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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에서 작은 이미지 하나로 시전체분위기를 만들라...
2016년 08월 04일 00시 13분  조회:4232  추천:0  작성자: 죽림
[25강] 이미지가 시 속에서 하는 일,2 

강사/김영천 


셋째) 이미지는 시의 주제와 시적 의미들을 제시합니다. 
물론 시적 주제가 선명히 들어나 있는 것도 있지만, 좋은 
시들은 주제나 의미를 노출시키지 않고 이미지에 의하여 
독자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미지에 
의하여 자신의 시에 들어 있는 시적 의미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입니다. 

김남조님의 <정념의 旗> 

내 마음은 한 폭의 旗(기) 
보는 이 없는 時空(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 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旗는 
눈의 음악이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이 없는 日沒(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降書(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悲哀(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旗 

보는 이 없는 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원문에는 한자로만 되어 있으나 한글 세대를 위해 제가 
괄호 안에 한글로 달아놓았습니다. 

이 시에서 나타난 '깃발'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앞으로 상징에 대해서도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여기서 깃발은 주제를 형상화한 주요 이미지입니다. 
갈등을 표상하면서도 오히려 그 것을 뛰어 넘어 지극한 
평화와 순수함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내면의 세계를 나타 
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관념과 테마를 육화 
시키는 것입니다. 

넷째) 이미지는 시적 분위기나 배경, 상황을 제시합니다. 
뭐,이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분위기나 배경, 상황은 
시 세계의 사실감을 자아내고, 시적 공간과 정서를 특정한 
색체로 물들게 하면서 그 시적 의미를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입니다. 

임화의 <야행차 속> 중에서 

(여기서 -중에서란 말은 그 시의 일부라는 이야기입니다. 
전문을 실을 땐 그 옆에 전문이라고 쓰는데 저는 지금 
편의상 거의 전부를 전문을 싣기 때문에 전문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허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러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골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젓갈이나 걷어 가주올 게지......" 
혀를 차는 제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잔은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은......... 
그믐밤이라 정거장 푯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내는지? 

나으리들뿐이랴. 누구한테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쟁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面所(면소)에서 준 표紙(지)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뵈니까 
그렇지! 

우선 임화란 시인을 아셔야 겠지요. 해방후 우리나라 
문단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었어요. 
이 때 사회주의 세상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해 문학을 
해야한다는 파들이 소위 카프 계열이였고 최근까지 
금서로 그들의 작품을 우리가 접할 수 없었습니다. 

임화는 그 카프계열의 시인이어서 아마 처음 듣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요즘 임화 등 그 동안 취급할 수 없었던 
카프계 문인들의 연구가 학계에서 아주 활발한 실정입니다. 
여기 그의 간단한 프로필을 실으니 그냥 한번 가볍게 
읽어만 보시기 바랍니다. 

임 화(林和/1908.10.13~1953.8.6) 

시인·문학평론가. 본명 인식(仁植). 필명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성아(星兒)· 
임화(林華) 등. 서울 출생. 

보성중학(普成中學) 중퇴, 잡지 《학예사(學藝社)》 
주간을 거쳐 1926년 카프에 가입한 이래 조직활동에서 
줄곧 중추적 역할을 했다. 32년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한 후 서기장이 
되었으며, 35년에는 카프 해소파의 주류를 형성, 카프 
해산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9년 
무렵부터로, 이때 그는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橫濱]의 부두》 《네거리의 순이》와 
같은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카프를 중심 
으로 하는 그의 비평은, 조직론에서부터 창작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강력한 지도성을 
발휘하였다. 

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세악화로 카프가 해산 
되고 정치투쟁에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활동은 좀더 
문학내적 방향으로 회귀하게 되고, 여기서 세태소설론· 
내성소설론·통속소설론·본격소설론 등 일련의 ‘소설론’ 
이 제기된다. 

이 가운데, 그는 성격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본격소설을 문학의 정도(正道)로 파악하고, 이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론을 전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문학사의 서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그의 《개설 신문학사》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최초의 근대문학사가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8·15광복 이후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그 
후신인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월북하였고, 53년 남로당 숙청 때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으로는 시집에 《현해탄(玄海灘)》《찬가(讚歌)》 
《회상시집(回想詩集)》 등이 있으며, 평론집에 《문학의 
논리》가 있다. 


위의 시는 일제 식민지 아래서 고향을 등지고 '되놈'의 
땅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우리 민족의 한 단면이 밤 
열차 속의 구체적인 상황들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 
니다. 조태일님의 해설을 그대로 옮깁니다. 
"타지방의 사투리라서 시적 화자인 나에게 그 것이 
낯설게 들리지만, 밤 열차 안에서 냄새 나는 도시락을 
먹는 모습과 검게 그을린 낯빛들은 너무나 눈에 익은 
모습이다. 

그 까닭은 그 당시 살기 위해서 고향을 버리고 
만주나 북간도로 떠나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흔하고 많았 
기 때문이다. 왁자지껄한 사투리와 냄새를 피우며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검게 탄 얼굴로 밥을 먹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코를 막는 점잖은 신사 숙녀들, 시적 화자의 
답답한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모든 상황들을 그 당시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고단한 삶을 시적 공간에서 
실감나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인 것이다." 

다시 김영무님의 <어머니>를 읽겠습니다. 

춘분 가까운 아침인데 
무덤 앞 상석 위에 눈이 하얗다 

어머님, 손수 상보를 깔아놓으셨군요 
생전에도 늘 그러시더니 
이젠 좀 늦잠도 주무시고 그러세요 
상보야 제가 와서 깔아도 되잖아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오가는 
이심전심의 애정을 느낄 수가 있지요? 
그러면서도 모자간의 따뜻함과 애틋함이 배어나오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이미지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시를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것입니다. 
모두 아마 똑 같은 그림일 것입니다. 
무덤 앞 상석을 소복이 덮고 잇는 흰 눈에서 발견한 상보의 
이미지, 이 상보의 이미지는 아들을 기다리며 밥상을 차리던 
, 또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을 위해 꼭두새벽 일어나서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의 사랑을 가시화한 것입니다. 

작은 이미지 하나로 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시적 
정서나 의미들을 온전히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위의 시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제와는 상관 없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 
은 여기서 한 번도 어머니를 향해, 그리운 어머니,보고싶은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이미지를 통해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를 쓰면서 감정의 직접적 표현이나 설명적 표현 
이 아니라 이런 이미지를 통해서 주제나 의미를 전달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주 좋은 시입니다. 


잠시 쉬며 좋은글 보세요 


하나.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다.. 

둘. 
사랑 때문에 고뇌해 본 사람은 잘못된 사랑에도 
비웃음을 보내지 않는다.. 

셋. 
불순물이 여과기를 통해 제거되듯. 
세월은 추억을 정화 시킨다.. 

넷. 
사랑의 감정은 그것을 감추려고 할수록 노출된다.. 

다섯.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 밖에서 헤매고. 
사랑은 홀로 안에서 기다리는 그런 이상스런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여섯. 
고뇌의 치유는. 
그것에 대한 긍정에서부터 비롯된다.. 

일곱. 
사랑에 있어 죽음보다 슬픈것은 망각이다.. 

여덟. 
진정한 고뇌는 삶을 이끄는 힘의 원동력이며. 
인생의 지혜의 산실이 된다.. 

아홉. 
누구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 
전과자나 환자가 된 듯 해진다.. 

열. 
기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값져진다.. 

열하나. 
이별후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새로워지는 추억이 되는것은.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증거다.. 

열둘. 
추억이란 영혼의 스크린에 남는 감성의 메아리.. 

열셋.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이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열넷.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다섯.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열여섯.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열일곱. 
사랑은 고뇌의 결과로서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로서의 고뇌의 과정이다.. 

열여덟. 
꿈..정신병..여행..술..사랑....... 
제자리에 돌아오면..모두..아쉬워지는 것들..... 


잘 쉬셨지요. 
무언가 생각하게 하지요 


다시 공부시작 해요 

다섯번째) 이미지는 시 세계의 강렬함을 보여줍니다. 
전봉건님의 <피아노>를 먼저 읽고 살펴보기로 하지요.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러분은 무슨 그림이 떠오릅니까? 
아주 생그러운 피아노 소리와 그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의 두 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시인은 아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하다가 청각적이미지, 시각적이미지라는 말들이 
자꾸 나오는데 이 것은 다음 시간부터 따로 강의 할 
제목들이니 염려치 마시기 바랍니다. 

위의 시에서 특히 1연의 "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라는 이미지는 손가락 끝에서 튀는 건반의 
흰 음계, 검은 음계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으로서 생동 
하는 빛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해 주며, 
제2연에서도 "시퍼런/파도의 칼날 하나"의 이미지는 
정말 섬뜩하리만큼 대담하고 강렬합니다. 

한참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최영미님의 <지하철에서 
.1>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단 두 줄짜리 시입니다. 
이 것이 시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지 저는 의심이 갑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자기들 출신이 아니면 그 외 시인들은 
아주 우숩게 보는 문단의 귀족 출판사에서 발행한 시집에 
버젓이 실려 있으니 시는 시인 모양입니다. 

저로서는 시로 인정하기 싫은데 조태일님의 책에 실려있으니 
조태일님의 해설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 상투성에서 벗어난 시인의 시각이 대상에 대한 특정 인상 
을 개성적으로 표현해 놓았을 때, 우리는 지금껏 갖지 못 
했던 강렬한 느낌을 맛보게 마련이다. 위 시도 지하철의 
전동차를 순대의 이미지로, 거기에 기를 쓰며 탑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밥벌레'의 이미지로 당돌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섯번 째입니다. 

시 속에서 이미지는 신선감을 불러 넣어줍니다. 
혹시 우리에게 낯익은 일상적인 사물일지라도 시인에 의해 
낯설게 보여지도록 하여 설레임과 신선감을 갖게 됩니다. 

김종철님의 <재봉>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가지의 暖冬(난동)의 빨간 열매가 繡(수)실로 뜨이는 
눈내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神(신)의 아내들이 짠 銀(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內部(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假縫(가봉).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天使(천사0에게 주문 받은 아이들의 전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神의 겨울. 
그 길로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懷孕(회잉)의 고요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雨雷(우뢰)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김종철의 <재봉>중에서 

옛날 시이지요. 아마 이 시도 많은 분들이 읽어 본 시일 것 
입니다. 이 시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그림이 떠오르십니까? 
눈 내리는 겨울날이 우선 떠오르시지요? 
그 일상적인 겨울날을 아주 새롭고 신선하게 여기도록 만 
들어주고 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가듯 싶고,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이 신비하게 살고 
있는 원초적인 생명의 세계, 신들이 거주하는 신화의 세계 
가 눈 오는 겨울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필경,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에는 저 
아득한 마음결에서부터 들려오는 베틀 소리와 신의 아내가 
은빛의 털옷을 짜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슴 설 
레는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강의가 길었으므로 
좋은 시 보기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요즘 강의가 조금 어렵지요. 
시간 나시는대로 복습을 하시면 좀 낫겠지요. 

========================================================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빛 어린 수없는 잎새 같은 바위 위를
걸어서 저기 하얀 길을 혼자 갈 수도 없고,
지상의 짐을 벗어나는 부엉이의

꿈꾸는 동작으로 떠다닐 수도 없다.
아, 땅이여, 네가 가두어 둔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이승의 친구보다 많구나.

 

 

절벽 옆 바다 등나무는 푸른빛 은빛으로 번득인다.
이 나무들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천사의 창이었다.
그러나 상실 속에서 더 굳건한 것이 자라나서

그건 돌 같은 냉철한 광채를 띠어,
달빛을 견뎌내고, 절망보다 더 멀리,
바람처럼 굳세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저 등나무
숲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옛 모습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결점이랑 모두 함께, 옛날보다 고상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아무리 사교적인 사람이라도, 친구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라도, 더이상 사람을 사귀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게 되는 시기가 있다. 사람마다 품이 다르니까 무한정 친구를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사십대 중반쯤 되면 이미 친구가 충분히 많다고 포만감을 느낀다. 매사에 그렇거니와 타인에 대한 호기심도 관심도 엷어지기 시작하는, 즉 타인에 대한 의욕이 줄어드는 나이.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건 의욕만이 아니다.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둘 사라진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느덧 이승의 친구보다 죽은 친구가 더 많아지게 된다. 시인은 그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자기의 죽음도 멀리 있지 않은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가 절벽 위 등나무 아래서. 

나무는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 같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측백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벚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한다. 남산 하얏트호텔 건너편에 야외식물원이 있다. 그 맨 꼭대기에 플라타너스 길이 있었다. 한 아름이 넘는 둥치에 아주 높다랗게 키가 커서, 그 아래 있으면 깊은 숲에 숨어든 듯 아늑했고, 우듬지를 따라 하늘을 헤엄치는 듯 머리가 시원했다. 재작년엔가, 그 플라타너스들이 전부 사라졌다. 쉰 살은 족히 넘었을 그 나무들을 누가 왜 베어버렸는지 꼭 밝혀내리라. 그리운 플라타너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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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어도 문학이란 친구는 있다... 2016-10-31 0 3937
1728 니체은 니체로 끝나지만 공자는 공자로 지속되다... 2016-10-31 0 3662
1727 詩란 사자의 울부짖음이다... 2016-10-31 0 3880
1726 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 2016-10-30 0 3771
1725 정지용, 김기림과 "조선적 이미지즘" 2016-10-30 0 4150
1724 김기림, 그는 누구인가... 2016-10-30 0 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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