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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정화가 된 "저체온의 성스러운 언어"로 시를 써야...
2016년 12월 22일 18시 54분  조회:2651  추천:0  작성자: 죽림

가혹한 운명의 겨울에 맞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슬픔으로 
불씨 피워 빚어낸 詩라는 結晶… 비탄에 젖기보다 황홀을 찾아내 
황폐한 풍경을 견디게 하니 겨울을 깨달음의 계절로 만드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러시아 시인 예세닌이 쓴 시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의 일부다. 첫눈을 맞은 기쁨을 '더운 피'로 표현했다. 혹독한 추위는 사람의 몸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의 의식을 일깨우기도 한다. 가벼운 겨울바람은 적당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뜨겁게 자작나무를 껴안겠다고 한 예세닌을 비롯해 수많은 시인의 겨울 노래는 황폐한 풍경 속에서 비탄에 젖기보다는 황홀을 찾아냈다. 시인은 겨울 풍경에 투명한 언어를 투사하고 생각의 불씨를 피워 추위를 녹이며 순백의 미학으로 순수한 영혼을 그려내 왔다.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하는 시의 힘이다.

한국 현대시에서 겨울을 예찬한 시인을 꼽으라면 황동규 시인(78)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58년 스무 살에 등단해 지금껏 시를 써오는 동안 숱하게 겨울을 노래했다. '막막히 한겨울을/ 바라보는 자여,/ 무모한 사랑이 섞여 있는/ 그런 노래를 우리 부르자'라고 했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눈이 내리는 소리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라고도 했다. 그의 시에서 눈송이는 천상과 세속 사이에서 떠도는 존재의 비유이고, 얼음은 시인의 의식이 빚어내는 결정(結晶)이고, 눈 내리고 그친 순간의 적요가 겨울을 깨달음의 계절로 만들었다.

황동규 시인은 최근 낸 열여섯 번째 시집 '연옥의 봄'에서도 겨울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중 시 '나의 동사(動詞)들'이 대표적이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오랜만에 허브차를 마시며/ 생각이 조금 따뜻해지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나와 함께 살아온 동사들, 그중에도/ 떨구다 드러내다 털다의 관절들 아직 쓸 만하다/(중략)/ 가만, 현관 앞 나무들은 잔뼈들까지 모두 드러낸 채/ 추위를, 추위보다 더한 무감각을 견디고 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더 떨구거나 드러내야/ 점차 더 무감각해지는 삶의 표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60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이 요즘 아끼는 우리말 '떨구다'는 겸손, '드러내다'는 솔직, '털다'는 달관의 미덕을 각각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 정신의 경지는 나목(裸木)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절망하기보다는, 벌거벗었기에 더 감각이 예민해진 실존의 상징을 떠올리면서 삶이 지속되는 한 무감각해지는 것을 끝까지 경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감각은 시 '외등(外燈) 불빛 속 석류나무'에 쓴 '간지럼 타는 눈송이의 살갗/ 어둠 속에서/ 그 간지럼 전하는 공기의 미진동(微振動)'처럼 섬세한 의식의 촉수로 포착한 심상(心象)으로 드러난다. 그의 또 다른 겨울 노래는 '몸이 말한다'이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노령자 무료 독감 백신을 동네 병원에서 맞은 뒤 끙끙 앓고 나서 쓴 시다. '이제 감기 몸살하고도 인사 한번 나눠야 않겠나/ 빨리 가라고 자동차에 매질 않지만/ 재갈 물린 말은 채찍을 들어야 말처럼 달린다'며 노년의 건강한 해학을 풀어놓았다.

이처럼 자연의 겨울과 인생의 겨울을 버무린 시집 속에는 연작시 '연옥의 봄'도 들어 있다. 기독교에서 연옥(煉獄)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장소를 가리킨다. 세속에서 죄짓고 온 인간 영혼이 고통을 겪고 정화되면 천국의 문으로 간다고 한다.

황동규 시인은 현존하면서도 연옥에 있다고 상상한다. 지난 몇 년 사이 오랜 친구들이 잇달아 세상을 뜨면서 허탈한 고통을 자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히 죽음을 다룬 시를 자주 쓰면서 현실도 초현실도 아닌 정화계(淨化界)를 체험했기에 지금-이곳은 연옥이기도 하다. 종교적으로 연옥은 명계(冥界)이므로 황폐하고 어두운 겨울의 이미지에 가깝다. 문학적으론 고통의 승화가 향기롭게 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노년의 삶을 '연옥의 봄'이라 부른 모양이다.

시인은 또 다른 겨울 노래인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에서 눈 내리는 폐광촌의 술집을 무대로 삼은 극(劇) 서정시를 펼쳐놓았다. 눈바람에 기차 소리마저 얼어붙는 겨울밤, 외딴 술집에서 형광등 불빛 아래 시인의 분신 같은 어느 사내가 홀로 술을 마신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떨치기 힘든 것은/ 이런 뜻 없는 것들'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래도 이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게/ 이 저체온(低體溫)의 슬픔, 이런 뜻 없는 것들이 아닐까'라고 덧붙인다.

시인이 패배적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는 평소 감상(感傷)을 경계하면서 언어와 정서의 지적(知的) 통제에 바탕을 둔 서정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육체의 삶이란 어차피 덧없기에 슬프다. 하지만 시인의 정신은 '이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저체온의 슬픔'을 놓지 않으려 한다. 꼼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슬픔이다. 그것이 '저체온의 슬픔'인 까닭은 가혹한 운명의 겨울에 맞선 인간 육체의 하찮은 온기(溫氣)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기운을 통해 정화된 영혼의 언어를 시집에 남긴다. 독자가 그 책을 음미하면서 상상하는 겨울의 밤하늘은 성(聖)스러운 슬픔의 흔적으로 아롱진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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