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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메마르고 거친 세상을 뛰여넘는 행위예술이다..
2017년 09월 19일 17시 05분  조회:1919  추천:0  작성자: 죽림
 
내가 생각하는 시 혹은 그 고민들

  신용목(시인)

  
시는 우리를 둘러싼 메마르고 거친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것입니다.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현실을 통과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늘 ‘예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말, 문득 깨닫게 된 어떤 것들에 대해 쓰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들은, 우리를 현실 너머로 안내하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아름답습니다. 질문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시는 어떻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은 얼핏 너무 빤해서 무의미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질문들이 빤해 보이는 것은 빤한 해답이 이미 있어서가 아니라 해답 없는 질문이 숱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색하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떤 시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의사의 청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이해와 표현이 오로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축적된 고통의 기억”입니다. 그는 예술이 고통을 잊어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예술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편이 낫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시는 고통만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스탕달은 예술을 “행복에의 약속”이라 했습니다. 행복이 지금-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예술은 허위입니다. 우리는 언제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 속에 두 개의 모래알이 똑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코가 되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시는 바로 그 폭력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되새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쁜 시, 깨달은 시는 현실의 고통을 긍정적 사고를 통해 그냥 견디라고 이야기하는 마취제와도 같습니다. 그런 시들은 아름다움이 현실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고통스런 현실이 지속되게 만듭니다. 그런 시를 쓰기는 쉽습니다. 남들이 살라는 대로, 남들이 생각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고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들은 대체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너무 쉽게 다 안다고 말해버리거나, 그들의 고통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포장합니다. 내가 말한 ‘예쁜 시’나 ‘깨달은 시’는 그렇게 씌어진 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고통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시를 사이비 종교에서나 가능한 설교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시는 세상의 이치나 처세술을 가르치는 장르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고 말 순간을 정지시키고 그 순간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 시는 우리 모두의 얼굴을, 이 우주의 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유일무이한 장르입니다. 물론, 시에도 아름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먼 바깥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미지에 있다고 말하는 것―그것이 시가 가진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신고 가는 물의 신발과 물 위에 찍힌 물의 발자국, 물에 업힌 물과 물에 안긴 물

물의 바닥인 붉은 포장과 물의 바깥인 포장 아래서


국수를 만다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사발 속에는 빗물의 흰머리인 국수발,

젓가락마다 어떤 노동이 매달리는가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 

궁동의 버스종점

  

비가 내린다,

목숨의 감옥에서 그리움이 긁어내리는 허공의 손톱자국!

비가 고인다,

  

궁동의 버스종점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이편을 말아먹는,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국수를 만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

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 속에서

―신용목,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이 시는, 저기 부천 가는 길에 있는 궁동이라는 곳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먹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쓴 시입니다. 만약, 이 시가 외국인노동자들의 아픔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서술을 했다면, 읽는 이에게 순간적인 감흥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감흥 그 이상을 선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감동은 시에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일 뿐 전체일 수 없습니다. 시는 특유의 느낌을 통해 우리가 현실 속에서 짚어내지 못하는 먼 곳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수를 마는 일시적인 한 순간을 영원한 한 순간으로 바꾸어놓았을 때, 우리는 슬픔의 복판에서 우리 모두가 가진 삶의 얼굴을 온전하게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생활은 언젠가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그들의 아픔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행복이 먼 미래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미지의 영역을 시 속에 불러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 시를 통해서, 문학을 통해서 함께 영혼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문학은 오랫동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고 또 고독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학은 비로소 우리를 뜨겁게 살아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신용목, 「새들의 페루」

  

시는 절대로 한 발만 걸치는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바로,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을 던져 자신이 명중시키고픈 자신의 시―그 과녁이 도대체 무엇이고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해 때로 비를 맞고 흠뻑 젖은 채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있더라도, 사지가 잘린 뿔처럼 단 하나의 몸둥어리로 나아가는 것―그때, 우리는 하늘의 급소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기꺼이 우리는 저 안락과 안일의 지붕을 걷어내고, 고통과 고독과 슬픔과 서러움의 별빛 아래 반짝이고 있을 것입니다.


어줍잖게, 또 쑥스럽게도 제 시를 예로 들며 이야기를 이어가 보았습니다. 이 자리는 시에 대한 제 고민을 이야기하는 자리이면서 제 시에 대해 여러분들게 수줍게 고백하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 시 2편을 첨부하는 것으로 짧은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시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늘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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