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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을 사랑햇던 Pearl Sydenstricker Buck (펄 벅) 1892년-1973년 중국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서민들의 생활을 주로 그려 냈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펄 벅은 미국의 여류 소설가로, 사회 인권운동가이자 아시아 지역 전문학자로도 활동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나라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동양인의 정신을 서구에 소개하는 한편, 아시아 각국을 방문하여 여성과 아이의 인권 보호를 위한 자선 사업을 펼쳤다. 중화민국이 출범하던 시기 혼란한 중국을 배경으로 빈농 왕룽 일가 3대의 삶을 그린 대하소설 《대지》 3부작으로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류 상호 간의 일체감을 일으켰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미국 여류 작가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펄 벅의 본명은 펄 시던스트라이커로,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힐스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앤드류 시던스트라이커와 어머니 캐리는 남부 장로교 출신 선교사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휴가를 받아 미국에 돌아왔을 때 펄을 낳았다.
펄이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때 부부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펄은 18세 때부터 4년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 외에 약 40년을 중국에서 보냈다.
펄은 어머니와 유모 왕씨의 손에서 자랐으며, 초등교육은 중국인 초등학교에서, 중고등교육은 미국인이 운영하는 미스 쥬웰스 학교에서 받았다.
이런 경험은 후일 그녀가 서구 사회에 동양의 모습을 진실하게 전달하면서 인종 간 이해를 도모하고, 비 서구권 지역 및 소수자들에 대한 자선 사업을 펴 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청조 말기에 해당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때문에 그녀는 중국의 역사를 한 몸에 체험하며 자랐으며, 8세 때에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베 이징에서 백인들이 살해당하고 있을 때 이웃들이 보호해 주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경험도 한다.
영어보다 중국어를 먼저 습득하고, 한학과 동양식 예절을 배우며 중국인 사이에서 자란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중국 아이가 아닌 이방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역시 자신이 미국인도 아님을 느끼고, 스스로를 영원한 국외자적 신세라고 여기게 된다.
대학교육을 미국에서 마쳐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18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랜돌프 매콘 여자 대학을 다녔으며, 졸업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25세 때 미국에서 온 농업경제학자 존 로싱 벅과 사랑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에 열중하고 가정은 어머니에게만 맡겼던 아버지에 대해 반발심이 있었는데,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딸 중 큰딸 캐럴이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을 앓았는데, 그녀가 캐럴을 고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는 동안, 남편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내란과 일본군 침략 등으로 외국인이 살기에 위험한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침략했을 때 백인이었던 그녀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이방인인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이런 고통과 혼란을 극복하고자 그녀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미국과 중국 어디에도 집이 없는, (그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문화적 이중 초점'은 그 녀 소설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그런 한편 펄 벅은 난징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미국의 〈포럼〉, 〈애틀랜틱 먼슬리〉, 〈네이션〉 지 등 여러 잡지에 중국 문화에 대한 논문들과 중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들을 발표했으며, 1926년 〈중국과 서양〉이라는 논문으로 롤러 메신저상을 받았다.
1930년, 펄 벅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첫 소설 《동풍 서풍》을 발표했으며, 이듬해 중국 빈농 왕룽의 삶을 다룬 대하소설 《대지》를 출간하면서 평론가들의 찬사는 물론,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다.
그해 《대지》는 21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3 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왕룽의 죽음 후 중국의 역사 변동에 따라 각기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살아가는 세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아들들》,
왕룽의 손자 왕위안을 중심으로 혼란기 중국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중국 청년들의 모습을 조명한 《분열된 일가》를 펴내면서 대지 3부작을 완결지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혼돈의 시기를 사는 중국 민중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 이 대하드라마는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펄 벅에게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안겼다.
1932년, 펄 벅은 코넬 대학의 초청으로 중국 문화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수호전》 영역, 《만인이 모두 형제》, 《대지의 어머니》, 《어머니의 초상》, 《싸우는 사도》 등 활발하게 집필 활동을 했다.
1935년에는 존 로싱 벅과 이혼한 후 《동풍 서풍》을 발행한 뉴욕 존 데이 출판사 사장 리처드 월시와 재혼했다.
1941년, 남편 리처드 월시와 함께 동서협회를 설립하고, 〈아시아〉 지를 발행하는 등 아시아와 미국의 비교 문화 연구 및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계 미국인들을 억류하자 이에 강력히 항의하는 등 미국 내 소수 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설가로 명성을 얻은 이후 무엇보다 그녀가 가장 주력해 활동한 분야는 장애 아동 복지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한국, 일본, 중국 등을 방문하여 정신장애나 신체장애, 인종 등으로 차별받는 아이들을 돕는 자선 사업을 하는 한편, 아시아인 장애 아동이 입양에서 차별을 받자 1950년 웰컴 하우스를 설립해 아시아인 및 혼혈인 고아들을 보살피고 미국 가정 내 아시아인 장애 아동 입양을 촉진하는 활동을 했다.
그녀 자신 역시 7명의 혼혈 및 아시아 아동을 입양했다. 그리고 자신의 큰딸 캐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자라지 않는 아이》를 출간하면서 미국 내에서 정신질환 문제를 수면 위로 부각시키는 한편,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1964년에는 펄 벅 재단을 설립해 아시아 10개국에 아동 의료 및 교육 사업을 시행했다.
아동 인권뿐 아니라 미국 내 유색인종의 인권운동도 활발하게 했는데, 유색인종 권익 향상을 위한 전국 연합 NAACP의 일원으로 기고문을 작성하고 연설 활동을 했으며, 미국 내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에슬란다 로브슨과 대담한 《미국의 주장》을 펴냈다. 이런 활동으로 말미암아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30년대 중반 이후 펄 벅은 FBI의 지속적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펄 벅은 사회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하며 수많은 작품들을 펴냈는데, 소설과 수필, 평론, 동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약 60종의 책을 출판했다. 후기 작품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서태후》, 《북경에서 온 편지》 등과 같이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 외에도 핵무기 사용을 비판한 《아침을 지배하라》, 구한말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김씨 일가의 삶을 다룬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등이 있다.
펄 벅은 미국 내에서 가장 낮게 평가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펄 벅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당시에도, 이를 두고 미국 비평가들은 그녀가 작품을 몇 편 발표하지도 않았으며, 미국 작가로 분류하기도 힘들다고 빈정거리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정도였다.
펄 벅은 미국인이 아시아를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당시, 서구 열강의 침략 속에 정치적, 역사적 격변기에 놓인 아시아 나라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작품을 통해 서구인의 동양에 대한인식 변화를 촉구하고, 미국 내 유색인종과 장애인의 인권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중년 이후 《대지》를 넘어서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면서 과대평가된 작가로 꼽히는 한편, 저돌적인 사회활동가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1950년대 이후부터 작가로서는 더욱 박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두 번째 남편과 사별한 뒤 40살 연하의 춤 선생 테드 헤리스에게 빠져 애인의 재단 자본금 횡령을 묵인하는 등의 실수를 해 오점을 남기기도 한다.
1973년, 담낭염 수술 후 버몬트의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인 3월 6일 사망했으며, 1992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가로서 펄 벅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일어나면서 다시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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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 문학가 집안에서 태어나 세 자매 모두 출중한 문학적 재능을 마음껏 뽐내며 불멸의 사랑 이야기를 남겼다.
문학사에 한 집안 자매들이 모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예가 얼마나 될까? 아마 브론테 자매뿐이 아닐까 싶다.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세 자매는 각각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 등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샬럿 브론테는 1816년 4월 21일에 태어났다. 6남매 중 셋째로,
위로 마리아와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에밀리, 1820년 1월 17일에는 앤이 태어났다. 영국 요크셔의 손튼 출신으로,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회 목사였다. 앤이 태어나던 해 가족은 아버지의 교구가 호어스로 바뀌어 그곳으로 이주했다.
샬럿이 5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녀들을 엄격하게 훈육했으며, 이모 엘리자베스 브란웰이 자매들을 돌봐주었다. 유년기를 보낸 이후
1824년, 샬럿과 에밀리는 랭커셔 지방 코완 브리지에 있는 클러지 여자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이미 언니인 마리아와 엘리자베스가 그곳에 있었고, 네 자매는 함께 생활했다. 사립 기숙학교였지만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모두 그때의 기억을 극히 싫어했다.
특히 엄격한 교육 방침과 열악한 기숙사 환경을 끔찍이 싫어했던 샬럿은 이곳을 후에 《제인 에어》의 주인공 제인이 자란 로우드 기숙학교의 모델로 삼았다.
한편 이곳에서의 생활 때문에 자매는 평생 앓게 될 폐질환을 얻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1825년 5월에 큰언니 마리아가 11세의 나이로 폐병과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고, 남겨진 세 자매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6월에 둘째인 엘리자베스까지 사망한다.
그러나 폐질환은 가족 병력인 듯도 하다. 어머니 역시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으며,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는 열 살이 되기 전에, 남동생도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샬럿, 에밀리, 앤 세 자매 역시 모두 폐질환으로 요절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자매들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독학으로 문학 수업을 하고 틈틈이 글을 써서 잡지에 기고했다.
자매들은 소녀 시절부터 공상을 즐겼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세 자매들은 함께 작가의 꿈을 나누면서 글을 쓰고 서로에게 비평을 해 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1831년, 샬럿은 로헤드 사립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족을 떠난다. 이듬해 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1835년에는 교사로서 로헤드로 떠났다.
이때 에밀리가 언니를 따라가서 로헤드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향수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말 앤이 로헤드 학교에 입학한다. 샬럿은 교사 생활 틈틈이 시를 썼으며, 시인 로버트 사우디 등에게 자신의 시를 보내기도 했으나 괜찮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1840년부터는 에밀리와 호어스에 머물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42년, 샬럿은 에밀리과 함께 사립학교를 열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필요한 학력 자격을 갖추고자 브뤼셀의 에제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에밀리는 이 시기에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었는데, 샬럿은 동생의 시를 본 후 그 재능을 직감하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시를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샬럿은 빅토리아 시대에 성차별을 받지 않고 공정한 평가를 받으려면 남성 작가로서 글을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샬럿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작품을 출간하고 좋은 비평을 얻기 위해 남성적인 필명을 사용하여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때문에 자매는 샬럿의 주장에 따라 초기에는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해 작품을 발표했는데, 각각 커러 벨, 앨리스 벨, 액튼 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846년 샬럿은 두 동생과 공동으로 시집 《커러, 앨리스, 액튼 벨 시집》을 출간했는데, 대부분은 에밀리가 쓴 시들이었다. 그러나 이 시집은 비평가들의 반응을 얻지 못했으며, 단 2부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샬럿의 소설 《제인 에어》는 그해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10월에 출간되었는데, 역시 커러 벨이라는 필명을 썼다.
이때 한 비평가는 '이 소설에는 남성적 박력이 넘친다'라고 극찬했는데, 이 작품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작가가 여성인 샬럿임이 밝혀지자 후일 익명으로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서평을 발표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작가의 입지를 잘 알려주는 일화이다.
《제인 에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잃고, 냉혹한 숙모 아래서 그리고 로우드 기숙학교에서 힘들게 자란 제인 에어가 스스로의 삶과 사랑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이 있으며,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재능을 살릴 수 있다. 또한 종래의 기준과 달리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일은 경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라는 제인 에어의 말은, 빅토리아 시대 사회 분위기와 인습을 극복하고 스스로 삶을 일궈 나가는 여성의 모습을 대표한다.
이 작품은 새로운 여성상을 창출한 한편, 최초로 '정열'을 다룬 소설로 평가받았다. 출간 당시에도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오늘날에도 영국 로맨스 소설 및 사회소설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인 에어》가 발표되고 두 달 후 에밀리가 앨리스 벨이라는 필명으로 《폭풍의 언덕》을 발표했다. 에밀리는 서른의 나이에 요절하여 장편소설로는 이 한 작품만을 남겼다. 그러나 이 작품이 영문학 3대 비극, 세계 10대 소설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녀의 이름은 영국 문학사에 길이 새겨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요크셔 지방의 고립된 황야에 자리한 농장 워더링 하이츠를 배경으로 인간의 애증을 낭만적이면서도 격렬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워더링 하이츠는 마치 세 자매가 어린 시절 자랐던 곳을 연상케 하는데, 에밀리 역시 황량한 요크셔 농가에서 자매들과만 교류하고 상상으로 이야기를 지어 내며 고립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폭풍의 언덕》은 발표 당시 거칠고 야만적이며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받았으나, 오늘날에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거칠고 극적인 감정들과 강렬함으로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완벽하게 융합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폭풍의 언덕》을 제외하고 에밀리가 남긴 글은 《커러, 앨리스, 액튼 벨 시집》에 실린 것이 전부인데, 이 작품들에는 신비주의적 성향과 자연에 대한 강렬한 묘사와 애정, 상징성이 풍부하다. 때문에 에밀리는 영국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비견되기도 한다.
《폭풍의 언덕》이 발표된 달에 막냇동생 앤은 액튼 벨이라는 필명으로 《아그네스 그레이》를 발표했으며, 이듬해 《와이드펠 홀의 소작인》을 펴냈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여성 가정교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중류층 여성의 삶을 직선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오늘날에는 언니들의 작품에 비해 문학적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으나, 당시 사회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어 당대 여성 독자들의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샬럿은 소설을 계속 쓰면서 독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활발히 활동했다.
반면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의 실패로 평소 우울하고 은둔적인 성격이 더욱 심해졌고, 하 던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이후 에밀리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1848년 12월 19일 30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동생인 앤 역시 폐결핵으로 이듬해인 1849년 5월 28일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언니인 샬럿이 가장 오래 살았으나 그녀 역시 마흔은 넘기지 못했다.
1854년 호어스에서 샬럿은 아버지 아래에서 목사보로 복무하던 아서 벨 니콜스와 결혼하여 그곳에 정착했으나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앓고 있던 폐질환 등이 악화되어 1855년 3월 31일 생을 마감했다.
《제인 에어》 이후에도 샬럿은 몇몇 작품을 썼으나 대표작인 《셜리》를 비롯해 사 후에 출간된 《교수》 등도 《제인 에어》에 비견할 만한 명성은 얻지 못했다.
브론테 세 자매의 극적인 삶은 수많은 전기와 영화의 소재가 되었으며, 자매들의 작품 역시 수차례 영화, 연극 등으로 재탄생되었다. 자매들이 살던 호어스의 목사관은 1968년 브론테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_ 청아출판사(이한이 글)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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