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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말장난의 詩가 "최고의 현대시"인가?!...
2016년 10월 14일 19시 55분  조회:3499  추천:0  작성자: 죽림
[ 2016년 10월 14일 07시 49분 ]

 

 

모태진에서-.




난해한 말장난이 현대시란 이름의 최고 시가 되다
-두 ‘미당문학상’ 수상작 두 편의 시를 분석적으로 읽고 난 후 나의 생각 정리하기
 
                                      이시환(시인/문학평론가)
 
 
과연, 시(詩)란 무엇일까? 시란 ‘당대인들이 시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궁여지책으로 말하곤 한다. 시의 개념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시의 날개에 해당하는 형식으로부터 알몸에 해당하는 본질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바뀔 수 있음을, 아니 바뀌어 감을 실감한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정하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맑고 깨끗한 언어를 부리게 되어 있고,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은 복잡한 시를 쓴다는 점이다. 그렇듯, 인간 사회의 불합리나 모순 등 현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으로 즐겨 쓰게 되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경이(驚異)나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으로 즐겨 쓰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그 시인의 바람[願]과 꿈[希望]은 물론이고, 심성(心性)과 관심(關心)과 지력(知力)과 성격(性格)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란 것도 근원적으로는 사람이 서로 공감(共感)・공유(共有)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기에 그 결과인 작품이 가지는 대사회적・대인간적 영향력의 크기에 따라서 작품의 우열(優劣)이나 가치(價値)가 매겨지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리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지라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소수의 독자인 평론가들로부터 외면 받으면 호평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다수의 독자들에게서 나오는 인기를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작품과 독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논리(論理)’ 내지는 ‘궤변(詭辯)’으로써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적극 유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광고(廣告)나 기사(記寫)나 문학상(文學賞)이나 먼저 이름을 얻은 유명시인의 찬미(讚美) 문장(文章) 등이 그 평론가의 기능을 일정 부분 대신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넓은 의미의 독자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 노력이 ‘꼼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가 시인의 경험적 자극에 대한 느낌・감정・생각・의식 등을 솔직하게 혹은 가공해서 짧게 표현하기 때문에 그 수단인 언어가 다분히 정서적이고 음악적이고 함축적인 속성을 띠게 되는데, 특히 문체(文體)에 반영되는 수사(修辭)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지만 시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부분적으로 깨어지고[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환경이 바뀌어가면서 시에 기대하는 효과나 시가 놓이는 자리 곧 그 위상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요즈음 주체가 다른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두 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상기한 나의 개인적인 시관(詩觀)을 재확인하게 되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시를 시로서 고집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변화가 창조인 양’혹은 시에 대한 이해도 차이로 기존의 틀을 자꾸만 깨기 일쑤이다. 이러한 내가 심사했다면 문학상은커녕 아예 예심에서조차 제외시켰겠지만 역시 심사위원들에겐 변화가 창조적인 발전으로 이해되었는지 거창한 이름의 문학상을 준 것이다.
 
차제에, 나는 그 두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면밀히 읽으면서 감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시 읽기를 좋아하는 여러분들도 그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나름대로 감상해 보기 바란다. 두 작품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미당문학상’이란 같은 이름의, 수여자(授與者)가 다른 상(賞)을 각각 받은 것들인데, 하나는 김행숙의 「유리의 존재」라는 작품으로 중앙일보 2016년 9월 22일(목) 지면에 소개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는 작품으로 「미당문학」통권 제2호에 소개된 것이다.
 
두 수상작을 낸 심사위원들의 명단이나 그들의 심사평이나 수상자의 말[수상소감 내지는 이들 작품과 관련 뒷얘기 등] 따위는 생각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작품의 전문(全文)만을 꼼꼼히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끼어 보기 바라며, 나 역시 그러할 것임을 약속한다.
 
생각해 보건대, 이런 돌출 제안은, 우리 ‘현대시의 경향’ 내지는 ‘두드러진 특징’을 가늠해 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만약 여러분이 나의 분석적인 판단에 동의한다면[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 주는 시문학 관련 지성인들(?)의 시관(詩觀) 곧 변화 당위에 대한 논리(論理) 내지는 궤변(詭辯)에 대한 분별(分別)이자 재확인(再確認)이 될 줄로 믿는다. 따라서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메이지 말고, 여러분 개인의 독자적인 눈으로써 읽고 마음으로써 먼저 느껴 보기 바란다. 그런 연후에 이들 작품 관련 심사평이나 시인의 말이나 다른 사람들의 촌평 등을 확인해 보시라.
 
***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김행숙의 시 작품「유리의 존재」전문으로 중앙일보 2016년 9월 22일(목) 24면에서 가져옴.
 
 
위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고 착잡하기까지 하다. 한두 번 읽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문장 해독력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나의 그 착잡한 심정의 직인[直因:직접적인 이유]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여러분 앞에서 작품을 또박또박 다시 읽으며 분석해 보이고자 한다. 여러분들도 시인이 혹은 시적 화자[話者:작품 속에서 말하는 이]가 이 작품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함이 어디에 있는지 그 끈을 놓지 말고, 작품의 주제가 되는 그것[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떠한 장치들이 구축[構築=設備]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서 따져보듯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 곧 양자 사이의 어울림이 기여하는 작품의 완성도를 판단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전문은 외형상 5개의 연(聯)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문장 자체는 산문(散文)이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전체 5개 연 가운데 제1연이다. 화자(話者)의 첫 말로서 최초의 판단이며, 다음 말을 하기 위한 전제(前提)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 첫 말에 동원된 두 개의 문장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표현이 모호해서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판독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짚고 넘어가야할 것들은, 첫 문장의 ‘통과할 수 없는 것’과 두 번째 문장의 ‘보이지 않는 벽’이 무엇이냐이다. 그리고 ‘꿈을 깬다’라는 말이 어떤 뜻으로 쓰였으며, 신경 쓰이는 ‘유리의 계략’이라는 생소한 말의 함의[含意:속뜻]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 등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조차 쉽지가 않다.
 
여러 번 읽고 난 후 용기를 내어 유추(類推)해 보건대, ‘통과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유리’인 것 같고, ‘보이지 않는 벽’은 의심이 가나 최종 판단은 역시 ‘유리’ 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리의 투명성’이다. 유리가 통과할 수 없는 벽(壁)임에는 손으로 만져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틀림없지만, 그 유리가 투명하기 때문에 벽으로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이지 않는 벽’이란 표현을 한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꿈을 깬다’는 의미는, ‘현실 또는 대상을 바르게 본[直視] 결과 바람[願]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알아차림[覺=認知]’일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은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곧, 그 꿈이 나[我]의 꿈인지, 유리(琉璃)의 꿈인지 분명하지 않으며, 또한 그 꿈의 내용이 ‘나[我]의 날고자[飛] 하는 바람[願]’인지 ‘유리의 계략’인지 단정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후자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만약, 나의 이 판단이 옳다면, 그 계략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과연, 화자는 무엇을 두고 ‘유리의 계략’이라는 문제의 말을 했을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라는 제2연의 내용과 연계시켜서 볼 때에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한 유추가 가능해진다. 곧, 유리는 나로 하여금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벽으로서 분명하지만 자신의 겉모습[外形]을 숨기기 때문에, 다시 말해, 투명하기 때문에 내가 통과하려다 부딪쳐서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더러 유리나 내가 깨어지고, 그 깨어진 유리파편에 내가 베이어 피가 나는[生] 일을 기도(企圖)하고 의도(意圖)함을 ‘유리의 계략’이자 ‘유리의 꿈’이라고 말이다. 만약, 나의 이런 유추가 사실이라면 표현이 얼마나 부자연스런, 아니, 불완전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2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2연이다. 이 두 문장에서도 ‘넘어지면’과 ‘안으면’의 주어가 생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그 생략된 주어가 ‘유리창’이 아니라 화자인 ‘나(내)’라고 생각한다. 곧, 내가 넘어지면 유리가 깨졌던 것이고, 내가 넘어지면서 깨어진 유리를 안으면 내게서 피가 났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유리의 꿈과 유리의 계략을 말한 제1연과 자연스럽게 연계(連繫)되기 때문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5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3연이다. 여기에서도 먼저 해명(解明)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란 무엇이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라는 가벼운 의문이 갖는 함의(含意)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란 유리(창)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유리창 너머 저쪽 ‘바깥세상’이자 동시에 그 유리(창)에 되비추어진 이쪽‘안세상의 형상’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만질 수는 없으나 나의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일이 곧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산 사람이 유리(창) 밖의 만질 수 없는, 그래서 ‘죽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인식했던 것 같고, 바로 그 내용을 ‘커다란’ 혹은 ‘놀란 만한’깨달음인 양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유리는 무표정이며, 유리에 남은 손자국조차도 유리의 것이 아니라’는 화자의 부연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유리는 죽은 사람의 눈[目]과 동일시되고 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5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4연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라는 표현이다. 바로 ‘그런’ 유리라는 존재에 대해 깨달았기에 화자인 나는 이 순간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 정도로 기쁘다[?]는 정서적 반응을 표출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문제의 표현인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에서, ‘껴입고 있는’의 주체와 객체가 무엇인지 모호하여 그 정확한 의미를 판단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항상 껴입고 있다는 주체가 ‘죽음’이자 ‘유리’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은데 ‘껴입었다’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죽음’과 ‘유리’라는 두 주체가 무엇을 껴입었다는 말인지, 나로서는 해독(解讀) 불가(不可)이다. 유추해보거나 판단할 어떠한 단서(端緖)나 근거(根據)조차 내게는 전혀 인지(認知)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 모르겠다. 책임질 수 없는 직감으로써 유추해 보건대, 생명[사람]이 죽음을 내장하고 있듯이 유리가 벽(壁)으로서의 기능과 벽이 아닌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껴입고 있는’이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정말 그렇다면, 이 작품은 모호성 하나로 평자의 극찬을 이끌어낸, 어처구니없는 경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5연이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떼는 주체인 ‘나’는 유리를 통과해서 안팎으로 드나들 수 없지만, 햇빛은 ‘믿을 수 없이’놀랍게도 그것을 통과하여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고, 창밖에 서 있었던 ‘네[유리창에 반사된 안쪽의 나]’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는 유리창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 서 있다는 경험적 인식을 드러내 놓고 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지금까지의 유추 내지는 일방적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는 단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유리’라는 벽(壁)과 ‘유리’라는 비벽(非壁)의 이중성을 ‘햇빛’과 ‘사람’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생략과 부적절한 어휘 선택으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문장들 때문에 모호성이 커져 그 내용을 판단하기에 매우 어려운 작품 가운데 한 전형적 표본이다. 이것은 의도되었다기보다는 시인의 문장력이 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이 작품에서는 유리(琉璃)가 꿈과 계략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되겠지만]을 가지고 별 것인 양 모호하게 치장되어 있는, 마치 ‘쓰기 위해서 쓴’ 작품 같은 전형일 뿐이다. 시를 분석적으로 읽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 예컨대, 문학평론가, 시 이론가, 시를 쓰기 위해서 쓰는 사람들 - 은 이런 유형의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여기에도 이유가 있는 법이지만, 나는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이 아주 훌륭한 시라고 한다면, 이미 시의 개념이 수정 재정리되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온갖 궤변들을 늘어놓으며, 시의 외연(外延)을 확대시켜 가고 있지만 읽어서 그 의미가 쉬이 전달되지 않고,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한낱 책상 위에서 벌어지는 말장난일 뿐이다. 시라면 여전히 그 문장이 음악적이고, 정서적이며, 함축적인 성격을 띠어야 함을 나는 믿고 싶다. 게다가, 그런 의복을 걸치고 나오는 알몸은 시인의 개인적인 느낌・기분에 기초한 감정과, 지각(知覺)・의식(意識)・판단(判斷)에 기초한 생각이나 그 생각의 체계인 사상(思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정은 선택되는 어휘(語彙)나 문장(文章)의 어조(語調) 등으로 연계되어 문체(文體)로 나타나게 되고, 생각이나 사상은 작품의 구조(構造)로 연계되어 주제(主題)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복잡한 의식・사유세계[이를 ‘정신세계’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를 드러냈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시가 자꾸만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그 변화・변형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할라치면, 시는 흥얼거리는 노래에서 심각한 사유의 편린 내지는 의식의 단면으로, 다시 말해, 입으로 이루어지는 낭송이나 낭독에서 눈으로 읽으며 사유하는 쪽으로 그 모양새가 바뀌어 가고 있고, 형식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되어지는 경향이 매우 짙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면, 시의 기능이나 위상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실상 바뀌기를 강요받는 상황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이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전문으로 『미당문학』통권 제2호에서 가져옴.
 
 
이 작품은 외형상 4개 연(聯)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역시 산문(散文)이다. 분명한 사실은, 아니, 앞의 작품과 공통점이 있다면, 한두 번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난해성(難解性)’이다. 그 어느 누가 이런 작품을 심사숙고하며 분석적으로 여러 번 읽어 주겠는가마는 다시 한 번 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려보자.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전체 4개 연 가운데 제1연이다. 화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어투(語套)다. 그 내용의 핵심인 즉 ‘용’과 ‘개천’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데 그 능력이 바로 개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천은 용을 배출했지만 그 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미련도 없이 그저 ‘뒤척이고’만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무관심하다는 뜻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느낌과 내용을 전제한다면, 날개 없이 날 수 있는 용의 능력은 의사 결정권이나 권력의 남용처럼 느껴지고, 그런 권한을 부여해 준 개천은 민중 혹은 국민일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여기서‘용’이란 경쟁에서 다른 무리들을 물리치고 이긴 ‘능력자’이고, ‘개천’은 그 무리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거나 그 ‘무리’일 것이라는 통상적인 비유어이다.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제2연이다. ‘화를 내는 사람’과 ‘불을 품는 용’을 대비(對比)시킨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연계(連繫)시켜서 용이 능력자이거나 권력자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용의 역린(逆鱗)을 떠올리며, 빈정거린다. 그 빈정거림은, 범상한 자들은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의 이유와 뜻을 모를 수밖에 없듯이, 용이 아니기에 용의 역린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몰라서 용이 불을 품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체념적인 시각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권력자와 그를 배출한 민중[=국민]이라는 양자 사이에, 다시 말해, 용과 용이 되지 못한 채 개천에 남아 있는 무리들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이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제3연이다. 돌연, 내용이 어수선해졌다. 화자인 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혼잣말로써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되, 그 중얼거림의 내용이 너무나 주관적인 소소한 것들이고, 그나마 비약(飛躍)이 심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서 어디선가 버스를 기다리는데, 그것도 버스 한 대를 놓쳤는데 그 다음 버스가 오지 않는 상황에 있다. 자신이 처한 그런 현실적 상황을 두고 세상이 자신을 홀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분명한 피해의식의 발로이자 표현상의 비약이다. 그리고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다가 후회하고, 울컥해지고, 선글라스가 그런 자신의 표정을 가려주었다고 히히거리는 정서적 반응을 보임은 주관적인 소소한, 가벼운 면들이다.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자신의 삶이 세상과 무관한 것처럼 거리를 두는 태도와, 편을 가르는 듯한 세상에 대한 이분법적인 해석 등을 전제로 ‘끼리끼리’의 연대감 내지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을 조장・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과거 민중문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개떡은 원래 개떡끼리’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제4연이다. 첫 문장 ‘~고 그들은 믿었단다’에서 ‘그들’은 용에 해당하는 의사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들이다. 그런데 화자는 바로 그들의 ‘무능력(無能力)’ 내지는 ‘오판(誤判)’을 비유법으로써 우롱(愚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지배하다시피 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신은 화를 낼 자격도 없다면서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그 개천에서 용이 되려는 꿈을 꾸는 것은 괜찮은 것이라’고 여긴다. 이 얼마나 황당한 현실 인식이며, 태도이며, 자기모순인가?
혹자는, 이런 자의식적인 중얼거림을 놓고 개인의 솔직한 내면세계 표출이라고 극찬할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저 감상할 가치도 의미도 없는 개떡 같은 사람의 개떡 같은 중얼거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위 두 편의 산문(散文)이 시(詩)라면, 시는 참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어려울까?
시의 난해성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문장(文章)의 결함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문장의 결함이란 문장으로서의 불완전성을 말함인데, 그 불완전성은 시어(詩語)와 문장부호 생략, 부적절한 시어 선택, 부자연스런 어순(語順) 도치(倒置),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 일방적인 비유법 구사[수사(修辭)의 부적절성] 등 복합적인 인자가 작용한다.
시의 난해성은, 단순한 내용을 가지고 복잡하게 말하는[표현하는] 시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도 있다. 내용이 심오해서라기보다는 상식적인 수준의 단순한 의미를 가지고서도 애써, 에둘러 말하기 때문이다. 에둘러 말한다는 것은, 시가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수사적인 표현이 불가피하다는 고정관념이 작용하여, 직접적으로 말해야 좋을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너스레를 떨며,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지 아니한 채 머물러 있는 미숙한 상태의 내용을 끄집어내어 횡설수설하는 격을 두고 말함이다.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문장과 어색한 작위적(作爲的) 표현은 문장이나 문맥상의 의미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에 독자의 일방적인 판단을 부추기는 셈이고, 또 그럼으로써 표현자의 의도와 다른 임의의 해석들을 낳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심지어는, 시인의 의도(意圖)와 작품의 주제(主題)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솔직히 말해, 이런 경우는, 작품의 내용이 시인에게서 농익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생긴 느낌과 생각과 의도 등을 갖고서 시 문장을 짓는데 그 과정에서 그것들이 자주 수정되다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이 아닌, 그것과 유사하거나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마무리가 되어버리고 마는 상황에서 많이 나타난다. 물론, 예기치 않게 성공작을 거둘 수도 있지만 대개는 내용 전개 과정이 억지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시를 쓰기 위해서 애써 썼기 때문에 그것들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현대시가 어려워지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관심이 ‘우리’에서 ‘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때에는 시라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이나 정서적 반응에 최소한의 객관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면서부터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에서의 파격(破格)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고, 오로지 자신의 느낌・감정・생각・의식 등을 중심으로 기술(記述)하되 정서적이고 함축적이어야 한다는 시어의 기능을 의식하여 비유적인 표현에만 신경을 쓰는 상황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감하기 어렵고 공유되어지기도 어려운, 극히 주관적인 정서와 개인적인 내용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2016년 올해 서로 다른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두 편의 시작품을 면밀히 읽어 보았지만 무능한 내게는 너무나 어려워 시인의 의도와 작품의 주제조차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문장 하나하나를 수십 번씩 분석적으로 읽으면서 해독하고 나서야 겨우 작품의 주제와 짜임새[構造]를 이해하였고, 시인의 의도 등을 나름대로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판단과 해석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누가 나처럼 시 한 편을 감상하기 위해서 며칠씩이나 골머리를 썩이겠는가?
 
앞의 작품은 ‘계략(計略)’을 가진 ‘유리(琉璃)’라는 존재를 새삼 알게 됐다는 놀라움이 시상(詩想)을 전개시키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고, 뒤의 작품은 개천을 인간세상으로, 용을 인간세상의 능력자로 각각 빗대어놓고, 그 용에 해당하는 능력자들을 조롱하면서도 그 용을 낳는 개천과, 능력자를 낳는 인간세상의 힘을 긍정하면서도 비하(卑下)하며 거리를 두는 이중적인, 모호한 입장과 태도가 시상을 전개시켜 가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모호한 표현들이 많아서 시인의 의도와 작품의 주제가 부각되지는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미숙한 내용과 표현이 낳는 오독(誤讀)이 개인의 솔직한 의식(意識)이나 깊은 정신세계를 드러낸 것인 양 오해되어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형국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누가 아는가? 유명한 시인이나 문학평론가 나타나 앞의 작품을 두고, 유리가 계략을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넘어지고 피가 나게 하듯이 그런 유리 같은, 사악한 인간 존재나 인간세상을 빗대어 놓은 수작(秀作)이라고 말한다면 적지 아니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듯이, 뒤의 작품을 두고서, 오판(誤判)을 하기도 하지만 용을 탄생시키는 개천의 건강함과 모성(母性)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긍정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 적지 아니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나는 이런 귀가 얇은 사람들을 두고, “자신의 눈과 귀를 가지고도 남의 것을 빌려 살거나, 자신의 불완전한 눈과 귀밖에 모르는 이들이다(이시환의 아포리즘・114).”라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다들 부분(部分)을 가지고서 전체(全體)인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인 셈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며,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일 따름이다.
 
-2016.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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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 김현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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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라는 것이 '난해한 말작난'이라는 그 말 참 시원합니다.
공감합니다.
 
요즘 시인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걸 쓰며 그냥 말장난만 합니다.
독자들은 영리해서 아무도 그런 시를 읽지 않습니다.
독자가 없는 시, 독자에게 처참하게 버림 받은 시가 현재 한국 시의 현주소이지요.
소설 수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전부 자기의 시집 수필집을 자비로 출판해야 합니다.
아무도 돈 주고 그걸 사가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 시집이 시집일까요?
그 결과 문인은 대중가요 작사자, 하다 못해 삼류 코메디안보다 대접받지 못합니다.
 
좋은 시는 천년 2천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두보나 이태백이 그렇지요.
반성해야 합니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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