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 시인이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
환경에 적응하며 살다보면 '콩은 밭에서 나고, 고기는 물에서 난다'라는 공식 비슷한 것이 우리의 뇌에 입력된다. 이런 관습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는데 바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굳어진 예전의 생각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가운데 발전을 지속 하여온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예전의 생각을 씻어내어 새로운 생각을 부른다는 뜻의 '탁거구견 이래신의(濯去舊見 以來新意)'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고, 특히 시를 쓸 때는 너무나도 필요한 생각인 것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파도의 속삭임에 익숙해지면 그 소리에 감동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이 말하는 내용이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것일 때는 그 말에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낯익은 사람끼리는 서로 바라보지만(look) 서로를 주의 깊게 쳐다보지(see)않는다" 이 말은 유명한 형식주의자이면서 시의 문학성(文學性/literariness)을 낯선 이미지의 구조로 보는 그 유명한 '낯설게 만들기'의 주창자인 러시아의 쉬클로프스키(V. Shklovski)의 시론이다. 그는 '언어의 친숙화는 가장 비시적(非詩的)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나는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낯선 언어로 시를 쓰자고 강조한바 있다, 반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누구에게나 친숙한 것들은 시를 맹물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지루하리만치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 시사모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아직도 이 기초적인 시작법을 이해하거나 익히지 못한 것인지 그리움타령, 사랑타령, 꽃타령, ~하노라 등의 고어체나 교조적, 지시적, 확정적인 옛 시인들의 시풍을 흉내내는 글이 많다. 시인이 대항해서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친숙함과 일상의 고정관념을 이기는 일이다. 상투적 표현과 습관적 문맥에 치명적 일격(致命的 一擊/coup degree)을 가해서 심미안(審美眼/아름다움을 살필 수 있는 안목)으로 새로운 결(texture)을 만드는 작업이 '시짓기'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하여 다른 말로 다시 강조한다. 시짓기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바꾸어서 간접적이며 은유적으로 나타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시 짓기의 가장 기초적 작법인데 영어로 메타포(metaphor)라고 한다.
위와 같은 언어의 용법은 무카로프스키(J. Mukarovsky)에 의해 체계화된 전경화(前景化/foregrounding)로 설명되기도 한다. 전경화란 탈선(脫線/deviation) 즉 규칙과 인습에 대한 위반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즉 일상적인 언어들은 배경화(背景化/back grounding)하고 낯선 시어들을 전면에 제시(전경화)하는 작법이다. 이것은 언어의 조탁능력(彫琢能力)이기도 하다. 언어가 잘 조립되어야 시(詩)가 완성되는 것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 조탁시 참고할 네 가지
1, 감동이 있어야 하고,
2, 말의 품격이 있어야 하며,
3,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하며,
4, 시인의 진술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쓴 커피와 같다. 쓴 커피를 처음 마셔본 사람들은 '이런 것을 왜 마시지?'라는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커피를 마시다 보면 커피의 맛을 알게 되고, 더 좋은 향이 나는 커피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시도 그렇다. 시의 깊은 맛을 모르는 사람은 언어를 새롭게 하거나, 언어의 조탁에 필요한 요소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달고 목으로 넘기기 좋은 시를 선호한다. 그런 시가 좋은 시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물론 그런 시 중에 좋은 시도 있다. 그러나 현대시가 추구하는 시작법과 조탁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깊이있는 시를 쓰기가 쉽지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의 가벼움을 지적하면 오히려 대들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언어의 정화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비속어로 대화하는 것을 나무라는 어른에게 대드는 것과 같다. 자기들끼리 잘 통하고 재미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한다. 이런 사람들은 불량식품 같은 시를 쓸 가능성이 많다.
또한 언어의 조탁능력이 있는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썼다고 할지라도 삶이 엉터리인 사람, 인격이 피폐한 사람은 시 만드는 기술자(글쟁이)이지 시인이 될 순 없다. 그 시는 공허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나라 시의 정부(政府)라고 일컬음을 받는 서정주 시인이 잠깐의 엇길 행각으로 인해 그의 시를 공허하게 보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삶이 제대로 받혀주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이랴.
-이어산, <생명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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