을 지르는 제일 높은 탑(塔)이어!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나는 무게, 아득―한 들판에

홀로 가없는 적막을 누르고……

 

몇차레나 가려다는 돌아서는가.

고이 다듬는 끌이며 자자하던 이름들

설운 이는 모두 다 흙으로 갔으나

다만 고요함의 끝 가는 곳에

 

이제도

한 층 또 한 층 주소로 애처로운 단념의 지붕 위에로

천년(千年) 아니 이천년(二千年) 발돋음하듯

탑(塔)이어, 머리 드는 탑신(塔身)이어, 너 홀로 돌이어!

어느 곳에 두 팔을 젓는가.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정문 오장환

 

정문(旌門)

 

부제: 염락․열녀불경이부(廉洛․烈女不更二夫)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를 모셨다는 정문(旌門)은 슬픈 울 창살로는 음산한 바람이 스미어들고 붉고 푸르게 칠한 황토 내음새 진하게 난다. 소저(小姐)는 고운 얼굴 방안에만 숨어 앉아서 색시의 한시절 삼강오륜 주송지훈(朱宋之訓)을 본받아왔다. 오 물레 잣는 할멈의 진기한 이야기 중놈의 과객의 화적의 초립동이의 꿈보다 선명한 그림을 보여 줌이여. 시꺼먼 사나이 힘세인 팔뚝 무서운 힘으로 으스러지게 안아 준다는 이야기 소저에게는 몹시는 떨리는 식욕이었다. 소저의 신랑은 여섯 해 아래 소저는 시집을 가도 자위하였다. 쑤군, 쑤군 지껄이는 시집의 소문 소저는 겁이 나 병든 시에미의 똥맛을 핥아 보았다. 오 효부라는 소문의 펼쳐짐이여! 양반은 조금이라도 상놈을 속여야 하고 자랑으로 누르려 한다. 소저는 열아홉. 신랑은 열네 살 소저는 참지 못하여 목 매이던 날 양반의 집은 삼엄하게 교통을 끊고 젊은 새댁이 독사에 물리려는 낭군을 구하려다 대신으로 죽었다는 슬픈 전설을 쏟아 내었다. 이래서 생겨난 효부 열녀의 정문 그들의 종친은 가문이나 번화하게 만들어 보자고 정문의 광영을 붉게 푸르게 채색하였다.

 

시인부락, 1936. 제 1호

 

 

 

 

 

종소리 오장환

 

종(鍾)소리&

 

울렸으면……종소리

그것이 기쁨을 전하는

아니, 항거하는 몸짓일지라도

힘차게 울렸으면……종소리

 

크나큰 종면(鍾面)은 바다와 같은데

상기도 여기에 새겨진 하늘 시악시

온몸이 업화(業火)에 싸여 몸부림치는 거 같은데

울리는가, 울리는가,

태고서부터 나려오는 여운―

 

울렸으면……종소리

젊으디 젊은 꿈들이

이처럼 외치는 마음이

울면은 종소리 같으련마는……

 

스스로 죄 있는 사람과 같이

무엇에 내닫지 않는가,

시인이여! 꿈꾸는 사람이여

너의 젊음은, 너의 바램은 어디로 갔느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종가 오장환

 

종가

 

돌담으로 튼튼히 가려 놓은 집안엔 검은 기와집 종가가 살고 있었다. 충충한 울 속에서 거미알 터지듯 흩어져 나가는 이 집의 지손(支孫)들. 모두 다 싸우고 찢고 헤어져 나가도 오래인 동안 이 집의 광영을 지키어 주는 신주(神主)들 들은 대머리에 곰팡이가 나도록 알리어지지는 않아도 종가에서는 무기처럼 애끼며 제삿날이면 갑자기 높아 제상 위에 날름히 올라 앉는다. 큰집에는 큰아들의 식구만 살고 있어도 제삿날이면 제사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 오조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손자 손주며느리 칠촌도 팔촌도 한테 얼리어 닝닝거린다. 시집 갔다 쫓겨 온 작은딸 과부가 되어 온 큰고모 손가락을 빨며 구경하는 이종언니 이종오빠. 한참 쩡쩡 울리던 옛날에는 오조할머니 집에서 동원 뒷밥을 먹어 왔다고 오조할머니 시아버니도 남편도 동네 백성들을 곧잘 잡아들여다 모말굴림도 시키고 주릿대를 앵기었다고. 지금도 종가 뒤란에는 중복사나무 밑에서 대구리가 빤들빤들한 달걀귀신이 융융거린다는 마을의 풍설. 종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일을 안 해도 지내 왔었고 대대손손이 아무런 재주도 물리어받지는 못하여 종가집 영감님은 근시안경을 쓰고 눈을 찝찝거리며 먹을 궁리를 한다고 작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하여 살아 나간다.

 

풍림, 1937. 제 3호.

 

 

 

 

 

찬가 오장환

 

찬가&

 

한때,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하였고 또 온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나운 날씨에

조급한 사나이는

다시금,

뵈지 않는 쇠사슬 절그럭거리며

막다른 노래를 부르는구나

 

아 울음이여! 울음이여!

신음 속에 길러 오던

너의 성품이,

넘쳐나는 기쁨에도 샘솟는 것을

아주 가까운 이마즉

우리는 새날을 통하여 배우지 아니했느냐.

 

젊은이여! 벗이여!

손과 발에…… 쇠사슬 늘이고

억눌린 뱃전에

스스로 노를 젓던

그 옛날, 흑인의 부르던 노래

어찌하여 우리는 이러한 노래를

다시금 부르는 것이냐.

 

뵈지 않는 쇠사슬

마음 안에 그늘지는 검은 그림자에도

내 노래의 갈 곳이

막다른 길이라 하면

아, 젊음이여!

헛되인 육체여!

너는 또 보지 아니했느냐.

8월 15일

아니 그보다도 전부터

우리들의 발길이 있은 뒤부터

항거하는 마음은 그저

무거운 쇠줄에 몸부림칠 때

온몸을 피투성이로 이와 싸우던 투사를……

 

옥에서

공장에서

산 속에서

지하실에서 나왔다.

몇천 길을 파고 들어간 땅속 갱도에서도―

땅 위로 난 모든 문짝은 뻐개지고

구멍이란 구멍에서 이들은 나왔다.

그리고

나와 보면 막상 반가운 얼굴들

함께 자란 우리의 형제 우리의 동무

 

K가 나왔다.

또 하나의 K가 나왔다.

A가 나왔다.

P가 나왔다.

그 속에는 먼― 남의 나라까지 찾아가 원수들 총부리에,

우리의 총부리를 맞들이댄 동무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터 부르는 나즉한 노래를

이제는 더욱 소리 높여 부를 뿐이다.

 

뵈지 않는 쇠사슬 절그럭거리며

막다른 노래를

노래 부르는 벗이여!

전에는 앞서가며 피 흘리던 이만이

조용조용 부르던 노래

이제는 모두 합하여

우리도 크게 부른다.

`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

 

곳곳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소리

아, 이 노래는

한 사람의 노래가 아니다.

성낸 물결모양 아우성치는 젊은 사람들……

더욱 세찬 이 바람은 귀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애타는 가슴 속

불을 지른다.

 

아 영원과 사랑과 꿈과 생명을 노래하던 벗이여!

너는 불타는 목숨을

그리고

불타면 꺼지는 목숨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

모두 다 앞서가던 선구자의 죽음 위에

스스로의 가슴을 불지르고 따라가는 동무들

 

우렁찬 우렁찬 노래다.

모두 다 합하여 부르는 이 노래

그렇다.

번연히 앞서보다 더한 쇠줄을

배반하는 무리가 가졌다 하여도

우리들 불타는 억세인 가슴은

젊은이 불을 뿜는 노래는

이런 것을 깨끗이 사뤄버릴 것이다.

 

우리들의 귀는 한 번에 두 가지를 들을 수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없다.

벗이여! 점점 가까워 온다.

얼마나 얼마나 하늘까지 뒤덮는 소리냐

`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체온표 오장환

 

체온표(體溫表)

 

어항 안

게으른 금붕어

 

나비 같은 넥타이를 달고 있기에

나는 무엇을 하면 옳겠습니까

 

나래 무거운 회상에 어두운 거리

하나님이시여! 저무는 태양

나는 해바라기모양 고개 숙이고 병든 위안을 찾아 다니어

 

고층의 건축이건만

푸른 하늘도 창 옆으로는 가까이 오려 않는데

탁상에 힘없이 손을 내린다.

먹을 수 없는 탱자열매 가시나무 향내를 코에 대이며……

 

주판알을 굴리는 작은 아씨야

너와 나는 비인 지갑과 사무를 바꾸며

오늘도 시들지 않느냐

화병에 한 떨기 붉은 장미와 히아신스 너의 청춘이, 너의 체온이……

 

헌사, 남만서방, 1939

 

 

 

 

 

초봄의 노래 오장환

 

초봄의 노래

 

내가 부르는 노래

어디선가 그대도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하고

 

유리창 밖으론

함박눈이 펑 펑 쏟아지는데

한겨울

나는 아무데도 못 가고

부질없은 노래만 불러 왔구나.

 

그리움도 맛없어라

사모침도 더디어라

 

언제인가 언제인가

안타까운 기약조차 버리고

한 동안 쉴 수 있는 사랑마저 미루고

저마다 어둠 속에 앞서던 사람

 

이제 와선 함께 간다.

함께 간다.

어디선가 그대가 헤매인대도

그 길은 나도 헤매이는 길

 

내가 부르는 노래

어디선가 그대가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하고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팔월 십오일의 노래 오장환

 

팔월(八月) 십오일(十五日)의 노래

 

기폭을 쥐었다.

높이 쳐들은 만인의 손 위에

깃발은 일제히 나부낀다.

 

`만세!'를 부른다. 목청이 터지도록

지쳐 나서는

군중은 만세를 부른다.

 

우리는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이처럼 부르짖는 아우성은

일찍이 끓어 오던 우리들 정열이 부르는 소리다.

 

아 손에 손에 깃발들을 날리며

큰길로 모이는 사람아

우리는 보았다.

이곳에 그냥 기쁨에 취하고, 함성에 목메인 겨레를……

그리고

뒤끓는 환희와 깃발의 꽃바다 속에

무수히 따라가는 아동과 근로하는 이들의 행렬을……

 

춤추는 깃발이여!

나부끼는 마음이여!

이들을 지키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너희들 가슴으로

해방이 주는 노래 속에서

또 하나의 검은 쇠사슬이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할렐루야 오장환

 

할렐루야

 

곡성이 들려온다. 인가(人家)에 인가(人家)가 모이는 곳에.

 

날마다 떠오르는 달이 오늘도 다시 떠 오고

 

누―런 구름 쳐다보며

망또 입은 사람이 언덕에 올라 중얼거린다.

 

날개와 같이

불길한 사족수(四足獸)의 날개와 같이

망또는 어둠을 뿌리고

 

모―든 길이 일제히 저승으로 향하여 갈 제

암흑의 수풀이 성문을 열어

보이지 않는 곳에 술 빚는 내음새와 잠자는 꽃송이.

 

다만 한 길 빛나는 개울이 흘러……

 

망또 우의 모가지는 솟치며

그저 노래 부른다.

 

저기 한 줄기 외로운 강물이 흘러

깜깜한 속에서 차디찬 배암이 흘러…… 사탄이 흘러……

눈이 따갑도록 빨간 장미가 흘러……

 

헌사, 남만서방, 1939

 

 

 

 

 

해수 오장환

 

해수(海獸)

 

사람은 저 빼놓고 모조리 짐승이었다

 

항구야

계집아

너는 비애를 무역하도다.

 

모―진 비바람이 바닷물에 설레이던 날

나는 화물선에 엎디어 구토를 했다.

 

뱃전에 찌프시 안개 끼는 밤

몸부림치도록 갑갑하게 날은 궂은데

속눈썹에 이슬을 적시어 가며

항구여!

검은 날씨여!

내가 다시 상륙하던 날

나는 거리의 골목 벽돌담에 오줌을 깔겨 보았다.

 

컴컴한 뒷골목에 푸른 등불들,

붕―

붕―

자물쇠를 채지 않는 도어 안으로, 부화(浮華)한 웃음과 비어의 누른 거품이 북어 오른다.

 

야윈 청년들은 담수어처럼

힘없이 힘없이 광란된 ZAZZ에 헤엄쳐 가고

빨간 손톱을 날카로이 숨겨 두는 손,

코카인과 한숨을 즐기어 상습하는 썩은 살덩이

 

나는 보았다.

항구,

항구,

들레이면서

수박씨를 까바수는 병든 계집을―

바나나를 잘라내는 유곽 계집을―

 

49도, 독한 주정(酒精)에 불을 달구어

불타오르는 술잔을 연거푸 기울이도다.

보라!

질척한 내장이 부식한 내장이, 타오르는 강한 고통을,

펄펄펄 뛰어라! 나도 어릴 때에는

입가생이에 뾰롯한 수염터 모양, 제법 자라나는 양심을 지니었었다.

 

발레제(製)의 무디인 칼날, 얼굴이 뜨거웠다.

면도를 했다.

극히 어렸던 시절

 

항구여!

눈물이여!

나는 종시(終是) 비애와 분노 속을 항해했도다.

 

계집아, 술을 따르라.

잔잔이 가득 부어라!

자조와 절망의 구덩이에 내 몸이 몹시 흔들릴 때

나는 구토를 했다.

삼면기사(三面記事)를,

각혈과 함께 비린내나는 병든 기억을……

 

어둠의 가로수여!

바다의 방향(方向),

오 한없이 흉측맞은 구렁이의 살결과 같이

늠실거리는 검은 바다여!

미지의 세계,

미지로의 동경,

나는 그처럼 물 위로 떠다니어도 바다와 동화치는 못 하여 왔다.

가옥(家屋) 안 짐승은 오직 사람뿐

나도 그처럼 완고하도다.

 

쇠창살을 붙잡고 우는 계집아!

바다가 보이는 저쪽 상정(上頂)엔 외인의 묘지가 있고

하얀 비둘기가 모이를 쪼으고,

장난감만하게 보이는 기선은 퐁퐁 품는 연기를 작별인사처럼 피워 주도다.

 

항구여!

눈물이여!

 

절망의 흐름은 어둠을 따라 땅 아래 넘쳐 흐르고,

바람이 끈적끈한 요기(妖氣)의 저녁,

너는 바다 변두리를 돌아가 보라.

오 이럴 때이면 이빨이 무딘 찔레나무도

아스러지게 나를 찍어 누르려 하지 않더냐!

 

이년의 계집,

5색,

7색,

영사관 꼭대기에 때 묻은 기폭은

그 집 굴뚝이 그려 논 게다.

지금도 절름발이 노서아의 귀족이 너를 찾지 않더냐.

 

등대 가까이 매립지에는

아직도 묻히지 않은 바닷물이 웅성거린다.

오―매립지는 사문장

동무들이 뼈다귀로 묻히어 왔다.

 

어두운 밤, 소란스런 물결을 따라

그러게 검은 바다 위로는

쑤구루루…… 쑤구루루……

부어 오른 시신, 눈자위가 해멀건 인부들이 떠올라 온다.

 

항구야,

환각의 도시, 불결한 하수구에 병든 거리여!

얼마간의 돈푼을 넣을 수 있는 조그만 지갑,

유독식물과 같은 매음녀는

나의 소매에 달리어 있다.

 

그년은, 마음까지 나의 마음까지 핥아 놓아서

이유 없이 웃는다. 나는

도박과

싸움,

흐르는 코피!

나의 등가죽으로는 뱃가죽으로는

자폭한 보헤미안의 고집이 시르죽은 빈대와 같이 쓸 쓸 쓸 기어다닌다.

 

보라!

어두운 해면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짐승과 같이 추악한 모습

항시 위협을 주는 무거운 불안

그렇다! 오밤중에는 날으는 갈매기도 가마귀처럼 불길하도다.

 

나리는 안개여!

설움의 항구,

 

세관의 창고 옆으로 달음박질하는 중년 사나이의

쿨렁한 가방

방파제에는 수평선을 넘어온

해조음이 씨근거리고,

바다도, 육지도, 한 치의 영역에 이를 웅을거린다.

 

항구여!

눈물이여!

나는

못 쓰는 주권(株券)을 갈매기처럼 바닷가 날려 보냈다.

뚱뚱한 계집은 부―연 배때기를 헐덕거리고

나는 무겁다.

 

웅대하게 밀리쳐오는 오―바다,

조수의 쏠려옴을 고대하는 병든 거위들!

습진과 최악의 꽃이 성화(盛華)하는 항시(港市)의 하수구,

더러운 수채의 검은 등때기,

급기야

밀물이 머리맡에 쏠리어올 때

톡 불거진 두 눈깔을 희번덕이며

너는 무서웠느냐?

더러운 구덩이, 어두운 굴 속에 두 가위를 트리어 박고

 

뉘우치느냐?

게거품을 북적거리며

쏠려가는 조수를 부러이 보고

불평하느냐?

더러운 게거품을 북적거리며……

 

음협(陰狹)한 씨내기, 사탄의 낙륜(落倫),

너의 더러운 껍데기는

일찍

바닷가에 소꿉 노는 어린애들도 주워 가지는 아니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해항도 오장환

 

해항도(海港圖)

 

폐선처럼 기울어진 고물상옥(古物商屋)에서는 늙은 선원이 추억을 매매하였다. 우중중―한 가로수와 목이 굵은 당견(唐犬)이 있는 충충한 해항(海港)의 거리는 지저분한 크레용의 그림처럼, 끝이 무디고. 시꺼먼 바다에는 여러 바다를 거쳐온 화물선이 정박하였다.

 

값싼 반지요. 골통같이 굵다란 파이프. 바다 바람을 쏘여 얼굴이 검푸러진 늙은 선원은 곧―잘 뱀을 놀린다. 한참 싸울 때에는 저 파이프로도 무기를 삼아왔다. 그러게 모자를 쓰지 않는 항시(港市)의 청년은 늙은 선원을 요지경처럼 싸고 두른다.

 

나폴리(Naples)와 아든(Aden)과 싱가포르(Singapore). 늙은 선원은 항해표와 같은 기억을 더듬어 본다. 해항의 가지가지 백색, 청색 작은 신호와, 영사관, 조계(租界)의 갖가지 깃발을. 그리고 제 나라 말보다도 남의 나라 말에 능통하는 세관의 젊은 관사를. 바람에 날리는 흰 깃발처럼 Naples. Aden. Singapore. 그 항구 그 바의 계집은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망명한 귀족에 어울려 풍성한 도박. 컴컴한 골목 뒤에선 눈자위가 시퍼런 청인(淸人)이 괴춤을 훔칫거리며 길 밖으로 달리어간다. 홍등녀(紅燈女)의 교소(嬌笑), 간들어지기야. 생명수! 생명수! 과연 너는 아편을 가졌다. 항시의 청년들은 연기를 한숨처럼 품으며 억세인 손을 들어 타락을 스스로히 술처럼 마신다.

 

영양(榮養)이 생선가시처럼 달갑지 않는 해항의 밤이다. 늙은이야! 너도 수부(水夫)이냐? 나도 선원이다. 자― 한 잔, 한 잔, 배에 있으면 육지가 그립고, 뭍에선 바다가 그립다. 몹시도 컴컴하고 질척거리는 해항의 밤이다. 밤이다. 점점 깊은 숲속에 올빼미의 눈처럼 광채가 생(生)하여 온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향수 오장환

 

향수&

 

어머니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만든 것이냐! 나는 이항(異港)에 살고 어메는 고향에 있어 얕은 키를 더욱 더 꼬부려 가며 무수한 세월들을 흰머리칼처럼 날려 보내며, 오―어메는 무슨, 죽을 때까지 윤락된 자식의 공명(功名)을 기다리는 것이냐. 충충한 세관의 창고를 기어 달으며, 오늘도 나는 부두를 찾아 나와 쑤왈쑤왈 지껄이는 이국 소년의 회화(會話)를 들으며, 한나절 나는 향수에 부대끼었다.

 

어메야! 온―세상 그 많은 물건 중에서 단지 하나밖에 없는 나의 어메! 지금의 내가 있는 곳은 광동인(廣東人)이 싣고 다니는 충충한 밀항선. 검고 비린 바다 위에 휘이―한 각등(角燈)이 비치울 때면, 나는 함부로 술과 싸움과 도박을 하다가 어메가 그리워 어둑어둑한 부두로 나오기도 하였다. 어메여! 아는가 어두운 밤에 부두를 헤매이는 사람을. 암말도 않고 고향, 고향을 그리우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모두 깊은 상처를 숨겨 가지고…… 띄엄, 띄엄이, 헤어져 있는 사람들.

 

암말도 않고 검은 그림자만 거니는 사람아! 서 있는 사람아! 늬가 옛 땅을 그리워하는 것도, 내가 어메를 못 잊는 것도, 다 마찬가지 제 몸이 외로우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어메야! 오륙년이 넘두락 일자소식이 없는 이 불효한 자식의 편지를, 너는 무슨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냐. 나는 틈틈이 생각해 본다. 너의 눈물을…… 오―어메는 무엇이었느냐! 너의 눈물은 몇 차례나 나의 불평과 결심을 죽여 버렸고, 우는 듯, 웃는 듯, 나타나는 너의 환상에 나는 지금까지도 설운 마음을 끊이지는 못하여 왔다. 편지라는 서로이 서러움을 하소하는 풍습이려니, 어메는 행방도 모르는 자식의 안재(安在)를 믿음이 좋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헌사 Artemis 오장환

 

헌사(獻詞) Artemis

 

마귀야 땅에 끌리는 네 검은 옷자락으로 나를 데려가거라

늙어지는 밤이 더욱 다가들어

철책 안 짐승이 운다.

 

나의 슬픈 노래는 누굴 위하여 불러 왔느냐

하염없는 눈물은 누굴 위하여 흘려 왔느냐

오늘도 말 탄 근위병의 발굽 소리는

성 밖으로 달려갔다.

 

나도 어디쯤 조그만 카페 안에서

자랑과 유전(遺傳)이 든 지갑마구리를 열어 헤치고

만나는 청년마다 입을 맞추리

 

충충한 구름다리 썩은 은기둥에 기대어 서서

기이한 손님아 기다리느냐

붉은 집 벽돌담으로 달이 떠 온다

 

저 멀리서 또 이 가까이서도

나의 오장에서도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

 

스틱스의 지류(支流)인가 야기(夜氣)에 번적거리어

이 밤도 또한 이 밤도 슬픈 노래는 이슬비와 눈물에 적시웠노니

청춘이여! 지거라

자랑이여! 가거라

쓸쓸한 너의 고향에……

 

헌사, 남만서방, 1939

 

 

 

 

 

호수 오장환

 

호수

 

호수에는 사색(四色) 가지의 물고기들이 살기도 한다.

차디찬 슬픔이 생겨나오는 맑은 새암

푸른 사슴이 적시고 간 입자욱이 남기어 있다.

멀리 산간에서는

시냇물들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어 오고

어둑한 숲길은 고대의 창연한 그늘이 잠겨 있어

나어린 구름들이 한나절 호숫가에 노닐다 간다.

저물기 쉬운 하룻날은

풀뿌리와 징게미의 물 내음새를 풍기우며 거무른 황혼 속에 잠기어 버리고

내 마음, 좁은 영토 안에

나는 어스름 거무러지는 추억을 더듬어 보노라.

오호 저녁바람은 가슴에 차다.

어두운 장벽(臟壁) 속에는 지저분하게 그어 논 소년기의 낙서가 있고,

큐비트의 화살 맞았던 검은 심장은 찢어진 대로 겉날리었다.

가는 비와 오는 바람에

흐르는 구름들이여!

너는 어느 곳에 어젯날을 만나 보리오.

야윈 그림자를 연못에 적시며 낡은 눈물을 어제와 같이 흘려 보기에

너는 하많은 청춘의 날을 가랑잎처럼 날려 보내었나니

오―

나는 싸늘하게 언 체온기를 겨드랑 속에 지니었도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화원 오장환

 

화원(花園)

 

꽃밭은 번창하였다. 날로 날로 거미집들은 술막처럼 번지었다. 꽃밭을 허황하게 만드는 문명. 거미줄을 새어 나가는 향그러운 바람결. 바람결은 머리카락처럼 간지러워…… 부끄럼을 갓 배운 시악시는 젖통이가 능금처럼 익는다. 줄기째 긁어먹는 뭉툭한 버러지. 유행치마 가음처럼 어른거리는 나비 나래. 가벼이 꽃포기 속에 묻히는 참벌이. 참벌이들. 닝닝거리는 울음. 꽃밭에서는 끊일 사이 없는 교통 사고가 생기어났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황무지 오장환

 

황무지

 

□ 1

 

황무지에는 거칠은 풀잎이 함부로 엉클어졌다.

번지면 손가락도 베인다는 풀,

그러나 이 땅에도

한때는 썩은 과일을 찾는 개미떼같이

촌민과 노라리꾼이 북적거렸다.

끊어진 산허리에,

금돌이 나고

끝없는 노름에 밤 별이 해이고

논우멕이 도야지 수없는 도야지

인간들은 인간들은 웃었다 함부로

웃었다!

웃었다

웃는 것은 우는 것이다

사람쳐놓고 원통치 않은 놈이 어―디 있느냐!

폐광이다

황무지 우거진 풀이여!

문명이 기후조(氣候鳥)와 같이 이곳을 들러 간 다음

너는 다시 원시의 면모를 돌이키었고

엉클은 풀 우거진 속에 이름조차 감추어 가며……

벌레 먹은 낙엽같이 동구(洞口)에서 멀리하였다.

 

□ 2

 

저렇게 싸늘한 달이 지구에 매어달려

몇 바퀴를 몇 바퀴를 몇 바퀴…… 를 한없이 돌아나는 동안

세월이여!

너는 우리게서 원시의 꿈도 걷어 들였다

죽어진 나의 동무는 어디 있느냐!

매운 채찍은 공간에 울고

슬픔을 가리운 포장 밖으로 시꺼멓게 번지는 도화역(道化役)의 커단 그림자

유리 안경알에 밤안개는 저윽이 서리고

항상

꿈이면 보여 주던 동무의 나라도

이제 오래인 세월에 퇴색하여

나는 꿈 속 어느 구석에서도 선명한 색채를 보지는 못하였다

우거진 문명이여?

엉클은

너는 우리게 무엇을 알려주었나

 

□ 3

 

광부의 피와 살점이 말라붙은 헐은 도로꼬

폐역(廢驛)에는 달이 떴다

텅―비인 교회당 다 삭은 생철 지붕에

십자가 그림자

누이고

양(洋) 당인(唐人). 광산가의 아버지, 성당의 목사도

기업과

술집과 여막(旅幕)을 따라 떠돌아 가고

궤도의 무수한 침목(沈木)

끝없는 레일이 끝없이 흐르고 휘이고

썩은 버섯 질긴 비듬풀!

녹슨 궤도에 엉클어졌다

해설피 장마철엔

번갯불이

쏘ㅏㅇ

쏘ㅏㅇ―하늘과 구름을 갈라

다이나마이트 폭발에

산맥도 광부도 경기(景氣)도 웃음도 깨어진 다음

비인 대합실 문 앞에는 석탄 쪼가리

싸늘한 달밤에

잉, 잉,

잉, 돌덩이가 울고

무인경(無人境)에

달빛 가득 실은 헐은 도로꼬가 스스로이 구른다

부엉아! 너의 우는 곳은 어느 곳이냐

어지러운 회오리바람을 따라

불길한 뭇 새들아 너희들의 날개가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은 어느 곳이냐

 

헌사, 남만서방, 1939

 

 

 

 

 

황혼 오장환

 

황혼&

 

직업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무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아래로 깔리어 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기―ㄴ 그림자는 군집(群集)의 대하(大河)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 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 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이고 밟히며 스미어 오는 황혼에 맡겨 버린다.

 

제 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이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나는 공복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띄엄띄엄 서 있는 포도 위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아 나의 마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샅.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혀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 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 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隋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 버린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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