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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의 전통 문화를 결합시킨 화풍이 특징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관능적이고 개성 강한 자의식의 세계를 창조한 프리다 칼로.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기억과 경험, 환상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멕시코 토속문화와 결합된 초현실적인 화풍은 때로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그녀 자신은 초현실주의와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이는 그녀의 그림에 표현된 초현실적인 세계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이다. 아버지는 유대계 독일인 빌헬름 칼로, 어머니는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마틸데 칼데론이다. 아버지는 사진가로 온건한 성격이었으나 어머니는 강한 성격에 멕시코 혁명 당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했을 정도로 열성적인 스탈린주의자였다. 프리다의 성격과 혁명가적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프리다는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발이 휘어 다리를 절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목발의 프리다’라고 놀렸고, 이는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춘기 시절에는 오른발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다리 길이가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해 늘 긴 멕시코 전통 치마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18세 때 일어났다. 1925년 9월 17일 하굣길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전차의 금속 기둥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고, 버스가 폭발하면서 그녀의 몸에 무수히 많은 파편이 박혔다. 프리다는 사고에서 회복되는 데만 2년이 넘게 걸렸으며, 이 사고로 평생 고통받았다.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는 지루함과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해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고는 그녀의 육신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프리다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의 캐노피 윗부분에 거울을 달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주 혼자여서,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에 나를 그린다.”
1928년, 칼로는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했고, 평생의 사랑이자 고통, 연인이자 적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그녀는 당대 추앙받는 화가이자 혁명가였던 디에고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 주었고, 디에고는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디에고는 프리다에 대해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예기치 않은 에너지, 특색 있고 명쾌한 인물 표현, 진정한 엄정함 ……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다.”
프리다는 이에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이듬해 두 사람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화가로서, 혁명가로서 존경했지만, 한 남자로서도 지극히 사랑했다. 그리고 디에고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두 번의 이혼 전력과 심각한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던 디에고는 결혼 후에도 수없이 외도했으며, 그중에는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다의 결혼 생활은 고통과 고독, 상실감으로 얼룩졌다. 훗날 프리다는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을 (교통사고에 이어) ‘두 번째 대형사고’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평생 디에고를 놓지 못했다.
결혼 후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 또한 멕시코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나 결혼한 해에 리베라가 공산당에서 축출당하면서 그녀 역시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1930년, 디에고가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벽화 작업을 의뢰받은 것을 계기로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3년간의 미국 생활은 끔찍했다.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이름에 묻혔고, 디에고는 프리다를 홀로 내버려 두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등뼈가 손상되어 두 차례의 유산을 경험했고, 몸의 통증 역시 심각해졌다. 게다가 디에고가 미국의 산업화와 발전에 경탄을 보낸 것과 달리, 그녀는 미국 상류층의 부패, 근본적인 인간 가치 붕괴, 심미안과 감수성 결핍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절망적인 상황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선 자화상〉, 〈내 옷이 거기에 걸려 있다〉, 〈헨리 포드 병원〉, 〈나의 탄생〉과 같은 작품으로 표출되었다. 결국 1933년 디에고가 록펠러 센터 벽화의 노동자 지도자를 레닌의 얼굴로 그리는 바람에 록펠러 재단과 불화를 일으켜 부부는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부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리베라는 작업을 하면서 모델을 선 여성들과 계속 바람을 피웠고, 이번 상대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였다. 정신적 충격과 함께 몸의 통증도 심해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세 번째 유산을 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 집을 얻었고, 디에고와 살던 집을 떠났다. 그리고 〈몇 번 찔렀을 뿐〉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질투 때문에 애인을 살해한 남자가 ‘그저 몇 번 찔렀을 뿐이라고요’라고 변론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살인에 대한 끔찍한 묘사는 마치 당시 디에고와 프리다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1936년, 프리다는 다시 리베라의 집으로 돌아왔고, 공산당 활동을 재개했다. 리베라의 바람기는 다소 잠잠해졌으나 이번에는 프리다가 염문을 일으켰다. 상대에는 멕시코로 망명 온 레온 트로츠키도 있었는데, 프리다는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자화상〉을 그리고, 거기에 ‘사랑을 담아’라는 헌사를 담아 생일 선물로 선사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프리다와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이라고 여겼다. 브르통과의 만남으로 프리다는 1938년과 1939년 뉴욕과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1939년 말,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이혼했다. 끝없이 실망하고 배신감에 고통받으면서도 디에고를 놓지 않았던 그녀는 완전히 절망했다. 척추의 고통도 심각해져 몇 차례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이듬해 그녀는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리베라가 다시 그녀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1년 만에 재결합했다. 고통과 절망뿐인 관계였지만, 그녀에게 있어 디에고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였다. 두 번째 결혼은 비교적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다.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회화 조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리베라의 아내가 아니라 화가 프리다 칼로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쌓아 갔다.
그러나 고요한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등과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계속되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을 거듭하면서 침대 생활을 하는 날이 길어졌다. 1944년 작 〈부러진 척추〉에는 황폐한 풍경을 배경으로 몸이 갈라지고 철제 보정기를 착용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석고 깁스에 자신의 부러진 척추나 다양한 아이콘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 회복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그녀는 〈희망이 없다〉, 〈희망의 나무, 굳세어라〉, 〈상처 입은 사슴〉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1940년대 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오른발이 썩어 들어갔다. 결국 프리다는 1953년에 다리 아랫부분을 절단해야 했다.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 있는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사회적인 활동이었다. 그녀는 집 밖에 거의 나가지 못했으나 1948년 공산당에 재입당해 당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병든 자를 낫게 하리라〉, 〈프리다와 스탈린〉, 〈긴 일생과 파릴 박사가 있는 정물〉 등 그녀가 죽기 전 그린 그림에는 이런 정치적 관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평화 운동 지지 서명 운동에 참여하고, 미국의 과테말라 내정 간섭에 항의하는 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수술과 약물, 고통으로 그녀의 그림은 선명함을 잃어 갔고, 최후에는 몸도 가누지 못해 침대에 이젤을 설치하고 누운 채로 그림을 그렸다. 1953년 그녀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디에고와 친구들은 그녀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다. 프리다는 침대에 누운 채 참석했다. 그리고 1954년 7월 13일, 47세의 고통스러운 삶을 마쳤다.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 1년 후 디에고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은 ‘푸른 집’을 국가에 기증했고, 이곳은 1958년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개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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