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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팰 때쯤
변희수
내가 태어난 날을 물어보면
인디언족처럼 엄마는 보리가 팰 때쯤이라고 한다
보리가 팰 때쯤이란 말은 참 애매하다
보리의 배가 점점 불러올 때나
보리의 수염이 까끌하게 자랄 때로 들린다
그때 그 보리밭에서 …….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다보면
보리가 떨군 씨앗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없이 들뜰까봐
언 땅에 떨어진 보리를
자근자근 밟아주던 소리
엄동에 어린뿌리 자장자장 재우던 소리
내 유년에 푸른 젖을 물리던
먼먼 전설 같은 춘궁의 족보
젖니처럼 간질거리는 봄날
스르르 눈꺼풀이 풀린다
시인소개
변희수는 1963년 경남밀양에서 태어나 영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11년 시 ‘아주 흔한 꽃’으로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다.
///해설
제왕국 시인.
수십 년 전만 해도 시골은 저랬다. 저 전설 같은 춘궁의 족보를 기억의 허니문처럼 가지고 산다.
보리가 필동 말동 무렵, 달빛 보늬처럼 아슴푸레 떨어지는 늦은 밤에 푸르른 청춘들이 다녀갔다. 보리밭에 독 오른 푸른 청춘들이 다녀가면 거짓말처럼 보리침대 하나 생긴다. 보리밭 주인 싱긋 웃으며 눈감아 주던 그 봄날의 까시랭이 같았던 우리들의 이야기 한 소절로 가가대소했던 시골전경 눈에 밟힌다.
입안에서 까끌까끌 맴돌기만 했던 꽁보리밥, 입맛이 아니라 배고픔에 먹어야 했던 아찔한 춘궁의 봄.
하필 보리였을까? 달착지근한 나락 같은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그 보리가 있었기에 우리의 봄은 아프지만은 않았다.
한데 지금은 그 보리가 시골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호사가들에게 무척 귀여움 받는 귀하신 몸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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