齐白石90岁画的虾,专家鉴定价150万元。
제백석(齊白石, 1864년 1월1일~1957년 9월 16일), 남, 후난(湖南) 창사푸(長沙府) 샹탄(湘潭) 출생(出生). 원명(原名)은 순지(純芝), 자(字)는 위청(渭青), 호(號)는 란정(蘭亭)이다. 후에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號)를 바꾸었다.
제백석(齊白石)은 근현대(近現代) 중국(中國) 회화(繪畵) 화가(畫家)로 유명(有名)한 세계적(世界的)인 인물(人物)이다. 일찍이 목공(木工)일에 종사(從事)했으며 후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生計)를 유지(維持)하고 50세 이후 베이징에 정착(定着)했다. 꽃과 새, 곤충(昆蟲)과 물고기, 산수(山水), 인물(人物) 그리기에 능했으며 필묵(筆墨)에 힘이 있고 색채(色彩)가 농후(濃厚)하고 그림 전체는 경쾌(輕快)하며 간결(簡潔)하고 생동감(生動感)이 넘치며 예술성(藝術性)이 소박(素朴)하고 인정(人情) 넘친다. 물고기, 새우, 곤충(昆蟲)을 소재(素材)로 삼아 자연(自然)의 정취(情趣)를 끊임없이 그렸다. 제백석(齊白石)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필사(筆寫)하고 진한(秦漢)의 비문(碑文)을 모방(模倣)했으며 소박(素朴)한 행서(行書), 전각(篆刻), 시문(詩文) 쓰기에 능했다.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學院) 명예교수(名譽敎授), 중국미술가협회(中國美術家協會) 주석(主席) 등을 역임(歷任)했다.대표작품(代表作品)으로는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다. 저작(著作)으로는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다. 1963년 세계 10대 문화(文化) 유명인물(有名人物)로 선정(選定)되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화단(畫壇)의 꽃이라 불릴 정도(程度)로 새우는 제백석(齊白石)의 대표적(代表的)인 예술(藝術) 부호(富豪) 중 하나이다. 제백석(齊白石)은 평생(平生) 관찰(觀察)을 통해 새우의 특징(特徵)을 심도(深度) 있게 묘사(描寫)하려 애썼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이미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간결(簡潔)하면서도 과감(果敢)한 필묵(筆墨)은 물속에서 노니는 새우들을 생동감(生動感) 있게 표현(表現)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활발(活潑)하고 영민(靈敏)하고 민첩(敏捷)함을 표현(表現)했으며 생명력(生命力)이 넘친다. 한 쌍의 짙은 눈, 머리 중간(中間)은 초묵(焦墨)을, 좌우(左右)는 담묵(淡墨)을 사용(使用)해 그린 새우의 머리 부분(部分)을 보면 다양(多樣)한 변화(變化)를 느낄 수 있다. 딱딱한 껍질은 투명(透明)하게 표현(表現)하기 위해 먹 농도(濃度)의 강약(强弱)을 조절(調節)해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표현(表現)했다. 한 번 붓질에 한 마디를 표현(表現)한 새우의 허리부분은 연속(連續)으로 붓을 놀려 점점 가늘어지는 새우 허리의 리드미컬함을 부각(浮刻)시켰다.
齐白石(1864年1月1日─1957年9月16日),生于湖南长沙府湘潭(今湖南湘潭)人。原名纯芝,字渭青,号兰亭。后改名璜,字濒生,号白石、白石山翁、老萍、饿叟、借山吟馆主者、寄萍堂上老人、三百石印富翁。是近现代中国绘画大师,世界文化名人。早年曾为木工,后以卖画为生,五十七岁后定居北京。擅画花鸟、虫鱼、山水、人物,笔墨雄浑滋润,色彩浓艳明快,造型简练生动,意境淳厚朴实。所作鱼虾虫蟹,天趣横生。齐白石书工篆隶,取法于秦汉碑版,行书饶古拙之趣,篆刻自成一家,善写诗文。曾任中央美术学院名誉教授、中国美术家协会主席等职。代表作有《蛙声十里出山泉》《墨虾》等。著有《白石诗草》《白石老人自述》等。2011年5月22日,他的最大尺幅作品《松柏高立图·篆书四言联》被拍出4.255亿元人民币的天价。
제백석(齊白石)은 중국 근대 미술문화사상 유명한 화가이고 서예가이며 전각가입니다.
그는 베이징 국립예술전문학교의 교수, 중앙미술대학 명예교수, 베이징화원 명예원장, 중국미술협회주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예술창작에 몸담아 온 제백석은 3만여폭의 그림과 3천여편의 시, 유수의 자필원고를 남겼습니다. 특히 산수화, 초상화에 능한 제백석의 대표작으로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으며, 저서로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습니다.
제백석의 "자술(自述)"에는 "1927년에 과차골목(跨車胡同)15번지 즉 지금의 13번지에 있는 집을 구매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백석은 바로 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 과차골목 13번지에 위치한 이 옛집에서 생의 최후 30년을 보냈습니다.
베이징 서단(西單)상업구 벽재골목(辟才胡同)에 이르면 고층빌딩의 수림속에 묻힌 자그마한 사합원이 보입니다. 청회색 벽돌담으로 둘러쌓인 이 사합원이 바로 제백석옛집입니다. 동서향의 이 사합원은 번잡한 현대도시의 분위기에 고풍적인 묘미를 가해줍니다.
지금의 제백석옛집은 기존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제백석 후손들이 기억하는 이 옛집은 시적정취가 다분하고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정교한 정원이었습니다. 사합원은 3채 북방(北房)이 주체를 이루었는데 가운데 방은 객실 겸 식사 공간이고 동쪽 방은 거실, 서쪽 방은 화실(画室)이었습니다. 전반 사합원의 구조는 간단하고 내부도 소박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화실의 서쪽켠에 놓인 회화용 책상 남단에는 넓이가 각기 다른 선지(宣紙)들이 쌓여있고 북단에는 문방사우와 염료를 담았던 크고작은 그릇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등받이가 있는 원형의자 우에는 방석이 놓여있었는데 이는 제백석이 서예 혹은 회화 창작할 때 앉았던 의자입니다. 회화용 책상 맞은켠에는 높다란 책상이 있고 그 우에는 유리케이스가 달린 시계가 놓여있습니다.
백석화실의 거실에는 원형과 네모의 두가지 형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상이 있고 긴 등받이 의자가 북쪽 벽에 놓여져 있습니다. 추운 날에 제백석은 의자에 이불을 깔고 식후 잠간 여기에 앉아 휴식을 취하군 했습니다. 제백석의 생활은 화려함과 거리가 먼 소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응접실에는 소파도 없이 그저 걸상만 몇 개 놓았을 뿐입니다. 제백석 후손들의 소개에 의하면 제백석은 안전을 고려해 1935년 북쪽 방앞의 복도를 철사슬로 묶어 난간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림에 글씨나 시문을 쓸 때 "철옥(鐵屋)"이라는 글자를 적어 이곳에 대한 깊은 정을 표현했습니다. 1953년 제백석은 이 철옥을 "백석화옥(白石畫屋)"으로 수정하고 전서체로 쓴 편액을 만들어 걸었습니다.
제백석이 살던 이 정원에는 포도와 능소화(淩霄), 버드나무들이 자라나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졌습니다. 정원의 북쪽켠에는 지붕을 능가하는 높다란 대추나무가 있었고 북쪽과 남쪽 정원을 이어주는 원형문은 무늬를 새긴 벽돌로 지어 고풍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제백석은 이 사합원에서 담담한 일상을 보내면서 2만여점의 작품 창작했습니다. 그가 간결하고 힘찬 붓을 휘둘러 그린 화초며 벌레, 새우, 산수, 인물은 정교함속에서도 독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제백석은 이런 화풍으로 현대중국화를 위해 소박하면서도 참신한 예술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필묵으로 중국화의 현대적인 예술정신을 표현했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삶의 지혜와 철학을 전했습니다. 제백석의 산수화는 예술창신에 대한 자부심과 통찰을 통한 깨달음을 표현했고 인물화는 표정에 담긴 내면의 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백서의 서예 또한 간결하면서도 대범하고 지어 웅건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특무 우두머리였던 북평 위경사령(偽警司令) 선철오(宣鐵吾)는 일찍 제백석의 명성을 듣고 생일잔치날 그를 초대했습니다. 연회장에 도착한 제백석은 주변을 살펴보고 잠간 사색에 잠기더니 종이를 펴고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잠간 사이에 종이에는 게가 그려졌습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숨쉬는듯 생동한 이 회화작품에 감탄해마지 않았고 선철오도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습니다. 이때 제백석은 붓끝을 놀려 그림옆에 몇자를 적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옆으로 가는 게의 특성을 비유해 "네가 언제까지 횡행(橫行)할지 두고보자"였습니다. 그러고는 소매를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돌아갔습니다. 이는 매국노에 대한 제백석의 풍자와 분노가 절실히 보여지는 대목이었습니다. 1937년 일본침략군이 북평을 점령한 뒤 제백석은 문을 닫고 일체 내방객을 사절했습니다. 그것은 위만주군의 두목들이 그림을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문에 "종래로 벼슬은 민가에 오지 않는 법이니 일체 접대를 사절한다"고 공지하고 옆에 비취새를 그린 그림도 덧붙였습니다. 그때 이 그림은 참으로 독특했는데요, 보통 비취새를 그리면 돌이나 강가에 서있는 비취새와 수면우로 올라오는 물고기를 함께 그리는데 제백색은 물고기를 그리지 않고 깊은 물속에 있는 새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옆에 "비취새의 그림에는 물고기가 반드시 등장하지만 특별히 새우를 그렸네, 새우가 뜨지 않으니 비취새인들 어찌하랴?"라는 내용의 문구를 적었습니다. 즉 제백석은 자신을 새우에 비유하고 한간들과 일본 침략자들을 비취새에 비유해 이자들이 호시탐탐 그림을 노린다해도 절대 그려줄 의향이 없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숭고한 민족절개를 지닌 중국 근대 현대 미술사에서의 걸출한 화가, 서예가, 전각가 제백석은 이곳에서 20세기 중국 회화예술의 휘황한 업적을 쌓았고 후손들에게 소중한 예술자원을 남겨주었습니다.
오늘날 제백석옛집은 기존의 우아한 정취를 잃은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1984년 5월 베이징시 정부는 이곳을 베이징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지금은 제백석 후손들의 저택으로 개관하지 않았습니다.
과차골목 13번지에 있는 사합원은 오늘도 제백석의 못다한 이야기를 담은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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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망(人民網) 제공
◎글자풀이: 가지런할 제(齊) 흰 백(白) 돌 석(石)
가지런할 제(齊)는 갑골문(甲骨文)에는 창끝모양 세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大部分) 이것을 보리이삭과 같은 곡물(穀物)로 해석(解釋)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現在)의 자형(字形)인 제(齊)를 눈여겨보면 그 해석(解釋)이 매끄럽지 못하다. 도(刀)나 씨(氏), 그리고 중앙부(中央部)의 신(辛) 모양(模樣)은 모두가 도검류와 관련(關聯)이 깊으며 자형하부는 그것을 가지런히 꽂을 수 있는 대(臺)라 할 수 있다. 즉 칼이나 창을 일정(一定)하게 짠 틀에 나란히 꽂아둔 모양(模樣)을 본떠 ‘가지런하다’는 뜻을 부여(附與)했다. 제(齊)자는 보리이삭의 알곡들 배열(配列)이 가지런하게 패어있는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가지런하다(齊)'라는 뜻인 글자이다. 제(齊)자는 본디 몇 개의 알곡 꼴이었던 것이 후에는 한 포기 꼴로 바뀌었다. 그런데 현재 '제(齊)' 꼴만큼 심오(深奧)한 연상력(聯想力)을 자극(刺戟)하는 글자도 드물 것이다. 즉 제(齊)자는 다섯 가지 자형(字形)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亠'자는 알곡들 끝 부분에 난 뾰족한 가시들이 한군데 묶인 보리이삭 '모가지'를 나타낸다. 둘째, '아(丫)'자는 낱알들이 모두 가지런하게 두 가닥으로 배열(配列)된 꼴이다. 셋째, 글자 왼쪽의 '도(刀)'자는 보리이삭 알곡의 끝 부분이 마치 칼처럼 뾰족한 꼴이다. 넷째, 글자 오른쪽 '씨(氏)'자는 낱알이 다음 해에 '씨앗'이 되는 것을 상징(象徵)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글자 아래쪽 '사다리(月)' 꼴은 이삭 모가지 하나의 전체적(全體的)인 '가지런함'뿐만 아니라 이삭 각각의 형상(形象)이 가지런하게 배열(配列)한 '반복성(反復性)'에 대한 의미(意味)들이 내포(內包)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의 의미(意米)들이 스며들기라도 하듯 제(齊)자는 '가지런하다(齊)'라는 뜻 외에도 '모두(齊)'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제(齊)'로 발음(發音)한다. 또한 제(齊)자는 제(祭)를 지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飮食)과 언행(言行)을 삼가며 부정(否定)을 멀리하는 일이 마치 보리이삭처럼 가지런한 몸과 마음가짐을 해야 하므로 '재계(齋戒)하다·상복(喪服)'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재(齋)'로 읽힌다. '제(齊)'자의 가지런함이 제단(示)에 스며있어야 한다는 '엄숙할 재(齋)'자는 조상(祖上)에게 제(祭)를 올리는 후손(後孫)들인 '씨(氏)앗'들이 기본적(基本的)으로 가져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제(齊)자는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 옷을 가지런하게 입는다는 의미(意味)에서 '옷자락(齊)'의 뜻으로 쓰여 '자' 음(音)으로 소리 난다. 또한 제(齊)자는 포함(包含)된 '칼 도(刀)'자가 있어서 가지런하게 '자르다(齊)'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전' 음(音)으로 읽힌다. 따라서 제(齊)자는 "칼로 자른 듯이 모두 가지런하다"라는 형상(形象)을 연상(聯想)하면서 스며든 글자들의 의미(意味)를 이해(理解)하면 쉽다.
흰 백(白)은 사람의 엄지손가락을 본뜬 것으로 손톱(爫)의 흰 부위(部位)를 나타낸 데서 ‘희다’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의 흰 부위(部位)를 본떴다는 설(說)외에도 ‘사람의 머리’를 상형(象形)하였다는 설(說)이 있는데,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백(白)과 백(百)이 혼용(混用)되다가 금문(金文)에 이르러 백(百)이 숫자 100을 뜻하는 것으로 정착(定着)되어 희다는 뜻을 가진 백(白)과 구분(區分)하기 시작(始作)하였다. ‘희다’는 뜻으로 주(主)로 쓰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상형(象形)하였다는 설(說)이 있어서인지 ‘아뢰다’는 뜻도 있다. 백(白)은 갑골문(甲骨文)에서부터 나타나지만 그 당시(當時) 이미 희(白)다는 추상적(抽象的) 의미(意味)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글자의 자원(字源)에 대해서는 의견(意見)이 분분(紛紛)하다. 백(白)이 껍질을 벗긴 쌀을 그렸다거나 태양 일(日)이 뜰 때 비추는 햇빛을 그렸다는 등 여러 설(說)이 있으나, 엄지손가락을 그렸다는 곽말약(郭沫若)의 설(說)이 가장 통용(通用)되고 있다. 그의 해설(解說)에 의하면, 엄지손가락은 손가락 중에서 가장 크고 첫째 손가락이기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그린 백(白)은 ‘첫째’나 ‘맏이’가 원래 뜻이고, ‘희다’는 의미(意味)는 가차(假借)된 것이라고 해석(解釋)한다. 그것은 백(伯)이 사람 인(人)의 항렬(行列)에서 첫째(白)를 말하는 글자인 데서도 그 증거(證據)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돌 석(石)의 구성(構成)은 산기슭 엄(厂)과 돌덩이를 뜻하는 구(口)모양으로 이루어졌다. 즉 언덕(丘)이나 산기슭(厂) 아래에 굴러다니는 돌덩이(口)의 모양(模樣)을 본떠 ‘돌’을 그려냈다. 석(石)자는 언덕(厂) 아래로 굴러 떨어진 덩어리(口)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돌(石)'을 뜻하는 글자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석(石)자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돌의 종류(種類), 재료(材料) 또는 성질(性質), 상태(狀態)"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공학 분야(理工學分野)에서 접(接)하는 원소(元素) 중에 돌에서 채취(採取)한 물질(物質)이거나 상온(上溫)에서 고체 상태(固體狀態)인 "무기물질(無機物質)"의 명칭(名稱)은 대부분 석(石)부에 속하는 글자라는 것도 아울러 알아두면 원소명칭(元素名稱) 및 성질(性質)을 기억(記憶)하는 데 도움(幇助)이 된다.
◎설명: 제백석(齊白石, 1864년 1월1일~1957년 9월 16일), 남, 후난(湖南) 창사푸(長沙府) 샹탄(湘潭) 출생(出生). 원명(原名)은 순지(純芝), 자(字)는 위청(渭青), 호(號)는 란정(蘭亭)이다. 후에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號)를 바꾸었다.
제백석(齊白石)은 근현대(近現代) 중국(中國) 회화(繪畵) 화가(畫家)로 유명(有名)한 세계적(世界的)인 인물(人物)이다. 일찍이 목공(木工)일에 종사(從事)했으며 후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生計)를 유지(維持)하고 50세 이후 베이징에 정착(定着)했다. 꽃과 새, 곤충(昆蟲)과 물고기, 산수(山水), 인물(人物) 그리기에 능했으며 필묵(筆墨)에 힘이 있고 색채(色彩)가 농후(濃厚)하고 그림 전체는 경쾌(輕快)하며 간결(簡潔)하고 생동감(生動感)이 넘치며 예술성(藝術性)이 소박(素朴)하고 인정(人情) 넘친다. 물고기, 새우, 곤충(昆蟲)을 소재(素材)로 삼아 자연(自然)의 정취(情趣)를 끊임없이 그렸다. 제백석(齊白石)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필사(筆寫)하고 진한(秦漢)의 비문(碑文)을 모방(模倣)했으며 소박(素朴)한 행서(行書), 전각(篆刻), 시문(詩文) 쓰기에 능했다.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學院) 명예교수(名譽敎授), 중국미술가협회(中國美術家協會) 주석(主席) 등을 역임(歷任)했다. 대표작품(代表作品)으로는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다. 저작(著作)으로는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다. 1963년 세계 10대 문화(文化) 유명인물(有名人物)로 선정(選定)되었다.
◎해설: 제백석(齊白石)의 그림의 특징(特徵)은 농후(濃厚)한 향토적(鄕土的) 숨결, 순박(淳朴)한 농민(農民) 의식(意識)과 순수(純粹)한 낭만(浪漫)이 살아 있는 동심(童心), 여유(餘裕) 넘치는 시적(詩的) 정취(情趣)는 제백석(齊白石) 예술(藝術)의 생명력(生命力)이라 할 수 있다. 제박석(齊白石)은 예술(藝術)을 ‘오묘(奧妙)함은 그런 것 비슷함과 비슷하지 않음 사이에 있다(妙在似與不似之間).’라고 주장(主張)하며 독특(獨特)한 사의(寫意: 중국화의 전통 화법 중의 하나. 정교함을 추구하지 않고 간단한 선이나 묵색 또는 채색으로 사람의 표정이나 사물의 모양을 묘사하는 것) 국화(國畵) 스타일을 형성(形成)하여 홍화묵엽파(紅花墨葉一派)를 열었다. 그는 특히 과일(果實,) 채소(菜蔬), 꽃, 새, 곤충(昆蟲), 물고기 및 인물(人物), 산수(山水)를 그림의 주제(主題)로 했으며 한 때 오창석(吳昌碩)과 ‘남오북제(南吳北齊)’라는 명예(名譽)를 누리기도 했다. 꽃과 새우 그림에 능했던 그는 먹 농도(濃度)의 강약(强弱)을 조절(調節)해 과감(果敢)하게 터치했으며 그의 그림 속 주제(主題)는 그의 붓 끝에서 생명력(生命力) 넘치는 주인공(主人公)으로 태어났다. 제백석(齊白石)은 순박(淳朴)한 민간예술(民間藝術) 스타일을 전통(傳統) 문인(文人) 화풍(畫風)과 서로 융합(融合)해 중국(中國) 현대(現代) 꽃, 새 그림의 최고봉(最高峰)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화단(畫壇)의 꽃이라 불릴 정도(程度)로 새우는 제백석(齊白石)의 대표적(代表的)인 예술(藝術) 부호(富豪) 중 하나이다. 제백석(齊白石)은 평생(平生) 관찰(觀察)을 통해 새우의 특징(特徵)을 심도(深度) 있게 묘사(描寫)하려 애썼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이미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간결(簡潔)하면서도 과감(果敢)한 필묵(筆墨)은 물속에서 노니는 새우들을 생동감(生動感) 있게 표현(表現)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활발(活潑)하고 영민(靈敏)하고 민첩(敏捷)함을 표현(表現)했으며 생명력(生命力)이 넘친다. 한 쌍의 짙은 눈, 머리 중간(中間)은 초묵(焦墨)을, 좌우(左右)는 담묵(淡墨)을 사용(使用)해 그린 새우의 머리 부분(部分)을 보면 다양(多樣)한 변화(變化)를 느낄 수 있다. 딱딱한 껍질은 투명(透明)하게 표현(表現)하기 위해 먹 농도(濃度)의 강약(强弱)을 조절(調節)해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표현(表現)했다. 한 번 붓질에 한 마디를 표현(表現)한 새우의 허리부분은 연속(連續)으로 붓을 놀려 점점 가늘어지는 새우 허리의 리드미컬함을 부각(浮刻)시켰다.
제백석(齊白石)의 제자(弟子)는 매우 많다. 그 중 유명(有名)한 사람으로는 리쿠찬(李苦禅), 리커란(李可染), 왕쉐타오(王雪濤), 왕수스(王漱石), 왕주주(王鑄九), 쉬린루(許麟廬), 천다위(陳大羽), 리리(李立), 러우스바이(婁師白), 장더원(張德文), 샤오룽스(蕭龍士) 등이 있으며 중국(中國) 희극(戲劇)의 대가(大家)인 메이란팡(梅蘭芳), 평극(지방 전통극) 대가인 신펑샤(新鳳霞)도 있다.
자료 제공 : (중국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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