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곽재구 - 사평역에서
2016년 05월 01일 18시 48분  조회:4761  추천:0  작성자: 죽림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 일러스트=권신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정끝별 시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723 김립 시모음 2016-10-30 0 5660
1722 대만 현대시 흐름 알아보기 2016-10-30 0 4168
1721 구름도 가고 순경도 가고 남은건 나와 나의 그림자와... 2016-10-30 0 3311
1720 대만 모더니즘 선도자 - 예웨이롄 2016-10-30 0 3518
1719 대만 녀성시인 - 옌아이린(옌艾琳) 2016-10-30 0 3616
1718 대만 시인 - 余光中 2016-10-30 0 3833
1717 나를 오리신고는 침선으로 나를 꿰매셨다... 2016-10-30 0 3357
1716 "동주" - 그는 가깝고 그리운 한 사람이다... 2016-10-29 0 4071
1715 5 + 7 + 5 = 17 2016-10-28 0 4209
1714 깨여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2016-10-28 0 4069
1713 ...바로 탐욕이다... 2016-10-28 0 3777
1712 새들은 왜 록색별을 떠나야만 하는가... 2016-10-28 0 3712
1711 우리가 언젠가는 "사막의 꽃뱀"이 될지도 모른다... 2016-10-28 0 3857
1710 어느 날 페허 잔해속에서 원자로 화석을 발굴하라... 2016-10-28 0 4296
1709 詩人은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저항하라... 2016-10-28 0 3986
1708 詩는 희곡을 "언어예술의 집"으로 건축하는 벽돌이다... 2016-10-28 0 3401
1707 詩와 비평은 쌍두마차이다... 2016-10-28 0 3709
1706 비평가의 詩, 詩人의 비평,- 립장을 바꿔보다... 2016-10-28 0 3373
1705 詩란 "내가 나의 감옥"에서 뛰쳐나가기이다... 2016-10-28 0 4408
1704 詩란 유일무이한 그릇에 유일무이하게 헌것을 새롭게 담는것... 2016-10-28 0 3543
1703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시인 -니자르 카바니 2016-10-28 0 3920
1702 아랍의 詩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2016-10-28 0 4627
1701 詩적 상상력을 중첩, 확대하는것은 실체(체험)를 바탕하기... 2016-10-27 0 3876
1700 현대시의 난해한 벽을 허물어보기 2016-10-26 0 4113
1699 불온한 상상력들이 광란의 춤사위에 나으다 2016-10-26 0 3974
1698 눈뿌리가 아플 정도의 포스터모더니즘의 한계 2016-10-26 0 3866
1697 무엇인지를 리해하는 문제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리해하는 문제와 련관된다... 2016-10-26 0 4731
1696 즐거움의 순간과 죽음의 망령은 삶의 련속이다... 2016-10-25 0 4206
1695 詩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방법 2016-10-25 0 3982
1694 詩 같은 수필, 수필 같은 시를 쓰라... 2016-10-25 1 3843
1693 詩란 태음신과 같은 현무(玄武)로서 시첩(詩帖)속에 잘 가두기를... 2016-10-23 0 3992
1692 詩어는 꽃잎에 닿자 나비, 꿀벌이 되다... 2016-10-21 0 3812
1691 詩리론은 하나의 울타리로서 늘 시인을 괴곱게 한다... 2016-10-21 0 4789
1690 詩여, 독침이 되라... 2016-10-21 0 3775
1689 詩의 첫행은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최초의 순간이다... 2016-10-21 0 4061
1688 한국 현대시사 최초의 선시리론자 - 김종한 2016-10-21 0 4106
1687 냄새가 나는 "조감도"(鳥瞰圖)냐, "오감도(烏瞰圖)냐... 2016-10-21 0 4268
1686 다시 떠올리는 정지용 시모음 2016-10-21 0 3651
1685 훌륭한 詩란 뼈를 저미는 고통의 작업에서 빚어진다... 2016-10-21 0 3994
1684 詩作에서 "창조적 변용"아냐, "몰상식적 표절"이냐가 문제면 문제 2016-10-20 0 4932
‹처음  이전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