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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신과 겨레의 문인들
2016년 12월 25일 21시 26분  조회:2639  추천:0  작성자: 죽림

   

로신과 우리 겨레 관계연구

 

 리함 

 

 

 

1.     들어가기

 

현대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와 사상가, 혁명가로 불리우는 로신(원명 주수인, 1881―1936)은 절강성 소흥출신으로서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그 시절의 리대소, 진독수 등 허다한 선진적인 지식분자들과 더불어 글을 쓰고 잡지를 꾸리면서 중국 신문화운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로신은 문학에 투신한후, 1918년에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봉건을 반대한 첫 백화문(白话文)소설로 불리우는 “광인일기(狂人日记)”를 발표하면서 로신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쓰게 되고 이어 “공을기”, “약”, “아Q정전” 등 허다한 소설과 잡문, 수필, 평론, 시들을 써내여 명실공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이와 더불어 로신의 작품들은 이웃 조선과 일본 등 나라들에 전해져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인민들을 크게 고무한다. 이를 두고 조선의 저명한 작가 한설야는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에 한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의 위대한 사실주의작가이며 중국 신문학의 창시자인 로신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친숙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로신의 이름은 그가 잡지 《신청년》에 관계하고 그의 첫 단편인 “광인일기”를 비롯하여 불후의 로작 “아Q정전” 등이 발표되면서부터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1]

 

조선작가 한설야의 이 한단락 말은 로신이란 이 이름이 20년대 그 시절 조선사람들에게 친숙히 알려져있음을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로신을 중국의 대문호로 숭배하면서 그의 사상, 그의 작품을 따르는 문인들이 늘어가고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광주 등지에서 로신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1936년 서거후 로신을 추모하고 따르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로신과 관련되는, 조선문인들의 사실과 글 이모저모를 력사적으로, 개략적으로 밝히면서 로신선생이 우리 겨레와도 관련되며 그의 문학이 조선(한국) 현대문학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였음을 서술해보려 한다.

 

2.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사람들

 

본문 서두에서와 같이 조선의 저명한 작가 한설야는 상기의 글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있다.

 

로신은 중국에서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려진 20세기의 탁월한 사실주의작가이다. 그의 이름은 이미 20년대 초기부터 조선인민에게 친숙되여왔다.

 

이는 로신의 이름이 지난 20세기 20년대 초기부터 조선에 알려졌음을 단적으로 증명하고있다. 살펴보면 중국 로신의 이름이 당시 조선에 알려지게 됨은 국내 번역을 통한 로신작품의 접촉, 중국내에서의 직접 접촉, 일본에서의 접촉 세갈래로 나타나고있다.

 

1)     조선(한국)국내를 통한 접촉

 

조선(한국)에서 로신을 제일 먼저 소개한 글은 량백화(梁白华, 1889-1944)가 1920년 《개벽》 제8호에 발표한 “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 문학혁명”으로 밝혀지고있다.

 

소설로 로신은 미래가 유망한 작가이다. 그의 “광인일기”와 같은것은 한 박해광의 공동적인 환각을 묘사하여 지금의 중국 소설가의 미도한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로신의 “광인일기”가 1918년 4월에 씌여지고 그해 5월 “신청년”(제4권 제5호)에 발표되였다면 그로부터 2년 남짓한 뒤 로신에 대한 평가의 글이 발표되였다는 말이니 로신에 대한 량백화의 이같은 평가는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접촉이 매우 빨랐음을 알려주고있다. 그뒤 로신의 대표작 “아Q정전”이 또 량백화에 의해 23회에 걸쳐 《조선일보》(1930. 1. 4―2. 16)에 번역,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로신의 작품이 조선(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발표된것은 1927년이다. 이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류수인의 번역으로 1927년 8월에 서울에서 발행되는 《동광》잡지에 로신의 소설 “광인일기”가 발표되였었다.

 

2). 중국내에서의 직접 접촉

 

로신작품의 중국내 접촉은 류수인[2]의 회억에서 그대로 잘 드러난다.

 

나와 많은 조선 청년들이 1920년초에 연길 도립제2중학에서 공부할 때 진보적교원을 통하여 《신청년》에 실린 “광인일기”를 읽었다. 처음에 우리들은 읽어도 뜻을 알수 없었다. 여러번 읽고 몇차례 의논한후에는 너무도 격동되여 거의 미칠 지경이였다. 로신선생은 중국의 미친 사람들을 썼을뿐만아니라 조선의 미친 사람도 썼다는것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로신선생은 우리들이 숭배하는 첫번째 중국사람으로 되였고 나의 마음속에는 로신선생을 만나뵈고싶은 생각이 생겼다.[3]

 

지난 세기 20년대를 헤아리면, 조선(한국)사람들에게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땅에는 19세기 60년대 이후부터 살길을 찾아서 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삶의 무대를, 투쟁무대를 중국으로 옮긴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류수인도 그런 조선이주민의 한사람으로 중국인중학교를 다닌데서 중문으로 된 로신의 작품을 직접 읽을수 있었다. 로신의 작품을 중문으로 읽은 사람이 류수인을 비롯한 많고많은 젊은이들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20―30년대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남경, 광주 등지에서 공부하는 조선류학생들이 많았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광주 중산대학에만도 50여명에 달했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3). 일본 국내에서의 접촉

 

20년대와 30년대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일본으로 떠났다면 공부하기 위해 일본류학길에 오른 젊은이들도 많았다. 당시 일본은 로신의 “아Q정전”을 제일 먼저 번역, 출판한 나라여서 일본문으로 출판된 로신의 선집, 문집, 단행본들이 적지 않았다. “아Q정전”만 해도 15가지의 서로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고 하니 일본에  류학한 조선류학생들이 로신의 작품을 얼마든지 접촉할수 있었다. 20―30년대는 아니지만 40년대에 일본에 류학한 한국류학생 리병주(李炳注,1921―1992)는 1941년 12월에 도꾜에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하였다면서 그의 《리병주 고백론》[4]에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신전의 서점에서 몇권의 책을 샀다. 그 가운데 낀것이 《로신선집》이란 문고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나는 프랑스문학과 일단 결별하고 로신에 몰두하게 되였다. 고서점에서 《개조사》판의 대로신전집을 구할수 있었던것도 하나의 행이였다.

 

한국류학생 리병주의 글은 일본에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생동한 실례로 되고있으며 일본에서 로신열이 대단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3.     로신을 만난 우리 겨레

 

로신의 작품이 조선 독자들과의 만남을 중국, 조선, 일본 등 세갈래로 나누어 두루 살펴보았다. 그중 조선에서만도 일제치하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조선총독부 단행본 금지목록”에 로신의 “아Q정전”, 《현대소설집》, 《로신선집”》, 《로신문집》, “로신 유작” 등을 금지도서목록으로 기재하였다는것으로 보아 일제치하의 조선에서 로신의 작품이 얼마나 널리 읽히였는가를 헤아릴수가 있다.

 

조선사람들, 더우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이런저런 관계로 중국에 온 젊은이들 가운데는 로신과 로신작품에 대한 관심이 독서와 숭배로부터 직접 찾아뵈려는 마음으로 번져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지는데 의하면, 그중 6명의 지식인들이 끝끝내 로신선생과의 만남을 실천했고 일부는 만남을 이루지 못한 유감을 남기고 일부는 로신선생의 강의나 강연을 직접 듣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로신과 로신작품에 대한 숭배와 관심이 그대로 잘 보여진다.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였던 리정문(李政文)생은 한편의 글에서 중국측 우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로신선생과 래왕하였던 조선벗들이 구경 얼마나 되는지 알수 없으나 필자는 리우관(李又观), 김구경(金九经), 류수인(柳树人), 리륙사(李陆史) 등 네분을 확실히 알고있다”[5]고 밝힌바 있다. 그후 중국인학자 양소전(杨昭全)도 “로신과 조선작가”[6]란 글에서 지금 알고있는 사료에 의하면 로신과 래왕한 조선벗들이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 리륙사 등 4명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다면 리정문, 양소전 등은 로신을 만난 조선벗들이 4명이라는것을 어떻게 알았을가? 그들은 약속이나 하듯 그 근거를 로신의 일기에 두고있다. 《로신일기》(상, 인민문학출판사, 1976년)에 의하면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과의 만남이 기재되여 있다.

 

1923년 3월 18일: 개임, 휴일 휴식. …오후에 리우관군이 왔다.

 

1928년 9월 1일: 개임, 오후…류수인이 왔다.

 

1929년 5월 31일: 개임, 오후 김구경…이 왔다.

 

관련자료를 보면 리우관(1897-1984)은 원명이 리정규(李丁奎)이다. 그는 1919년 일본에 가서 류학하던중 조선의 3.1운동소식을 접하고 중국에 와서 독립운동에 뛰여든 형님 리을규(李乙奎)을 찾다가 1921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게 된다. 그의 “년보(年谱)”에는 리회영, 신채호, 북경사범대학 교수 로신 형제(주수인, 주작인, 주건인), 대만 혁명동지 범본량(范本梁) 등과 래왕하였다는것이 기록되여있다.[7]

 

류수인(원명 류기석, 1905-1980)은 그의 저서 《중국을 찾아온 조선의 옛사람들》(13)에 실린 저자 략력에 따르면, “1905년 1월 조선 황해도 출생,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 1926년 북경 조양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그후 중학교 교원, 교장 및 《천진상업보》, 《하남민보》, 《중한월간》 등의 편집, 주필을 담임. 또 하남대학 농학원, 강소교육학원, 남통학원 농업경제학부 교수 력임, 1952년부터 1980년까지 강소사범학원 력사학부 교수”라고 되여있다. 그는 대학시절에 리우관을 따라 무정부주의자련맹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뛰여든 사람인데 언제부터 로신의 원명인 “수인”을 자기의 호로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김구경(1900-1950)은 1926년에 일본 교또에서 대학을 졸업, 귀국후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8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북경의 “미명사(未名社)”에 거주하였으며 북경대학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그 시절 로신이 상해에 있었으나 연경대학과 북경대학의 초청으로 북경에 가서 강연하기도 하여 김구경을 알게 되고 수차의 만남을 가지게 되였다.

 

리륙사(원명 리원록, 1904-1944)는 조선(한국)의 이름난 애국시인으로서 일찍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북경대학 사회학부에 다니였고 귀국하였다가 1931년에 다시 중국으로 와서 독립운동에 뛰여들었다. 그후 1933년 6월에 적들에게 피살된 중국인권보장동맹 부주석 양행불(杨杏佛)의 상해장례식에 참가하였다가 송경령, 로신과 맞띄우게 되고 벗의 소개로 로신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로신은 기억하지 못하였는지 그날 6월 20일의 일기에 리륙사와의 만남을 기록하지 않았다. 로신의 일기에서 찾을수 없는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여기까지 보면 로신을 만난 조선사람으로서 1923년 3월 18일의 리우관이 처음이였을가? 리우관의 자작 “년보”에 의하면 리우관이 로신을 만난것은 1923년이 아닌 1922년이다. 원인은 1922년에 쓴 로신의 일기가 전부 산실되여 고증할 방법이 없기때문이다. 다행한것은 로신의 동생의 《주작인일기》가 1996년에 대상(大象)출판사에 의해 출판된것인데, 주작인은 일기에서 로신과 자기가 만난 조선인 5명의 이름을 적고있다. 흥미로운것은 1922년 4월 14일에 조선인 오공초(吴空超)가 북경의 로신선생저택을 방문하여 로신을 만난것인데 주작인은 오공초가  로신을 방문한 첫 조선인이라고 일기에 적은것이다.

 

그해 1922년 5월 8일에는 오공초가 리우관을 안내하여 로신저택에 가서 로신형제한테 인사를 시키고 8월 3일에 로신네 가족, 벗 등 19명과 더불어 북경의 향산을 유람했다[8]고 하니 1922년에 로신을 만났다는 리우관의 “년보”는 틀리지 않는다. 이같이 오공초는 주작인의 일기에 로신을 만난 첫 조선인으로 선후 5차나 만난 사람으로 기록되고있다.

 

오공초(1894-1963)는 원명이 오상순이고 일본에서 대학 종교학부를 다닌 졸업생이다. 그는 1922년에 북경으로 갔다가 “새마을운동”을 이끄는 주작인을 찾고저 1922년 4월 14일에 로신의 저택을 찾았고 로신형제 셋을 만나게 된다. 그후 또 리우관과 같이 로신저택을 찾은후 귀국길에 오른다.

 

중국과 한국 여러 관련학자들의 노력으로 1922년부터 로신이 만난 조선인들이 오공초,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 리륙사 등 5명으로 밝혀졌다. 그외 또 한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신언준(申彦俊, 1904-1938)이다. 그는 1923년에 중국 동오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꾸린 흥사단(兴士团)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가 1929년에 《동아일보》사 남경, 상해 특파원으로 활약한다. 1933년 5월 중국좌익작가련맹 녀작가 정령이 국민당정부에 불행히 체포된후 《동아일보》사에서는 로신선생을 취재하라고 한다. 신언준은 채원배의 도움으로 로신의 저택을 알게 되고 이해 5월 16일에 편지로 만날것을 요구하나 국민당정부의 체포를 피해있는 로신의 거절을 당한다.

 

5월 22일에 신언준은 로신의 가까운 일본친구가 꾸리는 로신저택 부근의 서점 2층에서 끝내 로신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이 1934년 4월의 《신동아》잡지에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으로 실린다. 5월 22일 만남에 앞서 로신과 신언준이 주고받은 편지날자가 1933년 5월 16일, 17일, 18일, 19일의 로신일기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이러면 로신이 만난 조선사람은 6명으로 나타난다. 이밖에 더 있는것으로 보이나 현재로는 아직 더 밝혀지는 사람이 없다.

 

3.     로신의 강연을 들은이들

 

필자가 지난 몇년래 로신의 발자취를 쫓아 중국내 소흥,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 로신기념관이거나 박물관을 전부 답사한데 의하면 로신은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에서의 대학 재직생활과 거주생활시에 대학의 연단들에서 많은 강연을 하였는데 북경과 광주 대학생활시기에 그의 강연을 들은 조선인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알려진다. 정래동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한국 김시준(金时俊)교수의 론문소개에 따르면, 정래동(丁来东, 1903―1983)은 일본 도꾜 대성중학 출신으로서 1924년에 중국 북경에서 한해 중국어를 배운후 1925년에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 1930년에 졸업하고 무정부주의자단체에 가담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는 1929년 7월부터 《조선일보》에 12기에 걸쳐 “중국 현대문단개황”을 련재하고 1931년 1월 14일부터 그달 30일까지 또 《조선일보》에 장편평론 “로신과 그의 작품”을 련재하였다. 그는 비록 중국의 대문호 로신선생을 직접 만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로신이 1929년 5월 29일과 1932년 11월 22일 북경대학 제3원에서 두차례 강연을 할 때 두번 다 강연을 들은 행운을 가지였다.

 

이밖에 로신은 1927년 1월부터 1927년 9월까지 광주 중산대학 재직시절에 1927년 1월 25일과 3월 11일 중산대학 종루례당에서, 1927년 4월 8일에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혁명시대의 문학”이란 강연[9]을 가지였다. 그때 중산대학에는 수십명의 조선청년들이 공부하고있었고 황포군관학교에는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있었는데 로신의 강연을 들은 조선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더우기 중산대학에서 로신이 “중국문학사”, “문예론” 등 과목을 강의할 때 그의 강의를 선택한 학생들이 200여명에 달하고 사회의 많은 문학애호청년들까지 참가하여 서당(西堂)의 문과교실이 비좁아 종루례당에서 강의할수 밖에 없었다.

 

4.     로신을 만나려던이들

 

다 아는바와 같이 로신은 중국의 대문호로서 로신을 만났거나 강연을 들었거나 만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가인 김학철(1916-2001)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김학철은 1936년 여름 어느날 리수산이라는 조선청년과 함께 상해 대륙신촌 9번지에 있는 로신선생저택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그들 둘이 로신저택 문앞에 이르러 걸음을 주춤하였다. 그때까지 시 한수, 수필 한편 써본적이 없은데서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로신이 가끔 다닌다는 부근의 우찌야마서점에 가서도 책도 사지 않으면서 기웃거리고싶었으나 책도둑으로 몰릴것 같아 또 물러설수 밖에 없는 그들, 그뒤 10월 20일에 전날 19일 로신선생이 병으로 서거했다는 부고를 접하고 그들은 놀랐다. 장례식에라도 참가하려니 그들 소속단체의 책임자가 일본 특무, 경찰들이 우글대는 판에 조선인으로서 어디를 가겠는가고 호통치는통에 이 념원도 접어야 했다.[10]

 

중국에서 “영화황제”로 불리우는 조선인 김염(1910-1983)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김염은 원명이 김덕린. 일찍 학생시절부터 로신선생의 “납함” 등 작품을 즐겨 읽으며 존경한 김덕린은 로신의 이름에서 신자를 따서 김신이라고 지어보았으나 대문호의 필명을 그대로 옮긴다는것이 당돌하다고 생각되여 마음에 드는 별호를 찾던중 젊은이들의 정열을 상징하는 불꽃 “염(焰)”자가 마음에 들어 김염이란 별호[11]를 택했다. 그때부터 김염으로 통했으니 서울태생인 그는 상해시절에 첫 계몽스승인 중국 현대연극의 정초자이며 걸출한 희곡작가인 전한의 도움으로 영화예술인으로 성장하며 그와 더불어 상해의 중국좌익작가련맹 회원으로 활약한다. 그런 김염이, 그토록 로신을 숭배하던 김염이 좌익작가련맹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로신선생을 모르고 지냈을가, 대답은 로신과의 어울림이다. 그러나 관련자료가 보이지 않아 로신과의 인연을 긍정적으로 밝힐수가 없어 유감스러울뿐이다.

 

그외 광복전에는 독립운동가로, 광복후에는 중국에서 저명한 교육가와 농학교수로 활약해 온 류자명교수가 또 있으니 그는 로신 다음으로 손꼽히는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인 파금과 절친한 관계였다. 지난 30년대 상해 시절, 적절히 말해 상해 좌익작가련맹시절 로신이 가장 아끼는 문학도도 파금이요, 파금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내 선생이 로신이라면 류자명이 로신을 숭배하고 존경하도록 이끈이는 분명 파금이였다. 이런 류자명이 로신과의 관계에서 한획을 그으니 다음 론문에 그 한부분으로 전문 밝혀보려 한다.

 

5.     로신 추모에 참녜한이들

 

중국의 20세기는 위인을 수요로 하는 20세기였으며 위인을 배출한 세기이기도 했다. 로신은 이 세기에 걸맞는 중국 사상문화분야의 위인답게 1918년부터 1926년 기간에 신문화운동, 혁명문학운동에 나서 인생의 휘황한 10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향년 56세로 1936년 10월 19일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에 조선인들도 비통해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등 추로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1). 리륙사

 

1936년 10월 20일, 상해의 여러 신문들에 로신 별세부고가 실리자 로신을 숭배하며 로신을 마음으로 받들던 조선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1933년 6월 20일, 상해 만국빈의관 양행불(중국인권보장동맹 부주석, 민국혁명의 원로)장례식에서 로신을 만난적이 있는 리륙사는 조선 국내서 로신서거소식을 접하고 로신추모문인 “로신론”을 써서 그해 1936년 10월 23일부터 7일간 《조선일보》에 련재하였다. 장장 1만여자에 달하는 “로신론”은 로신의 략력, 로신을 만난 경과, 로신 작품의 연구와 평가 등으로 씌여졌는데 일제의 검열도 마다하고 비교적 공정한 태도로 “로신론”을 게재했다는것은 웬간한 사람으로서는 행할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해 12월 또 로신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여 《동광》잡지에 련재하기도 했다.

 

2). 한설야

 

일찍 1925년에 조직되고 1927년에 개편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지도자의 한 사람이였던 한설야는 로신서거소식을 접했을 때의 정황을 1956년 10월호 《조선문학》에 발표한 “로신과 조선문학”에서 이렇게 썼다.

 

로신 서거의 부음(讣音)이 전해오자 조선 작가들은 전체 조선인민과 함께 애도의 정을 금할수 없었으며 23일 신문지상들에는 로신에 대한 추모문들이 발표되였다.

 

한설야는 이 글에서 1936년 이 한해에 조선의 작가들은 “사회주의사실주의문학의 창시자인 고리끼와 중국의 고리끼로 불리우던 로신 두 위대한 문호를 잃게 된 슬픔을 참을 수 없”었고 이 슬픔속에서 자기도 추모의 글을 썼다고 스스로 밝혔다.

 

3). 야생=류자명?

 

로신이 서거한 이튿날 10월 20일, 야생(也生)이라고 필명을 단 한 조선청년이 만장과 함께 “로신선생을 애도한다”는 시 한수를 써서 상해의 로신장례위원회에 드리며 로신서거에 대한 자기의 애끓는 심정을 나타내였다.

 

고리끼선생이 돌아갔습니다

 

로신선생이 또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이 끝내지 못한 일

 

그들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어갑니다[12]

 

 

이 한편의 추모시에서 추모자는 야생이라는 필명을 쓰면서 로신을 쏘련의 고리끼와 병행시키며 중국의 대문호 로신을 심심히 애도하였다. 다른 글에서 전문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이 야생이 다름아닌 독립운동가 류자명으로 알려져있다.

 

6.     나오면서

 

본문에서 필자는 로신과 우리 겨레 관계연구란 과제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사람들, 로신을 만난 사람들, 로신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 로신을 만나려 했던 사람들, 로신 추모에 참녜한 사람들 등으로 나누어 로신과 관련되는 우리 겨레의 이모저모를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고찰하여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보다 힘을 기울인 부분은 로신을 만난 사람들과 로신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다. 자료의 부족과 자료의 한계로 로신을 만난 사람들과 강연을 들은 사람들을 더 이상 서술하지 못하였지만 기필코 더 많으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이는 로신연구의 보다 심층연구를 통하여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로신과 우리 겨레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싶다. 이는 또 우리 겨레 로신연구가들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름지기 가르치는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로신은 정말 중국 현대의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으며 그가 남겨놓은 정신적유산은 우리 조선민족을 포함한 우리 전체 인류의 재산임을 말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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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1] 《조선문학》 1956년 10월호, 제 189페지

 

[2] 류수인(1905―1980)은 조선 황해도태생 독립운동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1922년 7월 24일에 북경에서 처음 로신을 만났다.

 

[3] 리정문, “로신과 조선사람”, 《연변문예》 1981년 10월호, 제49페지

 

[4] 《이병주 고백록》 기린원, 1983. 제11페지

 

[5] 리정문, “로신과 조선사람”, 《연변문예》 1981년 10월호. 제49페지

 

[6]양소전, 《외국문학연구》 1984년 제2호

 

[7] 북경로신박물관 편, 《한국로신연구론문집》, 하남문예출판사 2005년 7월. 제58페지

 

[8] 김시준 “중국에 망명한 한국 지식분자와 로신”, 북경 로신박물관 편, 《한국로신연구론문집》, 하남문예출판사, 2005년 7월. 제54페지

 

[9] 광주로신기념관 장경 편저 《광주로신옛집》(수정본), 광동과학기술출판사. 제25페지.

 

[10] 김호웅 김해양 편저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8년 7월. 제86-88페지

 

[11] 김창석 저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 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10월. 제51페지

 

[12] 중국사회과학원 로신연구실 편 《로신연구학술론저자료휘편》(제2권), 문련출판공사,  1986년. 제286페지

 

연변문학 2010년 제11호

 

 

 

 

 

루쉰과 한국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 여러분,

그리고 노신 애독자 여러분과 이렇게 노신을 통해 만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의 외교관으로서가 아니라 노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노신과 한국」입니다만 저는 학자도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져「수이비엔」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옆 길로 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노신과 한국 또는 한국인과의 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신 애독자들에게도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출판된 노신관계 서적들을 상당히 많이 떠들어 보았습니다만,

단 한 줄이라도 노신과 한국관계를 언급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엇습니다.

노신과 한국인은 무관계일까요?

 

노신의 작품을 세계에서 최초로 외국어로 번역한 외국인은 바로 한국인 이었습니다. 

1927년 8월「東光」이란 조선어 잡지에 실린「광인일기가 그것입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야 일본에서 최초로 노신의「고향」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물론, 이보다 몇 년 앞서 노신의「쿵이지」가 베이징 거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주간지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만, 그것은 노신의 동생인 周作人이 번역한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조선인에 의해 노신의 작품이 세계 최초로 번역 소개되었는 것은

당시 나라 잃은 조선인들이 세계의 어느 사람들보다도 노신에게서

희망과 길을 찾으려 했음을 말해줍니다.

 

요즈음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노신을 즐겨 읽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할 일입니다.  암울한 시대의 괴로운 이야기를 누가 즐기려 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여러분에게 노신의 대표작 몇 편과 약간의 잡문들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노신의 유명한 소설들 광인일기, 고향, 쿵이지, 아큐정전을 처음으로 펼쳐 본 사람들은

좀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아큐정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작 다섯장내외 정도 분량이니까요.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고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노신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노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고 대표작은 아큐정전이라는 것. 

「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려 패라고 그가 말했다는 것 정도가 노신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아큐정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바 없었던 저는 그것이 아편전쟁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노신 선생이 말했다는「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겨 패라」는 말도 당시

저에게는 좀 기괴하게 들렸습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속이고 지배하는 권력자,

위선적인 지식인 등을 상징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노신 선생이 싫어한 동물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좀 옆길이지만 그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얼마나 싫어했든지,

한때 북경에서는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은 그 소문에 퍽이나 시달린 나머지 그에 대한 변명을 긴 글로 써서 남깁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노신의 유년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뱀에 물려 숨이 할딱거리는 생쥐 한 마리를 노신이 구해 줍니다.

그 후 생쥐는 노신의 친구이자 가족이 됩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생쥐는

노신의 주변을 맴돕니다. 

특히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생쥐는 식탁 위에 올라가 흘린 음식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해 줍니다. 

어린 노신이 먹물을 갈아 글씨를 쓰고 나면 쪼르르 책상으로 생쥐가 올라와

남은 먹물을 깨끗이 먹어 치워 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생쥐가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심한 어린 노신을 보다 못해 보모 키다리 아줌마 阿長이 노신에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말해줍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먹어버렸다」

 

그때부터 노신의 가슴에 고양이에 대한 증오감이 깊히 자리잡습니다.

한번 각인된 그 증오감은,

나중에 노신이 사실은 생쥐를 죽인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바로 그 키다리 보모였다는 진실을 알게된 뒤에까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노신은 그래서 오랫동안 고양이만 보면 돌을 던졌다 합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가고 있습니다만, 간 김에 조금 더 가자면

노신이 아주   싫어한 곤충이 하나 있습니다.  모기 입니다. 

벼룩이나 파리보다 모기를 특히 싫어한 노신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피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모기의 장광설, 그 연설 때문입니다.  

모기는 사람을 물기 전에 에엥하고 길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그 소리가「왜 내가 당신의 피를 요구하는가」하는 이유를 길게 연설하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빨아먹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빨아먹을 일이지 왜 그렇게 변명이 많고 장광설을

늘어놓느냐는 것이죠. 

민중을 착취하고 속이는 지배자들은 항용 자신의 탐욕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이유와 논리를 만들어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모기의 에엥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까 노신 작품의 번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일제시대때 조선의 여러 지식인, 지사들이 노신에 주목하고 공감했던 것은

노신이 그만큼 시대의 어둠과 절망속에서 지식인으로서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신은 자신을 문사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싸우기 위해, 마비된 민중의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

문예를 택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노신은 자신의 글을「비수와 투창」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전사,투사로 묘사했으며

자기 몸에 난 상처를 자기 혀로 핥으며 황야를 헤메는 한 마리 하이에나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처 입은 황야의 하이에나의 절규, 허위와 위선의 심장을 겨냥하는「비수와 투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들이 나라 잃은 조선의 지사들, 문인들에게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시인 김광균은「노신」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읋기도 하였습니다.

 

「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 氣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 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無數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恒時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날을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五臟을 씻어 내린다.

 

 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한국의 식민지 시인이 절망의 시대에 중국의 위대한 작가 루쉰의 용기를 추모하여

스스로를 다짐하는 시입니다.

 

광인일기를 최초로 번역했던 柳樹人 이라는 분은 항일애국지사였습니다.

본명이 유석기인 그는 얼마나 노신을 좋아했던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노신의 본명인 樹人을 따서 유수인 이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름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납니다만 여러분

김염, 중국 발음으로 진이엔   쇠금에 불꽃염자 진이엔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13억 중국인들이 '영화황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932년 영화 전문지 [電聲]이 1년여에 걸쳐 인기투표를 한 결과 김염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 '가장 잘 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싶은 남자배우'등 전분야에 걸쳐 1위를 차지,「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 24세 때입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한국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님 웨일즈는 '나는 그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본명이 김덕린인 그는 1910년 서울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였습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김염은 그 당시 좌파 시나리오 작가인 田漢과 노신의 반봉건,

반억압 진보사상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김염은 소년시절부터 노신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가 10대  였을 때 장래 굉장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영화배우면 멋진 이름을 써야되지 않습니까. 

소년 김염은 미리서 이름을 하나 지어 놓습니다.

노신을 존경했던 그는 노신에서 신을 따서 金迅이라고 지어 놓습니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상하이에 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냉대와 가난이었습니다.

「상하이의 어느 골목 조그마한 음식점, 이미 몇 끼를 굶은 한 젊은이가 식사를 하고

돈이 없어서 섣달그믐까지도 돈을 갚지 못해 입고 있던 웃옷을 저당 잡혀 식대를 갚아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더 강력하게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전에 지어 놓았던 金迅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불꽃처럼 타오리라는 열망을 담아

불꽃 염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김신이 될 뻔한 영화황제가 김염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염의 솔녀가 얼마전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추적하여 쓴

「상하이 올드데이스」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노신의 영향은 10대의 조선 소년의 가슴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염은 자신의 연기를 민중의 오락거리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정신은 반봉건, 반억압, 반일정신이었다 합니다.

「大路」「壯志凌云」으로 대표되는 항일영화의 제작에 앞장섰던 김염을 통해,

중국인들은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따라 했으며,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그의 동작과 말투까지 따라 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 김염의 미망인 친이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사는 노신의 미망인 쉬광핑 여사와 교류하면서 같이 활동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상하이 올드데이스」는 내년쯤 중국어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김염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한 비판적 지식인의 선각자적 정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공명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김염은 한류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참 묘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인이 더 이쁜데 그들은 한국인이 더 예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보아도 중국 배우나 탈렌트가 더 예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한류배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일부러 짐짓,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어떨땐 의심이 납니다.

 

김염이 영화계의 한류원조였다면 당시 음악계에서는

鄭律成이라는 음악가가 또한 한류원조였습니다. 

나이든 중국인들은 그가 지은「연안송」을 다 안다고 합니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아세안게임 개막식에서 울려 퍼진 노래「중국인민해방군가」를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도 당시 나라 잃은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곳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음악을 연마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고향 전남 광주에서 오는 11.12일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김염과 정율성이 모두 노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느끼지만

중국인의 포용성에 대하여 경이에 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민족의 배우를「영화황제」로서 받아들이며,

어떻게 이방인에게 자국의 군가를 짖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 한국에서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인의 이런 포용성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용하는 자가 결국 크게 되고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큰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의 이러한 포용성 때문에 크게 보입니다.

 

 

노신에 대한 묘사와 비유는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은 아무리 보아도 일품입니다.

 

'메스를 손에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도려내고 마는 기이한 의사'

 

딱 노신의 모습이 앞에 나타나지 않나요?

이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노신을 방문취재 했던 언론인 신언준의 묘사 입니다.

그가 노신을 인터뷰한 것은 1933년 5월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34년 4월 신동아에 <중국의 대문호 노신 방문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당정부의 要注意 인물로 반은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던 노신을 몰래 탐방하여 인터뷰한

노신방문기는 희귀한 자료에 속합니다. 

그를 만나게 된 과정부터 그의 수입에 비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상과

세계혁명이 완성되어야 약소 민족도 해방될 것이라는 노신의 육성을 전한 것은

상해 거주시기의 노신을 이해하는 데 간명하면서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문학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예를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 없고 또 제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노신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될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학생 여러분이 다 아는 이육사입니다.

「청포도」,「광야」의 시가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죠?

그는 노신에게서  영혼의 감화를 받았고 노신을 찾아가 만났으며

노신이 죽자 장문의 추도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7차례나 옥고를 치른 끝에

북경의 일본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생을 슬쓸히 마감합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최초로 옥사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할 때 죄수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입니다

.

노신과 한국관계를 탐색하던 중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이육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청포도에 투영된 그런 서정시인만은 아니었습니다. 

백마를 탄 채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런 세속을 초월한 초인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암흑 속에서 온 몸을 불살랐던 더 없이 순결하나 더 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불꽃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격량을 온 몸으로 부딛치며 고뇌하며 행동 했던 지식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노신을 길잡이 삼은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노신을 찾아가 만난 것은 1932년 6월 국민당에 의해 암살 당한

혁명원로 양싱푸(楊杏佛)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노신이 죽기 3년전의 일입니다.

이육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였다. (중략)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붓을 잡는 나뿐이랴.」

 

 

자 이제 우리의 시선을 노신에게로 돌려봅시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렇듯 큰 영향을 미쳤던 노신 자신은 조선을,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신의 글 속에는 조선이 어떻게 언급되어 있을까요?

노신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고작, 한 두 마디가 전부이며, 그것도 조선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신 자신이 번역한 어느책 서문에 이런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인은 전쟁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나 남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자기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만 남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오늘날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일에 대해 언급할 때도 득의 양양하게

"조선은 원래의 우리의 속국이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여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 글에서 조선을 언급한 것도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한, 또는 계몽하기 위한 맥락에서

 '조선'을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렇다면 노신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을까 라며

스스로 곤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민족감정에 이르면 누구라도 병적인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신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태도랄까.  견해 같은 것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노신과 이육사가 만났을 때 노신이 이육사를 친근하게 대한 정황을 통해

노신의 대조선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 그를 최초로 방문 취재했던 신언준과 나누었던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속에서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노신은 신언준과의 대화에서 조선의 문학계와 교류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아쉽게도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신언준이 노신의 바램대로 노신과 조선 문학계를 연결해 주었더라면

노신과 조선인간에는 의미있는 교류가 이루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노신 선생이 상해에서 서거한지 약 10년후 한국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 1992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길고 긴 냉전, 동면상태를

거쳐야 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찬양한 바 있었던 노신이 당시 한국에서 읽히지 않았던 것은

한국이 반공이데올로기에 결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택동 주석의 책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끌려가

조사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1952년생으로 한국전쟁중에 태어난 세대인데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때부터 였을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모두 모여 놓고 뭘 강제로 외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소위「혁명 公約」을 만들어

전국 국민학생들에게까지 외우게 한 것입니다. 

날마다 그것을 선생님들과 함께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제1조는 기억이 뚜렷합니다.

'반공을 國是의 제1義로 삼고…'

뭐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마다 외웠습니다. 

반공이란 말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거니까 알겠는데

국시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로 전혀 모르겠고 제1까지는 알겠는데

제1義 라는 말 같은 것은 무슨 뜻인지 통 몰랐습니다.

선생님들도 무조건 외우라고만 하지 무슨 뜻인지 안가르쳐 줍니다.

그래도 선생님을 따라 열정적으로 외웠습니다. 

그때 노신선생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그래도 일부 한국의 지식인에게 노신이 읽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유별난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리영희, 박영복, 전우익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런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지식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신을 좋아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에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모두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입니다.  죄명도 같았습니다.

좀 색깔이 붉다는 것이었지요.

 

노신의 비수와 같은 단문의 일부가 한국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리영희에 의해서였습니다.

리영희는 독학으로 습득한 중국어로 사전을 들쳐가며 노신을 읽었습니다.

리영희는 죽은 노신이 무덤속에서 소리쳐 자기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노신을 삶의 지표로 삼은 지식인이었습니다. 

노신은 리영희를 통해 한국에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한국의 현대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한 예로서 1999년 말 연세대학원신문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면서

'현재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을 국내와 외국으로 나누어 조사했는데

국외 학자로는 프로이드가 1위, 국내학자로는 리 영희가 1위로 나타났습니다.

 

리영희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1970-80년대 한국 변혁 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 상황에 맞서 싸웠으며, 70년대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학자'라는 평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노신이 자기글을 비유했던 바로 비수와 투창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여러 책에 수록된 노신에관한 글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에요. 

글의 기법,문장미,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그의 글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덕분에 그는 수차례 감옥을 가고 해직되고

고문당하고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과 절망과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정신을 버텨 준 것도 노신 이었습니다.

 

그는 '노신과 나'라를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소명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에 중국어 저서(작품)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가던 어느 날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에 마주쳤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숨이 막힌 채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군벌지배와 장개석 치하 중국을 방불케 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은 무덤에서 노신이 나에게 타이르는 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노신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준 노신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노신을 일러 많은 중국 사람들이 민족혼이라 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부터 69년전인 1936년 10.19일 노신이 서거했을 때 그의 유해 위에는

민족혼이라고 크게 쓴 銘旌이 덮힙니다.

북경의 노신 박물관 사이트르 열면 거기에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써진 민족혼이라는

제목아래 노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방의 한 노신 애독자로서 관위에 민족혼이라는 글자가 쓰인 사진을 볼 때

마치 노신 선생의 혼이 민족혼이라는 굴레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이방인으로서 소통하는 노신은 어느 한곳에 딱 규정하여 넣기 힘든

그런 자유스러운 존재입니다.

 

노신 선생의 삶과 글, 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분노어린 외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 외침은 물론 보편적 인간애에 굳건히 바탕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심안에 비친 중국의 역사는 황금빛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노예의 역사  였습니다.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잠시 노예로 안정되었던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처음 대할 때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예화는 중국의 현상만이 아니고 바로 나의 문제이고 인류  역사의 문제임을 말입니다.

 

노신이 한국에 지금 나타난다면 우리에게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모습을 볼까요? 

5살쯤이면 여러 학원으로 끌려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노예화의 모습을 볼지도 모릅니다. 

끊임 없이 맹목적인 경쟁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청소년들,

소비와 생산의 객체로 전락한 인간군상에서도 그는 노예의 모습을 볼지 모르겠습니다.

 

루쉰은 언제 읽어도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값싼 희망을 팔지는 않습니다.

 

참, 묘합니다. 

희망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들리는데

희망을 말하지 않는 노신의 저음속에서는 웬지 모를 희망이 느껴집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고향]의 말미에서 희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나와 윤토사이는 마침내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구나.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여전히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활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은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이렇듯 노신이 꿈꾸었던,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고 나라 사이에도 장벽이 없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 그것은 여전히 21세기 동아시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노신이 고뇌속에 살다간  지난 20세기는 야만이었습니다.

한 중 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같은 전쟁터에서 만나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그런 야만과 악몽은 이제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제 이야기를 끝마칠까 합니다.

 

「현재에 불만을 품은 자는 그러나 복고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우리 눈앞에 또한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미증유의 제3의시대를 창조하는 일. 

바로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사명  이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coindian (상하이 화동사대 강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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