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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다...
2016년 07월 29일 21시 14분  조회:6039  추천:0  작성자: 죽림

 

특강 : 상처입은 용들의 노래

― 현대 한국시 100년을 기념하며

 

 

 

한국 현대시 100년이라고 한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가 『소년』에 발표된 1908년을 그 기점으로 한 것이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라는 의성어를 내세워 육지의 단단함에 부딪치며 깨어지는 파도의 역동성으로 구시대의 질서와 유습을 깨고 나가려는 새 시대의 기운을 드러낸 시다. 새 시대의 기운은 안에서 밖으로 일고 나가야 하는데, 이 시는 거꾸로 새 기운이 밖에서 안으로 밀려드는 것으로 묘사한다. 생동하는 기운을 만들어내야 할 나라의 내부적 역량이 쇠진하여 안이 텅 비어 있는 까닭이다. 시인은 예지력으로 구한말 우리 민족이 당면한 총체적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현실 앞에서 헐벗은 ‘소년’을 불러내 그의 어깨에 희망을 의탁한다. 소년이 감당해야 할 민족의 운명은 “끝없는 장애와 의구심을 앞에 한 깜깜한 어둠 속의 외로운 행로”(이청준)였다. 최남선은 개항 이후 열강들의 외세에 앙바틈한 동아시아의 한 소국에서 바로 어른들 틈바귀에 낀 ‘소년’의 운명을 설핏 보았다. ‘소년’의 운명은 양자역학의 진공 상태 속에 놓인, 빅뱅을 눈앞에 둔 검은 물질 바로 그것이다. ‘소년’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 서 있다. 그 ‘소년’에게 장벽을 향해 온몸을 부딪쳐 나가는 바다의 기세를 실었던 것이다. ‘소년’은 꺼져가는 숨결이요, 어둠을 뚫고 동터오는 새벽이요, 높고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할 어린 나귀요, 상처받고 신음하는 물속에 엎드린 용龍이다.

 

2008년은 한국 현대시 100년에 대한 기념으로 넘치는 해였다. 한 신문에 ‘한국인의 애송시’라는 이름으로 주요 명시들이 소개되고, 나중에 책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전2권, 김소월 등 지음, 정끝별·문태준 엮음, 민음사)가 바로 그 책이다. 여기 현대 한국시 100년에 대한 감회와 더불어 그 책에 대해 읽고 느낀 것에 대해 한 잡지에 내가 쓴 글을 옮겨 놓는다.

 

백년의 압축이다. 그 백년 장엄하다. 청맹과니로 살아온 장삼이사의 눈을 밝히고 귀를 열어주는 100년 동안의 시심詩心이 하나의 압축파일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발원한 현대시 100년의 역사가 굽이굽이 돌아온 흔적들, 그 안에서 명멸했던 시인들의 삶과 상상세계, 그이들이 모국어로 가 닿고자 했던 생명-우주의 비밀들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무진장無盡藏한 콘텐츠가 뿜어내는 섬광들이 번쩍인다.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박두진, 「해」)라고 속에서 치미는 그 뜨거움과 벅참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밀어내며 노래할 때 화자話者의 리듬은 청자聽者인 우리 내면으로 직격하며 들어온다. 슬픔과 어둠과 절망에서 솟구친 이 리듬은 우리 안에 들어오며 기쁨과 빛과 희망으로 전환한다. “앳되고 고운 날”의 누림이 필경 불러올 “생생지락生生之樂”과 “시시지락詩詩之樂”을 꿈꾸는 일은 욕심이 아니다. 욕심이 아니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 

 

시가 무엇이냐? 시는 삶의 볼품없음과 꾀죄죄함에서 벗어나보려는 우아한 문화적 몸짓일까그 언어적 스침과 고임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보상 행위의 산물일까? 시가 먹고 사는 일에서 화급을 다투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굶주린 자가 한 끼의 끼니를 구하기 위해 육즙을 짜내고 뼈가 휘는 노동에 견준다면 시쓰기는 한가로운 생산에 지나지 않으며,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의 아픔에 견준다면 시를 토해내는 고통은 저 혼자 뀌는 물방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터다. 어쨌든 “삶 자체에 견주면, 시라는 것은 하찮은 물건”(고종석)이다. 이 하찮은 물건이, 그토록 시름과 주림에 겨워 헐떡이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구원의 손길을 내밀리라고는 기대를 갖지 않은 이것이 기어코 시름을 덜고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 지천으로 널린 풀에게서 생명의 역동성을 끌어낼 줄 아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공익을 더하고 세우는 일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수로 여겼던 자들이 저 흔하디흔한 풀에서 바람과 희롱하며 울고 웃는 감정의 연금술을 찾아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문태준)

 

시인은 익숙한 것들의 기억과 인상을 새롭게 만든다. 같은 체험을 하고도 다른 체험으로 드러내는 게 시인이다. 그리하여 “이 다른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 그 숨겨진 진실”(문광훈)을 보는 것이다. 이성부가 봄을 두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라고 쓸 때, 혹은 김광규가 이젠 늙어갈 일만 남은 중년의 사내들의 허전한 심중을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노래할 때, 이 익숙한 것들은 돌연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의 낯섦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그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것임을 깨닫고 안심한다. 시인들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서 놓쳐버린 것, 흘려버린 것들을 끌어다가 새롭게 갱신해서 다시 보여준다. 다시 보여줄 때 그 익숙한 것들은 숨은 진실을 드러내고 그 진실은 우리 안에서 삶을 갱신하고 조형하는 동력이 된다.

 

정지용 「향수」에서 매 연마다 후렴구로 되풀이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구절은 송곳이 되어 여린 마음의 한쪽을 후빈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인들이 고향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저간의 곡절들을 환기시키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빼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게 만든다. 우리는 함부로 쏘아올린 화살이었다. 만주의 너른 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토로, 중앙아시아의 무연고 허허벌판으로, 일본의 탄광촌으로, 저 멀리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그건 내 탓도 네 탓도 아니었다. 우리 의지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우리를 저 바깥으로 떠밀었던 것이다. 너무 멀리 갔기에 원심력에 붙들려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향수’는 고향을 잃은 자가 앓는 마음의 질병이다. 그것은 치유할 길이 없는 불치의 병이다. 20세기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앓은 전염병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귀환하는 기획에 성공했다. 그런 비극의 보편화가 있었기에 「향수」가 일러바치는 내가 없는 고향의 풍물들은 더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100명의 시인들이 지난 100년간의 시에서 100편을 골라내고, 정끝별과 문태준 두 시인이 그 시들에 일일이 해설을 붙였다. 이 시들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누린 지복至福이다. 이 시들을 읽으며 마음의 눌리고 맺힌 데를 펴고 풀 수 있었고, 주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시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 두 번 세 번 거푸 발을 담글 수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 시편을 읽으며 세월의 더께에 눌려 희미해진 첫사랑의 설렘과 기쁨이 늦가을 해질 녘 붉은 햇빛을 뒤채며 흐르는 강물에 고양되어 다시 타오르는 경험은 나만 했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 시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통과해온 그 비바람치는 나날의 고된 삶의 누적이 아무 뜻이 없는 게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장욱이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라고 쓸 때, 어이없는 겨울은 그 어이없음으로 유일무이하게 눈부신 겨울로 바뀌고, 최승자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 /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노래할 때, 농담에 지나지 않을 이 삶을 수식하기 위해 호명된 곰팡이, 오줌 자국, 죽은 시체와 동위同位에 놓일 정도로 뜻없는 그것의 하찮음 때문에 돌연 삶은 의미의 지평으로 솟는다.

 

김소월에서 이장욱까지 100명의 시인을 호명해서 한 자리에 모았다. 이런 선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선집이 기왕의 것들을 제치고 으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정끝별·문태준 두 시인의 신실한 시읽기와 권신아·잠신 두 일러스트레이터의 빼어난 그림이 만나 일으킨 예술 장르 간의 화학작용 때문이다. 시와 그림은 본디 두 개가 한 쌍으로 나왔다고 믿을 만큼 상호연관의 빛을 상대에게 던지며 상호조응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들어갈 시인과 들어가지 말았어야 할 시인들이 서로의 자리를 바꾼 경우가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짜게 걸러내도 오장환, 김구용, 김관식, 구자운, 박정만, 김남주, 이제하, 이승훈, 채호기, 이수명, 유홍준, 권혁웅, 김행숙 들은 마땅히 들어가야 할 시인들이다.1)

 

최남선 이래 20세기 한국시의 하늘에는 별들이 명멸했다. 별들은 저마다 빛의 세기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국어의 하늘에 떠서 빛나는 별들도 저마다 그 광도光度 다르다. 한국 현대시가 펼쳐놓은 상상력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그 스펙트럼 속에서 나-너-한-님-슬픔-어둠-자연-이향-도시-육체-연애-자아-역사-혁명-가족-생활-청춘...... 따위의 주제어들은 두드러진다. 한국 현대시를 투박하게 다섯 개의 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념의 길: 김소월-백석-김영랑-이용악-윤동주-박목월-노천명-조병화-김남조-김현승-박성룡-유안진-신달자-강은교-정호승-곽재구-김사인-허수경-최정례-김용택-안도현-김경미-박형준-나희덕. 둘째, 자유의 길: 이육사-유치환-임화-김광섭-박두진-김수영-박인환-신동엽-고은-신경림-조태일-정희성-이시영-김지하-고정희-김정환-하종오-박노해-백무산. 셋째, 인식의 길: 이상-김춘수-송욱-김종삼-전봉건-허만하-정현종-이승훈-박의상-오규원-노향림-이하석-최승호-이성복-황지우-최승자-김혜순-김정란-송재학-고진하-박찬일-최종천-이수명-김행숙-이장욱-황병승-이근화-김경주. 넷째, 탐미의 길: 서정주-정지용-박재삼-박용래-김관식-천상병-이형기-허영자-김영태-이근배-이수익-서정춘-김형영-박정만-조정권-임영조-나태주-송수권-문인수-장옥관-오태환-전동균-장석남-박형준-문태준. 다섯째, 존재의 길: 한용운-조지훈-김종길-황동규-마종기-이유경-정진규-김종해-최하림-오탁번-천양희-문정희-김광규-김명인-김승희-신현정-고형렬-김영승-김신용-황학주-이문재-황인숙-김중식-송찬호-채호기-고재종-김기택-이승하-기형도-김태형-정끝별-권혁웅-유홍준. 각각의 길들이 언제나 다른 길과 변별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길들은 겹치고, 심지어는 세 개, 혹은 네 개의 길이 하나로 몸을 포갠다. 정념의 길이 탐미의 길과 겹쳐지고, 인식의 길은 존재의 길과 자주 겹쳐진다. 자유의 길과 정념의 길이 겹치고, 존재의 길이 탐미의 길과 겹쳐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자유의 길로 분류된 시인의 상상세계 속에 탐미 본능이 작동한다고 이상할 게 없다. 시인들의 상상력은 늘 불확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에 어느 하나에 편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시인의 시세계를 통시적으로 볼 때 그 피의 기질과 본능으로 인해 어느 길로의 편재성은 불가피하게 드러난다.

 

한국 현대시를 통시적으로 가로지를 때 가장 큰 정서적 자원은 한, 어둠, 슬픔이다. 삶의 보람이자 기쁨인 님들은 항상 ‘나’를 떠나 달아난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김소월, 「진달래꽃」, 1922). ‘나’의 간절한 바람과 의지를 배반하고 떠난 님의 부재는 홀로 남은 ‘나’의 있음을 덧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실존의 요소다. 미처 떠나보낼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항상 님들은 떠난다. ‘나’의 슬픔과 고통 따위는 떠나려는 님의 의지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떠나는 님은 ‘나’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없는 이기적 욕망의 존재다. 님이 떠나면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 혼자 남고, 님 앞에서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김소월 이래로 한국시에는 님의 떠남을 피동적으로 감당하는 서정적 주체들의 눈물로 넘쳐난다. 그 눈물은 이루지 못한 욕망으로 움푹 팬 곳을 굽이굽이 흘러간다. 해질녘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강을 “울음이 타는” 것으로 본 시인의 심미 감각은 수일하다. 그 강은 자아 밖에 있는 것이지만 자아와 교호 작용을 하며 자아와 접속하며 자아화된 외부 풍경이다. 울음이 타는 강은 그걸 바라보는 자의 내면을 되비춘다. 실제로 강은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오래 눌리고 찢겨 설움이 쌓인 우리 마음이다. 울음이 타는 강은 슬픔을 가진 화자의 슬픔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1959)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가을 햇볕, 제삿날 큰집 불빛, 해질녘 타오르는 듯 지는 해의 빛에 드러난 강물....... 이런 것들은 들뜬 마음 안에서 하나로 엉겨 맺히고 쌓인 설움을 자극한다. ‘나’의 설움이 마침내 공연한 울음으로 터져 나올 때 강은 대상화된 ‘나’의 자아다. 아니, 마음 안에서 자아와 햇빛, 강 따위의 자연세계가 하나로 녹아들어 혼융한 가운데 ‘나’는 한껏 고양되는 것이다. 이때 울음은 맺힌 것을 푸는 해원解寃과, 쌓인 찌꺼기들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정화淨化로서의 울음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1925)

 

한용운의 님은 ‘나’를 버리고 냉정하게 떠날 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존재다. 이것은 버림이다. 버림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힘의 균형을 잃은 상태, 한쪽의 힘이 다른 쪽의 힘을 압도적으로 누르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님은 늘 먼저 ‘나’를 버리고 떠난다. ‘나’는 그 떠남을 피동적으로 받는다. 떠난 뒤의 상황을 감당하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상호 인식이 배제된 이 뒤틀린 관계 속에서 폭력과 희생의 윤리학이 만들어진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최만치도 없읍니다.”(한용운, 「쾌락」) 욕망의 대체물인 님이 떠난 뒤에 무슨 보람과 기쁨이 남겠는가. 슬픔은 외기러기의 발자취만큼도 없다. 님은 ‘나’라는 내부를 감싸는 외부다. 님은 외부이기 때문에 비非자기다. 외부가 있을 때 비로소 내부가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님은 ‘나’라는 주체를 완성시키는 객체, 기초적 환경이다. 님이 없다면 ‘나’는 외부를 갖지 못한 내부에 머문다. 외부가 없다면 내부도 있을 수 없듯, 님[외부]이 없다면 ‘나’[내부]도 없다. 님이 없는 ‘나’는 없음, 공허 그 자체다. 존재성이 발현되지 않는 질료, 무의미로서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김소월과 한용운의, ‘나’를 떠난 님의 뒤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상처받고 신음하는 용들의 노래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1937/ 1935?)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시적 화자는 최남선의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한 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첫 구절에 암시되어 있듯이 원초의 어둠은 아직도 우리의 운명을 두텁게 감싸고 짓누른다. 외할아버지는 먼 바다로 나가 실종되어 부재 상태고, 할머니는 파뿌리처럼 늙었다. 애비는 남의 집에 매인 종이고, 어매는 풋살구 하나가 먹고 싶지만 제 힘으로는 그 작은 소망조차 실현할 수 없는 가난하고 헐벗은 존재다. ‘나’는 가족들의 보살핌이나 돌봄을 받을 형편이 아니다. ‘나’는 함부로 방치되어 제멋대로 자라난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이다. 따뜻한 양육과 인생의 바른 지침들을 받을 수 없는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 계통도 없고 질서도 없는 바람에게서 훈육된 영혼이란 천민의 영혼이다. 바람은 외압과 세속의 전언을 실어 나른다. 바람은 지조도 없고 자존도 없이 물리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 팔 할의 바람으로 예측할 수 없는 저주받은 영혼이 되었다는, 제 신분과 처지에 대한 이런 환멸스런 확인은 필경 자기모멸과 자기 부정을 낳는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시인이 본 우리 안의 그림자, 억압된 자아는 죄인, 천치, 수캐다. 이것들은 자기실현의 존재와는 거리가 먼 일그러진 자아상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1941)

 

투명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형편과 운명을 바로 본다. 윤동주는 드물게 고요하고 깨끗한 청년의 영혼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부끄러움이다. 파란 녹이  구리거울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욕된 얼굴이었다(「참회록」). 그는 제 욕된 얼굴에서 부끄러움을 찾아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서시」) 수난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자에게 내면의 괴로움은 곧 존재의 원형질이다. 서정주와는 달리 윤동주에게 바람은 자기반성의 유력한 근거다. 시인은 살랑이며 불어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에서 윤리적 실재를 투시해낸다. 윤동주에게 괴로움은 깨끗한 양심이 이끄는 삶, 인격의 고결성을 지향하는 모색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윤동주 시의 주조음인 부끄러움은 내면적 인간의 소극적인 자기부정이다. 이 경우 자기부정은 대긍정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필연의 과정이다. 서정주나 윤동주가 시대의 어둠을 인지한 것은 닮았지만, 그 어둠에 반응하는 생의 형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윤동주가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 백골을 들여다보며 /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 백골이 우는 것이냐 /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또 다른 고향」)에서 볼 수 있듯이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 “곱게 풍화하는 백골”을 바라봤다면, 서정주는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중략) / 알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바다」)고 극렬하게 외부를 지향하고, 외부를 향해 뻗치는 힘이 장애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자멸의 길을 선택한다. 현저한 자기성찰적 내면지향을 하는 윤동주와 내부 모순을 외부에서 해결하려는 외부 지향을 하는 서정주는 상상력의 원소는 같되 기질과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저마다 한국 현대시의 별자리에서 광도가 다른 별들로 반짝인다.

 

최남선에게 나타났던 그 계통발생의 기억이 박두진의 「해」(1946)에서 다시 나타난다. 박두진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라고 노래한다. 최남선의 시대에서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현실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은 어둠의 수형자受刑者 처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어둠의 항로는 그렇게도 길고 지루했다. 어둠의 비극적 운명에 처한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밝은 세상에 대한 열망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라고 거듭되는 외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해를 부르는 시인의 외침은 빼앗기고 짓눌린 자의 절망과 고통에서 솟아나는 목소리다. 박두진의 거칠 것 없이 뻗어 나오는 남성적 율격의 소리는 이육사의 「광야」(1937)의 소리와 겹쳐진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 이육사는 천고의 뒤에 올 초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초인은 저 먼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길러지는 존재다. 초인은 ‘나’를 뿌리치고 떠났던 그 님일까. 초인은 천고의 뒤에나 당도할, 아주 늦게 오는 손님이다. 광야에서 기다리지 않는다면 초인은 오지 않는다. 소월과 만해의 님이 오래된 미래라면, 이육사의 초인은 먼 미래의 님이다. 님이 떠나간 길과 님이 돌아오는 길은 한길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1968)

 

김수영의 「풀」에 와서 주체의 내면에 짓누르는 한을 극복하고 타자성을 동렬에 놓고 생성하며 사유하는 주체를 발견한다. 풀은 여전히 작은 주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구에서 모래·바람·먼지·풀은 쩨쩨하고 소소한 자아의 표상물로 호명된다. 그러나 풀은 큰 것의 위세에 눌려 제 주체를 잊고 부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풀은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영향을 받지만, 그것에 눌리지 않는다. 오히려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은 바람에 피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도 더 빨리” 주체적으로 눕고, 울고, 일어난다. 풀이 획득한 능동성은 자신감의 산물이다. 셋째 연을 보라. 풀은 “늦게 누워도 / (중략) 먼저 일어나고 / (중략) 늦게 울어도 / (중략) 먼저 웃는다”. 바람과 풀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약동을 확인하고 유희하는 상대적 관계다. 풀은 바람이 오기 전에 먼저 눕고, 바람이 지나가기 전에 먼저 일어선다. 바람이 왔다가 돌아가진 전에 울음을 웃음으로 바꾼다. 김수영에게 와서 한과 슬픔은 더 이상 소모적 감정이 아니다. 시인은 슬픔도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맥락에서 “결의하는 비애 / 변혁하는 비애”(김수영, 「비」)를 읽어야 한다. 한국 현대시를 추동하는 DNA는 김수영에게 와서 한과 슬픔에서 힘과 생성에의 의지로 바뀐다. 김수영의 시가 보여주는 모더니티는 외래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자생한 모더니티다. 한국 현대시의 큰 흐름을 바꾼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중요한 시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1952) 

 

산다는 것은 타자와 연루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타자화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타자와 연루되지 않은 하나의 인간, 타자의 시선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인간이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란 신체가 없는, 혹은 아직 인격적 개별성이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실존이다. 타자는 ‘있음’이라는 익명의 비인격적 개별성에 머물고 있는 ‘나’를 주체의 표상활동을 하는 ‘나’로 거듭 태어나게 한다. 김춘수는 이런 철학적 깨달음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수, 「꽃」)라고 썼다. 이렇듯 타자는 ‘나’의 ‘나-됨’을 보증하는 존재다. ‘나’의 ‘나-됨’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존재함을 위협하는 외부[타자]와의 투쟁이라는 역사 속에서 ‘나’의 개별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살아가려는 의지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욕구를 통해 타자가 곧 ‘내’ 존재 실현의 물적 기반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타자는 언제나 우연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타자의 출현은 ‘나’를 감싸고 있는 실존의 베일을 걷고, ‘나’의 현존을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되게 한다. 타자는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객체화하고 ‘나’를 향유한다. 모든 삶은 세계를 채운 것들에 대한 ‘나’의 향유이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 「농무」(1971)

 

해방을 맞고 빼앗긴 주권을 찾아왔지만 눌리고 빼앗기는 삶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은 더욱 살림을 옥죄고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지체가 높고 쌓은 재물이 많은 소수의 사람이야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배운 것 많지 않고 가진 것이 없는 민중들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했고, 그 맺힌 걸 풀 길이 없었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를 돌고날라리를 불며 신명 돋궈보지만 뻥 뚫린 가슴 한켠의 허전함을 채울 도리는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못난 얼굴끼리 모여 술추렴을 하거나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두고 푸념이나 할 따름이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신경림, 「목계장터」). 산서리가 맵찰 땐 얼굴 묻을 풀이 있고, 물여울 모질 땐 그 뒤에 몸을 피할 바위가 있다. 하지만 맵고 모진 삶은 피해 숨을 곳이 없다. 「농무」(1974)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가는 시대에 희생자로 남아버린 소규모 자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상실감과 울분을 담은 시다. 시인은 농사가 더는 아무 희망이나 보람이 없는 시대의 답답함과 울분들을 사실적 언어로 토로한다. 이 시는 아무리 악을 쓰고 농사일에 달라붙어도 나날의 살림이 줄고 사는 게 팍팍해지는 사정에서 비롯된 억울함과 답답함을 세상에 일러바친다. 이 일러바침의 사연 안쪽에는 적게 일하는 자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뼈가 휘도록 일하는 사람이 고달프게 사는 세상은 잘못되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바로 고쳐져야 한다는 옹골진 속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1975)

 

전근대에서 근대에로, 농촌에서 도시에로, 독재에서 민주에로, 성장에서 분배로, 억압에서 자유에로 달려온 100년이다. 애비는 종이었고(서정주), 님은 막무가내로 떠나갔다(김소월, 한용운). 모란이 뚝뚝 진 뒤 봄을 여읜 설움에 잠겨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며 새 봄을 기다렸다(김영랑). 아내도 떠나보내고, 아내와 살던 집도 잃고, 부모와 동생들과도 떨어져서 낯선 거리를 헤맸다. 그러다가 어느 집 헛간을 얻어들어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면서도,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혼자 그려보는 것이다(백석). 그 드문 갈매나무를 바라고 그려보는 마음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윤동주)은 한마음이다. 가진 걸 빼앗기고, 살던 곳에서 내쫓기고, 눌리고 찢긴 마음엔 맺힌 한과 쌓인 설움이 그득했지만, 우리는 초식동물같이 견디고 참을 줄만 아는 족속이었다. 우리가 한 건 겨우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중략)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보았을 뿐이다(노천명, 「사슴」, 1938). 우리가 걸어온 100년의 길은 어두운 길이었고, 비바람 몰아치는 불순하고 날씨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상실의 세월, 헤맴의 세월, 유형의 세월이었다. 상실과 가난과 근심들을 고요히 참고 견디며 깊은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떼며 앞으로 걸어온 세월이었다. 우리 시는 전환과 격동의 시대를 건너오며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부른 노래다. 한국 현대시는 100년을 맞고 새로운 100년의 들머리에 서 있다. 달려온 시간이 100년이었다면 앞으로 나아갈 시간도 100년이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고향을 잊은 세월이 100년이다. 버린 헌신짝처럼 떠난 뒤 까마득히 잊은 고향으로 온전히 돌아가는 걸릴 세월도 100년일 터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한다.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 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죽편 1」)라고. 우리 앞의 100년이 백화제방의 시절이었다면 미래의 100년도 백화제방의 시절일 터다. 꽃은 한 가지에서 피어나도 제각각이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들은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김수영, 「꽃 2」). 시는 혀끝에서 맴도는 언어들 속에 있다. 개화되지 않은 꽃봉오리들! 그것들은 이미 있는 시와 앞으로 와야 할 시들 사이에서 개화를 기다린다. 무수한 시들이 언어와 사유 사이에서, 자연과 존재 사이에서, 죽은 시인과 태어나는 시인 사이에서 떠돈다.

 

 


1) 장석주, 『뉴스메이커』 2008년 7월 1일자, 7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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