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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당차고 아름다운 여성 화가의 인생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 화가 파울라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파울라'(감독 크리스찬 슈뵈초브) 메인 포스터와 예고편이 공개됐다. '파울라'는 여성 화가로서 최초로 누드 자화상을 발표하며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 파울라-모더존 베커의 화려한 삶과 눈부셨던 사랑을 그린 영화다. 공개된 포스터에는 한 손에 붓을 든 채 위트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파울라의 모습이 담겼다. 이는 남성 화가 중심이었던 당시 미술계에 큰 화제를 일으켰던 파울라의 독립적이고 당당한 성격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며, 시대가 감당하지 못했던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기에 파울라의 대표 작품이기도 한 '6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 속 배경 이미지를 메인 포스터로 활용해 소장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함께 공개된 메인 예고편에는 예술가가 될 재능이 없단 아버지의 말에 반기를 드는 파울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여성 화가에게 주어진 편견과 한계에 맞서 오롯이 자신의 색깔을 담아낸 작품을 완성하려는 파울라의 치열한 모습은 현 시대의 여성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된다. 또 파울라에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 새로운 도전을 위해 파리로 떠나는 모습까지 아름답고 감각적인 영상미로 구현돼 기대를 모은다.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
요약 독일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폴 고갱, 폴 세잔 등에 의한 19세기 후반 인상파 양식을 독일에 도입했다. 그는 프리츠 마켄젠에게서 그림을 배울 때, 브레멘 근처의 예술인촌인 보르프스베데에서 형성된 예술의 모임에 가입했다(→ 보르프스베데파). 1900~06년 4번에 걸쳐 파리로 가서 공부하는 동안, 고갱파와 나비파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초기 작품은 꼼꼼하고 자연주의적이나 〈동백꽃을 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Camellia〉(1907) 같은 원숙한 작품은 단순화된 색채로 칠한 고갱과 세잔 특유의 넓은 색면에 서정적 자연주의를 결합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현실의 정확한 묘사보다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 표현주의로 여겨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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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라 모더존 베커는 철도 공무원인 아버지와 감수성 풍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치, 문화적으로는 혼란스러우리만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시대에 태어난 그녀가 예술가로서 훈련을 받지않고 자기 실현을 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901년 화가 오토 모더존과 결혼하고 난 이후에는 자시만의 아틀리에를 얻어 최소한의 가사일을 제외하곤
항상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하여 몇달이고 혼자서 파리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1908년 5월25일 봄기운이 따스한날 아침 거욱속의 자신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몸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속의 그녀는 임산부처럼 배가 부른상태. 그녀의 눈은 뭔가 탐색하듯,
뭔가 묻는듯 그러나 자신감과 승리감을 담고 관찰자를 바라본다.
이 그림을 끝낸 후 그녀는 거기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30세가 되는해 여섯번째 결혼 기념일 이 그림을 그리다.
여자가 자신의 몸을 모델로 그것도 누드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당시 그녀는 임산부가 아니였다.
임산부도 아니면서 자신을 임산부로 그렸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왜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아마 이 담대한 여성은 임신부라는 모티프를 통해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표현을 하려했던것이 아닐까?
현재라는 시간축 위에서 벌어지는 짧은 차티를 쫓기듯이 살다 간
파울라 끊임없이 더 이상의 무엇이 되고자 했던 이 여인은 마지막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31살 이른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말 "유감스럽군".
-진중권 천천히 그림읽기 中 -
프리츠 매켄슨과 오토 모더슨이 초기 구성원이었으며, 1890년대에는 나중에 모더존과 결혼한 파울라 베커, 한스 암 엔데, 프리츠 오베르베크, 하인리히 호겔러가 참여했다.
재능있는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 역시 보르프스베데에서 작업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독일의 시인 릴케를 만났고 1901년에 그와 결혼했다. 2년 뒤 릴케는 작가들과 풍경화에 대해 논하는 〈보르프스베데〉라는 책을 발간했다.
보르프스베데 화가들은 1895년 뮌헨의 글라스팔라스트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매켄슨이 〈광야에서의 설교 Sermon in the Moors〉라는 작품으로 금메달을 받으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1890년대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그들의 성공은 지속되지 못했다. 지방화가인 그들은 프랑스 미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격리되어 있었고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제외하고는 후기 인상주의 회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여행에서 본 고흐·고갱·세잔의 작품에 영향받은 모더존 베커는 평면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하게 했다.
그녀는 독일 드레스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6세때 영국에 사는 친척집에 머물며 첫 드로잉수업을 받게 되었고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미술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898 년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Worpswede)에 있는 예술가 공동체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미술가들을 만나게되었으며 깊은 우정을 나눈 시인 릴케와 그의 부인이 된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난 곳이기도 하다. 초기 작품은 보르프스베데를 배경으로 한 소박한 풍경화가 많다.
1900년 파리행을 결심하고 그곳에서 세잔과 고갱, 반고흐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고 세잔의 화면구성과 단순화된 형태에 이끌렸고 나비파의 장식적 경향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그녀는 타히티 여인을 그린 고갱의 작품과, 과감한 색채와 장식적인 구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마티스의 작품도 접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흡수하여 화폭에 표현하였다.
Autoportrait(Selbstporträt),1906
(62,2 × 48,2 cm)
그 중 하나가 호박목걸이를 두른 상반신누드인데 원시적인 싱그러움과 더불어 자기애가 넘쳐난다. 자화상을 누드로 그린다는 것은 여자로서 상상하기 어려울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표현 되었다. 그녀의 작품에 보이는 투박하면서도 강한 원시적 감성은 고갱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01 년 보르프스베데로 돌아온 파울라는 오토모더존(Otto Modersohn)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회의와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1902년 다시 파리로 향한다. 1900년~1906년동안 모두 네 차례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 파리는 그녀를 새롭고 더욱 대담한 그림을 그리도록 강한 영향을 주었을뿐 아니라 예술적 영감을 끊임없이 부어주는 돌파구 였다.
그 녀는 불행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고 한다. 남편 오토모더존(Otto Modersohn)은 그녀의 모든 활동을 지지해 주는 부드럽고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이런 안락한 생활은 오히려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 생활의 안정보다 자유로운 독립된 생활과 자유로운 창작의삶을 갈망하는 파울라에게는 힘겨운 부담이었다. 아내로 살기보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은 친구 릴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느낄수 있다.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그렇다고 파울라베커도 아니거든요. 나는 나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모든 싸움의 최종 목표가 될 겁니다.”
그녀는 작업활동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가정을 떠나 홀로 파리로 와서 작업에 몰두 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그녀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보, 나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하니 방해하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너무 아름다워요. 지난주에 나는 취한 것처럼 살았어요. 정말 좋은 작품을 완성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엄 마. 언제나 바빠요. 아주 가끔씩 쉬고 다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곤 해요. 때때로 내가 사랑이 부족하게 보일 때면 이 점을 고려해주세요. 내 힘을 단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것을 이기주의로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가장 고귀한 것이에요.”
그 시대에 쉽지 않은 여성성과 여성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강인한 열정의 여성작가로 시대를 앞서는 생각의 소유자로 느껴진다.
1907 년 그녀는 마지막 파리여행을 마치고 북독일의 보르프스베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그해 11월 출산하고 3주후 색전증이라는 산후병으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짧은 삶이라 마음이 답답해져 온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주어 졌다면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더 큰 획을 그어 주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깊게 드는 부분이다.
Autoportrait au sixièmeanniversaire de mariage,1906
détrempesur carton, 101,8 x 70,2 cm
1906 년 그녀의 '여섯번 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을 그릴 때 그녀는 임산부인 자신의 자화상을 표현했지만 사실 그녀는 임산부가 아니었다. 임산부의 모습으로 관객을 자신감으로 바라보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이다. 여성의 경험이 주체가 되어 표현하는 것과 그것이 대상화 되어 표현되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의 표현일 것이다. 여성 스스로 창작의 주체가 되어 표현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몸을 자랑스러운 과시의 표현으로 강하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남성 화가가 여성의 몸을 표현한 것과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또 한 그녀는 여성화가답게 주로 모성애를 주제로 엄마와 아기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표현하였으며 여성작가로서의 섬세함이나 부드러움 보다는 가라앉고 무거운 색조에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현들을 하였는데 '위대한 단순함'으로 불리는 파울라식 표현이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녀는 미술의 전통과 관습을 따르지 않고 그녀의 독특한 표현법들을 연구했다. 스케치 없이 캔버스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뭉툭한 붓으로 투박하게 표현하는독특하면서도 파격적인 그녀의 작업들은 화단을 지배하는 남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녀는 독창적으로 내면의 감정들을 밀도 있게 표현하였다. 표현주의 시작점으로도 볼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지닌 작가, 그녀는 미술역사의 중요한 여성화가였다.
그림을 깊이 감상할수록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작가 Paula Modersohn-Becker 그녀의 짧은 인생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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