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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초현실주의 녀성화가 - 프리다 칼로
2017년 01월 28일 23시 47분  조회:3678  추천:2  작성자: 죽림
고통스런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Frida Kahlo de Rivera), Frida Kahlo
 
 
출생일 1907년 07월 06일
사망일 1954년 07월 13일
국적 멕시코
대표작 〈내 옷이 거기에 걸려 있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자화상〉, 〈부러진 척추〉, 〈희망이 없다〉 등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의 전통 문화를 결합시킨 화풍이 특징이다.

 
프리다 칼로의 얼굴이 담긴 멕시코 우표
프리다 칼로의 얼굴이 담긴 멕시코 우표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관능적이고 개성 강한 자의식의 세계를 창조한 프리다 칼로.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기억과 경험, 환상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멕시코 토속문화와 결합된 초현실적인 화풍은 때로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그녀 자신은 초현실주의와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이는 그녀의 그림에 표현된 초현실적인 세계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이다. 아버지는 유대계 독일인 빌헬름 칼로, 어머니는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마틸데 칼데론이다. 아버지는 사진가로 온건한 성격이었으나 어머니는 강한 성격에 멕시코 혁명 당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했을 정도로 열성적인 스탈린주의자였다. 프리다의 성격과 혁명가적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프리다는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발이 휘어 다리를 절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목발의 프리다’라고 놀렸고, 이는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춘기 시절에는 오른발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다리 길이가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해 늘 긴 멕시코 전통 치마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18세 때 일어났다. 1925년 9월 17일 하굣길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전차의 금속 기둥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고, 버스가 폭발하면서 그녀의 몸에 무수히 많은 파편이 박혔다. 프리다는 사고에서 회복되는 데만 2년이 넘게 걸렸으며, 이 사고로 평생 고통받았다.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는 지루함과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해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고는 그녀의 육신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프리다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의 캐노피 윗부분에 거울을 달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용문
“나는 자주 혼자여서,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에 나를 그린다.”
〈물이 나에게 준 것〉
〈물이 나에게 준 것〉

파리 다니엘 필리파치 컬렉션

1928년, 칼로는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했고, 평생의 사랑이자 고통, 연인이자 적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그녀는 당대 추앙받는 화가이자 혁명가였던 디에고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 주었고, 디에고는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디에고는 프리다에 대해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예기치 않은 에너지, 특색 있고 명쾌한 인물 표현, 진정한 엄정함 ……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다.”

프리다는 이에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이듬해 두 사람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화가로서, 혁명가로서 존경했지만, 한 남자로서도 지극히 사랑했다. 그리고 디에고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두 번의 이혼 전력과 심각한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던 디에고는 결혼 후에도 수없이 외도했으며, 그중에는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다의 결혼 생활은 고통과 고독, 상실감으로 얼룩졌다. 훗날 프리다는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을 (교통사고에 이어) ‘두 번째 대형사고’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평생 디에고를 놓지 못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결혼 후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 또한 멕시코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나 결혼한 해에 리베라가 공산당에서 축출당하면서 그녀 역시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1930년, 디에고가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벽화 작업을 의뢰받은 것을 계기로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3년간의 미국 생활은 끔찍했다.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이름에 묻혔고, 디에고는 프리다를 홀로 내버려 두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등뼈가 손상되어 두 차례의 유산을 경험했고, 몸의 통증 역시 심각해졌다. 게다가 디에고가 미국의 산업화와 발전에 경탄을 보낸 것과 달리, 그녀는 미국 상류층의 부패, 근본적인 인간 가치 붕괴, 심미안과 감수성 결핍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절망적인 상황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선 자화상〉, 〈내 옷이 거기에 걸려 있다〉, 〈헨리 포드 병원〉, 〈나의 탄생〉과 같은 작품으로 표출되었다. 결국 1933년 디에고가 록펠러 센터 벽화의 노동자 지도자를 레닌의 얼굴로 그리는 바람에 록펠러 재단과 불화를 일으켜 부부는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부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리베라는 작업을 하면서 모델을 선 여성들과 계속 바람을 피웠고, 이번 상대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였다. 정신적 충격과 함께 몸의 통증도 심해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세 번째 유산을 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 집을 얻었고, 디에고와 살던 집을 떠났다. 그리고 〈몇 번 찔렀을 뿐〉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질투 때문에 애인을 살해한 남자가 ‘그저 몇 번 찔렀을 뿐이라고요’라고 변론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살인에 대한 끔찍한 묘사는 마치 당시 디에고와 프리다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1936년, 프리다는 다시 리베라의 집으로 돌아왔고, 공산당 활동을 재개했다. 리베라의 바람기는 다소 잠잠해졌으나 이번에는 프리다가 염문을 일으켰다. 상대에는 멕시코로 망명 온 레온 트로츠키도 있었는데, 프리다는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자화상〉을 그리고, 거기에 ‘사랑을 담아’라는 헌사를 담아 생일 선물로 선사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프리다와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이라고 여겼다. 브르통과의 만남으로 프리다는 1938년과 1939년 뉴욕과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1939년 말,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이혼했다. 끝없이 실망하고 배신감에 고통받으면서도 디에고를 놓지 않았던 그녀는 완전히 절망했다. 척추의 고통도 심각해져 몇 차례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이듬해 그녀는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리베라가 다시 그녀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1년 만에 재결합했다. 고통과 절망뿐인 관계였지만, 그녀에게 있어 디에고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였다. 두 번째 결혼은 비교적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다.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회화 조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리베라의 아내가 아니라 화가 프리다 칼로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쌓아 갔다.

그러나 고요한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등과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계속되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을 거듭하면서 침대 생활을 하는 날이 길어졌다. 1944년 작 〈부러진 척추〉에는 황폐한 풍경을 배경으로 몸이 갈라지고 철제 보정기를 착용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석고 깁스에 자신의 부러진 척추나 다양한 아이콘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 회복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그녀는 〈희망이 없다〉, 〈희망의 나무, 굳세어라〉, 〈상처 입은 사슴〉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1940년대 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오른발이 썩어 들어갔다. 결국 프리다는 1953년에 다리 아랫부분을 절단해야 했다.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 있는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사회적인 활동이었다. 그녀는 집 밖에 거의 나가지 못했으나 1948년 공산당에 재입당해 당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병든 자를 낫게 하리라〉, 〈프리다와 스탈린〉, 〈긴 일생과 파릴 박사가 있는 정물〉 등 그녀가 죽기 전 그린 그림에는 이런 정치적 관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평화 운동 지지 서명 운동에 참여하고, 미국의 과테말라 내정 간섭에 항의하는 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조그만 일이라도 혁명에 도움이 되도록 온 힘을 다해 투쟁해야 한다. 혁명은 살아야 할 유일하고 진정한 이유다.

수술과 약물, 고통으로 그녀의 그림은 선명함을 잃어 갔고, 최후에는 몸도 가누지 못해 침대에 이젤을 설치하고 누운 채로 그림을 그렸다. 1953년 그녀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디에고와 친구들은 그녀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다. 프리다는 침대에 누운 채 참석했다. 그리고 1954년 7월 13일, 47세의 고통스러운 삶을 마쳤다.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 1년 후 디에고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은 ‘푸른 집’을 국가에 기증했고, 이곳은 1958년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개관됐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


 

 

프리다칼로

 

나는 프리다칼로를 생각하면, 그녀의 아픔부터 생각이 난다.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참으면서

하루하루를 그리고 1분1초를 살아갔을지가 느껴진다.

 

프리다칼로는 어린시절 버스를 타고 가다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겪게된다.

승객용손잡이가 달려있었던 쇠파이프가 프리다칼로의 몸을 관통한것이다.

 

가슴, 골반, 허벅지까지 관통한 쇠파이프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했던 사건이었다.

그 후 프리다칼로는 침대에 누워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만으로 그녀의 고통이 어떠한지가 느껴진다.

 

 

 

 

 

 

 아름다운외모를 가졌지만, 불의의 사고로 고통과 함께 삶을 살아가야했던 프리다칼로

프리다칼로는 그 고통을 미술로 잊어보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고통을 잊을수있었다는 프리다칼로...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 뜨거워지는건

그녀의 고통이 그림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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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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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54)는 멕시코의 한촌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1910년대의 멕시코에는 민중적 각성에 의한 농민봉기, 노동자 파업, 지식인의 무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다가올 러시아혁명을 예고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프리다는 21세 되던 해에 운명적 사랑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만났다. 천재 벽화화가이자 열렬한 사회주의자며 호색한인 디에고와의 결혼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당대의 평가를 받았다. 평생에 걸쳐 여러 번의 헤어짐과 재결합을 계속 한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자리매김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디에고는 연약한 육체를 가졌지만 불굴의 예술적 투지를 가진 프리다에게서 예술혼이 뭔가를 체험한 반면, 프리다는 디에고를 통해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범위를 넘어 가장 멕시코적인 작품을 좀 더 집요하게 파고 들 수 있었다.


 처제와의 염문 등 청탁을 가리지 않는 디에고의 병적인 호색기질에 한평생을 시달리고, 18세 때 겪은 끔직한 교통사고로 살아 생전 7번에 걸친 척추 대수술을 감내해야 했던 최악의 운명도 그녀의 불타는 예술혼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림은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자기자신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자 존재의 긴박한 이유였다. 자화상을 자주 그린 그녀는 그림 속에서 단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닌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담아내려 애썼다.

  

1939년 파리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서 당대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의 찬사를 받으며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민중예술가로서 세계적 위상을 마침내 구축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육체적 불행을 계속 강요하는 운명의 굴레는 너무도 버거웠던 것일까... 1954년 7월 13일, 오랜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을 직감한 그녀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는 인상적인 일기 귀절을 남기며 민중집회에 참여했다 47세의 우여곡절적인 삶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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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1929)

 

 당시 멕시코 사회의 여러 사회계층적 인물들을 버스 승객으로 묘사하여  자리에 서로 앉아있게함으로서 각 계층 간의 관계를 한 눈에 보여주려 한다.. 서로 간에 냉담한 포즈를 애써 지으려 하는것에서 계층 간 골이 제법 깊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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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와 리베라(1931)

 

프리다의 인생에서 버스충돌 사고 만큼이나 괄목할 만한 사건은 식인귀라는 별명을 가진 디에고 리베라와 운명적으로 만나 21세의 나이 차이를 넘어 결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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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탄생(1932)

 

이 그림은 프리다의 그림 중 가장 충격적인 대담함을 보인다. 비탄에 잠긴 마리아 상이 걸려있는 벽을 배경으로 자궁에서 힘들게 나오는 아이는 험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프리다 자신을 상징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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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있는 침대(1932)[ 헨리포드 병원 (1932) ]

 

이 그림은 프리다의 선혈적인 자화상 시리즈 중 첫번째 작품이다. 여기에는 고독감에 싸인 채 아무런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프리다 자신의 처지가 지평선 너머 황량한 산업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을씨년스럽게 그려지고 있다. 리본의 끈은 유산 당시의 절망적인 심정을 나타내고, 달팽이는 임신에 실패하는 유산과정의 상징인양 묘사된다

[ 헨리포드 병원 (1932) ]
세번이나 임신을 해도 모두 유산이 되고 만 프리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고와 병으로 인해 완전하지 못한 몸을 가진 그녀였지만 그녀안에 있는 열정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죠. 아기도, 자궁도, 희망도, 기대하는 마음이 클수록, 커지는 그녀의 슬픔이 그림 속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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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미국 두개의 세계 사이에서(1932)

 

이 그림은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뒤 이 지역 찬미가로 변신한 디에고에 대한 실망감을 프리다 자신의 멕시코 사랑과 대비시켜 묘사한 작품이다. 오른쪽은 미국의 모던화된 산업도시의 차가움을 , 왼쪽은 멕시코의 태양과 토착문화에 대한 프라다의 애착을 은연 중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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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치마가 저기 걸려있다(1933)

 

이 그림에서 프라다는 넘칠 것 같은 쓰레기통, 공기를 오염시키는 굴뚝, 기둥 위에 놓인 하얀 변기 등 미국에서 가장 추한 물건들을 전면에 드러내 보임으로서 미국적 산업세계에 대한 자신의 반감을 나타내었다. 대신 멕시코 원주민의 상징인 치마를 한복판에 걸어놓은 것에 대해 시인 살바도르 노보는 "말리려고 널어놓은 테우아나의 셔츠가 허드슨 강에 오줌을 눈 상황"이라고 프리다의 의미심장한 내심을 포착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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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작은 상처들(1935)

 

디에고가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염문을 피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절망한 심정을 이 그림 한 장으로 묘사했다. 디에고가 자신에게 가한 배반의 칼질로 얼마나 쓰라린 고통의 상처 속에 몸부림치는가를.. 그녀는 디에고가 그토록 좋아한 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채 난도질 당한 몸매를 침대 위에 널부러뜨려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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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기억(1937)

 

디에고에게 떨어져 몇 달을 보낸 뒤에 프리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외로움에 못 견뎌 디에고에게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균열된 믿음은 결코 복구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 그림은 잘 나타내고 있다. 프리다의 발치에 놓여있는 거대한 심장은 샘처럼 피의 강을 이룬 채 산과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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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에 죽은 디마 로사(1937)

 

프리다의 친구이기도 했던 꼬마 디마의 죽음은 그녀에게 멕시코의 비극을 그대로 상징하는 듯 했다. 프리다는 고대 인디언 의식에 제물로 바쳐진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치마 위에 누워 있는 디마의 모습을 존엄성이 가득차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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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와 나(1937)

 

프리다는 여기에서 연년생 동생 때문에 유모의 젖을 먹고 커야 했던 자신의 유아시절을 묘사하고 있다. 성인 얼굴에 어린 소녀의 몸을 하고 대지의 어머니이자 멕시코 혼혈 원류의 상징인 인디오 유모 품에 안겨 젖을 먹는 형상은, 자신의 뿌리가 아즈텍의 토착 신앙에 근거하며 여기에 자신의 예술혼을 내맡기겠다는 이심전심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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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1937)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멕시코로 망명온 트로츠키 일행을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는 자신의 집에 귀빈으로 머물게 초대했다. 이 시기에 프리다는 라틴 여인의 활달한 장난기와 바람기가 섞인 조금 복잡한 감성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영웅인 트로츠키와 유혹적인 연애유희 게임을 즐겼다. 이런 심사속에 프리다는 자신의 연애상대인 노정객을 당혹감에 빠뜨리는 애정고백적인 자화상을 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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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내게 주는 것(1938)

 

이 그림을 보고 앙드레 브루통은 "여기에는 잔인함과 해학성이 대담하게 버무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만이 고귀한 멕시코적 감정의 힘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고 평했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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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헤일의 자살(1938)

 

미국잡지사 여기자인 베네티 웨어가 뉴욕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여배우 도로시 헤일의 자살관경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작한 그림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자신이 자살한 광경으로 변형시켰다. 이 무렵 디에고와 헤어져 멕시코를 떠날 때의 절망적 심정을 노출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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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명의 프리다(1939)

 

디에고와 이혼한 직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프리다 자신이 가진 두개의 상치된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 두 형상 중 실제 프리다의 모습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후아나를 입고 있고, 그 옆에는 자신의 분신이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 둘의 심장은 하나의 혈관으로 연결되고, 그 혈관의 끝은 분리되어 유럽적 프리다의 드레스에 피를 흘러내리게 한다. 그녀가 자신을 빼다 닮은 분신을 설정해 피로 얼룩지게 한 것은 자살과 죽음의 이미지를 표출하려는 의도 외에, 끝없는 고독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심정을 나타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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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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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깎은 자화상(1940)

 

여기에서 프리다는 방안 가득 잘라낸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 있다. 그 위에는 분노와 허탈감이 교차된 노래가사가 울려 퍼진다: "알아?, 내가 널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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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서 박사에게 보낸 자화상(1940)

프리다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는 드물지요. 어려서부터 혼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그녀는 거울을 천장에 붙여놓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얼굴에 대한 인상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확실히 가지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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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디에고(1943)

 

테후아나 지방의 전통 의상을 착용한 채 이마에 리베라를 담고 있는 이 자화상은  불성실한 남편에 대한 분노와 질투보다는 어느 정도 체념한 듯 달관한 듯한 심리변화를 엿보이게 한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이라고도 불리우는 작품입니다. 테우아나는 멕시코 전통의상입니다. 특별한 의식의 의상을 입고 있는 자신의 이마에 디에고를 그려놓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프리다에게 있어서 디에고는 가장 완벽한 존재, 그리고 그녀가 유일하게 신성시하며 존경하는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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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또는 거치른 땅(1943)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대지의 어머니같이 여겨지는 식물로부터 더없이 편안한 자세로 자양분을 제공받고 있다. 보다 더 멕시코적인 예술을 꽃피우기라도 하겠다는듯이..   

그림 속의 화산으로 뒤덮인 멕시코 대지가 자신의 뿌리임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잊요. 식물의 줄기와 사람의 핏줄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으로 남들보다 몸은 건강하지 않지만 생명력만은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생명과 죽음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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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척추(1944)

 

여섯 번이나 척추 대수술을 받아야 했던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코르셋으로 부러진 척추를 얼기설기 추스려 몸을 고정시킨 채 힘겹게 서있는 프리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크게 안스럽게 한다. 저 멀리 황폐한 배경조차 그녀의 고통과 처연함을 극대화하는데 한 몫 하고..  

16살때에 당한 전차 사고로 인해 프리다의 척추는 부서졌고 그녀는 7번이나 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년동안 그녀의 척추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그녀가 받았던 고통은 그녀의 몸에 박혀있는 못들로, 흘러내리는 눈물로, 황량한 사막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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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사라지고(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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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1946)

 

살갗을 벗길 듯 강렬하게 내려쬐는 태양과 차가운 요기의 달로 인해 둘로 나뉜 사막을 마주한 프리다가, 허리에 깊은 상처가 움푹 패인 채 들 것에 누워있는 자신의 분신을 옆에 하고 앉아 있다. 이런 극심한 부정속에서야 희망은 떠오르는 법이런가..

자신의 망가진 척추를 지탱해주고 있던 지지대를 떼어내고 언젠가는 건강한 모습으로 서고 싶다는 바람을 그려낸 것입니다. 그림의 반쪽이 어둡고 황량한 밤의 모습이지만 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뒷모습의 그녀는 밝은 햇살 속의 아침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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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1945)

 

디에고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유산한 뒤 프리다는 더욱 무표정한 얼굴로 원숭이 등 애완동물릉 동반한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된다. 이런 애완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세상을 못보고 간 아이에 대한 대체적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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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늘어뜨린 자화상(1946)

 

이 자화상은 디에고가 프리다의 눈썹이 하늘을 나는 티티새같다고 말하던 시절의 추억을 담은 그림이다. 여기에서 운명의 손은 귀고리가 되었고, 머리카락은 뒤엉켜서 풀잎 목걸이로 변모했으며, 늘 그렇듯 뺨위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져 있다.  무언가 묻는 듯한 시선은 별들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우주를 떠다니는 빛처럼 공허하면서도 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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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사슴(1946)

 

여러차례의 척추수술, 유산, 한쪽 발 절단 등 온갖 신체적 고통을 겪은 프리다는 자신을 상징하는 화살맞은 사슴을 그리며 달관 속에 단련된 심정을 처연하게 드러낸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화살을 맞고서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는 저 평온한 표정의 역설이라니...

비록 여러 개의 화살을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슴이면서 얼굴은 프리다로 표현하여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또다른 차원의 예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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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와 나(1949)

 

여기에서 프리다의 긴 머리는 저절로 목부분에 감겨져 있으며, 그것은 그녀를 질식시킬 듯이 위협적이다. 그럼에도 디에고에 대한 맹목적이다 싶은 애정은 그녀의 표정에서 조금도 사그라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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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지구, 멕시코, 디에고와(1949)

 

고대 멕시코의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이 그림 이후에서부터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 대한 절망감을 표출하지 않는다. 대신 모성애적 관대함으로 점철된 그녀의 심리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달관한 여인처럼 금욕 억제적이며 냉정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참고 이기며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결의가 엿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디에고와 연출했던 사랑과 증오의 오랜 유희는 무한한 생명추구 유희로 승화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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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uits Of The Earth(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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