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엽서
- 조병화(1921~2003)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연락선이 왔다 간다는 항구로
남행열차는 쉴 새 없이 달렸습니다
삼등실 좁은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흐르고
수족관에 뜬 어린 시(詩)같이
싹 튼 보리밭이 보이고
포플라가 보이고 늙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말소리도 잠들어 버린 차간에
나는
중앙아세아 어느 바다로 가는 것일께니 하고
졸음 없는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기억은 생을 풍경의 액자로 보여준다. 빗물 흐르는 삼등열차를 타고 “수족관에 뜬 어린 시”와 “늙은 산맥”을 스치다가, “중앙아세아 어느 바다”로 향해 가는 옛 엽서의 풍경은 얼마나 고즈넉한가. 엽서가 사라진 세상은 폭이 없는 순간의 이미지들로 가득해서 기억이 발효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 시는 무려 41년 전(1975년)에 구입했던 옛 시집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화면 위에, 당시 까까머리 “고딩”이었던 한 문청(文靑)의 풍경이 겹친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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