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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靑포도>>는 <<풋포도>>
2016년 03월 15일 21시 33분  조회:5214  추천:1  작성자: 죽림

"이육사의 詩 '靑포도'는 청포도 아닌 덜 익은 '풋포도'"

 2016.03.15

근현대사 연구자 도진순 교수, '역사비평'에 재해석 논문

"청포도, 덜 무르익은 민족 의미"

 

/조선일보 DB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항일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사진)의 대표작 '청포도(靑葡萄)'에서 청포도가 연둣빛 포도가 아니라 '풋포도'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16년 봄호(114호)에 실린 '육사의 '청포도' 재해석―'청포도'와 '청포(靑袍)', 그리고 윤세주'라는 논문에서 "이 시에서 청포도는 품종으로서의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여야 제대로 독해된다"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육사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는 일제시대는 물론 지금도 청포도가 없으며, 그래서 육사가 시상(詩想)을 얻은 곳이 청포도가 재배되던 포항 동해면의 미쯔와포도원이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당시 청포도는 와인 제조용이었을 뿐 시에 나오는 것처럼 손님 접대용으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없다고 했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청(靑)'이란 접두어는 '생물이 태어날 때의 색상'을 의미하며 우리말 '풋'에 해당하는데 이 시에서 '청포도'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이란 부분도 청포도는 물이 들지 않기 때문에 풋포도로 해석할 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도 교수는 시에서 '청포도'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육사는 지인에게 시 '청포도'에 대해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일본은 끝장난다"고 말했다.

도 교수는 또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에서 '청포'를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으로 입던 푸른 도포'로 해석하여 시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중국 한시에서 청포는 비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며 중국에 망명한 우리 혁명가들이 입었다"고 주장했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孫)인 육사는 한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육사가 기다리던 '손님'으로 도 교수는 가장 가까운 동지 윤세주(尹世胄·1901~1942)를 지목했다. 밀양 출신인 그는 육사와 친분이 깊었고 1932년 9월 함께 의열단에 합류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육사는 1933년 7월 귀국 직전 아끼던 인장을 그에게 선물했고, 1941년 1월 발표한 산문 '연인기(戀印記)'에서 그를 애틋하게 그렸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
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육사는 1943년 서울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송치됐고 1944년 1월 옥사했다.

도진순 교수는 "육사는 평생 독립·혁명운동과 문학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시를 제대로 해독하려면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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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靑葡萄)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출처: 『文章』(1939. 8)>




■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 5. 18 ~ 194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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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이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음), 경북 안동 출생.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그의 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투옥되어 있을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딴 것.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10월경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 항일운동 중 10여 차례 투옥.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냄.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일본헌병의 악랄한 고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마흔의 나이로 생을 마감.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다. 1964년 경상북도 안동시 안동호수 입구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발표작품으로는 1933년〈신조선〉에 발표한 시〈황혼〉,〈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풍림1936. 12>,〈노정기 - 자오선1937.12>,〈연보 - 시학1939. 3>,〈청포도 - 문장1939. 8>,〈 교목 - 인문평론1940.7>,〈파초 - 춘추1941.12> 등이 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육사시집〉을 펴냈다.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고,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청포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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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게재 노트>

4월 4일은 이육사 시인 탄생일, <청포도>는 시인이 잠시 포항에 기거했을 당시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의 언덕에 있는 포도밭을 보며 고향과 조국의 광복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7월,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 보면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청포도>라는 한 사물을 통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즉,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는 <손님>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 작은 자원 하나라도 낭비하지 않고 분리수거라도 똑똑히 하는 범시민으로써 말이다.

...가뭄이 괘 오래 지속되고 있다.
... 하루 빨리 비가 오기를 오늘도 기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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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조 2편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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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조차 없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청포도’ ‘광야’ 등을 쓴 항일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사진)가 남긴 시조 2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시조는 육사가 1942년 동료 시인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으로 신석초의 유족이 발견해 최근 육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이육사 전집’(깊은샘)에 실리게 됐다.
전집을 엮은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지금까지 육사의 자유시 이외에는 한시(漢詩)가 세 수가 전해져 왔다”며 “육사가 시조를 썼다는 사실은 처음 알려진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또 “육사의 시조는 표면적으로는 신석초에게 보내는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국가 민족에 대한 그리움과 항일 저항의 정서를 깔고 있다”고 평했다. 외형적으로는 3장 6구라는 평시조의 형식을 지켜 전통적인 율격을 따르고 있다.
두 편 모두 1942년 8월 4일 씌어진 것으로 ‘(경북 경주)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육사 전집’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육사의 작품들과 함께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 4통과 2편의 산문 등 총 6편의 새로 발굴된 글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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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 산새는 시국 급할 줄은 모르고 /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

구한 말 의병을 이끌며 일제에 항거한 의병장 중 대표적 의병장인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가 남긴 시(詩)다.

김해 허씨인 왕산은 1855년(철종 6년) 4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 경북 구미시 임은동)의 덕망 높은 학자 집안에서 아버지 허조와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네 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허훈은 영남 유림의 종장(유교의 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학문이 높아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1896년 진보로 이주해 진보의진을 결성했다. 셋째 형 허겸은 훗날 허위의 막하에서 의병에 참가했다.

왕산은 7세때 부터 숙부 허희와 20살 위인 맏형 허훈에게 한학을 배웠다. 15살 때 '시경'·'서경'·'역경'을 읽었고 천문·지리·병진·산수 등도 두루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

맏형 허훈은 아우에 대해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했다.

1894년 전봉준 등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외세에 항거하고자 하는 동학운동이 일어났다. 왕산은 허훈 등과 함께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몸을 피했다.

왕산이 의병운동에 나선 것은 나이 40세 들어서다. 1895년 일제는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전국의 유생들은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안동에서는 권세연, 김도화, 김흥락 등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며, 허위 형제 역시 의병을 일으키키로 결심, 막대한 집안의 재산을 팔아 허훈은 진보에서, 허위는 김산에서 각각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김산의진은 수백명의 장병을 모집, 김산군 금릉의 무기고를 열어 무장했지만 조직을 채 갖추기도 전에 관군에 의해 흩어졌다.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 판결문.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왕산 등은 상주·선산 등지에 편지를 보내며 재기를 노렸고, 호서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인석과 합세키로 했다. 하지만 '의병을 급속히 해산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활동을 중지했다.

을미의병 해산 후인 1899년 2월1일 허위는 고종으로부터 환구단참봉 벼슬을 받았다. 그는 같은 해 2월6일 영희전참봉, 2월22일 조경원봉사 4월2일 성균관박사 등을 거치며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그는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거쳐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평리원재판장이 됐다. 1905년에는 현 대통령실장격인 비서원승에 올랐다.

왕산은 1904년 6월부터 일본의 침략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격문을 쓰는 등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당시의 격문에는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해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해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로 칼을 만들자'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왕산은 1905년 3월 일제에 의해 구금, 같은 해 7월부터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 3도의 경계인 삼도봉 아래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해야 했다.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압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왕산은 경상도·충청도·강원도·전라도 등지를 다니며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1906년 6월 의병봉기를 계획했다. 허위는 안동을 시작으로 강원도 일대를, 이강년은 상주를 시작으로 충청도 일대를, 여중룡은 김산을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각각 거쳐 경성에서 합류하자는 계획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 퇴위했고, 같은 해 8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됐다. 왕산은 경기도 북부와 남부, 그리고 강원도 일원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있었다.

1908년 12월 전국 의병장은 경기 양주에서 집결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통합 의병부대 '13도창의대진소'를 만들었다.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이때 왕산은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을 맡았다. 당시 양주에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명에 달했다.

13도창의대진소는 즉시 서울 진격작전에 돌입했고, 왕산의 선발대 300명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패했다.

왕산은 1908년 6월11일 경기 포천에서 일제에 체포돼 9월18일 사형선고를 받아 10월21일 교수형을 당했다. 향년 54세였다.

왕산의 아들 허학은 1907년 21살의 나이로 의병장 간 연락과 무기조달을 담당하며 부친의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3년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 1914년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허학은 만주로 망명한 후인 1925년 김혁을 위원장으로 한 신민부에서 참의원에 선출돼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와 아우 허영 허준 등은 당시 일본군의 수배대상이었다. 1940년 카자흐스탄에서 외롭게 사망한 그는 1968년에야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왕산의 맏형 허훈과 셋째형 허겸, 허훈의 손자 허종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허위의 사촌인 허형과 허필 일가 역시 독립운동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허형의 아들 허민, 허발, 허규와 허필의 아들 허형식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허형의 딸 허길은 진성이씨 이가호와 결혼해 이원기 이원록 이원일 이원조 이원창 이원홍을 낳았다.

이중 육사 이원록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원기도 독립운동에 투신해 훗날 건국포장을 받았다.

육사는 1904년 4월4일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 881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가호와 허형의 딸 허길이 그의 부모이고, 도산서원 보문의숙의 초대 숙장을 지낸 이중직이 그의 조부다.

허형은 의병장 허훈·허겸·허위와 사촌으로, 허형·허훈 등은 모두 예안의 진성이씨 집안으로 딸이나 손녀를 시집보내 중첩혼을 맺고 있었다.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의 친필 서한. 독립기념관 소장 이미지.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육사는 어린시절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보문의숙을 거쳐 1918년 설립된 도산공립보통학교에 1회로 입학해 신학문을 익혔다.

17세에 형 이원기를 따라 대구로 이주했고, 18세가 된 해에는 부인 안일양과 결혼했다.

1925년 9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했고, 1926년 봄에는 베이징으로 가 중국 대학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1927년 8월 귀국 직후에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중외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30년 다시 대구격문 사건에 연루돼 동생 이원일과 함께 다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건강이 악화된 그는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으키기 위해 문인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1936년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했고,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도 썼다.

1939년에는 '절정', '청포도'등의 시를 썼고,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시인 '광야'를 발표했다.

육사는 1943년 9월 일경에 잡혀 옥살이를 하던 중 고문을 못이겨 옥중 순국했다. 그와 함께 투옥됐던 9촌 조카 이병희 지사가 육사의 유품과 시신을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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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순 교수, 이육사 논문 발표
‘청포도’ ‘절정’ 등 새롭게 해석
‘광야’는 불교와 니체적 사유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청포도’ 전문)

 

도진순 교수
도진순 교수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이 나왔다. 한국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가 <역사비평> 봄호에 발표한 논문 ‘육사의 ‘청포도’ 재해석-‘청포도’와 ‘청포(靑袍)’, 그리고 윤세주’가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도 교수는 ‘청포도’를 익기 전인 ‘풋’포도로, ‘청포’는 독립투쟁을 벌이던 이들이 입었던 옷으로 풀었다. 그리고 “손님”을 대표하는 인물로 육사의 혁명 동지였던 석정 윤세주를 지목했다.

 

도 교수는 우선 육사가 시 ‘청포도’를 쓸 무렵 한반도에는 청포도 품종이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강희자전>에서 푸를 청(靑) 자를 “생물이 태어날 때의 색상”이라 한 데 착안해 그것이 우리말 ‘풋’에 해당한다고 보고 ‘청포도’는 독립과 혁명의 미래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조국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청포’의 해석을 위해 도 교수는 두보의 한시에 의지한다. 그러나 조선의 두보 시 해설서 <두시언해>는 두보의 시 ‘지후’(至後)에 나오는 “청포백마가 달리 무슨 뜻 있으리오./ 금곡과 동타가 있던 낙양은 옛 모습 아니로다” 중 ‘청포백마’를 안록산과 사사명 같은 반란군으로 해석했다. “안록산과 사사명은 대체 무슨 뜻으로 난을 일으켰는가. 왜 그들은 내 고향인 낙양의 금곡과 동타마저 파괴하였는가”라고 해석한 것이다. 도 교수는 한학에 밝았던 육사가 <두시언해>의 ‘지후’를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두보의 또다른 시 ‘세병마’(洗兵馬)에도 “푸른 도포에 백마 탄 반란자들이 다시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여 ‘청포백마’가 반란자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한다. 도 교수는 “육사는 두보가 부정적인 반란자로 표현한 이 청포백마를 긍정적인 혁명가의 이미지로 전환했다”며 “‘청포도’는 지치고 쫓기는 혁명가들을 맞이하는 향연을 노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육사
이육사
도진순 교수의 이육사 시 재해석은 ‘청포도’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달 발간 예정인 <민족문학사연구> 60호에 실리는 ‘육사의 ‘절정’: ‘강철로 된 무지개’와 ‘Terrible Beauty’’라는 논문에서 그는 육사의 또다른 절창 ‘절정’ 역시 새롭게 해석하는데, 특히 마지막 행에 나오는 ‘강철 무지개’에 대한 해석이 독창적이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절정’ 전문)

 

정한모와 김종길 같은 선행 연구자들은 강철 무지개가 ‘비극적 황홀’ 식의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도 교수는 기존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는데, 이번에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 이야기에서 근거를 가져온다. <사기> ‘추양열전’에는 형가의 암살 기도 사건 당시 하늘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白虹貫日)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로부터 ‘백홍관일’은 군주 암살 또는 국가 변란의 상징으로 문학작품 및 천문현상 기록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검의 기세로 해를 찌르는 ‘흰 무지개’”를 상징하며 “물론 해(日)는 일제(日帝)”를 가리킨다는 것이 도 교수의 해석이다.

 

도진순 교수는 이달 말 발행되는 <한국근현대사연구> 제76집에도 ‘육사의 한시 ‘만등동산’과 ‘주난흥여’: 그의 두 돌기둥, 석정 윤세주와 석초 신응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육사의 두 한시를 분석한 이 글에서도 그는 ‘만등동산’ 중 “높은 데 올라 해가 긴 것을 한탄한다”에서 ‘恨日長’을 일제 지배의 지속에 대한 한탄으로 해석하며, ‘주난흥여’에 나오는 ‘지음’(知音)과 ‘노석’(老石)을 ‘청포도’ 해석에도 등장했던 혁명동지 윤세주로 보는 등 기존 해석들과 다른 참신한 해석을 선보인다.

도진순 교수는 이 논문들과 함께 자신이 육사의 ‘절명시 삼부작’이라 이름한 ‘나의 뮤-즈’ ‘광야’ ‘꽃’에 대한 논문들의 초고 역시 완성한 상태이며, “육사의 심상 공간과 여성관계 등을 다룬 기행문 및 논문을 추가해 단행본으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마지막 시 세 편은 불교와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며 “황현산 선생이 최근 저서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서 육사의 시 ‘광야’를 인간의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했지만, 육사는 오히려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쪽이었으며 불교나 니체 같은 카이로스의 수직적 시간관을 ‘광야’에서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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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은 어떠한가... 2016-11-06 0 3530
1755 [자료] -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다... 2016-11-06 0 3471
1754 [자료]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다... 2016-11-06 0 4299
1753 詩人 되기 먼저 자기자신을 완전히 깨닫는것, 곧 구리쇠 잠깨어 나팔 되기 2016-11-06 0 3636
1752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감상하기 2016-11-05 0 4350
1751 詩란 자연과 함께 인간의 덕성을 말하는것이다... 2016-11-05 0 4320
1750 너무나 많은 라침판이여,-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라... 2016-11-03 0 3734
1749 詩는 "만드는것"이 아니라 생체를 통한 "발견"이다...... 2016-11-02 0 4167
1748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와 시인들 2016-11-01 0 4284
1747 죽은지 10여년 지나서야 시적 가치를 찾은 "악의 꽃" 2016-11-01 0 4216
1746 프랑스 상징파 시인, 모험가 - 랭보 2016-11-01 0 4237
1745 프랑스 상징파 시인 - 베를렌느 2016-11-01 0 4825
1744 詩란 우연스러운 "령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언어행위이다... 2016-11-01 0 4359
1743 파블로 네루다 시모음 2016-11-01 0 6304
1742 칠레 민중시인 - 파블로 네루다 2016-11-01 0 4980
1741 詩쓰는것이 돈벌이 된다면 어렵다는 말은 사라질것이다... 2016-11-01 0 3636
1740 조기천시인과 김철시인 2016-11-01 0 4331
1739 백두산은 말한다... 2016-11-01 0 4063
1738 "백두산"과 조기천 2016-11-01 0 4227
1737 "백두산", 완결물이 아니라 미완물이다... 2016-11-01 0 5056
1736 체코 문학을 알아보다... 2016-10-31 1 5975
1735 시인이 된다는것은... 2016-10-31 0 3867
1734 "풀"의 시인 김수영을 다시 떠올리다... 2016-10-31 0 5232
1733 "곰팡이는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것처럼..." 2016-10-31 0 4178
1732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것을 아는 모양이다"... 2016-10-31 1 3862
1731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2016-10-31 0 4361
1730 한국적 모더니즘 대변자 김수영 작품 공자에 젖줄 대다... 2016-10-31 0 3964
1729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어도 문학이란 친구는 있다... 2016-10-31 0 3954
1728 니체은 니체로 끝나지만 공자는 공자로 지속되다... 2016-10-31 0 3665
1727 詩란 사자의 울부짖음이다... 2016-10-31 0 3880
1726 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 2016-10-30 0 3771
1725 정지용, 김기림과 "조선적 이미지즘" 2016-10-30 0 4161
1724 김기림, 그는 누구인가... 2016-10-30 0 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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