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 강의-14(시를 쓰기 위한 준비 : 언어)
김송배
시창작 강의-
이번 주는 개인 사정에 의해서 좀 늦었네요.
항변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군요. 자, 오늘은 언어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4. 언어에 대하여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시는 아무리 좋은 발상과 동기와 주제가 명징하다 할지라도 표현할 수 잇는 언어가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는 시에서 언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기보다는 시의 모든 문제가 언어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일도 시인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시는 일반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감동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무도 맛보지 못한 체험이나 일상적인 의식 그 밑에 깔려 있는감정 세계를 표현하자면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적인 언어 몇 마디로는 아무래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총동원하여 깊이 이해하고 발휘시키면서 비로소 훌륭한 한 편의 시로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의 내용이 알차고 여러 형태로 승화되었다 하더라도 언어의 기능이 모자란다면 시로서의 형상화는 부족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서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은 정지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은 김기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상어가 시의 언어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 때 그 시대의 일상어가 시의 언어로 등장하는 경향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워즈워드(w. wordworth)는 일상어로 시쓰기를 주장했고 1930년대 김기림도 일상어로 시쓰기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로 될 수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책상을 만드는데 그 재료(소재)는 목재이지만 그 목재가 그대로 책상이 될 수 없다는 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재를 자르고 대패로 밀고 다듬어서 서로 짜 맞추어야 설계대로의 형태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일상어가 시의 언어로 되기까지는 깎고 다듬어야 비로소 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읽어 봅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렇습니다. 언어는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주는 등불입니다. 존재의 영역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범위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성냥을 켯을 때 성냥불이 비춰주는 그 범위만 환하게 눈에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암흑(또는 無) 속에 나타난 존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것처럼 언어가 적재적소에 놓여져야 시의 언어로서 빛을 내뿜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는 또한 일상생활에서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 기능보다는 정서적 기능을 중시하는데 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함과의 知的으로 판별하는 이외의 언어가 갖는 음향(음질, 음량, 템포. 강약, 고저, 억양 등), 즉 음악적인 미묘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신비하고도 오묘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시에다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를 에워싸고 있는 일상생활의 구어(口語), 그것이 시에 사용되는 언어인데 그것들을 한 단어씩 떼어내면 아무 색채도 없는 평범한 단어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가 어떻게 하면 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언어의 조합에 의한다.
둘째, 그 조합 자체가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 시정신 그 발상에 의해서 정해진다.
시인은 단순한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작품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낮설게 하기'라고....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 이미지를 나타내는 언어, 그것들을 구사하고 서로 섞여져서 엉컬어지고 조합하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를 표현시키기 마련인데 이것들을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알레고리(풍유) 등의 방법으로 복잡한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잘 알다싶이 일상어는 여러 가지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형용은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 한 번의 개념을 줄뿐이지만 시인은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리고 자기가 느낀 아름다움의 본질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의 언어는 다양해서 부드러운 언어의 연결로 복잡한 내용을 나타낼 수도 있으며 또는 난해하게 생각되는 언어의 조합이 아니고는 시인의 이미지를 나타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결국 시의 언어는 시인이 마주한 진실에 대하여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엄격한 시정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쓰기에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나 語句를 詩語(poetic diction)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바다'를 가리켜서 '고래의 길'이라고 하는 식의 표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뛰어난 시어는 그것이 명쾌한 것인 동시에 천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발레리도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서는 구절이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정을 자동적으로 알 수 있으며 물체도 정신화되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는 어떤 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말이 변화하듯이 시어도 역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여 낡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말을 死語(obsolete word)라고도 합니다.
현대 시인들은 대부분이 일상어를 간추려서 사용하고 있어서 엄격하게 말하면 시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학에서는 시어라는 개념보다는 비유를 시적인 표현의 본질로 생각하고 언어의 조탁(彫琢)에 보다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어는 없고 시의 언어만 있을 뿐입니다.
다음 중견 여성시인 구순희의 <봄밤>을 읽어보면 언어의 정제를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밤에는 무논의 개구리
지천으로 깔려 울고
달빛 아래 물안개
전설같이 피어올라
자정에도 오히려 대낮인
열 여섯 풋가슴
혼자 뜰을 거닐던 달도
개구리들의 합창에 잠길 때
몇 번을 닦아도 닳지 않을
이름 하나 몰래 키우네.
이렇게 절제되고 함축된 언어(일상적인 언어)로 간결하게 '봄밤'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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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오후에
-홍신선(1944~ )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 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 편에나 실려 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줄기를.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 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 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창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꼍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툭하면 쏟아지던 작달비들 멎은 긴 장마 뒤, 말매미 몇이 울어댄다. 흡사 제재소 전기톱날 돌아가는 소리, 모처럼의 ‘둥근 오후’를 토막토막 켜는 듯하다. 화자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있다. ‘몸피 큰 회화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그 옛날 과거를 보러 가거나 합격하면 집에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 혹은 선비나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 유교 관련 유적지에서는 거의 회화나무가 있다는데, 퇴계 이황이 모델인 천 원짜리 지폐 뒷면의 도산서원을 둘러싼 무성한 나무도 회화나무란다. 화자는 학자를 많이 낸 집안 후손인가 보다. 화자는 남새밭 농부가 아니다.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회화나무는 지식노동자인 화자의 반영이다. 잦은 비에 씻겨 사위가 깨끗한 늦여름 오후, 방동사니 우거진 밭에 ‘건수 투명한 도랑줄기’ 졸졸 흐르는 걸 보며 화자는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 묻은’ 세상이며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범람해 흐르는 개굴창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한’ 자신을 돌아본다. 이번 세기 초에 쓰였을 시다. 정치이념에서 비껴 살던 사람들도 충격이 없을 수 없었던 냉전 종식 이후, 세기가 바뀌는 ‘밀레니엄’ 여파로 벅차기도 하고 뒤숭숭하기도 했던 그때. 시대의 풍경 ‘먼 뒤꼍’을 기웃거리는 한 지식인의 내면이 장마 뒤 남새밭 풍경과 함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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