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꿈'은 황야를 달리고
한 해 저무네
머리에는 삿갓 쓰고
짚신을 신으면서
삿갓 하나, 봇짐 하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들면 어느 오두막에서건 잠시 숙소를 빌려 머무는 방랑 시인. 이것은 일본인이 가장 쉽게 떠올리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모습이다. "여기서 짚신을 벗어 쉬고 저기서 지팡이를 버리고 머물면서 나그네 잠을 자다가 한 해가 저무니"라고 시의 배경에 대해 쓴 전서(前書)가 붙어 있는 위의 하이쿠(俳句)
1)는 1684년 12월 말, 바쇼가 여행 중에 고향인 이가 우에노에 들러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읊은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 그에게 고향은 더 이상 돌아가 머물 안식처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 세상 모든 곳을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숙한 인간이라고 했던가. 이 하이쿠 작품에서는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라도 설을 맞기 위해 고향을 찾는 세밑, 또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는 바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94년 음력 10월 12일, 여행 중에 들렀던 오사카에서 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숨을 거두기까지, 바쇼는 은둔과 여행을 반복하며 오로지 하이쿠 외길의 삶을 살았다. 향년 51세로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읊었던 하이쿠는 이렇다.
여행길에 병드니
꿈은 저 황야를
헤매고 다니네
1694년 10월 8일 한밤중, 열흘 전부터 심한 설사로 자리에 눕게 된 바쇼는 자신을 간호하던 이에게 먹을 갈게 하여 이 하이쿠를 종이에 적는다. 그리고는 병상을 지키던 제자 시코에게 이 작품을 보이며, "꿈은 저 황야를 / 헤매고 다니네"와 "더욱 헤매고 다니는구나 / 꿈속에서는"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묻기도 한다. "여행을 하다가 병이 들어 눕게 되니, 저 황량한 들판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꿈을 꾸게 되는구만.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신없이 헤매고 다니는 거야." 바쇼는 여행 중에 앓아누운 자신을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제자에게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말했던 것일까. 원문을 직역하면 꿈을 좇아 "헤매고 뛰어다닌다"고 해석될 만큼 절실함이 베어 있는 이 작품은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시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하이쿠의 성인(聖人)으로 신격화될 만큼 일본의 전 문학사를 통틀어서 일본의 대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나아가서 일본인이 세계를 향해 자기 나라의 문학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시인이 되었다.
옛날에 일본에는 죽음에 임박한 시인이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는 '사세(辭世)의 시'를 읊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위의 하이쿠는 바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읊은 '사세의 시'라고 하기에는 이 세상과 시에 대한 집착, 그 '꿈'이 너무 집요하지 않은가. 세속을 초월하여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하면서 하이쿠를 위해 정진했던 시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이 집착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쇼는 이 시에 '병 중에 읊음'이라는 전서(前書)를 달아서 사세의 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평소 사는 것 그 자체가 사세"라고 말했던 그의 말대로 이 대시인에겐 사세의 시가 없다.
시인 자신이 결코 사세의 시로 읽히기를 거부했던 시. 그러나 일본의 사세의 시를 말할 때는 위와 같은 에피소드와 더불어 언제나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시. 사세의 시든 아니든, 생애 마지막에서조차 자신이 평생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을 찾아 겨울의 황야를 헤매는 이 시인의 '꿈'의 간절함과 절박함, 비통함은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는 '나'의 발걸음을 문득 멈추게 한다. 언젠가 올 삶의 마지막날, '나'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 아니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싶은가 하고.
하이쿠는 '풍아(風雅)'2)이다
1680년 겨울, 근세 일본의 정치 중심지였던 에도 시내에 정착해 살던 바쇼는 갑자기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 후카가와의 작은 오두막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해 봄, 친구 리카(李下)가 어린 파초 한 그루를 보내오자 그는 이 파초를 오두막 한 켠에 심었는데, 파초가 있는 이 오두막은 어느새 '바쇼암(芭蕉庵)'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파초가 있는 오두막에 사는 이 은둔 시인은 '바쇼(芭蕉)'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바쇼'는 이 시인의 대표적인 별호가 되었다. 바쇼암은 자칫 암자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처럼 파초가 심어진 조그만 오두막, 바쇼의 은둔처였다.
파초가 있는 오두막에서의 은둔 생활 첫해, 가을 태풍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밤, 바쇼는 커다란 파초 이파리를 거세게 헤집으며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하이쿠를 읊는다.
파초 태풍에 날리고
대야의 빗방울 소리를
듣는 밤이로다
일본은 기후 풍토상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많은 태풍이 온다. 지난 2004년에는 무려 13번이나 왔다고 한다. 이 하이쿠를 보면, 바쇼는 태풍 속에 찢겨지는 파초의 이파리 소리를 들으며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비바람에 쉬이 찢기는 연약함' 때문에 파초를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자신의 별호를 '후라보(風羅坊)'라고 지었다.
그 사람 후라보(風羅坊)는 교쿠(狂句)를 즐기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은 그의 일생을 건 일이 되었다. 어떤 때는 싫증이 나서 던져버릴까 생각하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열심히 노력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려 하기도 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다가 그 때문에 심신이 더러 편치 못했다. 한 번은 남들처럼 출세하기 위해 뜻을 세운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방해가 되어 안 되었고, 또 언젠가는 불교를 배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려 한 적도 있지만 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무능무예(無能無藝)의 오로지 이 길 하나로 살게 되었다.
사이교
3)의 와카, 소기의 렌가
4), 셋슈
5)의 그림, 리큐
6)의 다도(茶道), 이들의 근저를 관통하여 흐르는 정신은 하나이다. 풍아(風雅)라는 것은 천지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로 삼는 것이다. 보는 것 모두 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가 달이 아닌 것이 없다. 그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미개인과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을 보고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야만인이나 새, 짐승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그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 『오이노 고부미 기행』
1687년 음력 10월 초, 나라와 교토 등지로 떠났던 여행에 대해서 쓴 이 기행문의 서문에서 바쇼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예술에 대해서 매우 고조된 어조로 말하고 있다. "하이쿠는 풍아이다." 그는 이 선언을 하기까지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하이쿠에 걸었던 것이다. 말장난으로서의 하이쿠가 아니라 풍아로서의 하이쿠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에 차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해서 '풍아'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렇다면 도대체 풍아란 무엇인가.
풍아(風雅)의 어원은 중국의 『시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풍(風)'은 민간에서 행해지는 가요, '아(雅)'는 조정에서 불려지는 우아한 시가를 말하다가, 나중에는 『시경(詩經)』의 시 전체를 일컫는 말로 '시가 문장의 도(道)'나 예술 전반을 나타내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풍아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특히 품위가 있고 귀족적인 것을 나타낼 때, 즉 정통적인 예술 일반에 대해서 이 말이 쓰여졌다. 따라서 전쟁으로 얼룩져 있던 일본의 중세 시대, 그 하극상의 시대에 일본의 정통 시가인 렌가를 패러디하면서 전통을 뛰어넘고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생겨났던 하이쿠는 결코 '풍아'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바쇼도 말하고 있듯이 '보잘것없고 장난스러운 시', '교쿠(狂句)'였다.
꽃(하나) 보다도
코(하나)에 있었구나
벚꽃 향기는
초창기 하이쿠 시인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가 읊은 이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 하이쿠 문학은 이처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거나 재미난 비유를 통해 우아하고 고상한 정통 문학의 세계를 패러디했다. "봄 안개마저 / 얼룩얼룩 피어나네 / 호랑이해에는", "알 수 없는 세상이로고 / 석가모니의 죽음 뒤에 / 금전이 있네" 이 작품들은 바쇼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것이지만, 이처럼 '풍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바쇼는 이처럼 언어유희적인 하이쿠를 배우고 성장한 사람이었지만, 언어유희적인 하이쿠의 안티테제로서 자신의 하이쿠를 일구어 나갔다. 그가 하이쿠의 예술적 완성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은둔, 그리고 여행이었다. 말하자면 생활의 실천을 통한 예술적 완성을 시도한 것이다.
나의 풍아(하이쿠)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오랜 전란이 이어졌던 일본의 중세 시대
7) 사람들은 내일의 목숨을 알 수 없었기에 이 세상을 쓰라리고 근심 많은 난세(亂世), 이른바 '우키요(憂世)'로 보고, 그 덧없음을 '무상(無常)의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문학으로 형상화시켰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태평성대를 구가한 근세에 이르자, 이 세상은 즐길 만한 것, 잠깐 머물다 갈 현세라면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뜬 세상'의 '우키요(浮世)'라 생각하고 현실에 매우 충실한 문학을 시도했다. 우리나라와의 관련에서 보자면 임진왜란 직후에 해당하는 일본의 근세의 '우키요'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는 이토록 달랐다.
일본의 근세 시대, 현실적 쾌락 지향형의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향유하는 사람들은 무사로서 할 일이 없어진 하급의 무사 계급 출신과 이 시대에 새롭게 대두된 도시 상인 그룹인 조닌(町人)이었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성적 쾌락과 돈 버는 일. 이 두 가지 소재는 다양하게 소설로 쓰여지고 가부키 연극으로 상연됨으로써 근세라는 공간을 향락주의로 넘치는 '뜬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시기 문화의 내용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세속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조닌 문화의 감각적 쾌락주의와 무사 문화의 금욕적 윤리 가치의 이중구조가 같은 틀 안에서 발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뜬 세상'의 시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했던 시대, 바쇼는 이 같은 세상의 흐름의 어느 것과도 다른 삶을 지향했다.
나의 풍아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일반 사람들의 취향과는 달라서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오.
-「교리쿠(許六)와의 이별사」
무사 출신의 제자로 공직에 있으면서 그림을 잘 그렸고 하이쿠도 잘했던 모리카와 교리쿠(森川許六)가 에도 근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스승 바쇼는 제자를 보내는 아쉬움을 담아 긴 이별사를 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풍아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바쇼가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이룩한 풍아, "보는 것 모두, 생각하는 것 모두가 꽃과 달이 아닌 것이 없다"고 그토록 고조된 어조로 말하던 그 '풍아'가 아무데도 쓸 데가 없다니. 그러나 바쇼는 이 말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요약했다.
이른바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1997년엔가, 나는 예기치 않은 데서 이 말을 듣고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개혁을 부르짖던 젊은 정치인 몇 명이 선거에 패배하자 여의도에 '하로동선'이라는 식당을 냈던 것이다. 당시 그것은 꽤 화제가 되었는데, 바쇼의 '하로동선'적인 삶과 문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식당 이름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70~80년대엔 민주투사로 활약하다가 90년대 초반엔 일선 정치에서 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온몸으로 부르짖던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자 느닷없이 '여름날의 난로, 겨울의 부채'라는 이름의 식당이라니···.
신문에 실린 음식 나르는 그들의 모습에선 '와신상담(臥薪嘗膽)'과 같은 치열함과는 다른, 아웃사이더를 선언하고 생활전선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담박함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그 '하로동선'을 꿈꾸었던 정치가들은 지금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정치적 실세가 되어 '참여'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하로동선'과 '참여', 가장 먼 개념의 말을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자신들의 지향점으로 삼은 사람들의 행로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또 그들이 도모하는 일이 위태위태해 보일 때, 나는 '하로동선'을 표방했던 수년 전의 그들의 담박했던 표정과 실천적 삶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부디 나의 기대가 저버려지는 일이 없기를···.
그렇다면 바쇼가 말하는 '하로동선'은 어떤 것일까? 바쇼의 태생 자체가 아웃사이더였고 하이쿠라는 문학 자체가 당대의 주류이기보다는 아웃사이더인 서민 중심의 문학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바쇼의 행보와 지금의 하이쿠 존재 양상, 그리고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일본 문화의 독특한 일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참여'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불참'이야말로 하이쿠라는 시를 문학적으로 독립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의 여정을 좇아가 보자. 1684년 음력 8월, 바쇼는 4년간의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며 읊는다.
들판의 해골로
뒹구리라 마음에 찬 바람
살 에이는 몸이로다
- 『노자라시 기행』
'노자라시'는 '해골'이란 뜻이다. 이른바 '들판에 나뒹구는 해골'이 되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차서 떠나온 여행 도중에 강가에서 울고 있는 '버려진 아이'를 보게 되었을 때, 바쇼는 묻는다.
잔나비 울음 듣는 이여
버려진 아이에게 가을 바람 부네
어떤가
- 『노자라시 기행』
"예로부터 시인들은 잔나비 우는 슬픈 소리에 소매를 적시며 여행을 했다지만, 나는 이 가을 여행길에서 하필 버려진 아이까지 서럽게 울어대는 모습과 맞닥뜨렸습니다. 옛 사람이여, 가을바람 속에서 우는 저 아이를 그냥 보고 지나칠 수밖에 없으니, 저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바쇼는 이 하이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버려진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러한 때, 그는 옛 시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끝없이 묻는다. 그리고 이 여행의 끝자락에서는 여행 출발 당시 '들판의 해골' 운운하며 비장한 포즈를 취했던 자신을 야유한다.
죽지도 않은
나그네 길의 끝이여
가을 저물녘
- 『노자라시 기행』
"여행을 떠나올 때는 결국 이 여행 중 어느 들판에선가 죽게 될지도 모르리라 싶어 각오를 단단히 했건만, 이렇게 죽지도 않고 여정을 풀었네. 때마침 계절은 늦은 가을, 한숨을 돌리고 나니 오히려 여행의 쓸쓸함이 가슴에 파고드네." 바쇼는 자신의 여행 끝에서 이렇게 자조 섞인 쓸쓸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문학적으로 성공했고 많은 제자와 문하생을 두게 된 그는 여전히 자기 야유 속에 자신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임종을 맞이하기 2주일 전, 바쇼는 1694년 9월 26일 오사카에서 열린 하이쿠 모임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번 가을에는
왜 이리 늙는 것일까
구름 속의 새
이 길이여
가는 사람도 없이
가을 저무네
이 하이쿠들을 읊고 난 이틀 뒤, 9월 28부터 그는 앓아누웠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새, 자신이 50평생을 통해 그토록 갈망해 온 하이쿠의 길에는 가는 사람도 없는데, 가을은 저물어 가고 있다는 담담한 토로. 이처럼 그의 야유는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향해 있다. 결코 세상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그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그 자신을 가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동시대의 사회가치로부터 도피를 위해 은둔을 하고, 나아가서 여행을 떠남으로써 특정한 도시(에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바쇼. 그는 은둔과 여행을 통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고 스스로 자기 소외를 도모했다. 그는 끝내 '시대'에도 '계급'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나의 풍아는 하로동선, 즉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고 말하며, '무용(無用)의 미학'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예술적 순수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의 시, 하이쿠
1980년대 중반, 일본 유학 중에 하이쿠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생소했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 피어있는 꽃과 지저귀는 새들과 저 산을 넘어가는 구름을 그토록 섬세하게 묘사하는 시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러한 시의 창작과 감상에 열중하는 일본인의 열정, 나아가서 하이쿠에 심취한 서양 사람들의 하이쿠 예찬이 더욱 놀라웠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다 만 것 같은 시, 이렇게 단순한 시, 이렇게 시대와 무관한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단 말인가. 일본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시인은 잠수함의 새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잠수함에 산소가 모자라면 가장 먼저 알아채고 우는 새, 그 새의 울음이 배 안의 사람들을 일깨워야 하는 것처럼 시대의 공기 속에 산소가 모자랄 때 그 상황을 시로 읊어야 하는 것이 시인과 시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이쿠 속의 꽃과 나무는 너무나 생소할 것이다. 이데올로기 지향적이며 시와 시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우리나라 시의 저 먼 대극점, 그곳에 하이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눈앞의 자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일상의 한순간을 사진 찍듯이 언어로 읊어내서 다른 사람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며 옆 사람과 대화하게 하는 시가 곧 하이쿠다. 17음절의 그 사소함과 섬세함이 빚어내는 자연 친화적인 시 세계 속에 거대한 시대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현세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바쇼와 같은 삶을 지향하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까. 평생 동안 시대와 계급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고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로서 '무용자(無用者)'의 삶을 살았던 바쇼의 문학은 뜻하지 않은 데서 빛을 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고전 교육은 여러 가지로 수난을 받았는데, 바쇼의 하이쿠와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문예적 교재'로 분류되어 그러한 시대적 수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패전 후 많은 고전 작품이 천황 이데올로기와의 관련 때문에 경원시 되었던 시기에도 여전히 바쇼의 하이쿠와 기행문은 교과서에 실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쇼는 명실공히 근대 이후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일본의 '국민 공유의 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일본의 지식인과 대중으로부터 동시에 사랑받는 가장 대표적인 시인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연구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하이쿠 역사 500년, 지금 일본에서 하이쿠를 읊는 사람은 500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정통을 패러디하던 장난스러웠던 시 하이쿠는 이제 일본인의 시심(詩心)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형식으로 통한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의 담론에는 '참여'하지 않고,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하고 표현함으로써 서로의 일상을 공감하는 장으로서의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일본인의 일상을 노래하는 17음절의 시 하이쿠, 그 짧고 사소한 시가 '풍아'로 되기까지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시로 남아있기까지, 그 이면에는 일본어의 시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며 스스로 '무용자(無用者)'의 삶을 실천했던 바쇼가 있었다.
그가 생애 마지막 순간의 '꿈'속에서까지 황량한 벌판을 헤매면서 찾고자 했던 진정한 시의 세계에 대한 절실한 갈구 그리고 거기에 화답하려고 애썼던 많은 제자와 문하생과 대중이 이루어 낸 하이쿠의 역사를 보며, '무용(無用)의 용(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하이쿠라는 정형시(5ㆍ7ㆍ5의 음수율)가 500년이나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문화는 전반적으로 형식을 존중하고 그 형식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호인층을 형성하는 성격이 있다. 하이쿠의 발전과 계승, 현재 하이쿠 향유 양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일본 문화적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바쇼는 제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문학에서 보이는 고독한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닐까?
바쇼에게는 무사와 도시 상인 등 신분을 뛰어넘은 제자들이 많았는데, 바쇼가 이렇게 유명해지기까지는 그들의 역할이 컸다. 평생 개인 시집이나 시론집을 낸 적이 없는 바쇼이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 그는 인간을 싫어해서라기보다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을 했고, 속세에서 살았던 제자들은 바쇼와의 하이쿠 모임을 통해서 문예공동체로서의 집단을 형성했다.
3. 일본 천황이 읊은 하이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이쿠는 정통을 패러디하던 시, 서민의 시였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시의 형식에 따라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이 달랐는데, 원래 천황이나 귀족이 읊던 시는 5ㆍ7ㆍ5ㆍ7ㆍ7의 음수율에 의한 시 '와카(和歌)'였다. 근대에 들어서 이러한 전통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지금도 천황은 와카만을 창작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조를 왕부터 서민까지 모든 계층이 향유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바쇼의 하이쿠 기행』,
마츠오 바쇼 지음ㆍ
김정례 역주, 바다출판사, 1998.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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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ㆍ7ㆍ5의 음수율에 의한 정형시. 시 속에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인 기고(季語)가 들어 있어야 한다. 바쇼의 시대에는 하이쿠를 하이카이 또는 홋쿠라고 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하이쿠로 통용된다.
-
2) 원래는 시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품격 있는 예술을 뜻하게 되었다. 바쇼는 자신의 시를 이야기할 때 특히 이 말을 즐겨 썼다.
-
3) 무사계급 출신의 승려이며 일본 전국을 여행했던 시인으로 바쇼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바쇼의 동북 지방 여행기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는 사이교와 관련된 장소가 많이 나오는데, 이 여행이 사이교 500주기(1689)를 추모해서 기획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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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러 사람이 함께 읊는 렌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각 지방 영주들의 초대를 받아 일본 전국을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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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가이며 승려로 명나라에 유학하여 일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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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 다도를 완성한 사람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도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나중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할복자살했다. 바쇼는 당시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읊던 하이쿠 모임이 추구하는 세계를 강구함에 있어 다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
7) 1192년에서 1603년까지의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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