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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순이"...
2017년 10월 01일 01시 18분  조회:6209  추천:0  작성자: 죽림
 
 
 

▲ 윤동주 시인을 회상하는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오형범 부부.
ⓒ 윤여문  

 

"오빠는 항상 27살 청년의 모습인데, 동생인 내가 이렇게 '함뿍' 늙어서 미안해요.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아팠더니 오빠의 기억도 가물거리고, 아무래도 곧 오빠 곁으로 갈 것 같네요. 그때 만나요, 오빠."

 

지난 2월 14일(2010) 오전, 시드니우리교회에서 열린 '윤동주 민족시인 순국 6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86)가 국화 한 송이를 바치면서 오빠에게 전한 안부다. 윤동주 시인의 정확한 순국날짜는 오늘(2월 16일)이지만 그날이 마침 설날이기도 해서 이틀 앞당겨서 추도식을 치렀다.

 

중국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민 3세'이다. 게다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쳤기 때문에 그가 모국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평양 숭실학교 1년, 서울 연희전문 4년을 합해서 고작 5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서시'를 비롯한 대표작들을 모국에서 썼다.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말이다.

 

한편 윤동주의 생애를 증언해줄 수 있는 여동생 윤혜원은 20년 넘게 시드니에 살고 있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이 해외로 떠돌아다니는 것. 어디 그뿐인가. 그의 무덤이 지린성(吉林城) 룽징(龍井)에 남아있어 혼백마저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오빠의 문학은 스물다섯 살에 끝났다"

 

윤동주는 3남1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윤혜원은 7살 터울의 바로 밑 동생으로, 유난스레 명줄이 짧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마지막 피붙이다. 윤혜원 아래로는 성균관대 교수 재임 중 50대에 타계한 윤일주(시인, 건축가)와 해방정국의 와중에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하고 중국에 남았다가 30초반에 타계한 막내 윤광주(시인)가 있다.

 

이렇듯 3형제 모두 시인이었지만 동시로 등단한 윤일주 말고는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하거나 시집을 펴낸 일은 없다. 그래서일까. 윤혜원은 "동주오빠가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했기 때문에 윤동주 문학은 스물다섯 살에 끝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윤동주 추모제가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으니 오빠는 시인으로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윤동주의 문학적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그 나이에 본격적인 시세계를 구축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됐고, '서시' 또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로 꼽혔다. 25년의 짧은 생애에서 얻은 문학적 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동주 문학을 접해본 몇몇 호주 시인들도 '윤동주 신드롬'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다. 안나 비숍(크로아티아 출신 호주 시인)은 "1997년 시드니봄작가축제에서 윤동주 시편들을 접하고 나서 크게 감동받았다. 특히 '서시'와 '자화상'에 담긴 영혼은 너무 고와서 슬프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비숍은 영어로 번역된 '서시'를 원고 없이 외운다.

 


▲ 지난 14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5주기 추도식 장면.
ⓒ 윤여문  

 

윤동주 문학 연구의 메카가 된 시드니

 

언제부턴가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한국인들이 사는 수많은 해외 도시에서 윤동주 50주기와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 관련 뉴스들이 시드니로 바로 건너온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2005년 '윤동주 60주기 추도식'에는 오랫동안 윤동주 시고(詩稿) 원전연구를 해온 홍장학 선생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가졌다. 또한 2008년 9월에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대학교 명예교수를 초청해서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는 유실될 뻔했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룽징에서 찾아낸 고마운 일본인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세대학교 김찬국 교수가 참석했던 48주기 추도식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윤동주 추도식을 겸한 시낭송회 등이 호주한인문인협회와 시드니우리교회 주관으로 거행됐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재호주광복회가 전면에 나섰다.

 

윤동주 시인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꼿꼿한 기개를 지닌 시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다가 순국한 애국지사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내로라하는 단체들이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것도 광복회가 전면에 나선 이유로 보인다.

 


▲ 윤동주 시인 6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시드니 교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윤여문  

 

재호주광복회 주관으로 열린 윤동주 추도식

 

이번 65주기 추도식을 기획한 재호주광복회 황명하 부회장은 "윤동주 시인은 독립유공자들에게 서훈하는 훈격(勳格) 7가지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독립장'을 수훈한 순국선열"이라면서 "광복회가 나서는 건 당연하고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재호주광복회의 뜻을 대한민국광복회 본부에 전했더니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보내왔다. 광복회에서 처음으로 보내온 추도사"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보내온 김영일 광복회장의 추도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윤동주 선생님의 시와 삶 속에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찬 일제 식민지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젊은이의 고뇌에 찬 진정성이 묻어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시에는 유년의 평화를 갈구하고, 자아성찰의 깊이를 더해가며 일제강점기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과거 어느 해보다도 올곧은 민족정기 발현이 필요한 해입니다. 시대를 통찰한 선생님의 명징한 시 정신을 본받아 경술국치 100년이 주는 준엄한 역사의 가르침을 하시라도 잊지 말고, 나라의 소중함과 주권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깨우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호주동포들은 윤동주 시인에게 독립장이 서훈됐을 뿐만 아니라 애국지사이자 순국선열로 모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윤동주 시에는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결여됐다"는 평가를 받는 게 의아스럽게 생각될 따름이었다.

 

중국 룽징-청진-원산-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윤동주 시인의 유족들은 왜 그 사실을 호주동포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그것뿐이 아니다.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생애가 드라마틱하게 극화되거나 신비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걸 단호하게 거부한다. 특히 윤동주의 생애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 언론인터뷰 등에는 손사래를 치기 일쑤다.

 

오죽하면 북간도에서 서울로 내려온 사람들이 부산-필리핀을 거쳐서 호주 시드니까지 와서 정착했을까? 시드니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윤동주의 유족이라는 걸 전혀 밝히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 홍길복 목사가 한국에서 건너온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윤동주 여동생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다.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은 1948년 12월, 중국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당사자다. 그 이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작품만 게재됐을 뿐이다.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에 의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공을 세웠지만 윤혜원은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결이 남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입을 꼭 다물고 살아왔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윤혜원 부부가 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계속 남하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 지난 2008년 시드니에서 열린 오오무라 교수가 문학세미나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윤여문  

 

"시인은 시로서 말한다"면서 말을 아껴온 유족들

 

기자가 언젠가 대화 도중에 "윤동주의 민족의식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더니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 몰라. 하지만 변절한 문학인들, 특히 이광수의 얘기를 하면서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걸 잊을 수가 없어. 그리고 오오무라 교수가 전해준 재판기록 사본을 보니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았더군. 어린 동생들에게 민족 운운 할 수 없었을 터이니 그런 걸로 짐작할 수밖에 없지."

 

그런 다음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말을 어어 갔다. "오빠의 시를 읽으면 오빠가 그냥 보여. 신기할 정도로 오빠의 꼿꼿한 정신과 정갈한 삶이 시속에 담긴 거야. 어떤 평론가가 '윤동주는 시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일치한다'고 평했는데 그 말이 꼭 맞는다"고.

 

한편 2008년 9월에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 참석차 호주를 방문한 오오무라 교수는 기자한테도 '윤동주 재판기록 사본'을 건네주었다. 재판기록과 함께 가져온 <홋카이도 신문>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윤동주는 조선 민족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전반에 걸쳐 준엄한 민족적 저항정신과 기독교적 인간애로 가득 찬 서정시 124편을 남겼다. 그의 시는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청렬(淸冽)하고 우아한 혼을 지닌 동시에 민족의 운명 역시도 짊어지고 있었다."

 

 

윤동주 시 세 편에 등장하는 순이(順伊)는 누구?

 

65주기 추도식은 예배형식으로 진행됐다. 홍길복 목사는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말하는 사람"이라면서 "살아서도 죽은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죽은 다음에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설교했다.

 

김병일 시드니한인회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윤동주 선생이 윤혜원 여사께는 혈육이시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별과 같은 시인"이라면서 "특히 시드니에서 윤동주 선생의 추도식이 열린다는 사실이 한인동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복"이라고 말했다.

 

한편 시낭송 순서를 맡은 호주한인문인협회 이동일 부회장은 "윤동주 시인한테는 여자친구가 없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그의 시 세 편에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면서 "윤동주 연구자들이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은 이어서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사랑의 전당>(1938), <소년>(1939), <눈 오는 지도>(1941)를 낭송했다. 한편 1941년에 쓴 시 <바람이 불어>에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비록 시적화자(persona)의 고백이지만 그게 윤동주의 진짜 삶이었을 수도 있다.

 


▲ '서시'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
ⓒ 오마이뉴스  

 

성가대원 박춘애와 결혼할 뻔 했던 윤동주

 

윤동주의 생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혜원의 증언은 또 어떤가. "오빠는 여자친구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춘애라는 이름의 여학생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빠가 어른들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 오형범도 비슷한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해방 후에,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옌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

 

윤동주 시인 65주기를 갈무리하면서 오형범 장로가 나와서 유족대표 인사말을 했다. "시드니에서 윤동주 50주기와 60주기 추도식을 큰 규모로 치렀다. 그래서 보다 의미 깊은 70주기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윤혜원이 그때까지 살 것 같지 않아서 광복회의 65주기 추도식을 수용했다"고.

 

윤혜원은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상태이고 치매 치료까지 받고 있다. 남편 오형범도 건강이 나쁜 건 마찬가지. 뇌수술을 받았고 암 치료까지 받는 중이어서 정기적으로 병원에 간다. 그래서였을까. 추도식 참가자들 모두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주; 두분 다 고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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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 윤동주가 사랑한 녀인(?)
 

서울예술단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중에 나오는 순이의 형상
 
 
윤동주의 시 가운데 남녀의 사랑을 다룬 시 몇수가 있다.
     “사랑의 전당”(1938), “소년”(1939), “눈 오는 지도”(1941)등 세수의 시이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는 아픈 사랑을 노래한 시,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고 시리고 아름다운 이 시 세 편에는 한결같이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윤동주의 애독자들은 “순이”가 누구인가 궁금해 질것이다. 혹여 실제 인물이 아닐가 하는… 이를 두고 "윤동주 연구자들은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힌다. 
(중략)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것이냐, 떠나기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혀 따라갈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 눈 오는 지도(地圖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중략)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초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하략)
- “사랑의 전당”
 
…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소년”
 
수줍음의 대명사인, 그야말로 바른생활의 사나이 윤동주의 녀성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가?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의 절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씨의 회고에서 한 녀인과 윤동주의 일화가 나온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서울 신촌에서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인 지사(志士) 한 분이 있었다. 윤동주는 그분을 매우 존경했고 가끔 그 분 댁을 찾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이화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엿고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도 윤동주와 같이 다녔다고한다.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니“그 녀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것만은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고 정병욱은 회고했다. 
그러나 정병욱씨의 이 회고는 그저 추측의 범주에 머물수밖에 없는것 같다. 이화여전 문과 졸업반이였던 이 녀학생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며 그가“눈 오는 지도”나 “사랑의 전당”의 “순이”인지 아닌지 전혀 알 길이 없는것이다.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의 증언에서도 한 녀인이 나온다.
일본 류학중에 만난 박춘애 (혹은 박춘혜)라는 이름의 녀학생의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고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다고한다. 목사의 딸이고 성악을 전공하는중이라고했다. 
윤혜원의 남편 오형범은 윤동주의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한다. 연변에서 서울로 가던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는데 거기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고한다. 그런데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사실 윤동주가 순이라는 이름을 맨 처음 접한것은 아마 명동학교 졸업시기가 아니였나고 생각된다. 
1931년 3월20일 명동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치르면서 학교교지도 만들고 서울에서 아동잡지를 주문해 보며 문학에 심취되였던 윤동주와 송몽규, 김정우등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國境)의 밤”을 한권씩 선물했다.  
  이 서사시에서 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재가승(在家僧)의 딸인 순이는 마을의 선비청년과 래일을 기약한다. 허나 순이는 재가승의 정칙대로 재가승에게 출가를 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다. 이러한 숙명적인 비련의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두만강지역 서민들의 생활상으로부터 민족의 설음과 슬픈 사랑을 보여준 서사시이다. 한글 최초의 장편서사시는 문학에 심취된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을것이고 서사시에 나오는 비정한 현실의 주인공 순이에게서 윤동주는 처음으로 하나의 녀인상을 읽었을는지 모른다. 
  막연히 “순이”라는 이름에 호기심이 동해 추적해 보지만 결국 윤동주의 “한낱 벙어리같은” 피지 못한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웁게 한다.
  미남형에 천부적으로 여린 감성과 다감한 성격에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윤동주라 이성의 눈길을 끌기에는 족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바램과는 달리 앞서 읽은 “사랑의 전당”에서는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나오며 윤동주의 다른 한 시 “바람이 불어”에서는 "단 한 녀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윤동주의 사랑시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읊조림과 그로 인한 상흔으로만 남았다. 
순이하면 어쩐지 순진하고 순정 많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녀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고향의 이웃 녀동생의 이름 같은 첫사랑 그녀자의 이름같은, 그 이름- 순이다. 
하지만 여기서 “순이”는 특정한 어느 녀인의 이름이기보다 그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설정한 하나의 보통명사인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던 마광수교수는 윤동주는 “’순이’라는 심상을 통해서 모든 우리 민족의 녀성, 또는 그가 마음속에 그리고있는 리상적인 ‘님’, 모든 이웃과 동포를 함축적으로 상징하려했던것 같다”고 폭 넓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사랑에 눈 뜰 나이에 윤동주는 자신의 앞길과 문학,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의 흉흉함에 휩싸이게 된다. 풋풋하고 신선한 사랑의 분위기에 쌓일만큼 동주를 안온한 분위기로 이끌기에는 모든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일제의 철쇄에 수족이 동여 자유롭지못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캄캄한 민족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면서 윤동주는 자신의 리상 실현이 쉽지 않음을 알고 고민한다. 이런 마당에 태평한 시절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할수 없음을 알고 더욱 락심해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윤동주의 사랑시들은 모두가 슬픔의 색갈로 점철되여 있다. 
민족시인의 길을 걸었던 윤동주는 개인의 안일만을 위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후에 민족을 위한 우환의식을 그 기저에 수납한 더 지고한 사랑으로 확산되여 그의 시편들에 나타난다. 

  그러고보면 윤동주의 사랑은 한낱 남녀의 치정이 아닌 종교적인 사랑, 범민족적인 사랑의 차원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봐야 무방할것이다.

 
"문화시대" 2012년 4월호
 
[출처] 순이- 윤동주가 사랑한 녀인(?) |작성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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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시인 90세 생일잔치. 시드니 우리교회 신자들이 참석했다.
 
 
 윤동주 시인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윤동주, 생일 축하합니다."

 

12월 30일 오전 9시, 시드니 서부에 위치한 '시드니우리교회'에서 울려 퍼진 윤동주 시인 생일축하노래다. 교인들은 90년을 상징하는 촛불 9개를 밝혀놓고 생일축하 시루떡도 함께 나누었다.

 

(우리의 옛 땅이었지만)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남의 나라 땅 후쿠오카에서 타계한 윤동주 시인. 그는 27년 8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을 뿐이다. 그런 윤동주 시인의 90세 생일잔치가 하필이면 또 하나의 이국땅인 시드니에서 열렸을까?

 

그 까닭은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동생 윤혜원(84)이 20년 넘게 시드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윤혜원은 남편 오형범(84)과 함께 윤동주 문학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 헌신하면서 온 생애를 바쳤다.

 

윤동주 문학에 바친 80대 노부부의 생애

 

2007년은 한국 현대시 100주년에 해당되는 해다. 그를 기념하여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다. 한국인의 애송시 또한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1위로 뽑혔다. 이런 결과는 지난 20여 년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살아 생전 시인으로 등단한 적도 없고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윤동주 시인이 이렇듯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동생 윤혜원의 덕이 크다. 룽징(龍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이 1948년 12월,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작품만 게재됐을 뿐이다.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에 의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인데, 그 85편은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의 주요작품들이다.

 

 
 

이들 부부는 두 차례의 심장병 수술(윤혜원)과 뇌수술(오형범)을 받은 상태에서 지난 5월에 옌볜에서 열린 제8회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들 80대 노부부는 8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특히 올해는 '윤동주 문학상' 대상을 받은 옌볜 소녀 한국화(19)양이 연세대학교 인문학부에 합격(수시 2학기 재외국민과 외국인 전형)해 더욱 뜻깊은 한 해였다. 4년 장학생으로 공부하게 된 한국화는 중국교포 4세로 '윤동주 문학상' 대상 수상자에게 연세대가 부여하는 특전의 첫번째 수혜자다.

 

마침 윤동주 90세 생일인 12월 30일에 발표된 한국화양의 소식을 접한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이제 우리 부부가 소망했던 일을 거의 다 이룬 것 같다"면서 "약속을 지켜준 연세대에 감사하며, 한국화양이 윤동주 시인의 모교에서 훌륭한 시인으로 태어나기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윤혜원·오형범 부부와의 일문일답이다.

 

"살아있다면? 가난한 대학교수였을 가능성이 99%"

 

- 오빠의 90세 생신을 맞은 소감은?
"(윤혜원) 음, 오빠는 여태도 20대 청년인데 동생인 나만 이렇게 '함뿍' 늙었어요.(웃음) 요즘 몸이 아파서 잊고 지냈는데 시드니 우리교회에서 이렇게 큰 생일잔치를 마련해주어 너무 행복합니다. 오빠도 참 좋아할 겁니다."

 

"(오형범) 윤동주 시인 90세 생신을 맞아 두 가지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첫째로 국가보훈처가 광복회·독립기념관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이고, 둘째는 오늘 접한 한국화양의 연세대 4년 장학생 선발 소식입니다. 이보다 좋은 생일선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윤동주 시인은 참 애석하게도 27년 8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습니다. 그 분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윤) 우리 3남1녀 중에서 바로 밑에 동생인 나만 살아남았으니까 지금의 내 모습이겠지 뭐(웃음). 그건 농담이고, 곁에서 지켜보았던 오빠의 성격상 20대의 성품을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했을 겁니다."

 

"(오) 나도 동감인데요, 그 이유는 윤동주 시인의 사진에서도 나타납니다. 더 없이 선한 인상과 굳게 다문 입술, 다시 말해서 아무 흠결이 없는 90세 노인이면서도 문학적 업적을 크게 이룬 시인 말입니다."

 

- 윤동주 시인이 살아 계시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지도 궁금한데요.
"(윤) 오빠가 문학(연희전문)과 영문학(일본 릿교대·도시샤대)를 전공했기 때문에 교수가 됐을 겁니다. 그것도 가난뱅이 교수였을 가능성이 99%(웃음). 실제로 오빠는 돈 버는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의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강권을 뿌리치고 문학을 전공한 겁니다. 그것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는데…."

 

"(오) 가난할 것이라는 예상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시만 쓰면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은진중학교 선배들(오형범씨는 윤동주 시인의 은진중학교 후배이다)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 소년과 윤동주 청년은 오직 시를 쓰고 문학을 연구하는 일에만 골몰했기 때문입니다."

 

 중국방문을 앞두고 시드니우리교회 뜰에 나란히 앉은 윤혜원씨와 오형범씨.
 

 

"여자친구도 없던 오빠... 박춘애씨는 마음 속으로만"

 

- 어떤 스타일의 여성과 결혼했을까요?
"(윤) 오빠는 여자친구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타계했어요. 다만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춘애라는 이름의 여학생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 말고는 어른들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거든요."

 

"(오) 우리가 해방 이후에,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옌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성가대에 서있는 박춘애를 보았고, 나중에 함께 식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윤동주 시인이 마음 속으로만 좋아했을 뿐 프로포즈도 못 했답니다."

 

- 지금 두 분의 건강이 아주 안 좋은데 내년에도 옌볜에 다녀올 계획이신가요?

"(윤)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그런데 나는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상태이고 치매 치료까지 받고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오 장로(남편 오형범씨)님께서도 뇌수술을 받으셨고 암 치료까지 받고 계셔서 올해가 마지막 참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 그 말이 맞습니다. 윤혜원 권사는 지금 여덟 가지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에 열린 제8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장에서 2007년이 마지막 참석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어찌됐건 우리 부부가 간여하지 않아도 '윤동주문학상'은 잘 진행될 겁니다."

 

오빠에게 '한점 부끄럼이 없도록', 호주까지 남하한 누이 

 

윤혜원은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살았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윤혜원 부부가 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계속 남하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은둔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지난 2005년에 시드니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문학제' 이후로 윤혜원은 은둔 대신 오빠의 생애를 증언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특히 사진 속에 담겨있는 과묵한 이미지가 윤동주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많은 에피소드와 함께 증언하여 윤동주 연구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공했다.

 

 윤동주 시인 묘소를 방문한 윤혜원씨와 오형범씨
 

 

'윤동주문학상'은 어떤 상?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은 최근에 작고한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설립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주축이 되어 1999년에 출범했다.

 

1947년부터 미국에 정착한 현봉학 박사는 1984년에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옌볜으로 달려가서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단장하는 등 그 이후의 생애를 거의 윤동주 추모사업에 바치다시피 했다.

 

한편 매년 8000여편의 응모작품이 답지하는 '윤동주문학상'은 그 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소재),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단체들은 '윤동주문학상' 비용을 부담하는가 하면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방문의 기회를 부여한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올해부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중국동포 청소년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그래서일까. 윤혜원이 2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시드니는 윤동주 연구가들의 순례지가 되다시피 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윤동주 관련 행사들의 소식이 빠짐없이 호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윤동주 시인 63주기를 맞는 2008년에는 시드니에서 '윤동주문학 국제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다. 또한 한국·중국·일본·독일(미확인)에 이어서 호주 시드니에도 윤동주 시비가 건립될 예정이다. 윤혜원이 20여 년 동안 살았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윤동주 90세 생일을 맞아 각계에서 보내온 생일축하 메시지다.

 

 

홍길복(시드니 우리교회 목사) "우리가 기일이든, 생일이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윤동주 관련 행사를 갖는 이유는 그를 우리 곁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다. 윤동주의 육신이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생각, 맑은 영혼, 하늘을 향한 거룩함, 진리를 향한 열정, 인간을 향한 순수함, 그리고 민족이나 나라를 뛰어넘는 우주적, 보편적 양심이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해마다 윤동주 생일잔치를 열고 추모행사를 갖는 것이다."

 

김오(시인, 호주한인문인협회 회장) "윤동주 시인 50주기와 60주기 시드니추모제를 호주한인문인협회에서 주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특히 윤동주의 시편들을 낭송하면서, 그처럼 시와 삶이 일치하는 시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하기도 했다.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윤동주의 맑은 영혼이 더욱 그리워진다."

 

안나 비숍(Anna Bishop. 호주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출신 시인) "1997년 '시드니 봄 작가축제(Sydney Spring Writers' Festival)'에서 윤동주 시편들을 접하고 나서 크게 감동받았다. 그 시들을 번역해서 크로아티아에 보냈더니 거기 시인들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특히 '서시'와 '자화상'에 담긴 영혼은 너무 고와서 슬프기까지 했다. 2008년에 시드니에서 열릴 윤동주문학 국제심포지엄이 기다려진다는 말로 90세 생일 축하메시지를 가름한다."

 

 호주한인문인협회 회원들이 주관한 윤동주 시인 60주기 시드니 행사.
 

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윤동주 서거 60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1948년 발간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처럼.]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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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요. 동주오빠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있고 밤새워 책을 읽고 뭔가를 대학노트에 쓰던 사람이었으니 삶의 모습이 바뀐들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다만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시를 쓰는 조용한 모습의 교사나 목사말예요. 단짝이었던 문익환 목사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한국의 한 시인단체가 매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20년 가까이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서시(序詩)'가 가장 애송되는 시로 선정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싶지만, 한동안은 잘 믿기지 않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의 고결한 성품이나,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읽히는 <서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과대평가 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윤혜원) "나는 문학의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평가하면 그게 어디 문학작품인가요? 종교의 경전쯤 되겠지요. 또한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형범) "그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27년 2개월입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쉽게 쓰여진 시'인데 그 시를 1942년 6월 3일에 썼습니다. 정확하게 25살 때였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시가 모두 25살 이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대평가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동주오빠가 미워져요"

-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뚜렷한 항일활동의 흔적이 없는데.

(윤혜원)"당시의 북간도는 항일운동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난 어리고 여자라서(?) 잘 몰랐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 이후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빠라고 해서 뭐가 달랐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오빠의 꼭 다문 입술과 고뇌에 찬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만 오빠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오형범)"적극적인 항일활동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분위기의 일본에서 계속해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것은 윤동주 항일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는 운명적인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동갑내기로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은 감옥에서 사망함) 항일에 대한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사람입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가 모두 시인인데 왜 시를 쓰지 않는지요?

"그게 참 속상해요. 남자들은 다 똑똑하고 잘 생겼는데, 왜 나만 시도 못 쓰고 못난이로 태어났는지.(웃음) 그런데 동주오빠가 나에게 아동 문학지를 읽게 하고 동화를 들려준 것은 나의 글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 그동안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1942년 6월 3일 쓴 '쉽게 쓰여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정정됐는데.

(윤혜원)"'쉽게 쓰여진 시'가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오형범)"우리 부부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청진에 머물다가 윤동주의 일본유학생 친구들인 박춘애와 김윤립을 만났는데, 그들이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시 한 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혼란이라서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를 전해 받았다면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을 텐데."

-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린다면, 오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윤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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