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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은 고독과 고독이 부딪친 정물화이다...
2017년 01월 15일 18시 40분  조회:4356  추천:0  작성자: 죽림

폴 세잔

Paul Cézanne, 자화상은 고독한 정물화다
         "근대 회화의 아버지"
 
 
출생일 1839년
사망일 1906년
국적 프랑스
대표작 〈마흔한 살의 자화상〉, 〈생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튤립을 꽂은 화병〉, 〈사과와 오렌지〉

심술궂은 표정을 한 모델

〈서른여덟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75~1877, 55.5×46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서른여덟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75~1877, 55.5×46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라파엘로와 뒤러처럼 잘 생긴 용모를 한 거장들의 자화상을 보다가 세잔의 자화상을 보면 뭐랄까, 아무리 인상이 좋지 않더라도 이왕이면 좀 착하게라도 그릴 것이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화상 속 세잔의 모습은 참 예술가답지 않다. 그의 인상은 마치 심술궂은 고리대금업자나 감옥의 교도관을 연상시킨다. 세잔은 이처럼 비호감형인 자기 얼굴을 평생 30여 점이나 그렸다. 세잔이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은 자신의 모습을 후대에 남겨두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험상궂은 인상만큼 성격이 괴팍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몹시 싫어해서 마음에 드는 모델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틈나는 대로 자신을 모델 삼아 자화상을 그리면서 다양한 실험을 했다. 물론 그는 심술궂은 모델을 그린 자화상을 그리 흡족해 하지는 않았다.

〈서른여덟 살의 자화상〉은 세잔의 자화상 가운데 그나마 덜 심술궂게 보이는 작품이다. 세잔은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스승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소개로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한 뒤였지만 그의 화풍은 차츰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 자화상은 거칠고 육중한 검은 윤곽선이 인물의 형체를 분명하면서도 견고하게 잡아준다. 그림에서는 세세한 붓 터치를 사용해서 빛의 효과를 충분히 살린 인상주의의 화법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과감한 붓질로 안정감을 더한다.

세잔의 인상을 더욱 비호감형으로 만든 요인으로 대머리를 꼽을 수 있다. 세잔은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훨씬 권위적인 인상이 풍긴다. 세잔의 자화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마흔한 살의 자화상〉에는 대머리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 그림에서도 검은색의 두터운 윤곽선이 형태를 확실하게 잡아주면서 화면의 구조를 안정되게 지탱하고 있다. 화가는 부자연스런 색을 덧칠하여 형태를 표현하기 시작했고 사물의 구조를 최대한 단순화해서 묘사했다.

〈마흔한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0~1881, 33.6×26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마흔한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0~1881, 33.6×26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그리는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

세잔은 자연으로 가서 그림을 그리라는 피사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뒤에야 비로소 야외로 나가 밝은 햇빛 아래 변화하는 색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어둡고 침울한 화풍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생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유채, 1885~1887, 65×81cm, 소장처 불명
〈생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유채, 1885~1887, 65×81cm, 소장처 불명

세잔의 그림 속에 표현된 사물의 색채는 순색으로 칠한 부분도 있고 작은 색점을 무수하게 찍어서 만들어 낸 것도 있다. 물감이 두껍게 칠해진 부분이 있지만 어두운 부분은 오히려 물감이 얇게 칠해졌다. 〈생빅투아르 산〉에서 화면 가까이 보이는 숲은 뚜렷한 윤곽선으로 인해 형태가 안정된 반면, 화면 멀리 배치된 산은 햇빛 아래 환하게 빛난다. 이는 고전주의의 안정된 형태감과 인상주의의 색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회화는 짧고 빠른 붓놀림으로 햇빛 아래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색채의 효과를 이용하여 밝고 화려한 화면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사물의 형태를 지탱하는 윤곽을 붓 터치, 점, 면으로 분해하여 구조적인 안정성을 떨어뜨린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세잔은 인상주의 회화가 자연 채광 아래에서 변화하는 색의 효과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전주의의 조형미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튤립을 꽂은 화병〉, 캔버스에 유채, 1890~1894, 60×42cm, 소장처 불명
〈튤립을 꽂은 화병〉, 캔버스에 유채, 1890~1894, 60×42cm, 소장처 불명

세잔의 정물화는 모델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실험적으로 그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튤립을 꽂은 화병〉은 과일과 꽃병이 원, 원통, 원추의 형태로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세잔은 이것을 사물의 구조를 이루는 본질이라고 보았다. 또 색채와 형태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따뜻한 난색(暖色)과 차가운 한색(寒色)의 대비를 시도했다. 화면의 균형과 물체의 구조적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사물의 형태에 변형을 가하여 그 구조를 단순화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빛과 그림자로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사물에 추상적인 변형을 가함과 동시에 인상주의 화풍의 색채미와 조형미를 결합했다. 이로써 화면 속의 사물은 견고하고 안정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색조의 순도를 유지하여 균형 잡히고 선명한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사과와 오렌지〉, 캔버스에 유채, 1895~1900, 74×93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사과와 오렌지〉, 캔버스에 유채, 1895~1900, 74×93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미술사 최고의 정물화로 꼽히는 〈사과와 오렌지〉는 세잔이 거듭해온 색채 실험의 궁극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세잔은 동그란 과일이 햇빛을 받아 바라보는 각도마다 색채가 달라지는 자연 채광 현상을 캔버스에 투영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세잔은 정물화를 그릴 때 사물을 그리는 시간보다 관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실제로 그는 어떤 사물을 그리기 위해 스물네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피사체만 바라본 적도 있었다. 예술가의 시선이란 인내의 연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정물화 속 피사체처럼 혼자 남았다

1839년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태어난 세잔은 부유한 아버지(루이 오귀스트 세잔, Louis-Auguste Cézanne)를 둔 덕택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세잔은 아버지의 완고한 뜻에 따라 한때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잦아지면서 미술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갔다. 세잔은 파리에서 모델 일을 하던 마리-오르탕스 피케(Maire-Hortense Fiquet)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는다. 사사건건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제멋대로 사는 아들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세잔의 생활고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머지않아 아버지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된 것이다.

세잔은 괴팍한 성격으로 어릴 적에도 거의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나마 오랜 세월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이가 바로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이다. 1852년 콜레주 부르봉에 입학한 세잔은 이곳에서 졸라를 만나 친구가 된다. 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엑스 근교를 산책하며 미술과 문학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졸라가 중학교를 마친 뒤 파리로 이사하자 두 사람은 서신으로 연락을 나누며 예술가적 동지애를 이어갔다. 졸라의 문학적 감수성은 세잔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세잔은 정물화를 그릴 때 마치 한 편의 시를 짓듯이 정신적인 영역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지 못했다. 졸라는 1886년경 세잔을 주인공 삼아 쓴 소설 『걸작』을 발표했다. 졸라는 이 작품에서 세잔을 실패한 예술가로 그렸는데 이 일로 세잔은 몹시 불쾌해했고 두 사람의 우정은 거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자그마한 일도 대수롭게 넘기는 법이 없는 세잔의 까다로운 성품은 미술계에서도 유명했다. 주류 화단에서는 세잔을 성격파탄자로 취급했다. 비주류였던 인상파 모임에서도 그는 늘 불편한 존재였다. 이런 그를 이해하고 감쌌던 사람은 피사로뿐이었다. 세잔은 피사로를 스승이자 아버지처럼 따랐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작품에 임하는 화가로서의 자세뿐 아니라 선과 색의 철학에 대해서도 큰 가르침을 줬다.

당시 피사로는 젊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멘토와 같은 존재였다. 피사로의 화실에는 그를 따르는 젊은 화가들로 넘쳤다. 그 가운데 고갱도 있었다. 피사로는 세잔만큼 고갱을 아꼈고 고갱도 피사로를 존경했다. 이러한 피사로와 고갱 사이에서 세잔은 어리석은 질투를 일삼으며 두 사람을 힘들게 했다. 고갱은 세잔의 그림을 구입하는 등 관심과 호의를 보였지만 오히려 세잔의 괴팍한 자존심만 키우고 말았다.

주변 지인들에 대한 치기어린 분노는 세잔의 예술적 재능과 기회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세잔의 주변에는 스승도 동지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세잔은 부질없는 감정들로 스스로를 가뒀다. 말년에 그는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멀리하며 은둔자처럼 지냈다.

일흔에 접어든 세잔은 그림을 그리러 야외에 나갔다가 세찬 소나기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당뇨에 의한 합병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세상과 더불어 살지 못하며 평생을 상처받고 괴로워하던 화가의 죽음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그가 떠난 텅 빈 화실에는 그리다만 정물화와 바닥에 뒹구는 시든 과일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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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839년
사망일 1906년
폴 세잔
폴 세잔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 그린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감상한 라이너 릴케는 “어느 누가 이토록 웅장한 눈으로 산을 보았는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모네가 찰나의 미학을 잡아낸 화가였다면 세잔은 지속의 미를 그러낸 화가였다. 그가 그린 프로방스를 둘러싸고 있던 생트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에는 중앙의 다리와 농토, 작은 농가를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그림의 깊이감과 거리감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

폴 세잔(Paul Cézanne), 1885년, 캔버스에 유채, 66.8×92.3cm, 영국 코톨드 미술관 소장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원근법과 데생이 회화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수많은 화가가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절대 진리로 여겨지던 전통은 폴 세잔에 의해 새로워진다. 붓 터치와 색채의 조합만으로 전통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기존 원근법 대신 온화한 색을 앞쪽에 차가운 색을 뒤쪽에 배치하거나 앞마을보다 뒷산을 더 크게 그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원근감을 나타냈다.

혁신적인 방식은 당대의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다 보니 그의 그림은 일반인들보다도 당대의 예술가들이 먼저 찾았다. 클로드 모네, 폴 고갱,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유명한 화가들이 세잔의 그림을 두세 장에서 많게는 수집 장씩 소유하고 있었다. 화가가 화가의 그림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은 세잔을 그림을 공부하고 그의 독창적인 화풍을 연구했다. 그래서 그를 ‘화가들의 화가’라 부른다.

폴 세잔처럼 명성과 존경을 함께 받는 예술가는 드물었다. 한 시대의 존경은 그 시대적 윤리와 가치에 충실할 때 받는다. 조직과 인습이 강한 사회는 작가의 작품보다는 태도와 형식을 더 중시한다. 하지만 유명 예술가들일수록 초시대적인 욕구를 그대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명성만큼 존경받지 못한다.

세잔은 동료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받기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단절적 역발상으로 예술의 미래를 신탁하던 선각자였다. 그런 세잔이었지만, 그를 일순간 바보로 만든 여인이 있었다.

사랑 앞에 바보가 된 세잔

외골수로 살았던 화가 폴 세잔은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적었으며 누구의 후원도 없이 오직 홀로 고독과 침묵에 쌓여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도 그랬다. 그를 위로하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이런 세잔에게 따듯한 사랑의 온기(溫氣)를 준 여인이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uet, 1850~1922)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세잔의 아버지에게 절대 비밀로 해야만 했다. 이런 비밀스런 삶은 세잔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세잔 부인
빨간 드레스를 입은 세잔 부인

폴 세잔(Paul Cézanne), 1890~1894년, 캔버스에 유채, 89×70cm, 브라질 상파울루 미술관 소장

원래 모자 판매상이던 아버지가 가게 점원 엘리자베스 오베르(Elisabeth Aubert)를 좋아해 세잔을 가져 세상의 눈을 피해 낳아야 했다. 세잔이 다섯 살 될 무렵에야 부모가 정식 결혼을 해 비로소 세잔도 아버지를 공적으로 부를 수 있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아버지는 이때부터 은행을 인수하며 대 실업가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일을 아들이 이어받길 원했다. 그래서 세잔을 프로방스의 법대에 진학하도록 했다. 하지만 호화로운 삶에만 관심이 있던 세잔에게 법대는 적성에 맞질 않았다. 오히려 그림이 그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힘들게 학업을 이어가던 세잔은 1861년 어머니를 동원해 아버지의 설득을 얻은 뒤 법대를 중퇴했다. 그때부터 파리 국립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살롱작품전에 그림을 출품하면서 화가로 성공할 꿈을 꾼다.

하지만 대학은 번번이 낙방했고, 출품한 그림들도 수차례 낙선한다. 이때의 콤플렉스가 평생 세잔의 응어리로 남는다. 1863년 살롱전에서 떨어진 화가를 중심으로 연 ‘낙선전’에 마네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미술계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재능 없는 아들이 헛수고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은행 일을 하라고 압박을 가하지만 세잔은 굴하지 않는다.

화가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
화가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

폴 세잔(Paul Cézanne), 1866년, 캔버스에 유채, 120×200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당시 미술계를 술렁이게 만드는 모델이 등장한다. 사설 미술학교에서 책 판매원을 하면서 부업으로 화가 지망생들의 모델 일을 하고 있던 오르탕스 피케였다. 알프스 산악 지역 출신으로 열아홉 살 때 무작정 파리로 상경한 오르탕스는 산골 소녀의 순박함을 지녔음에도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에서 나오는 신비로움을 함께 지녀 많은 화가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세잔은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모델이 되어 앞에 서 있었음에도 세잔은 그녀를 그릴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그림은 엉망이 되었다. 결국 며칠을 더 모델로 세웠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잔은 계속해서 오르탕스를 모델로 세웠고, 그림은 그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감상만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세잔은 오르탕스를 모델이 아닌 연인으로 만들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화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오르탕스였다. 그녀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그가 오르탕스를 애인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애인을 만들 묘안을 찾던 중, 가난한 그녀의 삶에 주목했다. 산골에 있는 본가가 가난했기에 오르탕스는 두 가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본가로 보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화가가 가난했기에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납치
납치

폴 세잔(Paul Cézanne), 1867년, 캔버스에 유채, 117×90.5cm, 영국 피츠윌리엄 미술관 소장

세잔은 자신이 대은행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오르탕스를 유혹했다. 본가를 돕는 일에 지쳐있던 오르탕스에게 어머니와 누이의 도움으로 여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자신을 내세웠다. 세잔의 집안 배경을 보고 오르탕스는 구애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면서 어둡고 우울한 색조였던 세잔의 그림은 큰 변화를 보인다. 한 시점에서만 안정적으로 그리던 그림은 동거 이후 다각도로 관찰해서 한 화면에 담아내는 화풍으로 변화 발전했다.

동상이몽의 사랑

두 사람의 동거는 서로에게 다른 의미였다. 세잔은 아버지에게 철저히 비밀로 해야 했다. 만일 알려지면 당장 생활비가 끊기는 것은 물론 의절까지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르탕스는 동거 이후 삶이 달라질 거라 여겼다. 부잣집 아들과 살게 되었으니 파리의 번화가에서 화려하게 사는 것은 물론 산골 본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아버지 몰래 도와주는 어머니의 돈은 생계 걱정만을 해결해줄 뿐이었다.

사교적이고 수다 떨기 좋아했던 오르탕스는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마저 숨겨야 했다. 세잔이 부모를 만나러 프로방스에 갈 때도 동행할 수 없었다. 마르세유 역까지만 따라가고 거기 남아 세잔을 기다려야 했다.

오르탕스를 더 곤혹스럽게 한 것은 세잔의 모델이 되는 일이었다. 몇 시간씩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은 기본이고, 초상화를 그릴 때마다 그런 부동자세로 100가지 이상의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자세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세잔은 만족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그린 그림을 지우고, 긁어내고 다시 그리고 색칠했다. ‘백번은 그리고 백번을 고치고, 천 번은 모델을 보고 또 보았다’고 할 정도였다. 모네가 대상에서 빛의 반사를 보았고 르누아르가 대상의 싱싱한 뉘앙스를 캐치했다면, 세잔은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고자 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대상을 그대로 베끼지 말고 자기의 감각을 실현하는 구도를 잡으라”고 했다. 이 경우 감각을 ‘쌍사숑(sensation)’이라 하는데,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통한 인지작용을 말한다. 그래서 세잔은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집요하리만치 더 많은 시간을 모델 응시에 사용했다.

세잔의 이런 집요함은 초상화를 그릴 때도 나타났다. 파리의 거물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rl)가 세잔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는데, 화실 중앙의 상자 위에 의자를 놓고 볼라르가 조심스레 앉아 있었다.

너무 긴 시간 꼼짝없이 앉아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했던 볼라르가 깜빡 잠이 들어 나뒹굴고 말았다. 세잔은 그를 일으켜주기는커녕 화를 냈다.

“그렇게 움직이지 말라 일렀거늘, 기어이 작품을 망치네. 사과처럼 움직이지 말랐잖아.”

결국 볼라르는 졸지 않기 위해 블랙커피를 여러 잔 마시고 의자에 앉았다. 150일 동안 매일 아침 8시부터 12시 30분까지 무려 3시간 30분 동안 초 인내심을 발휘해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 고생은 독보적 초상화로 그려졌고, 그 덕에 볼라르는 인물화로 역사에 남게 된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폴 세잔(Paul Cézanne), 1899년, 캔버스에 유채, 100×81cm, 프랑스 아비뇽 프티팔레 미술관 소장

까만 옷을 입은 어머니가 뜨개질하는 곁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소녀가 피아노를 치는 〈피아노 치는 소녀〉에서도 온화함보다는 숙연함이 느껴졌다. 두 모델은 얼마나 오랫동안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남편의 모델을 하는 동안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피아노 치는 소녀
피아노 치는 소녀

폴 세잔(Paul Cézanne), 〈The Overture to Tannhauser: The Artist’s Mother and Sister〉, 1869년, 캔버스에 유채, 57×92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박물관 소장

금이 간 채 치러진 결혼식

오르탕스를 모델로 한 초상화는 44점이 만들어진다. 세잔의 모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예술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오르탕스는 참아가며 세잔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는 점점 더 큰 균열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 7월,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한 직후 둘의 관계는 급격히 어긋난다.

프로방스 인근의 작은 어촌인 레스타크로 이주한 시기였다. 아들이 징병 될 것을 두려워한 세잔의 어머니가 가파른 암벽 위 작은 집을 임대해 준 것인데, 바다와 소나무 풍경이 어우러진 그곳을 세잔은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오르탕스는 달랐다. 고급 살롱은 물론 카페나 네온사인도 없는 시골이라며 답답해했다.

1872년 1월, 아들이 태어나자 두 사람은 더 서먹서먹해졌다. 오르탕스는 왜 아들에게 할아버지를 소개해 주지 않느냐고 세잔을 다그쳤다. 결국 아들의 출생이 할아버지에게 알려진 것은 4년이 지난 뒤, 그것도 편지를 통해서였다.

세잔의 아버지는 손자의 출생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모욕하고 지원금마저 절반으로 줄여버렸다. 이 일로 부부는 각 방을 쓰게 된다.

이 무렵 세잔이 〈자 드 부팡〉을 그렸다. 유달리 맑고 깨끗한 물이 가득한 수영장이었다. 맑은 물이 계속 공급되고 있는데 수영장엔 사람이 없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만이 빛날 뿐이었다.

자 드 부팡
자 드 부팡

폴 세잔(Paul Cézanne), 1876년경, 캔버스에 유채, 46.1×56.3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박물관 소장

아버지는 임종을 앞둔 1886년에서야 결혼을 승낙했다. 동거 17년 만이었고 손자는 벌써 열네 살이 되어 있었다.

결혼은 세잔이 아들을 아버지의 유산상속자로 배려하기 위한 형식에 불과했다. 형식적인 부부사이지만 오르탕스는 세잔의 그림을 소중히 관리했다. 그림 한 장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공과 시간을 들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휴지통에 버리는 세잔이었다. 그런 그림들을 오르탕스는 알뜰히 챙겨 두었다. 훗날 이 그림 중에 명화가 된 작품이 많았다.

세잔은 처음 연애 시기를 제외하고 오랫동안 오르탕스를 모델로만 대했다. 두 사람의 소통 부재는 그림에서도 오롯이 나타난다. 세잔의 작품 속에서 오르탕스는 대부분 무표정했다.

별거 이후 또 하나의 우정, 에밀 졸라

결혼 6개월 후 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아버지의 부재는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세잔은 어머니와 함께 파리 교외에 거주하고 오르탕스는 아들과 함께 파리에 남게 된 것이다.

둘 사이의 별거에 대해 세잔은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

“오르탕스는 알프스와 레모네이드로 꽉 차 있어.”

세잔은 오르탕스를 처음 만나 사귀고 동거하면서 회화가 밝아졌고 결혼 후 담백하게 깊어졌으며 별거 후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아방가르드한 작가들에게도 신화적 예술가라 불리며 존중받기 시작했다. 그는 오르탕스를 모델이 아니라 아내로 만났기에 그녀를 냉철하게 바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대상을 구체적 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감정이입이 된 대상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후 고독을 숙명으로 여기고 산 세잔은 다른 사람이 자기 곁에 오는 것도 싫어했다. 나이 들수록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더 심해지면서 누가 가까이 오면 멀리 가라고 손짓했다. 특히 ‘갈고리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의 화실에서 ‘갈고리를 치워’라는 고함이 자주 들렸다. 이런 세잔의 유일한 친구는 ‘목로주점’으로 유명한 ‘에밀 졸라’였다.

두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좀 왜소한 졸라가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 때면 세잔이 나타나 해결해 주곤 했다. 이때 졸라가 고마운 마음으로 사과 하나를 주었다. 후에 세잔이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초창기 시절 ‘사과’를 그림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나는 세상을 사과로 날리게 하겠다”며 시작된 세잔의 사과 그림은 현대회화의 시작이 된다.

세잔은 화가로 살아가는 내내 사과 정물화를 그렸다. 그 덕에 에덴동산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함께 역사상 3대 유명 사과가 되었다. 움직여야 하는 인간과 달리 탁자 위의 사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구도를 연구하는 데 적격이었다. 사물의 본질을 원(圓), 원통(圓筒), 원추(圓錐)라고 본 세잔은 대상의 형태나 질감을 전통적 원근법과 명암법이 아닌 색조와 색의 농담(濃淡)으로 구현했다. 즉, 도드라지는 따듯한 색과 차분한 차가운 색, 그리고 붓의 반복 터치나 가벼운 터치를 이용했다. 세잔의 그림이 얼핏 보면 평면인데 찬찬히 보면 어느 순간 입체감이 나타나며 희열(喜悅)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3억 불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세계에서 비싼 그림이 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지화면 같지만, 어느 순간 활동영상처럼 느껴지게 된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폴 세잔(Paul Cézanne), 1890~1895년경, 캔버스에 유채, 47.5 x 57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세잔과 에밀 졸라는 서로가 만나지 못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다. 그렇게 절친이었던 두 사람이 뜻하지 않은 일로 결별하게 된다.

에밀 졸라가 새로 쓴 《작품》이란 소설에 실패한 천재가 나오는데,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오해로 1886년 4월 4일, 두 사람은 30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에밀 졸라가 오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1887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사교성이 없었던 세잔은 은둔에 들어간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지만, 그는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렇게 세인들의 시선에서 사라지면서 그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여러 미술관은 그의 작품은 수집하려고 열을 올렸고, 화실 주변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철저히 칩거로 일관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창 너머 들려오는 붓 소리만이 아직도 그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해수욕
해수욕

폴 세잔(Paul Cézanne), 1906년경, 캔버스에 유채, 249×208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오랜 칩거를 계속하던 세잔은 1906년 야외작업에 나갔다가 독감에 걸린다. 결국 그 일로 세상과 결별하게 되는데, 남겨진 막대한 유산은 아내는 제외하고 아들에게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결국 오르탕스는 세잔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죽는 그 순간까지 두 사람은 철저히 냉랭했다.

세잔이 숨을 거둔 이듬해 파리 살롱가에 세잔 회고전이 열렸다. 이 행사는 “사유와 감각의 일치를 시도해 예술사의 흐름을 바꾼 화가”라는 극찬과 함께 세잔 열풍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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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839년 01월 19일
사망일 1906년 10월 22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등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사물의 내재된 구조와 기하학적 구성을 표현했으며, 이후 많은 야수파, 입체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 루이 오귀스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등 과정인 콜레주 부르봉을 거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엑상프로방스 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법학과 전혀 맞지 않았고, 아버지 몰래 시립 개방미술학교를 다녔다. 1861년, 세잔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파리로 올라왔다. 이런 행동에는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에밀 졸라의 격려도 컸다. 파리에서 먼저 생활하고 있던 졸라는 세잔에게 편지를 보내 화가가 되는 것이 감상적인 취미인지, 진정한 천직인지 숙고해 보라고 말하곤 했다. 세잔은 자신의 운명이 화가라고 믿었다.

애써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친구인 졸라의 독려도 있었으나 그는 5개월 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세잔은 평소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데다 성격이 예민한 편이었는데, 파리의 아카데미 쉬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자신의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고 우울증에 빠졌던 것이다. 귀향한 뒤 약 1년간 그는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꿈을 포기하려 했지만, 결국 다시 굳게 결심하고 파리로 상경했다.

그는 아카데미 쉬스와 루브르 박물관, 뤽상부르 박물관 등을 다니며 그림을 공부했다. 이 무렵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르 드가 등 진보적 화가들과 사귀었다.

초기에 세잔은 〈아버지의 초상〉 같은 낭만주의적 경향이 엿보이는 초상화부터 신고전주의 화가들에게 천대받던 정물화 〈자 드 부팡의 밤나무 오솔길〉 같은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양한 화풍으로 그렸다. 그리고 1870년대 초반이 되면서부터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세잔은 아내 오르탕스 피케와 에스타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1873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하여 인상파 화가들의 수법을 받아들였다. 이는 친구인 카미유 피사로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 화가들이 관심을 기울인 색채의 변화보다 사물에 내재된 구조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이듬해 세잔은 피사로를 비롯한 신진 화가들이 아카데미에 대항해 개최한 앵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 〈모던 올랭피아〉 등이었다. 앵데팡당전에 참가한 30여 명의 화가들은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장식성, 관습적인 구성과 채색 기법, 서사 구조 등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던 이들이었다. 비평가들은 논평할 만한 이야기(소재)가 아니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데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라며 비아냥거렸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빗대 이들은 인상주의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세잔 역시 비슷하게 스케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경멸을 받았다. 결국 1877년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았고, 공공연히 그들과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등과는 계속 교류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세잔은 1870년대에 파리와 엑상프로방스 지역 등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으나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아 아버지의 재정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아직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고, 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그는 굴욕적인 시간을 보냈다. 자존심이 강하고 외곬 기질이 있던 그로서는 화단과 대중의 냉담한 반응도 참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가족 몰래 동거하고 있던 오르탕스 피케와 아들 폴의 존재를 들켜 재정 지원도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그럼에도 세잔은 인상파의 기법을 탐구하며 다양한 소재의 회화 실험을 계속했다. 그의 그림에서 점차 문학적 소재나 이야깃거리를 담은 소재가 사라지고 정물과 인물이 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 〈부엌의 정물〉, 〈줄무늬 치마를 입은 세잔 부인〉과 같은 그림들은 대상에 내재된 구도를 연구하는 기법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기하학, 형태와 구도의 양감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세잔의 이런 화법은 1888년에 이르러 제작된 〈에스타크〉에서 확립된다. 세잔은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에서 공간과 색채의 관계를 고려하여 공간감과 구도를 표현했는데, 이 작품부터 본격적으로 깊이 있는 공간과 평면적인 구도를 동시에 묘사하며, 색채를 통해 원근감을 나타내고 있다. 세잔의 회화관은 훗날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자연에서 원통과 구, 원추를 본다. 사물을 적절히 배열하면 물체나 면의 각 변은 하나의 중심점을 향하게 된다. 지평선에 평행한 선들은 넓이를 알려주며, 이는 자연의 단면을 알려준다. 반대로 지평선에 수직으로 걸친 선은 깊이를 알려준다. 그런데 자연은 넓이보다 깊이로 먼저 다가서기 때문에 빨강과 노랑으로 재현되는 빛의 진동 속에서 공기를 느끼게 하려면 파랑을 충분히 칠해야 한다.
〈줄무늬 치마를 입은 세잔 부인〉
〈줄무늬 치마를 입은 세잔 부인〉

보스턴 미술관

1881년, 그림 수집에 열의를 보이던 대가 고갱이 세잔에게 관심을 보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을 만난 고갱은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을 비롯해 세잔의 작품을 3점이나 구입했다. 그는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을 가리켜 “이 작품은 내가 갖고 있는 최고의 보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작품 〈여인의 초상〉에도 이 그림을 등장시켰다.

1886년, 아버지가 죽자 세잔은 꽤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죽기 직전 그토록 반대했던 오르탕스와의 결혼도 허락받았다. 파리의 일부 화상과 수집가 몇몇이 그의 그림을 인정한 것 외에 그림은 여전히 잘 팔리지 않았지만, 세잔은 경제적 안정과 생활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해 세잔은 30년 지기인 에밀 졸라와 불화를 일으켰다. 세잔은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에 등장하는, 실패하여 분노와 패배감에 휩싸인 화가가 자신을 닮았다고 여겼다. 졸라는 세잔과 인상파 화가들이 혁신적인 미술 기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랜 시간 이들을 지지하고 옹호해 왔다. 더구나 세잔이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때나 정신적으로 힘들어 할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세잔은 주위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때때로 졸라를 당황시켰고, 일평생 졸라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는데, 이런 면모는 성공하지 못한 화가의 나약함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세잔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결별한 두 사람은 평생 만나지 않았다.

1880년대 말에 이르러 세잔의 대표작들이 완성되었다. 그림의 형태는 좀 더 단순해지고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색은 완전히 독립성을 띠게 되었다.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과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고, 〈푸른 꽃병〉, 〈사과와 오렌지〉,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등을 완성했다. 1895년, 화상 볼라르가 화상 탕기의 가게에서 세잔의 그림을 보고 개인 전시회를 열어 주었고, 1889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마침내 세잔은 말년이 되어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1895년, 뤽상부르 박물관은 〈오베르의 농가〉와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르세유 만〉 등 2점을 구매했다.

 

세잔은 평생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어려워했다. 특히 젊은 미술가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음에도 아내 오르탕스가 죽은 이후 그는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지냈다.

세잔은 말년에도 야외로 나가 즐겨 그림을 그렸고, 사람들의 초상, 공원 풍경, 〈생트 빅투아르 산〉,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 등을 그렸다. 그러나 이 열정이 비극을 불러왔다. 1906년 10월 15일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도중 비바람이 몰려왔고, 노구의 세잔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폐렴으로 일주일 후 사망했다. 그의 작품들은 이후 야수파, 입체파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피카소가 1906년 작 〈목욕하는 여인들〉을 본떠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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