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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독해(讀解)는 천파장 만파장이다...
2016년 10월 12일 18시 12분  조회:3651  추천:0  작성자: 죽림
나이는 수자에 불과...88세 할머니 사진작가
[ 2016년 10월 11일 03시 24분 ]

 

 

일본 구마모토 현(熊本县) 88세 고령 할머니 니시모토 키미코(西本喜美子) 사진작가


어머니, 밥부처와 희생의 아니마


             육  근  종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며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자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할 때 이기주의가 남게 되고 나보다 너를 사랑할 때 이타주의의 헌신적인 사랑이 태어나는 것이다. 
김영남의 <'아줌마'라는 말은>이 보여주는 극명한 대립과 반전은 어머니의 위상을 돋보이게 만든다.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도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중략)

그런다고 그런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 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으로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그렇게 아버지가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이 세상까지 모두 흡수해버리는
포용력 큰 불발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아줌마'라는 말은> 김영남  <<현대문학>> 2002.3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지만, 그 힘은 날로 증대되어 여성상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화되었다. 억압되어 있던 불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분출되어 언어능력이 상대적으로 발달된 여성들이 남성의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고, 심지어는 이 시에 드러나듯이 가공할 파괴력을 갖고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억압은 댐과 같아서 저장량이 클수록 댐이 무너질 경우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듯이 억압력이 약화될 때에 자신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을 파괴시킨다. 우리의 '아줌마'들이 보여주는 저항력은 남존여비의 풍조가 낳은 부산물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직도 전통적인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순종과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김영남의 어머니가 드러내는 '포용력'일 것이지만, 이 포용력은 비록 김영남의 어머니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아줌마가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하게 될 때에 보여주는 인내력은 가공할 '파괴력'보다 강한 것은 동서 고금을 떠나서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본성일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 속에든 자신의 밖에든 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어머니의 역할이 배제되거나 포기되었을 경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모자 혹은 모녀 사이에는 심신 양면으로 혼연일체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어머니의 위대성이 살아 숨쉬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즉 어머니가 위대하다는 것은 지적이건 경제적이건 어느 한 측면에서의 능력의 비범함이 아니라, 혼신으로 사랑하는 전인격적 정열의 아름다움을 두고 이르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영남이 노래하는 어머니의 포용력은 그만의 어머니의 인내심이나 관대함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너그러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전근대성을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콤플렉스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배용재는 개체성과 특수성이 사라진 어머니의 모습을 노래한다. 


갑자기 엄마가 쓰러지자
지탱하던 풍경들이 무너져 내린다.
정신없이 달려간 응급실에는 착한 고통들만 정직한 목소리로
아우성치고 있을 뿐,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애를 써도 엄마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이 탈지면처럼 하얗게 탈색된다.
수십 년 동안 그냥 엄마였던 엄마,
손발에 못이 박히도록 눌러버렸던 꿈들과
낡은 가죽천막처럼 헐렁한 몸에서
허기진 욕설만 텅텅 울려나올 때까지
숨죽이며 엄마 뒤에 숨어있던 또 다른 이름 하나가
온몸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한겨울 화장품 가방을 메고 수십 리를 돌아와
불쑥 들어오며 야단을 치시던 엄마
(중략)
쓰러지자마자 꿈으로 뒤덮여 버린 엄마
엄마는 까마득한 풍경이 된다
(중략)
두 번 다시 엄마의 이름을 갖지 않으려
자궁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얼음을 채우는지도 몰라
자꾸만 미세해지는 엄마를 가만히 불러본다
고정될수록 경건해지는 꿈의 신전,
낯선 이름의 문패가 선명해진다.
      <엄마, 이름이 엄마인 엄마> 배용재 <<다층>> 2002 봄

병원 응급실로 숨가쁘게 달려가게 될 때가 되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이성은 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위급하게 되어 찾아간 응급실의 명패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 아득한 일이 되는 경우도 그런 사정 때문이다. 시인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묻는다.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이지 고유명사로 불러보는 김간난이나 오춘자 등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름들은 엄마의 개별성을 지칭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엄마들과의 차별성을 위하여 조작적으로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엄마라는 이름의 역할과 본성이지 개별자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조작적인 이름이 중요해지는 응급실에 들어서서 잊어버린 이름을 기억해 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아들의 당황스러움은 다만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름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대 때문에 어머니라는 역할인격 속에 갇혀 지내야 했던 망각 속의 한 개별자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냥 엄마였던 엄마'라는 이름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하여 화장품 가방을 메고 수십 리를 돌아다녀야 하고, 자식들에게 야단을 치기도 해야 하는 희생적인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희생은 잘 감내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자궁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얼음을 채우는지도 몰라'라고 노래한다. 자궁을 도려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어머니가 되기를 포기하는 행위인 것이다. 
어머니이기를 포기하고서야 진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내야 했던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남게 되는 어머니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이 한 개인으로서의 어머니일 뿐임을 배용재가 노해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아성취가 강조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타인과의 관계가 상실된 오롯한 개체만으로서는 의미 있는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아름답게 이루어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역설 속에서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가 아름답고 진정한 어머니일 수 있는 자리가 이처럼 역설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함을 노래하는 배용재와는 달리 고재종은 어머니가 노래될 수 있는 가능성조차도 의문시 한다.


어머니를 노래할 수 있는가
함박만한 대바구니를 넉 죽씩이나 이고
검정고무신에 감발을 한 채
시오리 오일장마다 눈얼음길을 지치던 
그러고도 점심 한 그릇 값이 모자라
탁배기 두어 잔의 요기로 돌아와선
허청허청 마루에 보리쌀 몇 되를 부리던
어머니를 노래할 수 있는가
(중략)
그러나 그 피눈물로도 다 못 씻긴 자식들
남의 집살이로 공돌이로 노가다로 내다 팔곤
뒤란 밤나무에 목을 매다 떨어졌던
어머니의 산발 머리는 여전한데
(중략)
친정아비를 빨갱이로 둔 죄 값으로
땅 한 뙈기 없는 술주정뱅이에게 시집와
머리채 잡히고 등허리 밟혔을 뿐인
어머니의 폭폭한 사랑을
웬수같던 영감은 들어주고 들어주는가
(중략)
시 한 편에 혹은 무고료의 시인이 되어
세상 등쌀에 시달리다가
하루 이틀쯤 곡기를 끊을 뿐인 내가
어머니 이제 절이라도 좀 다니세요, 했다가
밥이 부처여! 빽 고함치는 소리에
그 무정천리 깊어진 죄 많아
팔순 역정의 장편 서사를
도대체 노래하긴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무정천리> 고재종 <<라쁠륨>> 2002 봄

배용재의 어머니나 고재종의 어머니의 역할이 가난으로 인하여 가장의 역할을 함께 떠맡아야 하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고재종이 노래하는 어머니는 보다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배용재가 노래하는 어머니가 인식론적 태도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에 고재종이 노래하는 어머니는 보다 윤리적 태도를 바탕으로 드러난다. 
'밥이 부처여!'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는 어머니의 '깊어진 죄'를 화자는 집어내지만, 그것이 과연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은 죄가 될 것이지만, 어찌 그런 이름으로 어머니의 모든 발언이나 행위가 한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시인은 묻는다. '도대체 노래하긴 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노래는 어쩔 수 없이 의미화를 벗어날 수 없고, 의미화를 벗어날 수 없게 되면 삶은 단지 그 형해만을 남길 뿐 오롯이 노래될 수 없는 것임을 고재종은 곰씹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재종이 '어머니를 노래할 수 있는가'라는 전제를 두고 어머니의 삶의 편린들을 바탕으로 하여 내린 결론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노래와 침묵의 관계를 잘 성찰한 뒤의 것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어머니를 노래하면서 우리는 어느 만큼 객관적일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숙한 인격이 모성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어머니를 노래하는 시인들 중에 과연 그런 성숙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아마도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성숙한 태도로 노래할 수 있는 이는 신을 제외하고는 없으리라고 본다.
옛 선사가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고 하였다지만, 밥이 부처라고 소리칠 수 있는 어머니야말로 대갈일성의 화두를 내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이렇게 고함을 칠 수 있는 밥부처는 아니겠지만 생존의 진리를 체현한 어머니들이야 우리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만큼 희생적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들의 생활철학이 곧 화두이자 진리에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양애경이 노래하는 어머니의 노기는 겉으로는 사회를 향한 어머니의 권리장전처럼 보인다.

아버지사 가진 것 없는 시골 선비였지만
어머니는 경기도 포천 천석꾼의 막내딸
그럼 뭐하나 외할아버지는
딸들에겐 땅 한 뙈기 나눠주지 않은 걸
기름기 흐르는 경기미 쌀밥과
그 지방에서만 나는 커다란 알밤도
어머니 이야기 속에서만 들은 기억

(중략)

칠순을 넘어선 어머니
집안에선 제일 항렬이 높지만
종중의 산이 관광지 개발로 수용되자 
막대한 돈을 남자들끼리 나눠먹으며
시집간 여자는 그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다
아니 시집 안 간 여자까지도 그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다

서얼 자식도 있고
외지에서 들어와 같은 성이라고 하면서 머슴 살던 사람
손주의 손주까지 권리를 찾는데
그 산 사놓으신 내 아버지의 딸인 나는
왜 권리가 없느냐고
어머니 무릎 아파 절뚝거리며 다니시지만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돈 없고 빽 없기는
시 쓰는 나도 마찬가지
가진 것 없이 자존심 강한 것도 대물림일까
노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나는 속으로 샐쭉 웃는다.
      <내 어머니 파평 윤씨> 양애경   <<창작과 비평>> 2002년 봄

이 시가 보여주는 갈등은 성차에서 비롯한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상실된 상속권을 되찾으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법 앞에서 한낱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다 함께 겪어야 하는 남성의 그늘에 가려진 운명을 노래한다. 
출가외인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서서 상속권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대하는 딸의 태도에서 또 하나의 작은 갈등이 빚어진다. 제도라는 거대한 바위에 홀로 달걀을 던지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한편으로는 위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속으로 샐쭉' 웃는 시인은 어머니를 넘어선 자리에 위치한다.  
이 시의 주제가 다소 모호한 울림을 전하는 것은 어머니의 분노를 소시민의 탐욕이 좌절되면서 나타나는 부정적 대응으로 처리하려는 듯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어머니의 아픔을 제도에 의한 상실된 권리에서 찾지 않고 어머니의 분노의 대상인 돈에서 찾으려는 관점이 문제인 듯 싶다. 
이 시의 제목이 '내 어머니 파평 윤씨'로 되어 있는 점에서 시인의 태도의 일단이 암시되는 듯 싶기도 하다. 벌열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파평 윤씨가 강조되는 것 자체가 문벌 내의 부조리한 현상으로 못 박아두려는 기도를 숨기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곧 시인은 이 일이 파평 윤문(어머니를 출가외인으로 만든)의 일이며, 어머니의 욕망충족이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어머니일 수 있는 것은 실은 윤씨를 고집할 때가 아니라, 양씨의 보호자로 온전히 설 때라고 한다면 시인의 샐쭉거리는 웃음은 어머니의 모호한 성씨를 즐기려는 아이러니스트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시인이 어머니의 이름을 갖게 될 때 어떤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인지도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일날 아침
미역다발을 물에 담근다
툭 마른 삶 부러지던 소리 멈추고
녹아 사라질 생의 꿈이 파랗게 부풀어 오른다
(중략)
깨끗이 한 사발 들이키면
몸 속 바닷길을 미끄러져 간다
어머니에게로 간다
    <미역> 김상숙  <<문예운동>> 2002 봄

자신의 생일날 먹는 미역국은 실은 어머니가 먹어야 하는 국이지만, 그것을 기념하여 자신이 먹는다.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먹는 미역국을 해마다 먹는 까닭은 어머니를 잊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의 삶을 내가 살아보기 위해서이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다. 출산과 미역국의 관계는 기능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김상숙은 이런 미역을 싱싱하게 살아 있게 만든다. 불이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반면에 물이 생성과 삶을 상징한다. 물에 담긴 마른 미역은 푸르게 살아나서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가 되어 그것은 생명수인 젖이 되어 우리와 어머니를 하나로 이어준다.

=============================================================

 

 

 

소녀상 ―송영택(1933∼)

이 밤은
나뭇잎이 지는 밤이다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소리는
네가 오는 소리다
언덕길을 내려오는 소리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 된다
다시 가만히 어머니를 생각할 때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듯
내가 별을 마주서면
잎이 진다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서
또 가까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여름이 끝나간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누구든 직감하고 있다. 직감할 뿐만 아니라 기다린다. 가을은 서둘러 와서 우리의 뜨거운 이마를 식혀줄 것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줄 것이고 차분하고 고독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송영택 시인의 ‘소녀상’은 그런,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기에 더없이 적절한 작품이다.
 

 

시를 보자. 낙엽이 지고 있는 것을 보니 가을이 무르익었다. 게다가 가을 더하기 홀로 있는 밤이라니, 이런 시간은 가을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별 아래, 낙엽 아래 누군가가 너를 기다리며 머물러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이 더해져서 고적하기 짝이 없는, 진정한 가을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시를 쓴 송영택 시인은 1930년대에 출생한 시인이다. 그는 가을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한 시인인 릴케의 가장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송 시인은 평생 시를 썼고 단 한 권의 시집만 냈다고 한다. 여러모로 독특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총 6편의 ‘소녀상’을 썼는데 여기 실린 작품은 그중에서 첫 번째 작품이다. ‘소녀상’을 창작할 때 시인은 가을의 노래가 되라고 만들었을 것이다. 가을의 노래로 썼으니 가을의 노래로 소개했지만, 자꾸만 가을보다는 한 ‘소녀상’의 노래로 읽히는 것은 시인의 탓이 아니라 시대의 탓이다. 울고 싶은데 어머니를 생각하며 참고 있는 어린 소녀의 동상을 우리는 무척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가을에는 그 소녀들을 다시 생각하기를, 이 시는 또 다른 독해를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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