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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를 리해하는 문제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리해하는 문제와 련관된다...
2016년 10월 26일 00시 05분  조회:4725  추천:0  작성자: 죽림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

 

 

 

첨부파일 박만엽-텍스트수사학언어놀이.

 

 


박만엽 (서울시립대)

 

데리다는 문학적인 사람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보다는
니체와 프로이드에 훨씬 더 가깝다. - 아이리스 머독

 

1. 들어가는 말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텍스트들을 접한다. 과거 모
더니즘적 사고에 의하면 텍스트는 말 그대로 동서양의 학술적 고전
들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담론을 중요시하는 포스트모던한 사고에
따르면 텍스트의 의미는 (외연은 물론 내포적 측면에서) 그 적용의
범위가 다양해졌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수많은 담론들은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텍스트를 주
목하는 이유는 비단 교육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모
습을 보기 위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이 삶의 일부를 반영한다
면, 텍스트 역시 삶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삶은 텍스트로 출발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말과 글, 혹은 사고와 표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말과 글 사이의 역동적 긴장 관계를 얼마만큼
해소하느냐에 달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필자는 텍스트와
수사학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삶의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언어놀이’를 개입시키고
자 한다. 그 이유는 텍스트라는 용어가 어떤 종류이던 간에 언어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며, 텍스트가
78 • 수사학 제 8집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문제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텍스트에 초점을 둠으로써 자동적으로 텍스트
에 내재해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텍스트와 문제의
상호 순환성. 그렇지만 이 둘의 관계는 평면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미를 새롭게 생산한다는 입체적 차원에서 순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텍스트를 언급해야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텍스트를 토론하기 위해 문제를 주목해야 한다면, 우
리는 문제에 초점을 두는 것과 텍스트에 초점을 두는 것을 서둘러
구별할 필요가 없다. 즉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러한 문제를 통해서 텍스트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문
제와 텍스트의 상호보완 관계는 우리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봄의
방식과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중요한 기초로 생각했던 중세의 교수
법 이전에도 이 세 가지는 학문과 교육에서 중요한 기제의 역할을
했다. 서양철학의 역사에서는 논리학과 수사학 중 어느 것이 우선적
인가 하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논리학이 순수형식의 문제를 탐구
한다면, 수사학은 언어적 표현과 그 쓰임이 의미를 갖는 구체적 상
황의 관계를 통해 언어와 세계(삶)의 관계에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형식)논리학이 A=A라는 동어반복의 문제를 통해 진리의 문제에 관
심을 갖는다면, 수사학은 A=B라는 의미의 확장과 관련 있는 다양한
언어의 쓰임에 관련된 문제에 천착한다. 은유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역시 은유의 문
제를 비켜갈 수 없다. 그렇지만 은유의 문제와 관련해서 양자는 상
당한 차이가 있다.1)

 

1) 은유의 역할에 대한 양자의 차이는 이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못
하다. 은유와 씨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내공을 요하는 문제이기 때문
이다. 마골리스의 견해로 은유에 대한 이들의 차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79

 

필자는 텍스트와 수사학의 문제를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조망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논리학과 수사학의
갈등적 상황이 양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과학 혹은 지식으로서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논리학보다는
수사학에 비중을 두고, 진리대신 의미를 수용하고, 지식을 거부하는
대신 확실성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의 요인이 있다.
그렇지만 텍스트와 수사학의 문제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방식은 궁
극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우선 근대의 철학적
담론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한 상황들을 살핀 다음 데리다의 텍스
트주의를 다룬다. 여기서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갈등, 파르마콘
의 이중적 작용과 대리보충, 차연의 논리/놀이에 대해 논한다. 이후
의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본질주의 비판과 언어놀이와
문법의 차원에서 다룬다.

 

2. 근대라는 바벨탑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한 상황들

 

주체와 진리, 계몽된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 자연과학의 발달
로 인한 물질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표방한 근대의 거대한 기획에
맞서 니체는 도덕의 과잉과 기존 담론의 해체에 관심을 두었다. 근
대의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성공적인 권력을 향한 의지의 변종,
혹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권력으로 파악한 니체의 정신을 계승한 포
“데리다는 니체적 의미에서 언어가 지니는 은유적 성격을 극단적으로 주장하
는 데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사회적으로 실행 가능한 형식으로서의 자연 언
어를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니체적인 개념의 파괴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골수 회의론자이며, 비트겐슈타인은 골수 회의론
자의 숙적이다.” Margolis, “Vs. (Derrida, Wittgenstein),” Aesthetics,
1984, 131쪽.
80 • 수사학 제 8집

 

스트모더니즘의 전사(?)들은 포스트모던한 문화적 경향성이 새로운
삶의 양식의 지표가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서
주변이 아닌 중심으로의 이동을 암중모색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지배적인 가치
에서 ‘탈주’하고, ‘해체’하려는 철학적 시도를 다양하게 모색한다는
점에서 개체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산
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대라는 바벨탑을 비웃으며 현란하
게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계획적으로 정의할 수도 없으며, 상황
에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의 부재가 규칙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이런
이유에서 퍼즐 조각을 맞추면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지만, 불행하
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알리는 조각들을 맞추는 작업은 우
리에게 완성된 그림을 제공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지배적 담론에 맞서는 대항적인 주
도권을 만들어 내는 전략을 취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절대적
진리, 의식적 자아, 역사주의를 축으로 한 근대성의 기획이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비판과 함께, 이성중심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
며, 철학(형이상학)의 종말, 주체의 죽음,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포스트모던한 상황에 대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무엇일
까? 이러한 물음과 관련해서 양자의 입장에는 유사성과 차이가 공
존한다는 점이 이후의 논의에서 밝혀진다.

 

3. 데리다의 텍스트주의

 

진리(의미)를 추구하는 이성중심주의의 철학을 현전의 형이상
학, 음성 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로 파악하는 데리다(J. Derrida)
는『그라마톨로지』에서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OG, 158
쪽)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담론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81

 

능성을 부정하는 ‘텍스트주의’를 내세운다.2)
이러한 데리다의 생각은 서구 사유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존재 신학적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했던 니체와 근대 속에서 함몰해버린 존재의 회복을 통해
근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하이데거, 그리고 언어는 차이들의 체계들
이라는 소쉬르의 반실재론적 언어관을 연장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
를 의미화 작용의 과정을 특징짓는 적합한 개념으로 보지 않는 데
리다는 무한히 증식하는 기표들의 유희 속에서 의미 생산이 구성된
다는 점에서, ‘차연’(差延)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즉 차연의 논리
에 의하면, 특정한 기표의 의미는 한 순간에 완결되지 않으며 그 의
미는 차이를 생성하는 움직임 속에서 끝없이 연기된다. 데리다는 음
성언어의 직접성이 문자언어보다 오염되지 않은 기원적 사유에 가
깝고, 한 집안의 가장은 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논리적 동일성으로

 

2) 푸코에 의하면,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은 “담론적
실천을 텍스트의 흔적으로 축소시키고,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책읽기를
위한 지식들만을 얻기 위해 생략하고, 주체가 담론 속으로 연루되는 양태를
분석하지 않기 위해 텍스트 뒤에 있는 목소리들을 만들어 내며, 그것이 행해
진 변형의 영역 속에 담론적 실천을 다시 위치시키지 않기 위해 원초적인
것을, 텍스트 속에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해진 것으로 설정하는 체
계”로 파악한다. 김현,『시칠리아의 암소』, 문학과 지성사, 119쪽, 1990, 재
인용. 데리다의 텍스트주의를 비판하는 푸코의 전략에는 담론을 단지 담론
으로서 다루지 않고 담론적 형성체를 다루는 데는 역사라는 요인이 결정적
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푸코와 데리다의 근본적인 차이는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과 달리 푸코의 담론 개념은 다른 텍스트나 담론들에 의해 결정되는, 개
방적이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주체와 대상, 개념과 전략을
갖는 불연속적인 것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담론 개념은
모든 것을 담론으로 환원하는 고정적 입장을 비판하며 오히려 담론은 변화
하고 그러한 변화는 담론 개념을 넘어선다는 입장을 취한다. 푸코의 관심이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이행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진경,
“미셸 푸코와 담론 이론: 표상으로부터의 탈주”,『철학의 탈주』, 새길,
1995, 201쪽, 참조.
82 • 수사학 제 8집

 

진리라고 하는 하나의 중심 공간에 의미를 기록하는 근대적 사유
방식을 해체한다.
데리다에게 있어 텍스트는 더 이상 일관된 의미 또는 단일한
진리를 담고 있는 엄숙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모순과 공백의 집
합체로 이해된다. 때문에 시공의 복합체에서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
는 텍스트의 저자와 독자의 상호 관계에서 다양한 독해가 존재하는
것처럼, 의미와 무의미가 ‘흩어져 버리는’(산포) 은유의 공간이 된다.
따라서 근대의 모든 인식론적 가치관은 해체의 문자학으로 대체되
어 모든 텍스트가 ‘차연’의 논리/놀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억압적으로 부과되는 신성한 의
미를 수용해야만 하는 당위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자
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 된다.

 

3.1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갈등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말과 글은 중요한 기제이다. 말은 소리
로 글은 기호로 나타난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말과 글의 관계는 언
제나 비대칭적이었다. 전통적으로 말이 의사소통의 영혼이라면, 글
은 그러한 영혼을 담는 육체의 역할을 했다. 영혼과 육체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말과 글, 즉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쉽지는 않
았다.
상식적인 생각에 의하면, 우리는 말보다 글에 더 비중을 둔
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접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철학의 역사는 그렇지가 못했다. ‘해체’의 철학
자 데리다가 논의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텍스트
를 통한 다양한 읽기를 추구하고자 하는 데리다는 글보다 말에 더
비중을 둔 기존의 철학 텍스트를 해체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83

 

데리다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해체의 전략이 말과 글에 대한 기존의
관계를 역전시켜 말(음성언어)보다 글(문자언어)에 더 비중을 두었
다고 생각하는 것은 데리다의 잘못된 독해이다. 오히려 데리다는 말
과 글에 담긴 이분법적 대립을 텍스트 안에서 교란시키면서 우리들
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열린 해석과 새로운 읽기를 통해 텍스트
의 차이와 다양성을 모색하고자 한다.3) 데리다에 의하면, 어떤 텍
스트에 대해서 완전한 이해와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하나의 닫혀있는 체계로 보는 것이다. 과거에 읽은 책의 영향력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도 있지만 독자가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책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과거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책은 자기완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
가받았다. 이를테면 책은 영혼으로 써진 저자와의 대화로서 각각의
책은 저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고유한 작품이었다. 책의 권위를 무
시하는 것은 말/글, 현존/부재, 기원/반복, 복제, 기록되는 파생의
엄격한 상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기표가 아닌 기의에 우선한
책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 데리다의 해체적 관점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필
요가 있다. “그래서 헤겔은 책의 마지막 철학자이자 문자의 최초 사상가인
것이다.” Derrida, Of Grammatology, trans. Gayatri Spivak, Baltimore:
Johns Hokpins University Press, 1976, 26쪽. 데리다의 해체 전략에는 단
순히 텍스트 혹은 텍스트의 저자를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 내재해있는 의미와 저자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도들을 재생하는 데 있
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텍스트 읽기 방식은
나름대로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데리다가 헤겔을 언
급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헤겔이 이러한 지평에서 생각한
모든 것, 다시 말해 종말론을 제외한 모든 것은 문자에 대한 고찰로 다시
읽힐 수 있다. 헤겔 역시 환원불가능한 차이의 사상가이다. 그는 사유를 기
호를 생산하는 기억으로 복원시켰다. 그리고 그는 … 문자로 쓰인 흔적이
없이도 버틸 수 있다고 항상 믿었던 철학자 -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적 -
담론 속에 이 흔적의 본질적 필연성를 재도입했다.” 같은 책, 같은 쪽.
84 • 수사학 제 8집

 

좋은 쓰기는 언제나 포괄되었다. 하나의 총체성 안쪽에 포괄되며,
한 묶음의 책 또는 한 권의 책 속에 수납된다. 책은 유한한 또는 무
한한 총체성, 또는 하나의 기표이다. 기표의 이러한 총체성이 총체
성을 획득하는 것은, 오직 기의에 의해서 구성된 총체성이 기표의
총체성보다 앞서 존재하고, 기표의 표기와 여러 기호들을 감시하며,
기표와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의 관념성을 갖추고 있을 때에만 가능
하다. (OG, 18쪽)
데리다는 책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는 책의 구조 바깥에 있는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 진리를 중심하는 이성중심주의가 자리 잡
고 있음을 비판한다. 데리다가 책의 자리에 텍스트를 배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는 자기 완결적인 고정적 위치를
갖지 않는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텍스트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해 만
들어진 직물과 같은 그물망과 같다. 씨줄과 날줄이 얽히면서 새로운
직물이 생성되는 것처럼,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안에서 그 의미가
‘산포’된다. 텍스트 속에 숨어있는 모종의 이해관계를 해체하고자 하
는 그의 전략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텍스트를 외부로부터 지배하려고 했던 것을 텍스트 속에 결렬하게
기입하면서 삭제로 말미암아 말소된 것을 읽히게 하는 삭제의 몇몇
결정적인 장소들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중의 놀이를 통하여 나는 이
러한 철학소들과 인식소들을 그것들이 관여성을 상실해 버림으로써
소진되어 버리는 그 경계선에까지 슬그머니 밀어 넣음으로써 그것들
의 규칙적인 내적 작용을 가능한 한 엄격하게 의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철학을 해체하는 것은 그 개념들의 구조화된 계보학을 가
장 충실하면서도 내면적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가 어딘가
에 이해관계가 걸린 어떤 억압에 의해 스스로를 역사로 자처하면서
무엇을 은폐하고 금지시켰는가를 철학에 의해 형용되고 명명될 수
없는 어떤 외부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Po, 6쪽)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85

 

한 마디로 말해서 데리다가 염두에 둔 해체적 읽기는 의도적
으로 텍스트를 분열시키면서 다양한 의미를 산포하고자 한다. 이는
텍스트가 맥락이나 저자의 의도와는 독립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산
출하고 따라서 다양하고 대립적인 독해가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텍스트에 써진 검정 활자보다 그 여백에서 자유롭게 유희
(놀이)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데리다에 의하면, 텍스트의 여백은 무
한하게 산포된 변형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될 수 있다.” (Dis, 345쪽)

 


3.2 파르마콘의 이중적 작용과 대리보충

 

데리다의 저작은 근본적인 철학 비판으로서, 그것은 진리와
지식이라는 통상적인 개념을 문제 삼는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가
로지르며 해체하고자 하는 그에게 철학은 무엇보다도 글쓰기이다.
따라서 철학은 문학이 관심을 갖는 언어의 스타일과 형식, 즉 수사,
은유 혹은 텍스트의 편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데리다의
저작들을 관통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는 ‘결정불가능
성’(undecidability)과 ‘탈선한 의사소통’(derailed communication)
이라는 개념이다.4)

 

4) 데리다는 이 둘의 행렬을 바이러스의 형체에서 발견한다. 무한대로 증식할
수 있는 바이러스는 첫째, 생물학적 영역에서도 의사소통에 무질서를 끌어
들인다. 이때의 무질서는 부호와 부호의 해독을 상식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게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바이러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그것은 활
동적이지도 비활동적이지도 않으며, 살아있지도 죽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
은 결정불가능한 대상이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즉 살
아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좀비(zombie)는 결정불가능한 대상이다. 이러한
결정불가능성은 기존에 통용된 이항 대립의 구조, 즉 삶/죽음, 정신/몸, 안/
밖, 긍정/부정, 현재/과거, 참/거짓, 남/여 등의 양자택일적 지배의 논리를
86 • 수사학 제 8집

 

데리다는 해체적 읽기를 위한 시도의 하나로서 플라톤의『파
이드로스』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는다.『플라톤의 약국』에서 데리다
는 음성언어가 문자보다 우월함을 파이드로스에게 설득하는 소크라
테스보다 희랍의 청년 파이드로스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서양철학
의 모델이랄 수 있는 플라톤의 텍스트를 가지고 결정불가능성의 놀
이를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는 데리다의 전략
은 기존의 주석가들이 행하는 작업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갖는다.
주지하는 것처럼, 소크라테스적 추론이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진실의 길이라고 믿는 플라톤은 거짓된 지혜의 전달자, 즉 그럴 듯
한 언어유희로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을 현혹하는 소피스트나 수사
학자들처럼 단지 자연을 모방하거나 지식 없이 반복하는 시인이나
신화학자, 이야기꾼을 폄하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성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서 진정한 철학은 이성의 능동적인 활용이다.
플라톤의『파이드로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
스를 통해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신화를 통해 음성언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의 결정론적 생각, 즉 음성언어는 선하고 문자는 악
하며, 진정한 기억은 내면적이고 문자로 써진 것을 상기하는 일은 외
면적이며, 음성 언어는 지식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문자는 그 외
관만을 지니고 있으며, 언어의 신호는 살아 있는 것이고 문자는 죽은
것이다라는 생각을 데리다는 결정불가능한 놀이로 대체하고자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르마콘’(pharmakon)이 등장한다. 기존의 플라
톤 독해에 대한 데리다의 의도적인 탈선된 의사소통이 시작된다.
약과 독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파르마콘을 가지고 데
리다는 플라톤의 이항 대립적 구조를 해체하고 텍스트 속에 잠재되
붕괴시킨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양성구유자가 있고, 인간과 기계 사이에
는 안드로이드가 있으며, 친구와 적 사이에는 이방인이 있는 것처럼, 결정불
가능성은 이러한 이항 대립의 원리 자체를 근원적으로 의문에 빠뜨린다. 제
프 콜린스,『데리다』, 이수명 옮김, 김영사, 2003, 20-28쪽, 참조.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87

 

어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텍스트 해석에 대
한 반전을 도모한다. 즉 약으로 읽히기를 강요받고 있는 지점에서
파르마콘을 독으로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읽음으로써 파르마콘에
대한 이중적 움직임(운동)을 주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데리다
는 이항 대립의 쌍들을 붕괴시키고 그에 대한 반전을 통해서 결정
가능성 속에 숨어있는 문자의 결정불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
라서 파르마콘은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되거나 하나의 의미로 사용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 안에서 서로 다른 두 개념의 차이
로 대체되면서 확산되게끔 하는, 이른바 텍스트의 열린 해석을 가능
하게 하는 구성적 힘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파르마콘은 고유하거
나 결정적 성격을 갖지 않으며, 그것은 가능성의 놀이이고 안과 밖
을 넘나드는 운동이다. 파르마콘의 결정불가능성에 대하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정불가능성은 철학적 이항 대립 속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립 속에 살면서 거기에 저항하고, 그 대립을 조직하면서 파괴시킨
다. 그러나 결정불가능성이 제3의 용어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사
변적 변증법의 해결을 부르는 것도 아니다. 파르마콘은 치료약도 아
니고 독약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말도 아니고 문자
도 아니다. 대리보충은 보탬도 아니고, 모자람도 아니며, 바깥도 아
니고 안의 보완도 아니며, 우연도 아니고 본질도 아니다. … 문자는
기표도 아니고 기의도 아니며, 기호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며, 현존도
아니고 부재도 아니며, 정립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다. (Po, 43쪽)
플라톤의『파이드로스』는 음성언어/문자, 원형/파생, 아버지
와 아들의 대립을 고정시키려는 자기동일성의 시도이다. 데리다는
파르마콘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텍스트 속에서 대립을 이루고 있는
개념들 간의 위계질서로부터 차이를 이루고 있는 균형의 관계로 회
복시키기 위한 전복의 단계로 대리보충(supplément)5)을 도입한다.
88 • 수사학 제 8집

 

『파이드로스』에서 자기지식을 추구하려는 철학의 소명을 보충하기
위해 신화를 도입하는 것도 역시 대리보충의 한 사례이다. 신화로부
터 독립한 철학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금 신화가 도입되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소크라테스는 신화
가 아니라 자기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델피의 신탁, 더 자
세하게 말하면 델피의 비명에 새겨진 문자를 언급하지 않던가? 이
처럼 신화와 철학의 경계는 대리보충의 과정을 통해 그 경계가 모
호해지면서 텍스트의 의미가 새롭게 재구성될 가능성이 열린다.
따라서 대리보충의 논리는 기존의 존재론에서는 사유될 수 없
다. 대리보충은 유령처럼 출몰한다. 그 자체로는 현전도 부재도 아
니며 흔적으로 남는 효과를 묘사한다는 것, 그것이 그 지형을 변형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해체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대리보충은 바이
러스와 같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감염시킨다.6) 데리다에 따르면, “이
개념은 사로잡을 수도, 길들일 수도, 교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
독성이 강하다.” (OG, 157쪽)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데리다의 플라
5) 프랑스어 ‘supplément’은 추가와 대체 모두를 의미한다. 대리보충이란 보완
을 위해 어떤 것이 보완된 것, 그리고 단지 외부적인 것이 첨가되어 있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충만성에 다른 충만성이 보완된 것, 즉
잉여라는 뜻, 그리고 채워지려면 비워져야 하는 것처럼 결여를 만들어낸다
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포함한다. … 데리다는 대리보충 안에서 이 두 의미
작용의 이상하지만 필요한 공존을 탐색한다. 대리보충에는 기묘한 논리가
뒤따르게 된다. 그것은 내부자도 아니고 외부자도 아니면서, 그리고/또는 그
것은 동시에 내부자익면서 외부자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부분이 되지 않으
면서도 일부분을 형성하며, 속하지도 않으며 속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
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리보충은 미치게 만든다. 그것은 현전도 부재
도 아니기 때문이다.” (OG, 154쪽) 니콜러스 로일,『데리다의 유령들』, 오
문석 옮김, 앨피북, 2007, 122-123쪽,
6) 니콜러스 도일, 같은 책, 124쪽. 말과 글의 문제를 대리보충의 관계에서 보
자면, 말은 자연이고 글은 자연의 대리보충이다. 성교가 자연이라면 자위행
위는 자연의 대리보충이다. 대리보충의 ‘유령적 결론’에 대해서는 같은 책,
134-140쪽을 참조할 것.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89

 

톤 읽기는 종결된 상태가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파르마콘이 치료약
인지 독약인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파르마콘의 원흔적이라 할
수 있는 차연이 끝없이 차이를 내며 연기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
다. 플라톤이라는 서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3.3 차연의 논리/놀이

 

차연은 이제까지 논의한 데리다의 텍스트주의, 파르마콘, 대
리보충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차연
이란 무엇인가? 차연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한가? 불행하게도 이러
한 물음에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응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데리다에
게 있어서 차연은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어떤 식으로 작
용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차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하지
않고는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적 사유체계를 논하기가 어렵다는 점
이다. 특히 차연은 어떤 하나의 낱말, 개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차연의 일차적 관문은 차이에 있다. 그렇다면 차연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김상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데리다
의 차연에 이르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나가야 하는 두 종류의 차이
가 있다. 그것은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학적 차이와 하이데거가 말하
는 존재론적 차이이다.”7)
거칠게 말해서 소쉬르는 랑그와 파롤, 기표와 기의, 연쇄체와
계열체의 구분을 통해 구조주의 언어학을 완성했다. 하이데거는 서
구 형이상학의 실패가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이 둘의 차이에서 데리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는다.
즉 소쉬르나 하이데거가 지적한 차이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데리다
가 해체의 표적으로 삼았던 음성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

 


7) 김상환,『해체론 시대의 철학』,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6,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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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8)
해체의 길을 선택한 데리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위해 데리다는 두 가지, 즉 옛 이름(palaeonymics)
과 신조어(neologism)의 사용을 택한다.9) 이런 전략의 목표는
물론 형이상학의 토대를 교란시키는 데 있다. 옛 이름은 음성언어와
문자라는 이분법에서 후자를 뜻한다. 그렇지만 데리다는 문자의 의
미를 과거의 사용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라마톨로지’라는 용어가
데리다의 독특한 사고를 표현하는 것처럼, 데리다는 과거에 통용해
온 문자를 자기 식대로 변형시키면서 말과 글 사이의 긴장 관계를
극대화시킨다. 그렇지만 데리다가 자기 식대로 말하고자 하는 ‘문자’
에는 형이상학에서 각인된 의미를 완전하게 해소할 수 없다는 한계
가 있었다. 데리다에게는 특권화된 음성언어의 우월성으로 폄하된
문자의 지위를 복권시키는 동시에 양자의 관계를 원초적 기반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존의 이분법이라는 대립적 구조에서 탈피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의 신조어에 해당되
는 ‘차연’은 새롭게 태어났다.
차연에 해당되는 불어는 la différance이다. 원래 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이 조어는 차이를 뜻하는 불어 la différence와 발음(소
리)이 같고, 다만 글자(문자)상에서 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데리다가 이런 조어를 만든 속사정은 무엇일까? 철자법상 차연은

 


8)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Derrida, Of Grammatology, 제2장,
<언어학과 문자학>을 참조할 것. 여기서는 주로 “언어와 문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기호 체계이다. 문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언어를 대리표상하는
것이다”는 소쉬르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적 생각이 다루어지
고 있다. 또한 하이데거의 ‘현전의 형이상학’을 토대로 후설의 현상학까지
해체하려는 데리다의 생각은 데리다,『목소리와 현상』, 김상록 옮김, 인간
사랑, 2006, 123쪽과 옮긴이 해제(논문: “철학적 구도(求道)의 가능성”)를
참조할 것. 구조주의와 현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저작들은 1967년에 출간된
『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연』,『그라마톨로지』를 들 수 있다.
9) 제프 콜린스,『데리다』, 이수명 옮김, 김영사, 2003, 78쪽, 참조.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1

 

분명히 정상의 경우가 아니라 변칙사례에 해당된다. 이러한 변칙의
원인은 논리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즉 차연은 결정불가능한 차이
의 놀이를 통해 차연이 그 자체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차연은 낱말도 개념도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이
름도 아니다. 데리다는 차연을 ‘묶음’ 혹은 ‘다발’ (MP, 3-4쪽)이라
고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실이나 의미의 줄을 다시 출발시키고
다른 것들과의 매듭을 맺게 하는 짜깁기나 교차나 얽힘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뉘앙스가 묶음 혹은 다발과 비슷하기 때문이
다.10)
차연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들리지 않는
의 차이를 드러
내고자 하는 데리다의 의도는 그것이 문자(텍스트)를 통해야만 한다
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문자로서의 차이는 있지만 음성으로서
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소쉬르가 말하는 모든 기호를 가
능하게 하고 기능하게 하는 ‘차이’도 데리다가 고안한 차연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차이에서는 이항 대립적 구조의 위계를 생각
해야 하지만, 근원적 흔적(실체 없는 근원으로서의 흔적)으로서의
차연은 그러한 구조의 양극단을 가로지르며 텍스트의 의미를 생산
해내는 일종의 힘과 같은 역할을 한다. 때문에 차연에서는 고전논리
에서 말하는 동일율, 모순율, 배중율과 같은 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합의 논리에
도 적용되지 않는다. “차연은 목소리에도 속하지 않으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글에도 속하지 않는다.” (MP, 5쪽) 차연은 결정불가능
성의 운동을 활성화시킨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전략은 차연의 논리
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연의 해체적 놀이를
고통스럽게(?) 즐긴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연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데리다는 차연
은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니고 하나의 ‘중간태’(middle voice) (MP,

 


10) 김형효,『데리다의 해체철학』, 서울: 민음사, 1993, 207쪽, 참조.
92 • 수사학 제 8집

 

9쪽)라고 규정한다. 차연의 시간적 실인 기억, 대기, 연기, 유보, 저
장, 유예 등의 개념과 차연의 공간적 실인 차이, 거리, 행간, 사이,
자간 등의 개념은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시간이 공간으로 또 공간
이 시간으로 변용될 수 있다. 그래서 차연은 ‘시간의 공간되기’(becoming
space of time) 혹은 ‘공간의 시간되기’(becoming time of
space)가 서로 교차하는 직물로서 표상된다. 그런 점에서 차연은 수
사학에서 말하는 ‘교차적 배어법’(chiasmus)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11) 따라서 “의미작용이라는 운동을 가능하게 하
는 만드는 것으로서” (MP, 13쪽) 차연은 언어와 의미의 가장 근원
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동일성과 차이, 차이와 연기, 반복과 타
자성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이상한 논리인 차연은 우리가 결코 따
라잡을 수 없는 탁구공이다.12) 탁구공을 때리는 선수들의 차이와
다양성에 따라 탁구공의 움직임 역시 차이와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탁구공을 우리는 한 번도 고정된 시각에서 볼 수 없
다. 이런 이유로 해서 차연은 (텍스트의 다양한 맥락에 따라) ‘흔적’,
‘파르마콘’, ‘문자’, ‘대리보충’, ‘고막’, ‘쇼핑목록’13), … 등으로 변할
수 있다. 때문에 차연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차연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회귀의 운동이 아니던
가?

 

11) 김형효, 같은 책, 214쪽. 교차적 배어법은 2개의 같은 관계에 있는 구 또는
절이 반복될 때의 어순의 전치(轉置)를 말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죽기위해
살지만, 우리는 살기위해 죽는다”와 같은 문장을 들 수 있다. 또한 ‘X’, ‘+’
와 같은 문자들도 교차적 배어법을 형상화한다고 볼 수 있다.
12) 니콜러스 도일, 같은 책, 174쪽.
13) 데리다의 차연을 엘리자베스 바우엔(Elizabeth Bowen)의 소설『마음의 죽
음』(The Death of Heart, 1938)에 나오는 쇼핑목록과 비교하는 글을 위해
서는 니콜러스 로일,『데리다의 유령들』, 168-181쪽을 참조할 것.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3

 

4.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언어적 환
경에 둘러싸여 양육되고, 학습의 과정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세
계 속의 대상들을 언어의 의미화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성장하는
언어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인간 정신 활동의 산물이다. 여
기서 말하는 언어는 단순히 일상 언어에서 사용되는 말과 글뿐만
아니라 낱말을 통해 대상을 알 수 있는 지시적 언어들이 포함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드시 지시적 언어를 통해서만 낱말의 의미를 획
득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과학 혹은 음악, 미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체적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추상적, 혹은 상징적인
영역에서 언어가 작동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인간은 언어
의 사용을 통해 삶과 세계 속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행
위들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와 인식에 있어
서 언어의 고정점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말과 글을 가지
고 지식과 지혜를 전수받고, 문제의 해결 방식을 강구하며 미래를
계획한다는 점에서 언어는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가 된다. 이런 맥
락에서 언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작업은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한
언어놀이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를
통해 다음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분명히 밝히는 데
있었다.
(1)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2) 한 화자가 자신들의 공통 언어에서 표현을 하는 것처럼,
다른 화자가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94 • 수사학 제 8집

 

4.1 본질주의 비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될 만큼 사유 방식
에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언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
다. 그가 제시한 철학의 문제는 한 마디로 ‘언어를 언어로서 가능하
게끔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물음
속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의미와 이해의 문제가 함축되
어 있다. 칸트가 이성 능력의 비판을 통해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구
분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적 역할과 그 한계를 명확
하게 구분함으로써 기존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집약되어 있는『논고』에 의하면,
진리는 지식을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선천적인 기준
에 의해 결정되는 실재론과 관련이 있다. 실재론에 의하면, 현실 세
계뿐만 아니라 가능 세계에 있어서 진리를 가늠할 수 있는 선천적
형식들이 있다. 실재론에 입각한 의미론적 본질주의를 그대로 계승
한『논고』의 주된 관심은 이상 언어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
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데 있다. 언어의 본질은 논리적 공간의 세계
를 ‘그리는’ 것이다.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다. 명제는 우리가 그렇
게 생각하는 실재의 모형이다.” (TLP, 4.01)
그러나 언어의 사용과 의미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후기에
서는 철학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곧 당혹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며, 이는 진정한 철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선행 조건에 해당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
는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제로 느껴진 혼란” (BB, 6쪽)이며,
“철학적 문제는 ‘내가 어느 길을 가야할지를 알지 못한다’는 형식을
갖는다.” (PI, §123) 철학자들이 부딪히는 난점의 진정한 원천은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5

 

내부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깊은 데 있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것의 존재를 알기조차 어렵다.
철학자는 건전한 인간 지성의 개념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의
지성의 수많은 질병을 스스로 치유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
가 삶 속에서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와 같이 우리는 오성(이
해력)의 건강 속에서 광기에 둘러싸여 있다. (RFM, IV §53)
세계와 사물들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 사고방식이나 기존의 철
학자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사유의 불합리성을 드러내려는 비트겐슈
타인은 철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목적은 가장된 헛
소리에서 명백한 헛소리에로 옮겨 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PI,
§464) 철학적 당혹의 주된 원천은 언어에 대한 오해와 인식 초월
적인 형상 내지는 본질을 추구하려는 “일반성에 대한 열망” (BB,
17~18쪽)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그는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이 본질
에 집착하는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의
사용에서 비롯되는 차이와 다양성을 간과해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그림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철학적 질병에 걸린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이『탐구』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은 바로
존재와 세계에 관련된 기존의 사유 방식과 개념들의 의미에 대해
비판하는 언어적 문제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언어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며 똑같은 문법적 범주에 있는 낱말들은 모두
똑같은 식으로 기능한다는 전기의 생각으로부터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로 전환한다. 낱말의
의미는 낱말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도 아니며, 낱말을 둘러싼 어떤
정신적 분위기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낱말의 사용에 있다.『논
고』에 의하면, 명제가 하는 일은 단 하나의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다. 그러나『탐구』에서는 낱말과 명제들은 광범위하게 다양한 상황
96 • 수사학 제 8집

 

들에서 적용되며, 적용을 하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
준이 있다는 점과 함께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과 명제를 어떻게 ‘이
해’하는가 하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실재의 그림이 아닌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며, 서로 다
른 언어는 연장통에 있는 서로 다른 연장들처럼 아주 다양한 용도
를 갖는다. 어떤 연장에도 고유한 용도에만 쓰이는 단 하나의 용도
가 없는 것처럼 (이를테면, 망치는 못을 박기도 하지만 못을 빼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낱말이
나 문장도 마찬가지로 단 하나만의 본질적인 용법이란 없으며, 여기
저기에 ‘유사성’14)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은 낱말들
이 우리에게 말해지거나 원고 또는 인쇄된 글에서 우리와 마주치게
될 때 그 낱말들이 지니는 겉모습의 획일성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사용은 우리 앞에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철학을 할 때에는!” (PI, §11)
일상 언어의 다양성과 차이에 대해 주목할 것을 강조하는 비
트겐슈타인의 생각은『탐구』§156~178에서 논의되는 ‘읽기’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떤 신문 속에 있는 기사를 읽는
것과 그 기사를 읽는 체 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처
럼, 그는 단순히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차이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읽기’를 일종의 규칙따르기로 생각한다. 즉 ‘읽기’는
14)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유사성은 비유사성을 수반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놀이들은 미래의 어떤 언어 규제를 위한 예비 연구들
- 말하자면 마찰과 공기 저항을 고려하지 않은 최초의 근사치들 -이 아니
다. 오히려 그 언어놀이들은 유사성과 비유사성에 의해 우리의 언어 상태
에 대해 어떤 빛을 던져야 할 비교 대상들로서 있다.” (PI, §130) 그런 점
에서 유사성은 언어의 본질을 가정하는 언어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의 역할
을 수행한다. 동시에 그것은 흄에게서와 같은 자연성을 논할 수 있는 계기
이기도 하다. 양은석,『논리철학』(미출간본), 2007, 160쪽.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7

 

읽고자 하는 낱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나 인쇄
된 것을 규칙에 따라 소리로 바꾸어 놓은 활동이다. (더 나아가 구
술하는 것에 따라 적는 것, 인쇄된 것을 베껴 쓰는 것, 악보에 따라
연주하는 것 등등도 읽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읽기’는
“어떤 하나의 특별한 의식적 정신 활동” (PI, §156)이 아니다.
오히려 읽기는 “이러이러하게 써진 글자에 반응하는 것을 뜻
하며, … 학생이 읽기 시작했을 때의 변화는 그의 행동의 변화였
다.” (PI, §157) 읽기 위해 규칙을 따르는 것은 행동적인 기술
(technic)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술을 갖는 것은 일정한 종
류의 경험을 겪는 문제나 의식의 조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비
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물리적인 대상으로서
언어적인 기호를 단순히 지각하는 사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의 영역에서 생각할 문제이
다.15)
중국인의 말을 건성으로 들을 때, 우리는 그의 말을 분절되지 않은
‘쏼라쏼라’와 같은 소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소리 속에서 언어를 인식할 것이다. (CV, 15쪽)
전통적 철학에 의하면, 언어와 사유의 기초들은 선천적인 원
리, 수학의 공리, 자명한 진리 혹은 직접적인 경험이나 감각 자료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
하면, 규칙을 따르는 인간의 행위에는 삶의 다양한 양식들이 주어졌
다는 자연적 조건을 외면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본래적으로 규
칙을 따르는 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논
리는 인간의 본성을 포함해 수많은 자연의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즉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으며 자연스럽게

 

15) McGinn, Wittgenstein on Meaning, Oxford, Blackwell, 1987, 46-47쪽.
98 • 수사학 제 8집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이다.16) 이는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언어 사용의 자연성을 본능을 빌어 설명하는 것과 통한다. 그에 따
르면, “언어 사용은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자연적 본능에 의한
것이다.” (OC, §475) 그러면서도 중요한 점은 몇 가지 기술들이
우리들에게 예를 통해 설명된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이러이러한 하나의 기
술을 가르친다면, 그랬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진행하며 어떤 특정
한 새로운 경우에는 저런 식으로 하지 않거나, 혹은 그가 저런 식이
아닌 이런 식으로 계속하는 것은 그에게는 ‘자연적인’ 지속인 것이
다. 이 점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자연의 사실이다. (Z, §355)
언어의 도구적 측면과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동시에 파악함으
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의미 이
론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단순히 하나
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들
의 집합체인 동시에 언어는 어떠한 규칙들, 즉 언어에 있어서 다양
한 용법을 ‘규제하는 규칙’17)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일련의 활동들이

 

16) 스트로슨이나 핸플링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반회의적 특성을 통해 그의
철학을 흄의 자연주의로 해석한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종속논제’와 ‘선험논
증’을 빌어 비트겐슈타인 철학을 흄의 자연주의로 간주한다. 핸플링에 의하
면, 정당화될 수 없는 근본 신념은 의심할 수 없는 삶에서 당연히 받아들
여야 할 것이고, 그러한 점을 이성이 본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종속 논제
를 통해 보여 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자연적, 본능적 반응을
빌어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는 근본 신념들의 그러한 성격
을 강조한다. 이하 자세한 논의는 양은석, 같은 책, 제6장 ‘비트겐슈타인과
자연주의’, 144-167쪽, 참조할 것.
17) 규칙의 차이를 규칙의 지위와 관련시키면 규칙에는 구성적 규칙과 규제적
규칙이 있다. 구성적(constitutive) 규칙은 게임이나 모종의 행위를 가능하
게 하는 규칙으로 테니스의 규칙, 또는 카드 게임의 창시자가 카드 게임에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9

 

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것의 개념들은 도구
들이다.” (PI, §569)

 

4.2 언어놀이와 문법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은 (전기의 그림이론과 달리) ‘언어놀
이’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라는 말
이 주는 가벼움 탓에 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 가볍고 경박하
다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과연 언어와 놀이라는 개념이 잘 통할
수 있는 조합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언어를
놀이와 연관시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언어를 말하는 것과 비
언어적 활동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실제로 언어를 말하는
것은 공동 사회 활동의 일부, 즉 복잡하게 뒤얽힌 (우리에게 자연적
으로 주어진) ‘삶의 형식’에 포함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데 있다. 비
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의 용법에는 다양한 쓰임
이 있음을 주목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언어놀이에 대한 개념은 이미
중기의『청색책』에서 등장하고 있다.
부여한 규칙과 같은 것을 말한다. 구성적 규칙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집
합적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명령문보다는 보통 서술문으로 표현되어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가령 테니스를 정의하는 구성적 규칙이
없이는 한 점을 따거나 한 세트를 이기는 것은 물론 서브를 하거나 서브를
받는 행위가 불가능하다. 다른 한 편, 규제적(regulative) 규칙은 개별적으
로 완전한 의미를 지니며, 서술문보다 보통 명령문으로 표현되며, 그 규칙
에 의해서 조정하려는 동작이나 행위를 이미 가능한 것으로 전제한다. 체
스의 규칙이 구성적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하여 체스의 전략은 규제
적 규칙이다. 뉴턴 가버 ․ 이승종,『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 이승종 ․ 조성
우 옮김, 민음사, 1998, 173쪽.
18)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있어서 ‘언어놀이’, ‘규칙’, ‘실천’, ‘삶의 형식’
등은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100 • 수사학 제 8집

 


나는 미래에 되풀이해서 내가 언어놀이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들
에 여러분들의 주의를 돌릴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매우
복잡한 일상 언어의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식들보다 단순한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식들이다. 언어놀이들은 어린애가 낱말들을 사용하기 시
작하는 언어의 형식들이다. 언어놀이에 대한 연구는 원시적인 언어
의 형식들이나 원시적인 언어의 연구이다. 우리가 참과 거짓, 명제
의 실재와 불일치, 주장, 가정, 그리고 물음 등의 본성에 대한 문제
들을 연구하려 한다면, 우리가 매우 복잡한 사유의 과정과 같은 혼
란한 배경이 없이 이러한 사유의 형식들이 나타나는 원시적인 언어
의 유형들을 보는 것은 상당히 유리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언어
의 단순한 형식들을 볼 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의 쓰임을 가린 것
처럼 보이는 안개는 사라진다. (BB, 7쪽)
중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언어놀이 개념을 착상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의도들이 있었다. 수학의 ‘계산’을 ‘놀이’(게임)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함으로써 수학기초론에서 논의되는 플라톤적 실
재론이나 유명론적 형식주의와 다른 차별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었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놀이가 그 자체로 어떠한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계산 체계 역시 그 자체로 완전하며, 놀이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구성 혹은 발명된 것처럼, 수학 역시 마찬가지
이며, 놀이가 자율적인 것처럼, 계산 체계 역시 자율적이라는 점이
깔려 있다. 이러한 놀이의 개념은 언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놀
이(게임)에서 규칙의 역할은 언어에서 규칙의 역할과 유사하다. 놀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놀이 역시 인간의 자율적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 혹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고정된 규칙에 의거한
계산 개념은 일상 언어의 유연함과 다양성을 말하는 데는 한계가 있
다. 이상언어에 입각한 논리적 사고로부터 일상 언어에로 전환을 모
색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서 충분하게 엿볼 수 있다.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1

 

우리가 실제의 언어를 더욱 정확하게 고찰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
구 사이의 충돌은 더욱 강해진다. (논리학의 수정체 같은 순수성은
실로 나에게 탐구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였다.) 그 충돌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 요구는 이제 공허한
어떤 것으로 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는 그 조건이 이상적인,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걸어갈
수도 없는 빙판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걸어가고 싶다; 그렇다면 우
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대지로 되돌아가자! (PI, §107)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삶의 세계는 수많은 우연성들이
작동한다. 이러한 세계를 논리적 참과 거짓이라는 이상언어로 그려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마찰이 있는 일
상 언어로 관심을 돌린 것은 일상 언어의 다양한 쓰임과 맥락을 무
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언어의 실천적 활동을 주목하며
언어놀이가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의 글은 언어
놀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으며 언어놀이
의 다양한 목록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기호들’, ‘낱말들’, ‘문장들’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상이한 종류
의 사용이 있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고정된 것, 딱 잘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새로운 유형들, 새로운 언어놀이들이라
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고, 다른 것들은 낡은 것이 되어 잊혀
진다. (수학의 변화들이 우리에게 이에 관한 하나의 대략적 그림을
줄 수 있다.)
‘언어놀이’란 낱말은 여기서,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활동의 일
부, 또는 삶의 형태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들에서, 그리고 다른 예들에서 언어놀이의 다양성을
똑똑히 보라:
명령하기, 그리고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
어떤 하나의 대상을 그 외관에 따라서, 또는 측정한 바에 따라서 기
102 • 수사학 제 8집

 

술하기-
어떤 하나의 기술(소묘)에 따라 어떤 대상을 제작하기-
어떤 하나의 사건을 보고하기-
사건에 관해 추측들을 하기-
어떤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검사하기-
실험결과들을 일람표와 도표로 묘사하기-
어떤 하나의 이야기를 짓기; 그리고 읽기-
연극을 하기-
윤무곡을 부르기-
수수께끼 알아맞히기-
농담하기; 허튼소리하기-
어떤 하나의 응용 계산 문제를 풀기-
어떤 한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부탁하기, 감사하기, 저주하기, 인사하기, 기도하기. (PI, §23)
그렇다면 언어를 놀이와 관련시키는 궁극적 이유는 무엇인가?
언어와 의미는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러
한 실천적 행위의 문맥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
의 사용에 있어서 의미와 행위 간에는 놀이가 연관되어 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낱말이 의미를 얻는 다양한 언어놀이를 (사
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연사와 관련시킨다. “명령하기, 질문
하기, 말하기, 잡담하기는 걷기, 먹기, 마시기, 놀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연사의 일부이다.” (PI, §25)19) 자연사의 일부인 언어놀
이는 어떤 하나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 그
리고 유사성으로 중첩된 인간의 실천적 활동과 관련된 복잡한 네트
워크를 형성한다. 이런 이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를 ‘가족유사
19) 자연사와 관련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다음의 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
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인간 존재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이다. 그러
나 우리가 불러일으키려는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
문에 아무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확인이다.” (PI, §415)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3

 


성’(family resemblance)으로 설명한다. 밧줄은 그것을 형성하는 많
은 섬유들이 중첩됨으로서 강한 힘을 갖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관
통하는 언어놀이 역시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유사성으로 중첩되었
을 경우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언어놀이는 언어적 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사학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20) 말과 글
의 긴장 관계를 수사학적 힘으로 해소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수사학에 대한 관심은 “철
학은 한 편의 시처럼 쓰듯이 해야만 한다” (CV, 28쪽)는 구절에서
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연하고 자유로운 글
쓰기를 옹호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일
상에서 익숙한 나머지 지나치기 쉬운 언어적 문제들에 대해 근원적
으로 묻고 생각하는 엄정한 과정을 통해 자기 식의 명확한 글쓰기
를 한다. “올바른 문체로 쓴다는 것은 차량을 철로 위에 한 치의 어
긋남도 없이 올려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CV, 44쪽) 그의 글을 자
세히 살피면 거기에는 은유와 유추를 통한 수사학적 표현의 힘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이라는 거대담론이 일으킨 혼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태도의 변화, 혹은 봄의 방식의 변화가 요구된
다. 이러한 봄의 방식의 변화는 지적인 영리함보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함으로써 일상의 언어 사용에서 잠재된
이해와 느낌의 지평을 재발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항상 영
민함의 척박한 산정에서 내려와 어리석음의 푸른 계곡으로 들어가
라.” (CV, 86쪽)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의 기술
에 의해서 철학적 문제와 오해들이 해소되고 제거되어야 하는 문법
적 탐구이다. 개념적 관계에 대한 고찰은 ‘문법적 주석’ (PI, §232)
20) 박만엽, “후기 비트겐슈타인 텍스트의 수사학적 읽기”,『수사학』, 제7집,
한국수사학회, 2007, 75-98쪽, 참조.
104 • 수사학 제 8집

 

내지는 ‘문법적 고찰’ (PI, §574)이다. 논리적 물음들은 실질적으로
문법적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는 무엇 때
문에 생기는가?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된 원천은 우리가 우리의 낱말들의 사용
을 명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문법에는 명확성이 결
여되어 있다- 명확한 묘사가 이해를 성립시키며, 이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연관들을 보는’ 데에 존립한다. 매개적인 중간고리들의 발견
과 발명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I, §122)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들은 분명히 단 하나의 용법만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언어놀이의 다양성은 단순히 언어의
유사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차이에 의해서도 밝혀질 필요가 있다.
어떤 한 낱말의 사용을 지배하거나 그 낱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명확한 규칙을 제시한다는 생각은 철학적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철학적으로 혼란된 사람은 말이 쓰이는 방식에서 하나의 법칙을 본
다. 그리고 이 법칙을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그것이 역설적 결과로
이끄는 경우에 부딪치게 된다.” (BB, 27쪽) 더군다나 우리가 일상적
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표현들은 물론 철학적으로 흥미 있는 표현
들조차도 그것들은 엄격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며 엄격한 의미를 갖
지도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설명으로서의 철학을 배격하고 철학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한다. “어떠한 철학도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해를 주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철학은 언어의
사용을 단지 기술할 뿐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언어의 사용에 대한
기초를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
아둔다.” (PI, §124) 철학의 설명적 측면을 배격하는 그의 생각은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의미’가 어떤 정신적 실재나 활동을 가리킨다면, 우리가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5

 

행하는 언어놀이의 모든 측면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
러나 언어놀이는 “아무 것도 감추어져 있고, … 아무 것도 숨어있지
않은” (PI, §435)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아픔과 같은 사적인 감각
이 아픔에 대한 언어놀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철학이 궁극적으로 문법적 규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문법적 규칙의 명료화를 통해서 철학적으로 혼동을 일으킨 문제들
과 역설들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물속에 있는 설탕이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그러한
문제들이 사라지는 문법적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에 실패하는 데서
기인한다. 과학의 문제는 그 특성상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있는 반면
에, 철학의 문제들은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 과학과 달리 철학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21) 비트겐슈
타인에 의하면, 뜻의 한계와 한 표현의 사용에 대한 규칙을 결정하
는 문법은 언어의 옳은 사용을 결정할 수 있는 지표로서 ‘언어의 회
계장부’ (PG, 87쪽)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법은 논리적 필연성 혹은 필연적 진
리에 대한 지식의 근원, 언어와 실재 간의 본질적 연관성 혹은 사고
법칙의 영원성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회의적 생각을 불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철학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문제들과 거짓
으로 점철된 신비적 분위기는 ‘한 방울의 문법에로 응축된 철학 전
체의 구름’ (PI, 222e)에 의해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다.
언어에 대한 문법적 고찰을 탐구한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는 언어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처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생각을 언어와 문법의 임의적이며
자율적인 특성과 관련짓는다.22) 그렇게 함으로써『논고』에서 다루
21) Hacker, Wittgenstein's Place in Twentieth-century Analytic Philosophy,
Blackwell, Oxford, 1996, 109-110쪽, 참조.
106 • 수사학 제 8집

 

었던 실재적인 언어의 논리적 형식에 대한 이론을 포기하는 대신에,
후기에서는 일상적인 언어의 문법적 측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체계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그물망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을 구성하는 규칙들의 체계로서 문법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언어놀이를 통해서 낡은
언어들이 도태되고 새로운 언어의 유형들이 생기는 것처럼, 철학에
서도 다양한 개념의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5. 나오는 말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통은 알지 못할 미래의 즐거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데리다와 비트
겐슈타인 역시 철학이라는 기존의 권위에 서슴없이 저항하면서 고
통을 감내했던 자들이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비교하는 작업이
가능할까? 이러한 회의적 물음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와 비트겐슈타
인은 공통점과 차이들이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로고스(진리) 중
심의 거대한 철학적 담론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일치
22) 1929년 초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현상론을 “물리학이 이론을 구축하는
그러한 사실들을 기술하는 문법” (WA, I 5)으로 기술했다. (이 구절은『철
학적 고찰』§1에서 다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결과로 비트겐
슈타인의 문법의 개념은 변해야만 했다. 1933년에 대타자본(Big Typescript)
(여기서『철학적 문법』이 발췌되었다)을 쓸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의
규칙은 그것들이 의미를 결정하고 그러므로 앞서 있는 의미나 실재에 대해
서 책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임의적이며 자율적이라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법적 규칙들은 자율적이다. Marion, Wittgenstein,
Finitism, and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larendon
Press, 1998, 142쪽.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7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진리 중심의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철학
보다는 수사학에 그리고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을 중시했으며, 언어
(놀이)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같은 철
학 운동에 개입한 것으로 평가한 로티(R, Rorty)의 평가도 그런대
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특히 필자는 이들이 (그동안 폄하되어 왔
던) 수사학의 지평을 여는 데 강력한 촉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이들을 통해 진리와 논리로 무장한 거대한 빙하(거대담론)의
밑바닥을 관통하려는 수사학의 솟구침을 들을 수 있었다.
텍스트, 수사학 그리고 언어놀이 개념을 중심으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주장하는 데리다의 논
의는 결국 텍스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
에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 안에서 행해지는 차연의 놀이는 언어와
의미의 지속적인 차이와 연기를 끝없이 진행하는 일종의 힘과 같은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복잡하
게 뒤얽힌 삶의 형식을 완전하게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 안
에서 그려진 세계는 마찰이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가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일부라는 생
각과 맞닿는다. 비트겐슈타인은 관성에 길들여진 우리의 사고를 질
타하면서 사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봄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
다. 왜냐하면 사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은 철학적 믿음들에 의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자라온 삶의 방
식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과
세계를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은 텍스트로
시작되지 않는다.
둘째, 데리다 자신이 포스트모던한 사상가 그룹에 속하는 것
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건대 데리다는 포스
108 • 수사학 제 8집

 

트모던한 경향이 강하게 있다. 문자의 억압을 주도했던 음성중심주
의를 해체하는 데리다의 교란 전략은 질서에 잠복해있는 무질서를
회생시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아방가르드한 텍스트 퍼
포먼스를 스스로 연출하고 연기를 한 사람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
다. 문제는 이항 대립적 질서를 해체하는 데리다의 목소리가 (스스
로 차연의 논리/놀이에 함몰되면서) 잘 들리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현란한 춤동작과 함께 랩을 역동적으로 부르는 래퍼의 목소리
가 중간 중간 파열되면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자신의 사고와 글쓰기에 언제나 엄정했던 비트겐슈타인
은 진리 중심의 형이상학을 거부한 점에서는 포스트모던한 사상가
에 포함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가 않게 보
아진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어느 주의에도 어느 학파
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과 자신에 대해 치열할 정도로 진솔
성을 가졌던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모던의 정점에 있는 (고급의)
문화와 예술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낱말은 오직 삶의 흐
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는 언어적 패러다
임의 전환으로서 수사학적 힘이 담겨있다. 결론적으로 텍스트와 수
사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개념을 통해서 더욱 그 지평을 넓
힐 수 있을 것이다.23)
23) 이 글은 한국수사학회/한국텍스트언어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2007년 (11
월 17일, 성신여자대학교) 가을철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특히
본 논문의 논평을 맡아주셨던 김종갑, 박우수 선생님의 비판적 지적에 감
사를 드린다. 그리고 본 논문을 최종적으로 심사하시면서 좋은 지적을 해
주신 익명의 심사위원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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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시칠리아의 암소』, 문학과 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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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가버 ․ 이승종,『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 이승종 ․ 조성우 옮김,
민음사, 1998.
니콜러스 로일,『데리다의 유령들』, 오문석 옮김, 앨피북, 2007.
데리다,『목소리와 현상』, 김상록 옮김, 인간사랑, 2006.
박만엽, “후기 비트겐슈타인 텍스트의 수사학적 읽기”,『수사학』, 제7집
/2007.
양은석,『논리철학』(미출간본), 2007.
이진경, “미셸 푸코와 담론 이론: 표상으로부터의 탈주”,『철학의 탈
주』, 새길, 1995.
제프 콜린스,『데리다』, 이수명 옮김, 김영사, 2003.
크리스 젠크스,『문화란 무엇인가』, 김윤용 옮김, 현대미학사.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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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 그 새벽, 시인이 서 있는 곳은,ㅡ 2016-05-16 0 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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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 비긋는 아침, 당신의 고해소는 어디?... 2016-05-16 0 4240
1428 교훈조의 詩는 좋은 詩가 아니다 2016-05-15 0 4878
1427 잊혀진 시인 찾아서 - 설창수 시인 2016-05-14 0 4793
1426 잊혀진 시인 찾아서 - 김종한 시인 2016-05-14 0 5446
1425 동시인 김득만 "365밤 동요동시" 출간 2016-05-14 0 4904
1424 사랑의 방정식 2016-05-14 0 4710
1423 울음상점에서 만나다... 2016-05-13 0 4424
1422 시인의 몸에 몇개의 지문이 없다... 있다... 2016-05-13 0 4720
1421 시작의 첫 줄에 마음 써라... 2016-05-12 0 4391
1420 시의 이미지는 진화한다... 2016-05-12 0 5203
1419 [안개 푹 설레이는 아침 시 한컷]- 옛 엽서 2016-05-12 0 4470
1418 왁자지껄한 평화속에서 꽃 피우라... 2016-05-11 0 3986
1417 아이는 삶으로 뛰여든다... 2016-05-10 0 4226
1416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2016-05-10 0 4288
1415 살구나무에 몸을 비벼본다... 2016-05-10 0 4533
1414 하이쿠 = 17자 2016-05-10 0 4386
1413 구체시 = 구상시 2016-05-10 0 4741
1412 혁명시인 - 김남주 시모음 2016-05-07 1 4968
1411 민족시인- 김남주를 알아보기 2016-05-07 0 5539
1410 [한밤중 詩 읊다]- 우리 엄니 2016-05-07 0 4741
1409 눈(안眼)인가 눈(설雪)인가... 2016-05-07 0 4476
1408 {이것도 詩라고 하는데...} 5월이 시작되다... 2016-05-07 0 4198
1407 詩人은 언어의 마술사이다... 2016-05-06 0 4166
1406 詩人은 현대의 돈키호테이다... 2016-05-06 0 4549
1405 詩人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2016-05-06 0 6712
1404 詩人은 골목길을 좋아한다... 2016-05-06 0 5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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