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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와 한글학회
조선어학회는 나라를 잃기 2년 전인 1908년 8월 31일 서울 봉원사에서 "말과 글은 홀로 서는 나라됨의 특별한 빛"이라며 "그 빛을 밝히자"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의해 모질게 억눌리고 시달렸으며, 이윤재, 한징 등 숱한 국어학자가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 무렵 수많은 자료를 빼앗겼고, 한국전쟁 때에도 숱한 자료가 불타거나 사라졌다. 이후에도 상황은 이후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한글전용운동, 국어순화운동, 한글말 펴기행사, 세종대왕 숭모행사 등을 꾸준히 진행해 왔지만 정부의 무관심 내지 외면 속에 시민모금으로 1977년에야 겨우 한글회관을 마련할 정도로 존재 자체가 힘겨운 투쟁 아닌 투쟁을 했었다. 나라를 지킬 때 그 얼을 지킬 수 있는 한 방법은 우리나라 언어를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어학회는 우리나라 말을 온갖 탄압 속에서도 지켜왔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은 일본 제국이 1942년에 한글을 연구하는 학회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및 관련인물들을 강제 연행,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21년 창립된 '조선어 연구회'의 명칭이 바뀐 것으로, 조선어와 조선글을 연구하던 학회이다. 1941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 국어사전 편찬 등 말과 글의 표준화에 주력하였다. 현재는 한글 학회로 남아 있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였다. 1938년 '국어상용화(國語常用化)' 정책으로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한국어(조선어) 사용을 금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1939년 4월부터 학교의 국어 과목을 전폐하고 각 신문·잡지를 점차 폐간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다.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는 내부의 반항을 염려하여,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에도 총검거의 손을 대었다. 조선어학회는1942년 4월부터 한국어 사전을 편찬 중이었다.
함흥 일출여고(또는 영생여고)의 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1942년 9월 5일 조선어사전 편찬원 정태진이 관련되었다며 정태진을 증인으로 불러가더니, 이를 빌미로 1942년 10월 1일에 와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단정한 뒤 관련자들을 일제검거하기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1942년 10월 1일에 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김윤경(金允經)·권승욱(權承昱)·장지영(張志暎)·한징(韓澄)·이중화·이석린(李錫麟)·이고루 등 11사람이 1차로 일제히 서울에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압송되었다. 10월 18일에는 이우식(李祐植), 김법린(金法麟)이, 20일에는 정열모가, 21일에는 이병기(李秉岐),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4사람이, 12월 23일에는 서승효(徐承孝), 안재홍(安在鴻),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정인섭(鄭寅燮), 윤병호(尹炳浩), 이은상(李殷相) 등 8사람이 각기 검거되었으며, 1943년 3월 5일에 김도연(金度演), 6일에 서민호(徐珉濠)가 각기 검거되어 모두 홍원경찰서에 유치되었다. 3월 말부터 4월 1일까지 신현모(申鉉謨)와 김종철(金鍾哲)은 불구속으로 심문을 받았다. 권덕규(權德奎)와 안호상(安浩相)은 신병(身病)으로 구속을 면하였는데, 1943년3월 말경까지 29명이 검거되어 대체로 1년간 홍원(洪原)경찰서 내 유치장에서 온갖 야만적 악형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48명이 취조를 받았다. 33명 중 16명을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 함흥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고 한다.
이윤재, 한징 미결감 옥중 사망,
피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아니한다고 곽상훈(郭尙勳)·김두백을 유치장에 구금한 일도 있었으나, 이들 증인 중에는 어학회 사업을 운조, 협력한 저명한 문화인들도 많았다. 함흥 검사국에서는 범위 축소 지시에 따름인지 모르나, 어학회 관계자를 다시 조사하여 대부분은 석방하고, 이윤재·한징·최현배·이희승·정태진·이고루·김양수·김도현·이중화·김법린·이인·정현식 13명만 공판에 회부하였다.
1943년 1월 이윤재가, 이듬해 2월에 한징이 각각 심한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옥사(獄死)하였다. 그 나머지 11명은 함흥 지방재판소에 각각 징역 2년에서 6년까지 판결을 받았다. 그 중 정태진만은 복역(2년)함이 더 빠르겠다고 하여 복역을 마쳤고, 장현식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체형을 받은 이는 공소하였으나 8.15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어학회가 해산되고, 사전 원고는 증거물로 홍원과 함흥으로 옮겨다니다가 여러 부분의 원고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고는 광복후 1945년 9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가 잃어버린 원고가 발견되어 추후 한글 대사전이 출판되었다.
한글 학회(—學會)는 한글과 한국어의 연구를 위해 이루어진 학술 단체이다. 1908년 8월 31일에 김정진을 회장으로 하여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1921년 12월 3일 창립하였다.
한글 학회는 1926년에 한글날을,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한글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해방 후, 학회는 한글 전용을 주장해 국한문혼용을 한글 전용으로 쓰는 것을 장려했다.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서 국문연구소(1907년 설치)를 계승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회원은 장지영·김윤경·최현배·권덕규 등 15~16명이었다. 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 활동으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한편, 1927년 2월 8일에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쳤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고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 1942년부터 회원들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죄로 검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부활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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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매일-박찬호 기자]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맞서 북촌지역을 지켜낸 기농 정세권 선생이 딸인 고 정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서울시가 정세권 선생의 업적을 조명하고 기념사업 추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회를 열었다.
서울시는 2월 27일 오후 북촌 가희동성당에서 한국부동산개발협회, 대한건설협회 서울특별시회, 국사편찬위원회, 종로구와 함께 '일제강점기 디벨로퍼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이라는 주제로 기념사업 토론회를 진행했다.
정세권 선생은 지난 1888년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나 1930년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다. 이와 함께 1919년 종합건축사 '건양사'를 설립한 뒤 조선인들에게 중소형 한옥을 저렴하게 제공하며 일제에 맞서 북촌지역을 지켜낸 도시개발자이기도 하다.
토론회는 정세권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한편 기념사업 추진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정세권 선생 기념사업은 서울시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된다. 시는 지난해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대한건설협회 서울특별시회, 국사편찬위원회, 종로구와 협력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첫 발제자인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정세권 선생이 설립한 건양사의 도시개발사적 의미에 대해 발표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경성은 1920년을 기점으로 소비도시에서 산업도시로 변했다. 그러면서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몰려 들어 인구가 빠르게 늘었다. 사람이 몰리면서 주택은 부족해지고 주거환경이 열악해졌다.
김 교수는 일제가 일본인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가지 정책을 펼쳤다고 분석했다. 교외지역에 새로운 주거촌을 개발하는 정책과 조선인 주거지역이었던 북촌을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바꾸는 정책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1920년대 경성에 주택이 매년 2000채 정도 지어졌다"며 "그 중 조선인 주택은 900~1000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중 300채를 정세권 선생이 제공했다"며 "조선인 주택의 30%이상을 제공한 것으로 어마어마한 활동"이라고 평했다.
박용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독립운동가로서 선생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 박 교수는 선생의 활동을 △민족의식 고취 △신간회운동 참여 △조선물산장려운동 실천 △조선어학회 언어 독립투쟁 후원 △민족구호활동의 5가지 분야로 나눠 소개했다.
선생은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활동에 참여해 경성지회의 상무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독려에도 힘썼다.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의 초대 이사를 맡아 기관지 발간을 책임졌다. 1931년부터 1940년까지 60편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또 당시 돈으로 2만원의 자비를 들여 물산장려회관을 지었다.
이와 함께
조선어학회의 언어독립투쟁 자금도 지원했다.
조선어학회 모임 비용을 전담하는 한편 조선어학회 회관부지도 매입했다.
만주 동포의 구제활동도 펼쳤다.
1936년 8월 만주에 수재가 발생하자 이재민을 위해 의복 200점을 기탁했다.
이듬해 평안북도에 수재가 발생했을 때에는 이재민을 위해 의복 650점을 기탁했다.
박 교수는 "정세권 선생은 부동산사업으로 돈을 벌어서 민족 독립운동 자금으로 투여했다"며 "아직까지 선생이 제대로 조명이 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과 연계해 내년 2월 협력 기관들과 함께 정세권 선생 기념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또 선생의 전시물을 상설전시하고 투어코스를 개발, 상시적으로 기념사업을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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